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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과 우울, 그리고 그 사이
―최정란 시집 『독거소녀 삐삐』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I.
이 시집엔 깔깔대며 세계의 지붕에서 미끄럼 치는 명랑, 발랄한 소녀들의 언어가 있고, 그것들의 배후에서 사선射線으로 내리는 비처럼 우울한 슬픔의 언어가 있다. 이 두 개의 언어는 별개가 아니라 상호내주perichoresis 하는 언어이며, 이 시집을 끌고 가는 두 개의 벡터이다. 소녀-언어는 유토피아의 언어이자, 피난의 언어이고, 현재만 있는 언어이다. 슬픔-언어는 고통의 언어이자, 갈등의 언어이고, 과거의 언어이다. 이 두 가지 벡터들은 서로 꼬이고 엉키며 다양한 주름들을 만들어낸다. 소녀-언어가 세계의 통증을 잊고 무지개처럼 달려갈 때, 그 순수-현재의 배후에는 지는 노을처럼 사연 많은 슬픔-언어가 걸려 있다. 최정란 시인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가벼운 현재와 무거운 과거, 순수와 경험을 교직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시적 미장센Mise-en-Scène을 사용한다. 소녀-언어는 안식과 평화, 망각과 도취의 유토피아로 슬픔-언어를 유혹하거나 야유한다. 슬픔-언어는 소녀-언어의 허구성을 물어뜯음으로써 소녀-언어에 대한 질투를 상쇄한다. 그러나 슬픔-언어가 없다면, 소녀-언어는 얼마나 공허한가. 망각이 아름다운 것은 그 배후에 뼈아픈 고통이 있기 때문이며, 무사유의 현재가 귀한 것은 과도한 사유의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최정란의 쇠북엔 두 개의 추가 달려 있다. 하나의 추가 종을 칠 때, 다른 추는 그 소리를 흡수한다. 그리하여 다른 추가 울릴 때, 두 추의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최정란의 시는 소녀-언어와 슬픔-언어가 겹치는 곳에서 태어나는 주름들이다. 그것은 다양한 형식과 콘텐츠로 이루어져 있지만, 겹치고 겹쳐 다름 아닌 ‘최정란의 세계’로 종합된다.
자전거를 타고 소풍을 가요 챙이 큰 흰 모자를 쓰고 소풍을 가요 김밥을 싸고 흰 운동화를 신고 자전거를 타고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어떻게 아이가 생기는지 모르면서 아이를 품은 소녀가 소풍을 가요 돗자리에 둘둘 말린 소녀가 소풍을 가요 날아오는 돌에 멍이 든 소녀가 소풍을 가요 어제저녁 엄마 제사상을 직접 차린 소녀가 소풍을 가요 내일이면 야반도주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싣고 소풍을 가요 의자와 침대에 앉아 제각기 따로 첫날밤을 보내게 될 소녀가 소풍을 가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소풍을 가요 아무도 소녀들을 아프게 할 수 없는 땅으로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소녀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은 소풍, 소녀들이 소나무 숲을 지나 염소 떼를 지나 소풍을 가요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전문
“소녀”, “자전거”, “소풍”, “흰 모자”, “김밥”, “풀밭” 같은 기표들은 모두 소녀-언어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것들은 얼마나 경쾌하고, 즐겁고, 명랑하고, 발랄한가. 이것들은 오로지 현재에서 현재로 미끄러지는, 무사유가 죄가 아닌 공간의 기표들이다. 이 공간에서 모든 것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세계는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하며, 모든 곳은 집처럼 편안하다. 이곳에선 권태도 슬픔도 없다. 이 속에서 모든 것들은 “아프게 할 수 없는 땅”으로 가는 것처럼 즐겁다. “날아오는 돌”, “엄마 제사상”, “야반도주”는 모두 슬픔-언어의 계보에서 나온 기표들이다. 소녀-언어가 아무 생각 없이 “아프게 할 수 없는 땅”으로 깡충거리며 뛰어갈 때, 슬픔-언어가 거머리처럼 이들의 손과 발과 목을 휘감는다. 말하자면, 이 소풍은 ‘순전’하지 않다. 소녀들은 슬픔-언어의 “돗자리에 둘둘 말린” 채 소풍을 간다. 이 시를 그림으로 옮긴다면, 얼마나 참혹한 화폭이 될까. 상기된 분홍빛 얼굴에 흰 모자를 쓰고 푸른 풀밭을 달려가는 명랑 소녀들의 온몸을 휘감는 폭력과 죽음과 불화의 어둡고 칙칙한 천들을 보라. 누구에게나 소녀-언어의 시절이 있고, 소녀-언어로 본 세계가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아픔도 예고하지 않았으며, 노여움과 슬픔을 가르치지 않는다. 간혹 슬픔-언어와 직면할 때도 도망갈 소녀-언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세계는 우리가 소녀-언어의 풀밭으로 계속 소풍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돌이 날아오고, 가까운 사람이 죽고, 아버지의 법칙Father’s Law은 늘 징벌의 기회를 엿본다. 그러므로 삶은 이토록 명랑하고 이토록 슬프다. 삶은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선 혹은 두 면이 겹쳐 만드는 주름이다. 주름 속에는 소녀와 슬픔, 사랑과 환멸, 현재와 과거, 경쾌함과 무거움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깍지를 끼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찌르며 놀아요
말없이 잘도 놀아요
오늘 당신은 나를 찌르며 놀고 나는 찔린 가시를 뽑으며 놀아요
뽑으려 하면 할수록 가시가 더 깊이 들어가요
그래도 가시를 뽑아요
놀이의 규칙을 지켜요
…(중략)…
가시의 안부가 도착해요
가시 안테나가 더듬더듬 붉은 신호를 읽어요
가시가 가시를 내밀어 가시를 읽어요
가시가 없는 말은 무심하고
가시가 없는 관계는 깊이를 몰라
세계의 표면을 겉돌아요
…(중략)…
우리는 찌르고 스미며 피를 나누는 사이,
혀를 내밀어 서로의 가시를 맛보지요
우리는 걷는 식물과 뿌리 내린 동물,
당신의 모순을 사랑해요
당신도 나의 모순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어 나는
기어이 한 방울 피 맛을 보고
그 사이 화분은 뿔이 한 뼘 더 자랐어요
― 사슴뿔선인장」 부분
세계는 소녀-언어와 슬픔-언어의 중층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녀-언어와 슬픔-언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두 개의 층위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이 없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는 이것들이 “서로를 찌르며” 노는 공간이다. 슬픔-언어는 소녀-언어의 유쾌, 발랄, 명랑의 상태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슬픔-언어는 소녀-언어의 환상을 깨며, 먹구름을 뿌리고, 찬 서리를 내린다. 그러나 소녀-언어가 없이 슬픔-언어는 자신의 결핍을 모른다. 슬픔-언어는 자신의 지친 남루를 벗고 소녀-언어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소녀-언어는 슬픔-언어의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다. 반대로 슬픔-언어가 없이 소녀-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 슬픔-언어의 어둠이 소녀-언어의 밝음을 구성하고, 슬픔-언어의 공포가 소녀-언어의 환희를 존재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를 찌르며 서로에게 파고드는 “가시”들 같다. 그것들은 “뽑으려 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더 깊이 들어” 간다. 이 “찌르고 스미며 피를 나누는 사이”가 존재와 세계를 구성한다. “당신의 모순을 사랑해요”라는 고백은, 그 자체 모순인 세계를 수용하는 시인의 고통스러운 자세를 잘 보여준다.
II.
소녀-언어는 통일성의 언어이다. 그것은 차이와 분리를 동질성의 끈으로 묶는다. 소녀-언어는 동질성의 반복으로 차이를 무화함으로써 슬픔-언어의 틈입을 막는다. 소녀-언어는 슬픔-언어의 복잡성을 단순성으로 대체하며 슬픔-언어에 저항한다.
졸라 블라블라 졸라졸라 블라블라 어여쁜 소녀 떼가 졸라졸라 길을 간다 졸라졸라 팔짝팔짝 졸라졸라 즐거워 교실도 졸라 시험도 졸라 학원도 졸라 아빠도 졸라 (밥맛없어) 엄마도 졸라 (밥맛없어) 집도 졸라 용돈도 졸라 알바가 졸라 생리대가 졸라 말과 투구가 졸라 발랄해, 졸라졸라 거슬려, 내가 졸라 밥맛이라는 증거, 학교와 부모를 졸라 존중하는 증거, jollyjolly 깔깔대며 졸리졸리 조잘대는 소녀 떼, 투명한 새 탁구공처럼 졸라졸라 튀어 오르며, 입을 모아
졸라졸라 블라블라
존나 블라블라 존나존나 블라블라 씩씩한 소년 떼가 존나존나 길을 간다 존나존나 펄쩍펄쩍 존나존나 유쾌해 게임도 존나 급식도 존나 과외도 존나 선생도 존나 (병맛이야) 형도 존나 (병맛이야) 축구도 존나 여친도 존나 꿈이 존나 솜털 수염이 존나 말과 노새가 존나 경쾌해, 존나존나 거슬려 내가 존나 병맛이라는 증거, 선배와 또래를 존나 존중하는 증거, 尊나存나 낄낄대며 좋나좋나 진지한 소년 떼, 보이지 않는 골대를 향해 존나존나 돌진하며, 발을 굴려
존나존나 블라블라
* 괄호 안이 더 크게 들린다. 밥맛과 병맛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모른다는 것 좋다.
―「말과 투구와 노새와 랩」 전문
“졸라졸라”와 “존나존나”는 차이의 기병대를 때려 부수는 동일성의 주술이다. 차이의 “말”들이 쳐들어올 때, 소녀-언어는 “졸라졸라”를 외쳐 모든 차이를 무산시킨다. 세계의 모든 것은 오로지 “졸라졸라”와 “존나존나” 대상물일 뿐이다. 차이와 분리와 분열의 세계는 “졸라졸라”와 “존나존나”의 주문 앞에서 무너진다. 세계는 “졸라”와 “존나”의 “투구”를 뚫지 못한다. 소녀-언어는 “소녀”와 “소년”의 젠더적 차이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졸라”와 “존나”는 모든 것을 단순화시킴으로써 무력화하는 “랩”이고 “블라블라”이다. “졸라”와 “존나”는 그러므로 복잡성과 차이의 세계에 저항하는 동맹의 언어이다. “어여쁜 소녀 떼”와 “씩씩한 소년 떼”는 이렇게 “깔깔대며” “낄낄대며” “입을 모아” “발을 굴러” 싸운다. 이것들은 이성, 문법, 관습, 위계, 권위의 언어를 조롱한다. 그것은 고체화된 성인의 언어와 문법을 희롱하는 옹알이 혹은 액체의 언어이다.
순정과 명랑의 장르를 오가며
밤과 발랄을 제각기 다른 온도에서 뒤섞다가
제풀에 지쳐 고요해지기를 반복하는
미완성 울음들
날마다 나를 회수한다
…(중략)…
불발의 망명자가 되어
얼음이 된 말의 지층을 발굴하게 될 줄
녹슨 말의 파편들 띄엄띄엄
맞추어 보는 날들이 올 줄
기나긴 만화소녀시대가 끝나는 날이 올 줄
왜 모를까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만화소녀시대」 부분
그러나 세계는 그리 만만치 않다. 소녀-언어가 “졸라졸라” 주문을 외치며 차이의 세계를 상상계의 동일성으로 덧칠할 때, 상징계의 가시들이 “순정과 명랑”의 물풍선에 구멍을 뚫는다. 소녀-언어는 시간의 덫에 갇힌다. “장밋빛 입술과 뺨이 시간의 구부러진 칼날 아래”(셰익스피어 소네트 116) 놓일 때, 저항의 “미완성 울음들”이 넘친다. 시인은 전쟁터에 쓰러진 소녀-언어의 조각들을 줍는다(“나는 날마다 나를 회수한다”) 이제 액체 언어가 아닌 상징계의 슬픔-언어, “얼음이 된 말”이 세계를 지배한다. 시인의 작업은 그렇게 고체화된 언어의 “지층을 발굴”해서 액체 언어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시인은 “기나긴 만화소녀시대가 끝나는 날이 올 줄” 알면서도,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액체의 언어, 소녀-언어, 분리와 분열 이전의 상상계를 꿈꾼다.
III.
이렇게 보면, 최정란의 시들은 액체 언어와 고체 언어, 소녀-언어와 슬픔-언어, 상상계와 상징계의 길항拮抗 속에 놓여 있다.
나는 무수히 많은 거절로 이루어진다 내일 사과로 거절당하고, 오늘 오렌지로 거절당하고, 어제 레몬으로 거절할 것이다 거절이 관계를 우롱한다. 거절이 관계를 개관한다. 관계가 지속될지 끝날지, 거절 이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삶을 거절해보기 전에는 삶을 모른다 꽃을 거절할 수 없어 열매를 거절한다 달을 거절하지 않을 예정이므로 나는 해를 모른다 삶도 나를 모를 테니, 비긴 걸까 너를 거절할 수 없어 오늘도 나는 나를 거절한다
―「거절학개론 -이 필수 교양서의 목차를 지운다」 전문
“거절”이 없이 세계는 없다. “거절”이 없이 존재도 없다. “삶을 거절해 보기 전에는 삶을 모른다.” 거절은 존재의 기원이며, 서로 다른 층위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수행performance이다. 비존재는 배제의 수행을 통해 비로소 존재가 된다. 소녀-언어는 파괴와 위계의 언어를 “졸라졸라” “존나존나” 거절하면서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거절은 상처의 부위들을 만든다. 「눈물광대」, 「막막광대」, 「회의광대」 연작시들은 거절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아픈 정동情動들을 “눈물”, “막막”, “회의”의 기표들로 그려낸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액체 언어에서 고체 언어로, 소녀-언어에서 슬픔-언어로 넘어갈 때, 눈물 어린, 막막한 회의가 생겨난다.
어딘가 닿겠지요 닿지 않으면 어때요 자갈길, 흙길, 모랫길, 풀밭길, 길 위의 시간이 길어요 좁은 길, 불면을 부르는 길, 슬픈 일이 눈을 가득 채우는 길, 작은 골목과 거리와 바닷길, 산길, 들길을 오래 걸어요 우울과 명랑이 뒤섞인 길을 걸어요 슬픈 일은 일기에 숨기고 기쁜 일만 겉으로 꺼내 놓아요 일찍 철든 유쾌한 사람으로 비친다면, 그건 순전히 슬픔과 우울을 빨아먹은 언어 덕분이지요 눈물이 우리 삶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말일까요 떨어진 눈물자국은 왕관 모양이고요 나는 우는 사람, 다시 우는 사람, 혼자 통곡하는 사람, 누군가 들을까 숨죽여 우는 사람일까요
―「숨죽여 우는 사람」 전문
이 작품은 온전히 상징계로 떠밀려온 존재의 비애를 잘 그리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수많은 종류의 “길”들은 “우울과 명랑”의 이중 언어가 유랑하는 공간이다. 상징계는 “명랑”의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소녀-언어, 사라진 것 같은 먼 고향의 언어를 버리지 않는다. 슬픔-언어, 우울-언어의 세계에서 소녀-언어, 명랑-언어는 사라진 유토피아이다. 이 시의 화자가 “우는 사람” 혹은 “통곡하는 사람”인 이유는 고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슬픔과 우울을 빨아먹은 언어”는 가짜 존재, “일찍 철든 유쾌한 사람”을 만든다. 화자는 차라리 “통곡”함으로써 철들지 않기를 원한다. 소녀-언어를 버리지 못한 자만이 상징계에서 “통곡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최정란의 시에는 이렇게 “우울과 명랑이 뒤섞”여 있다. “명랑”은 그녀의 시를 경쾌하게 만들고, “우울”은 그녀의 시를 깊게 만든다. 그녀의 시들은 “우울”의 언덕에서 “명랑”을 그리워하고, “명랑”의 풀밭에서 “우울”을 감지한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충남 공주에서 출생.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운 명륜여인숙』이 있으며, 문학이론서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번역서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음.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