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경 불
정경희
얼마 전부터 수필쓰기를 배우고 있다. 붓 가는대로 쓰면 되지 뭘 배우느냐고 탓하는 이도 있다. 글제가 주어지면 적당한 분량 맞추는 것조차 힘들어 끙끙거린다. 각자 쓴 글 읽고, 합평과 토론을 거칠 때는 참으로 진지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 참 좋다.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미처 몰랐던 것들에 대하여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수필은 “인생이나 자연에 대하여 느낀 바를 마음의 여유 가지고 부담없이 산문으로 쓰는 글”이다. 이제 막 시작한 초보는 ‘부담 없이’ 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야속해 하며 글을 쓴다. 내 경험에서 거리를 찾으려니 아무래도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투박한 모습으로 자식 돌보던 부모를 떠올린다. 혼자 빙긋이 웃기도 하고, 가끔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당황한다. 그렇게 들추어진 추억은 글자로 저장이 된다. 서랍 구석에 흩어져 있던 사진을 앨범에 정리한 듯 뿌듯하다.
요즘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에 의미 부여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등교시간에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젊은 엄마들이 여럿 보인다. 교문 앞까지 어린 자녀 데려다 주고 교실에 들어가는 모습 확인하느라 목을 길게 늘이고 있다. 끝까지 지켜주는 엄마 보며 웃는 아이들 두 눈이 반짝인다. 엄마들의 젊음이 부럽고, 두 아들 키우면서 저렇게 하지 못한 지난날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다.
등산할 때나 들판을 지나칠 때 들꽃을 보면서도 행동이 달라졌다. 전에는 키 작고 가냘픈 야생화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나 했을 뿐이다. 이제는 들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작은 꽃술까지 찬찬히 살펴본다. 겨울 추위 견디고 다시 살아난 연약한 식물이 대견스럽다. 내 몸 그림자에 꽃이 싫어할까봐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수필 쓰기 배우면서 미처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아가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만 집중하느라 만물박사가 될 수는 없다. 잊고 있던 사소한 물건의 이름을 들으면 지난날의 기억이 줄줄이 떠오른다. 새로운 물건이나 단어 알아가는 기쁨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번 주 글제는 ‘등경 불’이다. 평소 안 쓰는 물건이라 금방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국어사전보다 가까이 있는 휴대폰으로 등경이 무엇인지 검색하였다. 등잔을 걸어 놓는 기구. 놋, 철, 나무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다. 모양도 등잔을 올리기 위한 최소 조건만 갖춘 것부터, 온갖 장식을 해둔 것까지 다양하다.’ 신분에 관계없이 일반가정에서 널리 애용되던 조명기구이다.
직접 우리 집에서 사용하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아버지가 분가하기 전, 할아버지와 대가족이 함께 살 때 등경을 본 것 같다. 하얀 사기 호롱에 석유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인다. 등경에 올려놓으면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춘다. 어린 내가 뛰어다녀도 발에 걸려 넘어질 위험이 없다.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목재 등경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등경 앞에서 바느질 하던 할머니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쯤 읍내에 있는 대부분 가정에서는 전기를 사용하였다. 아버지가 분가하면서 지은 우리 집은 처음에는 전기를 넣지 않았다. 신작로 사이에 두고 한쪽은 우리 집 하나만 있었기에 전기 공급이 어려웠나 싶기는 하다. 그보다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신문물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였는지 모르겠다.
처음 몇 년은 남포등을 사용하였다. 남포등을 우리는 ‘호야’라고 불렀다. 맨 아래 통에는 석유를 담고, 넓은 심지에 불을 붙인다. 유리 등피가 있어 바람이 불어도 불이 쉬이 꺼지지 않는다. 작은 심지의 호롱불보다 훨씬 밝다. 기름 타는 냄새는 말할 것 없고 그을음은 많이 났다.
동네 가게에 석유 사러 가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그때는 과자와 담배 파는 가게에서 석유를 팔았다. 작은 체구에 한 되짜리 갈색 병을 들고 다니는 것은 부담이다. 잘못하다가 미끄덩하고 손에서 빠지면 그런 낭패가 없다. 그나마 이웃 동네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엄마는 집안 곳곳에 있는 호야에 기름을 채운다.
오랫동안 전기의 편리함을 누리고 살았다. 전기 덕분에 밤을 낮처럼 생활하면서 때로는 원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해 지면 움막에 기어서 들어가고 해 뜨면 열매 채집하러 나오는 원시인이 되고 싶었다. 계속되는 야근과 밀려드는 업무로 지칠 때였을 것이다. 그 옛날 사용하던 호롱이나 등경, 남포등은 언제 사용했나 싶게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물건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변해야 산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 뇌이며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세상의 변화는 거센 물살처럼 밀려오는데, 이러다 떠내려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때도 있었다. 수필쓰기 덕분에 인생과 자연을 생각하며 내 삶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등산에 비유하면 벌써 정상 찍고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무조건 앞서야 한다는 생각은 버릴 때도 되었다. 젊은이들이 가는 방향을 뒤 쫒으며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면 될 것이다.
긴 세월 흐르는 동안 삶의 방식이 아무리 바뀌어도 부모 자식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하는 감정은 바뀌지 않았다. 수필 쓰면서 부모에 대한 서운함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언제나 딸자식 잘되기를 바라며 내 언덕이 되어 주었던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 초등학교 기억 속, 갓 서른 살 된 엄마 모습이 너무 예쁘다. 글쓰기 덕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무심코 지나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며 노년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번 주 글제로 주어진 “등경 불” 단어 하나에 내가 살아온 세상이 새롭게 느껴진다.
(20250303)(20250305수정)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