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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순교성지와 순교자
한덕운 순교 현향비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839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鄭 , 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사목, 1999년 5월호, pp.107-109, 차기진]
영혼의안식처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 형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교회측 자료(증언 기록) 15위
성명 | 세례명 | 순교일(음력) | 순교형태 | 나이 | 거주지 | 비고(관변기록='관') |
한덕운(韓德運) | 토마스 | 1801.12.27 | 참수 | 50 | 광주 의일리 | 충남 홍주 태생 |
김덕심(金德深)(본명 萬集) | 아우구스티노 | 1841.01.28 | 옥사 | 43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의 아우 |
정여삼 | 바오로 | 1866.10 | 옥사(?) | 45 | 용인 삼베일 | 충남 천안 직산 태생 (관 정오복鄭五卜) |
이화실 | 1866.10 | 옥사(?) | 40 | 용인 삼베일 | 충남공주관불산태생 (관 이장복李長卜) | |
尹서방 | 1866.11 | 옥사(?) | 45 | 이천 동산리 | ||
정은 | 바오로 | 1866.12.08 | 백지사 | 63 | 이천 단내 | 정규량 신부의 증조부 (관 정성재鄭成才) |
정양묵 | 베드로 | 1866.12.08 | 백지사 | 이천 | 정은 바오로의 재종손 (관 정원명鄭原明) | |
이(李) | 요한 | 1866 | 교수 | 38 | 광주 먹방리 | 죽산 남광리 태생 |
오(吳) | 안드레아 | 1866 | 교수 | 34 | ||
서(徐) | 아우구스티노 | 1866.02(?) | 장사 | 38 | 광주양지 태생 | 신부(神父)댁 주인 (관 서태순徐泰淳) |
이종여 | 1866.02(?) | 장사 | 24 | 충북 진천 | 신부(神父)댁 주인 (관 이조여李祖汝) | |
홍성국 | 요한 | 1867.04 | 56 | 광주 새말 | 양주일담리태생 | |
광주부 옥사자 | 12명 | 1867.01.09 이전 옥사 | ||||
광주부 옥사자 | 4명 | 1868.01.04 이전 옥사 | ||||
이(李) | 요한 | 1869.02 | 50 | 광주 먹방리 | 포천 태생 | |
이치재 | 1871.09.06 | 40 | 광주 새말 | 포천 솟다리 태생 | ||
서(徐) | 바오로 | 미상 | 50 | 양지 | 정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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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측 자료(가전 전승 기록) 6위
성명 | 세례명 | 순교일(음력) | 형태 | 나이 | 거주지 | 비고(관변기록='관') |
김준원(金俊遠) | 아니체토 | 1845.12(혹은 1866) | 광주 하우현 | 김선영 신부의 증조부 | ||
김윤심(金允深)보명 文集 | 베드로 | 1868.02.15 | 68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의 아우 | |
김성희(金聖熙) | 암브로시오 | 1868.02.15 | 54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 |
김차희(金次熙) | 1868.02.15 | 40 | 광주 구산 | 김덕심의 차남 | ||
김경희(金敬熙) | 1868.02.15 | 54 | 광주 구산 | 김윤심의 외아들 | ||
김윤희(金允熙) | 1868.02.15 | 35 | 광주 구산 | 김성희의 6촌 형제 |
관찬 자료(《광영계록》)에 이름만 언급된 22위 * : 교회측 자료 순교자와 동인인물로 추정
* 서태순(徐泰淳) *이조여(李祖汝), 22 이학록(李學祿), 23 이정현(李正鉉), 24 엄쾌길(嚴快吉), 25 서상철(徐相哲), 26 이기좌(李奇佐), 27 권경보(權京甫), *김준원(金俊元), 28 오선장(吳善長), 29 김하상(金夏商), *정원명(鄭原明), *정성재(鄭成才), 30 한동원(韓東源), 31 이재금(李在琴), 32 한경조(韓敬祚) 이상 16위
1867.01.09 이전 옥사
* 이장복(李長卜), *정오복(鄭五卜), 33 윤재현(尹在鉉), 34 김상희(金尙喜), 35 송일지(宋一知), 36 송칠지(宋七知) 이상 6위 1868.01.04 이전 옥사
연령을위한 기도처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 형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한 시대의 사상이나 영성을 단편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신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원교구 내에서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담고 있는 신앙의 유산이나 보배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일이다. 그렇다고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담고 있는 신앙의 유산이며 보배인 영성을 묵과한다면 우리 신앙 선조들에 대한 후손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기에 미력하나마 남한산성 성지에 내려오는 신앙의 유산에 대하여 사목적 입장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다른 성지와 구별될 수 있는 특징이며, 현대인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보배는 바로 남한산성 성지가 신앙의 증거터요, 연령을 위한 안식처라는 점이다. 우선 ‘신앙의 고백터’로서의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박해시대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끌려와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하는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붙일 수 있는 명칭이다.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을 당했던 교우들은 자신의 신앙을 일회적이며 부지불식간에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많은 고문과 협박, 회유과정을 겪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오로지 ‘애주(愛主)의 용덕(勇德)으로서 신앙을 증거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선조들의 혼이 깃든 이곳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모든 고통을 감내한 순교자의 신앙 고백터요, 증거터가 된다. 따라서 이곳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신앙성조들의 순교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되짚어 봄으로써 평소의 삶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참된 표양’으로서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신앙이 약한 이들에게는 튼튼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도와줄 것이다.
튼튼한 신앙의 뿌리는 다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열심한 신앙생활울 해나갈 수 있는 삶의 활력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곳능 혹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기거나 믿음이 흔들이는 이들이 찾아화서 신앙을 굳세게 다져가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 성지가 연령을 위한 안식처로서, 또한 연령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함은 기록상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하신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한덕운 토마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의 저자거리에서 천주교 신앙 때문에 참수를 당하고 방기된 교우의 시신을 거두어 잘 안장해주었는데, 온갖 감시와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이러한 궂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의 영성이 빛난다, 그러므로 한덕운 토마스처럼 이 곳을 찾는 순례객들도, 각자의 삶의 환경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찾아가 기도하고 또 이미 돌아가신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신앙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은 각 본당 연령회원들의 활동에 꼭 들어맞는 것이므로, 모든 연령회원들이 찾아와서 한 토마스 순교자가 보여준 연령을 위한 자발적 봉사활동의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또 배워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필자는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연령들의 안식처이자, 연령회 봉사활도의 모범을 본받는 신앙교육의 장이며, 주님께 한평생 삶의 마지막을 올곧게 봉헌하는 증거터이자 신앙 고백터이므로 신앙생활의 시련기에 처한 교우들에게 다시 굳건한 믿음을 가져다주는 신심 단련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이런 점에서 ‘연령회원들을 위한 신앙학교’ 또는 ‘신앙을 굳세게 해주는 신앙의 증거터요, 고백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복자 한덕운 (토마스) 연령회장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믿으며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깁니다”.
1752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으로부터 십계에 대해 배운 뒤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1800년 10월 한덕운은 가족을 이끌고 광주땅 의일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동정을 살펴 볼 목적으로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서울로 올라가 청파동·서소문 등지를 돌아보다가 순교자 홍낙민 루카와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거두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어 있던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만나자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사실을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덕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주는 모범(즉 연령활동)을 보였고, 홍재영을 질책한 사실과 함께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연령활동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된 한덕운은 형조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한덕운 순교현향비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자신이 턱을 괴어야 하는 나무토막을 직접 손으로 받쳤으며,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망나니는 헛칼질을 하였고, 세 번째 칼질에서야 겨우 한덕운의 머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덕운 토마스의 영성은 한국 천주교 연령회 활동의 기원이 되며, 또한 냉담자 권면활동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남한산성 홈피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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