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31
소모전쟁과 막간극
소모전(War of Attrition)의 시대 : 아랍의 공격과 반격하는 이스라엘
단기 결전이나 기동성 있는 정규전으로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자인한 아랍 측은 장기적인 소모전을 선택했다. 더구나 앞장서 싸워줄 파타라는 존재까지 있었으니 그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달도 안 된 7월 1일, 중대 규모의 이집트 특공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군 경비부대와 교전하면서 3년에 걸친 소모전이 시작되었다.
요르단 쪽에서는 아예 파타가 주력을 맡았다. 아라파트는 대담하게도 전쟁이 끝난 지 한 달도 안 된 시기에 의사로 변장하고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냈다. 승전에 취해있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요르단과 시리아에서 무기를 반입하여 아지트에 은닉해 두었다. 참패에 격분한 팔레스타인 청년들 특히 지식인들이 무더기로 파타에 가입해 아라파트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이제 이집트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들의 희망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폭탄테러, 요인암살, 소규모 전투 등의 방식으로 이스라엘과 맞서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식들은 대부분 이르군과 레히 등 반영 유대인 테러 조직들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여객기 납치 정도만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투쟁방식’이지 않을 까 싶다.
1968년 3월 18일,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탄 버스가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설치한 지뢰를 밟아 29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전차와 무장 헬리콥터까지 포함한 대병력을 요르단 영내로 진격시켜 파타의 훈련소가 있는 카라마 Karama 를 공격했는데, 이 작전에 제82전차대대가 참가했다. 휴대용 대전차 로켓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중화기가 없는 파타였기에 무난히 제압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파타의 완강한 저항과 의외로 요르단 정규군이 파타를 지원하면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사자 29명, 부상자 68명이 나왔고 전차와 장갑차도 네 대씩 잃었다. 이 전투는 1차 중동전쟁 초기 전투 이후 첫 번째 승리였기에. 아랍 언론은 대대적으로 이 전투를 보도하였고 파타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 해 2월, 아라파트는 PLO 의장으로 정식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나세르와 시리아를 버릴 수 없었던 소련은 엄청난 지원을 하여 불과 몇 달 만에 아랍측이 상실한 장비를 메워주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당수의 조종사들과 대공미사일 조작요원을 포함된 16000명이 넘는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어 참모본부부터 대대 단위까지 배치되어 이집트군의 지도를 맡았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 외의 지역으로는 최대의 파병이었다. 이 때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한 말이 걸작이다. “이집트군 전차 한 대가 열 발씩만 쏘았어도 전쟁에 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세르의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수에즈의 운하의 ‘국경화’를 막고, 최종적으로는 원래의 국경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스라엘의 궤멸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일단 소련의 지원으로 아랍 쪽에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지자 소모전은 때와 장소도 없이 길어져 갔다. 1967년 7월 11일에는 로마니 Romani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져 이스라엘이 쾌승을 거두었지만 10월 21일에는 이스라엘 구축함 에일라트 Eilat 가 이집트 해군의 미사일정이 발사한 스틱스 Styx 대함미사일을 맞고 47명의 전사자를 내고 격침되고 말았다. 텔 아비브 등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테러는 물론 해외공관과 여객기가 공격을 받았다. 수에즈 운하 동쪽에 배치된 이집트 군의 야포는 1,000문이 넘었다. 시나이 전선의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군의 계속적인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1968년 10월 26일의 포격전에서는 무려 45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물론 이스라엘도 강력하게 반격했다. 에일라트의 격침에 대한 보복으로 나흘 후, 수에즈에 있는 이집트 최대 규모의 정유소를 폭격하여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1968년 12월 28일, 이스라엘 여객기가 공격당하자 이틀 후, 베이루트를 공격하여 14대의 아랍 비행기를 파괴해 버렸다. 공중전도 자주 일어났고 소련 조종사들까지 참전했지만 승리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차지였다. 1969년 3월 9일에는 이집트 군 참모총장인 리아드 Riad 장군이 이스마일리아 부근 벙커에서 진두지휘하다가 이스라엘군이 쏜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969년 6월 26일에는 쌍방을 합쳐 50대가 넘는 전투기가 참가한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소련 조종사들의 패배는 오히려 이집트 조종사들의 사기를 높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 동안 이스라엘에 당한 패배가 자신들의 기량 탓이 아니라 기체의 열세에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점차 이집트 전역으로 확대되어 헬리콥터에 태운 특공대를 나일 강 상류까지 보내 변전소를 파괴하기도 했다. 115mm 활강포를 단 최신형 T62 전차 2대를 탈취하는 놀라운 작전도 성공시켰다. 당연히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도 잦았지만 소련제 대공미사일로 무징힌 이집트 방공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스라엘 군은 9월 9일에는 노획한 소련제 전차 몇 대가 포함된 전투부대를 도하시켜 이집트군의 기지를 공격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이렇게 시나이 쪽이 주전장이었지만 요르단과 시리아, 레바논 쪽에서도 횟수가 적고, 규모만 작을 뿐 포격전, 게릴라 전, 공중전, 소규모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아랍 쪽의 전략적 목표는 인해전술과 물량 공세로 이스라엘을 질식시키려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의 전략은 아랍 특히 이집트의 일상생활까지 어렵게 하여 나세르를 퇴진시키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