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개노래(031)-배를 만들다
구양섬 다리[1]가 생기자 강개 나루터는 한산해졌다.
구양섬 다리가 생기 전 강개 나루터는 개건너 영상구지 담안장이나 예산장을 보러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뒤로 강개 나루터는 이따금씩 건너다니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한 두 척의 배만 갯벌에 걸쳐 있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사월, 아버지와 나는 마을 사람들과 삽교천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갯둑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신리 큰아버지께서 운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급히 신리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큰아버지는 철침대에 누어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계셨다.
기유생(1908)이 쉰여섯에 숨을 거두려하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둘째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셋이 침대를 둘러싸고 울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 위앵 신부님이 사목하던 세거리[2] 공소회장을 지내셨다.
당진 송산 유곡리에서 정해년(1887)에 태어나신 할아버지께서는 복자 배관겸께서 주문모 신부님을 맞으셨던 당진 순성 양유리 교우촌으로 이사하셨다.
그 후 예산 고덕면 상궁리 양촌성당[3]으로 이사 하셨다가 신리 강개로 오셔서 외조부와 함께 교대로 세거리 공소회장을 지내셨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합덕성당이 지어지던 일 년 전인 무진년(1928) 마흔둘에 돌아가셨다.
당시 큰아버지는 스무 살, 둘째 큰아버지는 열세 살, 아버지는 열한 살, 작은아버지는 일곱 살, 고모는 네 살이었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아버지 형제들은 우애가 좋았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린 동생들을 자주 살폈고 명절 때면 모두 큰집에 모여 잠을 자며 쇠었다.
그런 큰아버지가 운명을 하며 고통스러워 하니 어찌 슬프지 않았겠나.
어린 나는 철없이 서있기만 했지만 아버지 형제들은 만감이 섞바뀌며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큰아버지의 신음소리가 잦아들자 아버지 형제들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장례를 치룬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예산 신례원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천안에 가셨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사이다 맛과 난생 처음 보는 차창 밖 풍경은 신기했다.
천안역에서 내려 아버지와 나는 비석을 만드는 곳으로 갔다.
그 당시 비석이 서있는 묘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급스런 검은돌(烏石)로 비석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신례원역에서 내렸다.
캄캄해진 길을 무서워 하는 나를 아버지는 업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뒤, 아버지는 목수들과 함께 초여름부터 뗌마[4]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밑창을 깔고 그 위에 가루시루 하꼬목[5]을 대고 참나무못을 박았다.
다음에는 위 아래로 구붓한 기둥을 세우고 앞에서 뒤로 타원형으로 깎은 나무판을 붙였다.
배 바닥에 마루를 깔고 중간에 가로보를 댔다.
배의 앞과 뒤를 막고, 고물에 키와 노를 만들어 붙였다.
마지막으로 배 외벽 틈에 나무껍질을 끼워 배안으로 물이 새어 들지 못하게 하고, 콩기름 칠을 했다.
갯물이 많이 들어오는 날 진수식을 했다.
삽교천으로 나가 거더리 나루터까지 시운전을 했다.
아버지는 그 배를 자주 쓰지도, 오래 사용하지도 않았다.
물 위에 떠 있기보다 갯벌 위에 얹혀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어쩌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할아버지 고향 근처 행담섬[6]에 가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아 오셨다.
아버지는 자주 쓰지도 않을 배를 왜 만드셨을까?
아버지 마음속에는 배가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 윗대 입향조상들께서는 지금은 당진제철공장으로 사라진 송산면 바닷가 유곡리와 가곡리에 사시며 배를 교통수단으로 삼으셨던 것 같다.
배는 육지를 벗어나 바다로 나가면 다른 세상이 된다.
그것은 떠남과 자유를 뜻하기도 하고 제한과 위험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추락과 비상이 정해지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도 그렇고,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도 그렇다.
환갑도 안 된 큰아버지의 죽음이 아버지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했던 것 같다.
생사희비에 얽히는 ‘지금 여기’를 떠나 자유로운 곳으로 가고 싶어서 마련하신 것 같다.
나는 배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만들 만한 재주나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로는 차안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주(虛舟)든 만주(滿舟)든 배는 물을 떠나지 못한다.
배는 산을 오르지도 넘지도 못 하고 비좁은 틈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한다.
내가 어찌 바람(何風)이 되고자 하는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 때문이다.[7]
[1] 구양도 다리 : 1927년 국도 32번 중간 합덕에서 여사울·신례원·예산을 잇는 가교가 생기고 나서, 1933년 정식으로 다리가 완공되었다.
[2] 세거리 : 충남 당진 합덕읍 대합덕리 삼호. 성 다블뤼 주교님께서 사목하시던 신리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다(거더리는 신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나루터가 있던 마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님은 지방사목방문을 하며 세거리와 거더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양촌에) 도착하기 조금 전, 왼쪽으로 신리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고 또 1866년에 체포된 곳이다. 그리고 좌우의 세거리와 거더리 두 마을은 1866년 이전까지는 완전히 교우들 마을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은 모두가 외교인일 뿐만 아니라 어느 곳보다도 완고한 외교인들이 되었다. 박해는 이 가련한 영혼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뮈텔 주교 일기》 2, 1896년 10월 26일자). 세거리공소에서 사목한 위앵 신부님에 대한 기록은 이러하다. “1865년 5월 27일에 조선의 충청도 내포에 도착하였다. 위앵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7월 18일까지 내포에 머물다가 합덕 세거리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조선의 삶의 방식에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그는 조선말 또한 빨리 배워 1866년 2월경부터는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었고, 조선말로 교리를 가르쳤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그가 있어서 매우 행복해 했다. 위앵 신부는 500회 이상의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약 20명의 교우들에게 병자성사를 주었고, 몇몇 부부의 혼인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년에 박해가 일어나 3월 11일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는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여 3월 12일 체포되었다. 3월 19일에 그 세 명의 선교사는 모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위앵 신부는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 3월 30일에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으로 압송되었다. 그날 위앵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요셉 그리고 황석두 루카 등과 함께 참수된 다음 군문효수 되었다.”
[3] 양촌성당 : 1890년 예산 고덕면 상궁리 양촌에 설립되었다. 1899년 현재 합덕성당이 있는 당진 합덕읍 합덕리로 이전했다.
[4] 뗌마 : 돛이 없는 작은 거룻배. 배와 배 사이를 오가는 전마선(傳馬船).
[5] ‘가루시루’는 가로 세로(강개사투리). ‘하꼬목’의 ‘하꼬’는 일본말로 나무상자를 뜻하지만 하꼬목은 칫수가 제법되는 각목을 뜻한다.
[6] 행담섬(行淡島) : 서해대교 아래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서해고속도로 휴게소가 되어 있다.
[7] 요한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