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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여진천(본시아노) 신부 / 배론 성지
머리말
한국인으로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는 ‘사목자의 생활과 성덕의 전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가 아시아 선교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에 한국인 선교사들의 귀감이 되실 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사제 생활은 오늘날까지 신자들의 가슴 속에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 분의 뒤를 따르고 현양하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그러한 결과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먼저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출생과 신학생 선발, 유학생활과 사제수품과정, 사목활동과 죽음을 시기별로 볼 것이다. 귀국 후 그의 사목활동을 선교활동, 저술 및 교리연구, 백성들에 대한 연민 등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양업 신부가 하느님 안에서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삶의 특징을 영성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생애
1) 성장기: 출생과 신학생 선발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사이에서 1821년 3월 1일 6형제의 장남으로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정구(鼎九)이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그의 증조부 최한일(漢馹)이 아우 한기(漢驥)와 함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하여 아들 인주(仁柱)를 낳았는데, 순박함과 신심이 뛰어났던 인주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때 많은 고초를 겪고 석방된 후 모친과 함께 청양 다락골로 피신하여 이후 3대가 이 곳에서 생활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이며 강력한 성품을 타고난 부친 최경환은 가족들의 신앙심이 냉담하게 되자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떠나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에 거처하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다. 그리고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면서 교우촌(敎友村)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으며,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모친 이성례(마리아)도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시 포도청에 갇혔다가 모성애 때문에 배교했으나 후에 형조 감옥에 갇힌 후 모성애를 극복하고 배교를 취소한 뒤에 용감하게 1839년 12월 27일 순교하였다.
2) 유학기: 신학생 시절과 사제수품
교우촌에서 열심 한 부모와 함께 성장한 최양업은 경기도 부평에 살 때에 교회 지도자들과 1835년 11월 25일(음)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동료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베리오, ?-1837) 등과 함께 1836년 12월 3일(음 10월 25일)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한 뒤 서울을 출발하여 봉황성 책문(柵門, 12월 28일)을 거쳐 이듬해 6월 7일(음 5월 5일)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대표 르그레즈와(Legrégeois) 신부, 부대표 리브와(Libois) 신부, 교장 칼레리(Callery) 신부, 매스트르(Maistre) 신부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사천(四川) 선교사인 데플레슈(Desflèches) 신부 등의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고,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Lolmboy)에서 신학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 리브와 신부는 “브뤼니애르(de la Bruniére) 신부는 조선 학생(최양업)을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1842년 7월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만주 선교사인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북상하는 프랑스 함선 파브리트(la Favorite)호의 통역을 맡아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그해 9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김대건 일행과 합류하였고, 이들은 요동의 태장하(太莊河)⋅백가점(白家店)⋅양관(陽關)을 거쳐 11월에는 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l) 주교(1843년-1853년 교구장 재위)가 있던 길림성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최양업 부제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훈춘과 의주 변문(邊門)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845년 초에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홍콩으로 가서 페레올 주교가 보낸 프랑스어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로 보냈다. 1847년 7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중국⋅인도 해군기지 분함대장인 라피에르(Lapierre)가 지휘하는 글로와르호(la Gloire)를 타고 왔다가 신치도(薪峙島) 인근에서 좌초함으로써 네 번째로 귀국에 실패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최양업은 예수회의 서가회(徐家匯) 신학원에서 마지막 신학수업을 마친 뒤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수품되었다.
3) 사목활동기: 사목활동과 죽음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와 약속되어 있던 백령도(白翎島) 까지 갔으나 마중 나온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상해로 되돌아갔다. 1849년 5월 만주 요동으로 가서 7개월 동안 만주교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 밑에서 중국교우들을 위하여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주일과 축일미사의 강론을 맡고, 어린이 교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다. 당시 사목활동 지역은 요동의 전교중심지인 양관(陽關, 현 개주시 羅家店)과 차쿠(岔溝, 현 장하시 蓉花山)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러한 사목활동을 통해서 볼 때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보낸 조선교회의 밀사를 봉황성 책문에서 만난 그는 그해 12월 3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에 성공하였다. 1842년 마카오를 떠난 지 7년 6개월 동안 모두 여섯 차례의 여행 끝에, 신학생으로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만난 뒤 한덕골(현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교우촌에 가서 중백부 영겸(榮謙)과 동생 신정(델레신포로)을 만났으며,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동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교우촌을 사목거점으로 삼고 사목활동을 하였다. 입국이후 1850년 1월부터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걸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였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간은 장마와 무더위, 농사일 때문에 순회할 수 없는 7-8월 한 두 달에 지나지 않았다.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는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고,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하는 등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할 수 없이 피로가 누적되었던 그는 박해가 수그러진 듯 하자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방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다가 경상도 문경 땅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1861년 6월 15일 선종하였다. 일단 그 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에 신학교 푸르티에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에 이장되었다.
2. 사목 활동
1) 선교활동과 성직자 양성
(1) 선교활동
귀국 후 그의 선교활동은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사목 방문에서 시작되어 사목방문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까지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워 순방할 수 없는 지역을 주로 담당하였다.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사목방문은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3, 815명의 교우들을 만났는데, 이는 전국 교우 수 11,000명의 약 35%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1857년에 관할구역 신자들은 모두 4,075명이라고 하였다. 1852년 8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으로 그의 사목방문 지역은 약간 줄어들게 되었지만, 이듬해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면서 다시 넓은 지역을 담당하였다. 1857년 3월에 입국한 페롱신부가 강원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를, 1858년 10월부터 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가 경기⋅충청⋅강원⋅경상도 일부를 담당하고, 1859년에 다블뤼 부주교가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부를 담당하면서, 그는 경상도 중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사목활동의 결과를 보고하는 중에 그는 “제가 담당하는 조선의 5도(충청도,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만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마을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40명 내지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19통의 서한을 통해서 그의 선교활동 및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이들의 다양한 입교과정을 보고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종이 된 신자가 주인을 회개시키고 교우촌을 건설하고(1857년 9월 14일자), 공소 회장을 끈질기게 졸라서 교리를 배운 젊은이가 공소 집을 준비하고(1857년 9월 14일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족들과 가정을 다 잃어버린 여인(1858년 10월 3일자), 교만한 양반에서 비천한 시골뜨기로 변한 김 베드로(1858년 10월 3일자), 모든 것을 버리고 교우촌으로 숨어 들어와서 사도의 사명을 받은 양반 조 바오로(1851년 10월 15일자) 등을 최양업 신부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사는 교우들을 방문하여 돌보아 주었다. 또한 교우들, 그 중에서도 양반과 부녀자들은 고통과 수난을 겪었고(1850년 10월 1일자),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우들의 생활을 보고 비신자들이 찾아와서 교리 배우기를 청하였으며(1851년 10월 15일자), 전교하고자 공소에서의 전례 행사를 자랑했다가 공소 집이 완전히 파괴당한 일도 있었다(1857년 9월 14일자). 또한 교우들의 인내와 친절과 겸손으로 마을 전체가 회개하여 교우촌이 되었고(1859년 10월 11일자), 공소를 지어주고 화려한 촛대까지 선물하는 외교인도 있었다(1859년 10월 11일자). 그리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방문중인 교우촌을 찾아오는 교우들이 있었고(1857년 9월 14일자), 19년간 성사생활을 못하고 외로이 사는 안나에게 찾아갔으며(1850년 10월 1일자), 세 명의 교우라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위로하였다(1851년 10월 15일자). 교우들은 하느님 나라와 성사와 성물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있었고(1850년 10월 1일자), 동정생활을 갈망하는 처녀들과 만난을 무릅쓰고 동정을 지킨 처녀들이 있었다(1850년 10월 1일자). 이러한 교우촌은 험준한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의 방문을 받아 축제를 지내기도 하였다(1850년 10월 1일자). 매년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방문하는 거리가 7천 리가 넘었는데,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만 의탁하며 사목활동을 하는 그의 노고와 표양은 신자들에게 더 큰 힘과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2) 성직자 양성
파리외방전교회의 교육을 받은 자답게 성직자 양성에도 힘써서, 최양업 신부는 1854년 3월 이만돌(바울리노), 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 서쪽 섬인 페낭(Penang, 彼南)에 자리 잡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낸 뒤, 그들에게 계속 서한을 보내 관심을 표명하였다. 리브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김 요한이란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하여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버림받을 위험이 많다”고 염려하였으며, “신학생들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참된 겸손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평가할 줄도 모르며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세속적이며 외적인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을 줄만 압니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양업 신부는 1855년 초 배론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초가집에 신학교가 세워지자 배론을 방문하였고, 여기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855년 10월 8일자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보낸 이 바울리노는 1857년 휴양 차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 머물던 루세이(Rousseille) 신부의 지도 아래 제주 출신의 표류인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후 김기량은 귀국하여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았고, 페롱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거처하고 있던 교우촌도 방문하였다. 휴양을 끝낸 바울리노는 페낭 신학교로 돌아갔고, 칼래(Calais) 신부는 1861년 3월 12일 다시 몸이 약해진 바울리노를 데리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임빈첸시오와 김 요한도 1863년 6월 30일 오메트르(Aumaître)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후 김 요한은 신학교를 그만두었고, 임빈첸시오와 이바울리노는 배론신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다가 1864년에 각각 소품과 삭발례를 받았으나, 1866년 3월 병인박해를 만나 신학교를 떠나야 했다.
(3)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물의 정화 노력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사목한 시기는 대체로 철종(哲宗, 1850-1863)의 치세(治世)와 맞물리는데, 이때는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여론은 험했고 또한 사적인 박해는 계속 일어났다. 최 신부는 교우들의 영적 사정에만 정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교우들의 생활 전반에 대해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여교우들은 집안에서는 수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렇다고 집을 떠나면 겁탈을 당해 외인들의 첩이나 종이 되기 일쑤라고 하였다. 이러한 애정은 교우들 뿐 만 아니라 동포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조정은 서로 분열되어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백성들의 생활은 나날이 가난과 학정으로 전례없이 비참한 처지에 빠져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저는 교우촌들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 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꼼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아! 이 불쌍한 여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릅니다....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한 “도처에서 신자들과 외인들이 약탈과 착취를 일삼는 양반들과 포졸들한테서 억울한 처사를 당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니, 실로 통탄과 동정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는 그런 중에서도 백성들의 한 가지 고통만이라도 덜어주려고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 나라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에 좋은 곳이 평야에나 산골에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민들은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리고, 피 섞인 가래침이 나오며, 몸이 나른해 지는 등 여러 가지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 간청하였다. 이처럼 그는 신자들을 비롯하여 백성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번역과 저술 및 순교자 자료 수집
(1) 교리서의 번역
최양업 신부는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교활동과 교리 공부에 유리한 것 두 가지, 즉 상복(喪服)과 한글을 말하고 있다. 상복은 서양 선교사들을 위해서 발명된 도구라고 할 만큼 큰 도움이 되는데, 이 상복과 상을 지내는 풍속이 없었더라면 선교사들은 한 발짝도 외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로 한글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글의 유용성에 대해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주 쉬어서 10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교회에서 사용하던 교리서와 기도서들은, 첫째 교회 창설 이후 한문교리서의 한글 번역본과 한문 기도문의 음만을 언문(諺文)으로 적어 암송하던 언문체 기도문, 둘째 앵베르(Imbert) 주교에 의해 편찬된 한글 서적, 셋째 1839년에 순교한 이문우(李文祐, 요한) 성인이 지은 ⌜삼세대의⌟(三世大義)와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성인이 저술한 ⌜옥중제성⌟(獄中提醒) 등의 천주가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서적이 부족했으므로 베르뇌 주교는 1862년부터 서울의 목판 인쇄소에서 한글본 서적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서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이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 번역과 편찬 작업에 최양업 신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한글 교리와 기도, 천주가사 등이 여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859년에 페롱신부의 관할 구역인 경상도 안곡(경북 선산군 무을면 안곡리의 안실)을 여름 휴식처로 삼고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교요리문답⌟의 한글 번역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한글본 ⌜천주성교공과⌟의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이를 끝마쳤다. 페롱 신부는 “그의 한문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1862년에 처음 간행된 ⌜천주성교공과⌟(4권 4책)는 이후 100여 년 동안 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사용되었으며, 1864년에 간행된 ⌜성교요리문답⌟(1권 1책)은 이후 70년 동안 공식 교리서로 사용되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사본문답⌟(四本問答)을 모두 익혀서 영세를 하는 신자가 소수에 불과하였고,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사본문답을 외우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다.
(2) 천주가사의 저술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짓게 된 배경은 1850년대에 와서 글을 읽지 못하는 여성 신자와 하층민 신자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아울러 신자들의 교리 이해 수준은 물론 구송(口誦)에 위한 교리학습이 많다는 현실을 알고, 한글을 이용한 교리서⋅신심서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 결과 누구나 이해하고 암송하기 쉬운 대중적인 교리서요 신심서인 한글본 천주가사가 만들어졌는데,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영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는 소중한 작품인 것이다. 먼저 사말(四末, 죽음⋅심판⋅천당⋅지옥)을 노래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과, 천주가사의 진수라고 일컬어지는 ⌜사향가⌟(思鄕歌)를 편찬하였다. 이들 네 편의 가사 내용은 최양업 신부가 번역한 한글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와 동일한 부분이 많다. 그의 천주가사는 신자 재교육의 측면에서 주요 교리를 다시 한 번 주지시켜 주고,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 묵상과 교리실천, 신심 함양에 힘쓰도록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특히 ⌜사향가⌟는 당시의 신자들이 외우고 배우던 중요 교리와 기도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긴요한 육화론적 영성(교리 실천)과 함께 종말론적 영성(순교 신심)을 함양해 주기 위해 저술된 천주가사였다. 그는 바로 언문체 천주가사들을 통해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진리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며 가르치고 신자들의 수준에 맞게 보급하였으므로 ‘신앙의 교육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이러한 그의 생애와 저술 활동으로 볼 때 한국교회의 ‘교부’(敎父)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것이다.
(3) 순교자 자료 수집과 정리
뛰어난 재질을 가졌던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에 단지 몇 해 공부한 것으로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쓰게 되었었다. 1847년 초 현석문(玄錫文, 가를로)과 이재의(李在誼,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보완 정리한 프랑스어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행 중에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82명의 행적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 73명은 최양업이,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의 행적은 매스트르 신부가 번역하였는데, 이 라틴어본 행적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그레즈와 신부의 손을 거쳐 교황청으로 보내졌으며, 1857년에는 82명 모두가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한국순교자들의 시복 첫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저의 조상들의 순교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순교록을 중국에서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신부님들에게 그 보고서에 관하여 더 정확히 써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결심 외에도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만한 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달라고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부탁을 받았다. 그 후 귀국 순방 중에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 그리고 친척 최해성(崔海成, 요한)의 순교행적을 조사하여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냈다. 그 외 다른 순교자들에 대해 틈틈이 글로나 구전으로 전하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기는 하였지만 필요한 증인이나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또 그의 조사 사업은 이 단계에서 중지되었다. 왜냐하면 베르뇌 주교는 1856년부터 다블뤼 신부에게 정식으로 순교자 행적으로 조사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3. 영성(靈性)
영성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신앙생활의 방법을 규정해 주는 정신적인 틀이다. 영성생활은 성령 안의 삶으로써 하느님 중심적이며, 역사 안에서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제시하신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신비 안에 참여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삶으로 인도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삶인 것이다. 한 분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영성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양한 양식으로 드러난다.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보화의 결과이다(에페 3, 8).
1) 하느님께 대한 사랑
교회는 사제들에게 신품 성사를 통해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로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자신들의 신원(身元)을 발견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의 삶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긴밀한 사랑과 일치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 영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굳은 믿음이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교회의 박해 소식을 듣고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라고 하였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마음이 달려 있고,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더욱 강하고 더욱 감미롭게 인도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 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르그레즈와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가자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림을 하느님을 위해서 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시요,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살고 죽습니다.”고 하였다.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했을 때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도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 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조선교회의 소식을 전하여 “우리는 만사에 항상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온전히 복종시켜야 합니다.”고 하였다. 섭리에 대한 그의 인식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마태 6, 25-34; 루가 6, 34참조).
최양업 신부의 서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은 적게 나온다. 홍콩에서 입국을 기다리며 “여하 간에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밖에 (소원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자신의 결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 고린 2, 2)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조선 사회에서 박해로 인해 복음의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짝 말라버린 우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낙비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그는 순교자들과 박해의 고초를 겪고 있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보다도 철저히 따르고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순교자들을 ‘그리스도의 용사들’이라고 불렀으며, 박해로 인해 감옥에 갇힌 이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일치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최양업 신부의 기록들 가운데는 성령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적었던 당시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삶 안에서 활동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은총과 도우심의 은총이 필요하며, 성령의 내적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활동 안에서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우리는 모두 웬만큼 건강하고 제법 평온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불쌍한 우리 신자들이 한시름 놓았습니다.”고 하였다. 또 박해 중에도 많은 새 영세자들을 얻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우리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태 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많은 은총 안에서 순수하고도 깊은 영적 기쁨을 느끼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우연한 계기로 제주도에 복음이 전파된 소식을 전하며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박해의 곤경 속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진실한 기쁨과 보람, 희망의 삶은 바로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2) 신심(信心)
(1) 성모 마리아 신심
성모 마리아는 믿음과 사랑,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교회의 모범이 되신다. 그의 기록들 가운데 성모 마리아 신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예수 성심 신심과 성인 및 순교자 신심은 마리아 신심에 비해 적게 언급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시절 스승 리브와 신부와 함께 “성모성심회”(聖母誠心會)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백령도를 통한 입국에 실패했을 때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고 하였다. 외교인들에게 포위되어 체포될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아래에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좌포도대장 임태영과 우포도대장 신명순이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품고 일으킨 경신(庚申, 1860년) 박해때 체포될 위험 속에서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그는 어려운 난관 속에 부닥칠 때마다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구하며 항상 자신을 보호해 주신다고 믿었다. 또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믿었다.
그는 스승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몇 차례 성물(聖物)들을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묵주는 보내시지 마십시오.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듭니다.”고 하였고, “묵주 만드는 집게를 구하실 수 있으면 하나나 여러 개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를 조선 교우들에게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시는 셈이 되겠습니다. 또 할 수 있으면 묵주 만드는 금빛 나는 구리철사를 많이 보내주시면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묵주를 직접 만들어 보다 쉽게 보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그가 마리아 신심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할 당시 “푸르티에 신부가 그에게 마지막 사죄경을 염해주고 병자성사를 주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거의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주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드러낼 만큼은 아직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그의 깊은 마리아 신심을 엿볼 수 있다.
(2) 예수성심 신심
예수성심 신심은 교회의 가장 크고 유익한 신심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그분 몸의 다른 어느 지체들보다 더 고귀한 부분으로서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자연스런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예수성심 신심의 구체적인 실천 내용 등은 찾을 수 없으나, 스승에게 올린 서한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침 인사와 함께 예수 성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특별히 인연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는 경애하올 스승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하여 간청하오니, 이 소자를 잠시도 잊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하여 미약하고 쓸모없으며 부당한 아들 조선 포교지의 부제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고 하였다. “우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하였다. “고마우신 신부님을 통하여 신학교의 모든 신부님들에게 특히 우리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대표이신 바랑(Baran) 신부님께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늑방 안의 심장으로부터의 순명과 인사의 문안을 드립니다.”고 하였다. 이것은 스승 신부와 비록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성심과 같은 뜨거운 사랑 안에서 항상 변함없는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그의 삶 속에서 비중있게 실천되고 있었을 것이다.
(3) 성인과 순교자 신심
성인(聖人)은 시대적 환경과 조건 속에 적응해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훌륭히 본받은 사람으로서 교회가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인정한 사람이다. 성인 공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을 풍부하게 해주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해줌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속에서 특히 성인들의 인내와 희생의 삶을 본받고자 하였다.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단 한 사람의 죄인의 회개나 어떤 특별한 은총을 얻기 위하여 10년, 20년, 30년, 40년 또는 더 오랜 세월 동안, 열렬한 기도와 크나큰 희생과 힘들고 지루한 극기와 보속을 하느님께 바치셨습니까? 참으로 이러한 모범을 묵상하는 때에 저는 어떤 정신으로 고무되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교우촌을 방문했을 때 박해 속에서도 신앙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오! 만일 또 한사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나 베르나르도 성인이 여기 나타나신다면, 저렇게도 빈궁한 이들한테서 얼마나 큰 열정으로 환영받을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는 전교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인들께 기도하고 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신자들에게 보급할 성인 성녀들의 성패와 상본을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성인은 성 요셉, 세자 요한, 사도들, 거룩한 학자들, 성인호칭기도에 나오는 성인 성녀들, 베드로, 바오로, 요한, 야고보, 프란치스코, 안나, 아가다, 막달레나, 바르바라, 루치아, 세실리아, 아나스타시아 등이었다. 이는 그가 성인공경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다양한 성인 신심을 가르치고 장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인들의 유해를 열심히 공경했는데, 르그레즈아 신부에게 성인들의 유해를 보내 주십사 요청했고, 유해를 받고 더 할 수 없이 기뻤다고 하였다. 어느 성인의 유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인 유해를 개인적으로 공경하기 위해 청했던 것이다.
그는 순교자(殉敎者)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공경심을 갖고 있었다. 조선교회의 박해와 신자들의 순교소식을 듣고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는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한 “언젠가는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식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날이 올 때 우리에게 얼마나 기쁘고 영광된 날이 되겠습니까?...아직까지는 조선 순교자들의 전구로 공적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아마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우리의 정성이 미약하고, 우리가 순교자들에게 전구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또한 그것을 우리 신자들에게 계몽하는 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전구하심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기적을 얻도록 가르치면서 순교자들을 더욱 열절히 공경하도록 인도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그들의 굳은 믿음과 용기를 본받기를 원했고, 사목활동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행적과 증언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3) 덕행(德行)
(1) 겸손(謙遜)
하느님은 겸손한 자를 돌보시고(시편 138,6), 그들을 굽어 살피신다(시편 113, 6-7). 그들은 자기들의 나약함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으로 삼지 않고(2고린 12,9), 그들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의 능력에 자신들을 개방한다(1고린 15,10).
최양업 신부는 성서의 말씀처럼 그의 겸손한 마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받기에 너무도 부족하고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는 사제품을 받고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아마도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에는 너무나 소홀하였고, 인간적 희망에 너무 의존하였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하였습니다....본시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치욕을 당하며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체하는 것뿐이랍니다. 오로지 저에 대한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제 안에서 저를 통하여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는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덕을 삶으로 깊이 체득하였고, 그의 겸손이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에 기초를 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순종(順從)
순종은 강제적인 인종(忍從)이나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다. 순종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자발적인 귀의(歸依)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으나 말씀을 통하여 믿을 수 있도록 인간에게 제시되어 있고, 인간은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생애를 하느님께 대한 봉사로 바치게 되고, 하느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복음과 교회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2데살 3,14),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고(사도 6,7), 원조의 불순종에서 벗어나 구원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최양업 신부가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가는 백령도를 통한 입국 실패 후에 “제가 거룩한 순명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우리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순교하여) 저 세상에서 우리 신부님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저의 장상이 명하시는 것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는 그가 하느님의 뜻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받아들이기 힘들고 고통을 요구했을지라도, 기꺼이 따르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순교의 또 다른 면모는 하느님의 뜻으로 기꺼이 수난을 받아들이는 순종이다. 순교하고 싶은 간절한 원의를 오직 하느님과 장상의 뜻에 맡기며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사는 것이 순교자적인 삶인 것이다.
그는 교회 권위에 대한 그의 철저한 순종을 볼 수 있는데, “그 해 예비 교우들이 상당히 많아서 4백 명이 넘었으나, 영세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교님께서 ⌜사본문답⌟을 전부 완전히 배우지 못한 자에게는 세례성사를 주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본문답 전체를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고 하였다. 즉 교구장의 사목방침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교회 내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책임감 있게 진언할 줄도 알았다. 페레올 주교가 자신의 측근에서 일하는 양반 계층의 복사들의 의견만 들음으로써 신자들 사이에 그러한 처사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주교에게 여러 차례 서한을 올리고 직접 면담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는 교회 권위에 대한 그의 순종이 무조건적이 것이 아니라 책임성 있는 순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인내(忍耐)
그의 인내심은 모친으로부터 받은 교육이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먼 곳으로 이사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었습니다.”고 하였다. 인내가 결국 희망을 낳는다(로마 5, 4참조)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는 인내의 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우리도 겸손하게 크나큰 고난을 참아 받은 다음에야 열매를 맺도록 미리 정해 두셨습니다.”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시련을 충실히 견딜 수 있게 되며(묵시 2,10), 끝까지 참는 사람들에게(마태 10,22; 야고 1,12) 약속된 행복을 얻고, 특히 세상의 종말의 큰 재난에서(마르 13,130 그 행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성서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4) 선교(宣敎)
(1) 열성과 노력
교회는 교회사 안에서 볼 수 있는 훌륭한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복음 선교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의 열성을 기르고 그것이 커지도록 노력하기를” 가르쳤다. 최양업 신부의 활동과 업적은 ‘선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조국의 복음화에 대한 커다란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서 있으면서 박해가 지속되는 조국의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국의 날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 전파의 열망 때문이었다. 또한 귀국하여 신자들을 찾아다니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여 교우촌들을 방문하였다. 계속적인 박해로 인해 항상 어려움과 체포의 위험이 뒤따랐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였고, 자신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큰 결실로 보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꾸준한 열성과 노력으로 자신의 사제 생활 전부를 복음 선교를 위해 애쓰다가 과로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2) 기도(祈禱)
기도는 복음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도할 때 당신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시며, 복음을 듣도록 비그리스도인들의 정신을 여시고, 구원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 결실을 맺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조선에서는 “비신자들에게 직접 교리를 설교함으로써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사제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신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신앙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의 선교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우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낙비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박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교회를 위해 “전능하시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마음이 달려 있고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더욱 강하고 더욱 감미롭게 인도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였다. 또한 그는 스승 신부들에게 자신과 조선교회의 신자들을 위해 기도를 자주 요청했고, 또한 스승 신부들을 통해 조선교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될 모든 이들에게도 기도를 청하였다. 이는 그가 조선의 선교를 위해 직접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편지를 통해 널리 알림으로써 전 교회의 보다 많은 기도와 영적인 도움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3) 증거(證據)의 삶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증거의 삶은 선교의 참된 효과를 거두는데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 선교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단순 소박한 생활, 기도, 모든 이에 대한 사랑, 순명, 겸손, 극기 등을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는 박해로 인해 사도적 활동에 많은 제약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그는 결코 위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목자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박해 중에 외교인들로부터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신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가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물질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는데, 가난하고 궁핍한 교우들의 처지를 목격하고서도 도와 줄 능력이 없다고 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교회의 장상들을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장상들의 지침에 순종하였다. 또한 스승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중국의 사천(四川) 대목구 시노드 회의록의 한 부분을 잘 읽게 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사목자들이 동정을 지키기 원하는 처녀들에게, 당시의 사회적 관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삶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정생활을 막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교적 정결의 삶에 있어서도 깊은 이해를 갖고 실천하였음을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가난과 순종, 그리고 정결의 복음적 가치들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의 선포자로서 훌륭한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맺음말
최양업 신부의 선교열정, 순교영성, 겸손, 기도생활 등을 통하여 볼 때 그는 한국교회의 신앙인들에게 참된 표양을 제시하는 목자였다. 그는 성가정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순교자 사이에서 태어났고, 1836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및 소팔가자에서 신학공부를 하였고, 1845년 12월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9년 4월에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입국과정에서 베르뇌 신부와 함께 요동 땅에서 한국인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7개월 동안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는 육로와 해로를 통한 6번째의 시도 끝에 그해 12월 입국에 성공한 이후 1861년 6월 선종할 때까지 11년 6개월 동안 선교사들이 다닐 수 없는 궁벽하고도 넓은 지역을 매년 7천리를 다니며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그는 성직자 양성 사업과 순교자 행적 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하였고, 신자들을 위하여 한글본 교리책의 번역과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4편의 천주가사는 그의 신앙과 영성을 담고 있는 교리서요 기도서였으며, 그 저작 자체가 토착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의 활동과 업적은 ‘선교’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는 선교에 대한 열성과 노력, 기도, 증거의 삶으로 죽기까지 선교사명에 충실했던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열정이 담겨있었던 그는 뛰어난 성덕과 분별력을 지녔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박해로 위험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비로운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고, 하느님 안에서 긴밀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며 그분과 깊은 내적 삶을 살았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성심, 그리고 성인과 순교자들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신심을 갖고 있었고, 장상들에게 존경과 순명의 정신을 갖고 있었으며, 억압받은 백성들 및 신자들과 어울려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목자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의 겸손, 순종, 인내의 삶은 박해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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