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성지
주소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산 9-53 교구 대전교구
오천(鰲川)의 "鰲"는 자라 "오", 또는 큰 바다거북이 '오'(본래글자는鰲)에 내 '천'자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이름이다. 오천의 면소재지는 본시 조선왕 11대 중종 5년(1510년)에 축조한 고소성(姑蘇城)의 머리글자를 떼고 지은 소성리(蘇城理)이다.
성지가 있는 곳의 행정구역을 통폐합을 하기 전에는 갈마연동(葛馬淵洞), 그러니까 칡 '갈'+ 말'마'+ 못'연'+ 마을'동'이 모아져 만들어진 땅이름이다. ''갈마연'(葛馬淵)은 '갈매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말뜻과는 상관없이 음만 비슷하게 나도록하는 취음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갈매못'은 '갈매기 연못'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루어진다.
오천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던 수영이 있었고 수군 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못이 순교지가 된이유중에 하나로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와의 관련성이다. 외연도(外烟島)(烟-연기)는 황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46년 6월에 불란서 해군제독인 세실 함장이 세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한강을 못찾고 외연도에 정박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에게 1839년(기해박해)에 불란서 선교사, 앵베르 범 주교님, 모방·샤스땅 신부님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상자에 남겨놓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님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1866년 3월30일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수영을 안 다블뤼 주교님, 오 오메트로, 민 위앵 신부님, 교우 황석두와 장주기 등 5인을 끌고와 외연도를 향하여 목을 쳐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때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군은 이를 물리치고 나서 불란서군이 진출하였던 양화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에 수천명의 신자들을 목베어 죽인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이곳은 서양인 처형장소 선정과 관련이 있다.
1925년 당시 공주 본당 최말구 신부와 괴산군 높은 다랑이 주임 윤 바오로 신부와 답사에 나선 정레오(규량)신부 (당시 부여군 금사리 쇠양리 본당 주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갈매못 순교현장을 발견했다. 1866년3월 30일 위의 다섯분의 시체를 몰래파서 홍산지방 석죽골로 이장까지한 이바오로와 그 조부 이바오로 중백부 지수씨, 부친 힐라리오씨가 정 신부님 공소에 사는 것을 발견하였다.
장깃대섰던 자리와 참수하던 자리 그리고 임시 매장했던 세 구덩이를 틀림없이 확인하는데 고증을 해준 편응택씨와 이조용씨 그리고 김순경씨 세분과 비밀히 파서 홍산땅 석죽골로 이장한 장본인들 네분의 말과 일치함을 정레오신부는 확정지었다. 장상길씨가 지주인 그 장소는 밭이되 있었는데 장깃대 섰던 자리라고 허사익주사(1975년 현재 55세)와 그 아들(면서기)이 입증까지 했다.(위치는 오천면 영보리 갈마연진터가 있던곳 전(田) 353번지로 3각형 밭의 면적은 20여평이었다. 이 20여평 안에서 109년전에 비극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레오 신부님은 부랴부랴 서둘러서 1926년 9월 14일 자기 명의로 그 20평을 10원(일화로)에 사들여 등기까지 완료해 두었다가 1929년 1월 서울 천주교 재단법인에 기증했다. 오기선 신부님의 "곡예사 같은 인생"(171면 이하)에 정규량(레오 1883 ~ 1953) 신부님께서 이곳 갈매못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