성호사설 제9권 / 인사문(人事門) / 정암청송(靜庵聽松)
퇴계가 기명언(奇明彦)에게 답한 서한에 이르기를 “정암(靜庵)이 일이 어렵다는 것을 모른 것이 아니라 어려운 줄을 알면서도 그릇된 믿음이 있었던 것이요, 또한 그릇된 믿음으로서만이 아니라 진실로 물러갈 길을 찾아도 길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저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이 옷섶에 가득하게 한다[長使英雄淚滿襟].’는 시(詩)는 비단 죽은 제갈량(諸葛亮) 한 사람만이 아니다. 이는 바로 제현(諸賢)들이 위태로움에 다다라 경계하지 않고 곧장 나아가기를 너무 날래게 한 까닭이다.” 하였고, 또 박화숙(朴和叔)에게 답한 서한에 이르기를 “장기 두는 자는 한 수만 잘못 놓으면 온 판이 넘어지게 된다. 근세의 사림(士林)의 화도 대개는 헛된 수를 놓음으로 해서 발생된 것이다. 기묘년 일(기묘사화를 말한다)로 말하더라도 영수(領袖)의 인사가 학문이 완성되지 못한 채 별안간 큰 이름을 얻었는데도, 갑자기 경제(經濟)를 자부하였으니 이 점이 벌써 헛된 수를 놓은 것이어서 실패를 가져온 첩경이 되었다.” 하였다.
이 두어 조문을 자상히 살펴본다면 퇴계가 정암에 대하여 오히려 유감되게 여긴 바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듣는 자가 많이 불쾌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성청송(成聽松 성수침(成守琛))의 묘갈명을 지으면서는 “기미를 보아 명철했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그 추앙과 허여가 컸다 하겠다. 그러나 우계(牛溪)ㆍ율곡(栗谷) 제공은 이 말을 불만으로 여겼었다. 그러므로 퇴계가 성우계(成牛溪)에게 답한 서한에 이르기를 “보내 주신 말 가운데의 ‘기미를 보아 명철했다.’는 말에 대하여 공(公)과 숙헌(叔獻 이이의 자(字))이 힘써 분소(分疏 변해(辨解))를 가하여 화를 피한 것을 정법(正法)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곽임종(郭林宗)도 족히 법받지 못할 것이 된단 말인가? 기묘년 일에 대하여 망령된 생각으로는 선공(先公)의 처사(處事)가 바로 정(正)이었다고 믿는다.”고 하였고, 또 김이정(金而精)에게 답한 서한에 이르기를 “성군의 서한에 또 ‘그 선친의 뜻이 본시 명철보신(明哲保身)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며, 그 벼슬하지 않은 것은 다만 병이 많아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역설하였으나, 내 생각으로는 자고로 고은(高隱)의 선비가 단지 병 때문에 나아가 벼슬할 수 없는 데서 원인이 된 것이라면, 세상의 고은의 선비를 무엇 때문에 얻어보기 어렵다느니 귀하다느니 말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명철보신’이라는 말은 ‘전진이 너무 날래다.’는 것과는 정히 서로 반대되는 것이니, 퇴계가 청송에게 대하여 부족하게 여긴 말이 없었은즉 정암에게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퇴계는 또 일찍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廸)의 호)가 망기당(忘機堂)에게 준 서한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회재(李晦齋)가 조정암보다 낫다.” 하였으니, 그 뜻은 아무리 진적(眞積)의 공부가 있다 할지라도 대현(大賢)을 전제하여 논한다면 미달일간(未達一間)이라 말했다고 해서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성현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자기 부형의 나이의 높낮음을 따져 헤아리는 것과 같다.”라 하였으니, 후학에 있어서는 삼가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옛 어진 이의 이르러 간 학문도 가는 길의 멀고 가까움과 같아서, 비록 천리의 먼 데라도 그 끝이 어딘가를 분별하지 아니하고서 바로 달려가 얻은 자는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우선 소견을 기록하여 나의 학문이 진보됨을 기다려 다시 상고하기로 한다.
[주-D001] 정암청송(靜庵聽松) : 정암(靜庵)과 청송(聽松). 《類選》 卷10上 經史篇9 聖賢門.[주-D002] 길이 영웅들로……한다[長使英雄淚滿襟] : 이 말은 두시(杜詩) ‘촉상(蜀相)’의 한 구절이다. 촉상은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에 가서 감회(感懷)를 읊은 것으로 그 구절의 안짝은 “出師未捷身先死”이다.[주-D003] 곽임종(郭林宗) : 후한(後漢) 때 사람. 이름은 태(太). 임종은 그의 자(字). 분전(墳典)에 통하여 제자(弟子) 수천 인이 있었다. 일찍이 낙양(洛陽)에 유력(遊歷), 하남윤(河南尹) 이응(李膺)과 깊은 교분이 있어 이름을 떨쳤는데, 뒤에 고향으로 돌아갈 제 수많은 전송객 가운데 이응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선(神仙)이라 하였다. 《後漢書 卷98》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8
靜庵聽松
退溪荅奇明彦書云靜庵非不知為難知難而誤有所恃亦非獨誤恃之故良由求退無路而致之歴長使英䧺淚滿巾不獨死諸葛一人也是乃諸賢臨危不戒直前太銳之故又荅朴和叔書曰博者一手誤着全局致敗近世士林之禍率因虚着而作己卯領袖人士學未成而暴得大名遽以經濟自任已是虚着取敗之道詳此數條退溪之扵靜庵猶有所憾以此當時聞者多以為不快及撰
成聽松墓銘有見幾明哲之語此其獎詡也大矣然牛栗諸公為之不滿扵此語故退溪荅成溪牛書云示喩
見幾明哲䓁語公及叔獻力加分䟽意以要避禍為非正法郭林宗為不足法耶如己卯間事妄謂如先公所處乃正也
又荅金而精書曰成君書又力言其先志本無明哲保身之意其不仕也只為多病不出也愚意自古髙隱之士若只因病不出則世之髙隱之士豈鮮得而可貴乎盖明哲保身與直前太銳相反退溪於聽松無貶辭則扵靜庵可知也退溪又甞見晦齋與㤀機堂書云李優於趙其意謂雖有真積之功在大賢論則不害為一間之未達也古人云比方聖賢如論量父兄年甲髙下此言在後學冝謹守然古賢所造如行程逺近雖千里之逺未有不辨涯際而能趲趂得者也姑識所見以待吾學之進而更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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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七 / 墓碣誌銘 / 聽松成先生墓碣銘 幷序
嘉靖四十有三年正月己亥。聽松成先生。病卒于坡州之牛溪。享年七十二。司諫院啓曰。伏以前積城縣監成守琛。屢以遺逸授職。輒謝病不仕。杜門求志。力行古道。窮約以終身。玆實一國之善士。當代之逸民。請於其喪葬。錫之恩典。以表我聖朝崇重節義之意。於是。朝命給葬具。以四月癸酉。葬于州之向陽里先塋之側。其嗣子渾。以校理李君珥狀。請述銘文於眞城李滉。滉不敢當。而終不得辭焉。謹按。先生字仲玉。昌寧人。六代祖汝完。佐我太祖。位至領議政。曾祖諱得識。漢城府尹。祖諱忠達。縣令。贈吏曹判書。考諱世純。大司憲。諡思肅。妣貞夫人金氏。江華府使克怩之女。先生之生。以弘治六年二月甲寅也。生于門閥。而絶紈綺之習。長于都城。而外聲利之求。其出人之資。高世之見。自然有古隱君子之風。始隱于白岳下之巖廬。有聽松之號。終遯于牛溪上之別業。名堂曰竹雨。士大夫咸高仰之。以爲先生之與陶隱居。可謂千載神交。而王子猷疎誕。殆不足比。特愛賞偶同耳。先生長身秀骨。儀刑甚偉。忠厚和粹。喜怒不形。言笑有時。望之儼然。卽之穆如。沖澹凝遠。亭亭物表。少與弟守琮。嘗遊趙靜菴之門。其爲學。由博而折之於小大學,論語。以及周程朱諸書。手書程子涵養須用敬。進學在致知等語。揭之坐隅以自警。其有意會。便欣然自樂曰。讀聖賢書。方知義理之無窮。優游涵泳。自有灑然處。然人問之則曰。吾未能有得於斯。其敎人。必以質愨平白可踐行者。未嘗敢作虛談誤後生也。天性至孝。甫踰弱冠而孤。居喪極哀毁。躬爨具。篤行侔顔丁,二連之儔。事母夫人。養志養體。以一部內則爲則。禮重祠廟。致謹齊祭。皆人所莫及。以爲今俗尙墓祭。亦不可以鹵莽。乃爲之優置土田臧獲。畫規立籍。以爲經遠之圖。兄弟四人。友愛甚至。其輕財急義也。兄弟友朋。苟可與則與之。奴婢若輟杯水。貧不能嫁娶者。捄助之不顧己貧。外舅無子。欲託後事於先生子。先生勸外姑取同宗人爲後。姑不從。又勸以舅孼子奉其祀焉。先生通不踰閑。介不絶俗。神用渾厚。不露圭角。於事若無甚可否。至斷以義理。則有凜乎不可犯者。行己大方。若不甚異於人。而收束檢制處。確然自守。味淡泊。絶嗜慾。常情所不堪。而方且綽綽然有裕。性雖高潔。接人。無貴賤小大。與之懽洽。油油然也。愛閒多病。寒暑不敢出。每春暖秋涼。日命駕出遊。風詠而歸。一室圖書。燕處超然。人但見其遊心事外。若無意當世。而其傷時憂國。出於至性。往往因書感事。仰屋沈嘆。固莫測其爲何如也。善行草書。筆法雄健蒼古。自成一家。其得意處。運筆如風雨。得之者不啻如拱璧。詩詞略不留意。有時吟詠自得之餘者。若與悠然見山之趣。默相會也。初。太學諸生。欲疏其孝行于朝。識者曰。某兄弟。豈可以一善之名。早聞於世。乃止。嘉靖辛丑。薦遺逸。授厚陵參奉。壬子。復薦。超除內資主簿。改禮山縣監。皆拜命不就。或問之。曰。吾世臣也。不宜聞命偃蹇。若病不能仕則已定矣。已而移兔山。又換積城。會母夫人未寧。遂歸而不復出矣。自是年尊德邵。休譽滿世。而益自謙虛。歲庚申。明廟特簡先生名。命除司紙。尙領相震與之書。力勸其出。先生答曰。昔。文立不薦程瓊。知其性謙年老。無復當世意故也。公非知我者耶。竟不起焉。及遘疾。沈綿日久。而神更淸了。遺命訖。更衣就枕而逝。至隆慶初。明廟又命褒贈。贈中直大夫司憲府執義。吾嘗觀自古高尙之士。多往而不返。偏而失中。若先生之爲人。可往而可返。不偏而得中。其不仕非無義也。時適然矣。而所樂者又在此爾。夫焉有所倚。然而先生旣未嘗自言。亦非夫人之所能與知也。故或以謂先生之隱。多病自謙退而已。嗚呼。斯言也豈足以盡先生之蘊也哉。配坡平尹氏。判官士元之女。有賢行。能承順事姑。生男卽渾。用薦爲參奉。今又除掌苑。女適直講閔思道。孫男二。曰文泳,文溥。外孫男三。曰成己,成章,成憲。女一適尹勉。銘曰。
羲軒旣邈。世迭澆淳。夔契揚庭。沮溺隱淪。士各有志。誰屈誰伸。往在前朝。多士生國。感會風雲。咸慶千一。維此碩人。白駒空谷。坦履幽貞。其介如石。松籟爽襟。隴雲悅目。時有飜覆。維其韞櫝。濁流淸流。無與淵襲。名薦于天。除書狎至。踰垣不恭。畫牛若戲。賁然而來。翛然而返。炯炯雲月。時見復隱。婆娑偃息。歲月晼晩。高竹我軒。雨洗霜淸。妙墨我池。鬼變霆驚。寄謝君房。其知我未。永矢不諼。洋洋樂泌。不夷不惠。超世出類。我諗太史。誰傳隱逸。庶無落莫。用振頹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