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궁인] 혈류 血流(2권) 14. 하룻밤 사랑을 위해

[ㅎHㅅiㅅi]

제 14 장 하룻밤 사랑을 위해
 

 

 <1>
  
  꽝꽝 얼어붙은 동토(冬土)도 춘풍(春風)에는 녹아들게 마련이다.
  만년거암이 세월에 마모되어가듯 목검추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차츰 풀려갔다. 처음 그는 희사령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의 생각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끈질기게 그를 따랐다. 처참한 고깃덩이 신세가 될 뻔한 위기가 몇 차례이며, 여인으로서 견뎌내기 힘든 모욕적인 경우가 또 얼마나 많았던가.
  한데도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목검추는 몸을 누이는 곳이면 아무 데서나 잠을 잤고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굶을 때도 있었다.
  빗속에서도 나무등걸에 기댄 채 잠들곤 했다. 목검추는 희사령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며칠간 단 한 마디도 말을 걸거나 시선을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모욕은 희사령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하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목검추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다. 샘을 보면 신발을 벗어 그것으로 샘물을 떠먹었고 독사와 독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에서는 말없이 누워 잠을 청했다.
  그녀는 확신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둘 고검류향이 아니라는 것을.
  목검추는 그녀의 행동에 번번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떤 때는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동행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희사령은 영리한 여자였다. 
  그녀는 목검추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을 수없이 연구했다. 싸워야 하는 순간이 아니면 나머지 시간을 그녀는 여기에 골몰했다. 그래도 목검추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제 그녀는 다른 일을 시작했다. 
  감쪽같이 음식을 마련해 며칠씩 굶은 목검추의 허기를 채워주기도 했고, 그가 자는 동안 옷을 빨아 밤새 모닥불에 말려 놓기도 했다.
  차츰 그녀는 목검추의 사소한 것까지 시중을 들었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은 점차 자연스러운 동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녀가 고집을 세우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밤이면 죽기 살기로 목검추와 한 방에서 자기를 원한 것이다. 그것은 필사적인 고집이었다.
  결국 목검추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한 방에서 잠들기를 원할 뿐, 그 이상의 것은 요구한 적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검유향의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버렸다.
  
 

 <2>
  
  철무독은 연일 날아드는 전서구를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보나마나 했기 때문이다.
  구천검맹의 명성과 위엄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그것도 단 한 사람, 고검류향이란 약관의 청년에 의해 와해직전에 이른 것이다.
  "……."
  철무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강호에 나서지 않은 지도 어언 이십여 년이다.
  "허허! 고작 한 명의 어린 아이 때문에 노부가 손수 나서야 한단 말인가?"
  그의 앞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다.
  그는 언제나 독국(獨局)을 즐겼다. 그것은 그의 무림에서의 위치와 비슷했다. 언제부턴가 그는 천하에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여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백추량. 그대가 죽은 이후부터였지."
  백추량.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다. 
  아니, 그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만승지존이었으며 검도(劍道)의 일인자였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최고의 찬사와 경어로 백추량을 칭송했다. 그런 그가 죽은 후에는 이렇다 할 적수가 없다 여기는 철무독이었다.
  "고검류향……. 과연 노부가 나설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란 말인가?"
  따악.
  그는 한 개의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하긴 지금까지 그 아이는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믿었던 사검마영도 패했고, 연옥당주마저 놈을 따라가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고 말았으니… 허허! 그가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딱.
  또 한 알의 바둑알이 놓여졌다. 
  철무독은 설사 구천검맹이 전부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있었다.
  "구천검맹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아이에게 뿌리 뽑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천검맹은 영원히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놈이 노부를 쓰러뜨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노부가 다시 구천검맹을 세우는 데는 일 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그시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는 노안(老眼)은 득의에 차 있었다. 섬광처럼 흐르는 안광과 그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만인을 압도하는 기상과 어우러져 그의 모습은 일대종사(一代宗師)의 상을 만들어냈다.
 

 한데 그때였다.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하지만 맹주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만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겠소?"
  "……."
  철무독의 갈기 같은 눈썹이 꿈틀했다. 하나 그뿐, 그는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허허! 그대는 왜 이제야 참견을 하는가? 노부는 이미 반 시진 전부터 젊은이의 고견을 기다리고 있었거늘……."
  놀랍도록 여유있는 대응이었다.
  오히려 상대 쪽이 약간 놀란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과연 천하제일인답소. 나의 귀식대법과 둔영술(遁影術)은 완벽하다 자부했거늘……."
  철무독은 담담히 말했다.
  "그대는 노부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군."
  "적어도 얼마 전까지 그랬소. 하지만 이젠 생각을 바꾸어야겠소."
  철무독은 바둑판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언제까지 숨어 간섭만 할 참인가?"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스스스.......
  그것은 안개였다. 아니, 안개처럼 보이는 하나의 인영이 홀연 정자의 지붕 위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
  이어 안개가 모이는 듯하더니 또렷한 형상으로 화했다.
  허리까지 늘어진 장발, 유난히 흰 피부에 각지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얼굴이 나타났다.
  울긋불긋한 전의(戰衣)에 검은 피풍까지 걸치고 나타난 사내는 삼십 정도 되어 보였다. 그의 등에는 장도(長刀)가 걸려 있었다. 유난히 사이가 좁은 눈썹과 칼로 그은 듯한 눈매는 왠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철무독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동영인(東瀛人)인가?"
  장발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만은 중원인이오."
  "알 만하군. 요즘 부상하고 있다는 신풍방(神風幇)의 방주가 자네인가?"
  장발인은 여전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야혼(野魂)이오. 그렇게 불러주시오."
  "야혼이라… 그래 노부에게 볼일은?"
  철무독의 시선은 다시 바둑판으로 향해졌다.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인간이었다.
  야혼의 눈이 번쩍 빛을 뿜었다. 
  마치 잘 닦여진 칼날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야혼은 만년거암처럼 태연히 앉아있는 철무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야혼이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겠소."
  철무독의 고개가 서서히 들려졌다.
  "내 고민을?"
  야혼의 입가에 실낱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고검류향을 죽여주겠소."
  철무독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것 참 재미있군. 그래, 조건은?"
  "당신은 그저 한 가지만 약속하면 되오."
  야혼의 눈이 더욱 더 가늘어졌다.
  "중매를 서 주시오."
  이번에는 철무독의 눈이 놀람과 흥미로 약간 벌어졌다.
  "중매……?"
  "그렇소."
  "흠. 들을수록 흥미로워지는군. 그래, 어떤 신부를 원하는가?"
  "내 눈은 매우 높은 편이오. 중원제일미녀가 아니면 안되오."
  급기야 철무독의 입에서는 우레와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핫핫핫핫......!"
  야혼의 낯빛이 변했다.
  "지금 날 비웃는 것이오?"
  철무독은 웃음 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헛헛… 한데 자네는 이미 점 찍어둔 여인이 있나 보군. 솔직히 털어놓는 게 우리의 거래에 도움이 될 걸세."
  야혼은 좁은 눈가에 약간의 흥분을 보이며 말했다.
  "육합(六合)의 세력 중 하나인 환상전의 전주가 무척 아름답다고 들었소."
  철무독은 의외라는 듯 흠칫했다.
  "자네… 그 아이를 본 적이 있나?"
  야혼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하나 천하제일의 미인을 아내로 삼는 건 오래 전부터 내 꿈이었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귀하가 보기에는 어떻소? 그녀가 과연 그 자격이 있는지?"
  그를 뚫어질 듯 바라보던 철무독은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핫……! 충분해, 충분하고 말고… 핫핫핫! 과연 자네의 안목은 대단하군."
  야혼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의 거래는 이루어진 것이구려."
  철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자네가 고검류향을 죽인다면 노부는 명예를 걸고 자네가 원하는 여인을 얻게 해주겠네."
  처음으로 야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너무 짧았다. 이내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야혼은 가겠소."
  "잠깐."
  야혼의 눈이 철무독을 쏘아보았다.
  "만약 실패한다면?"
  일순 야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내뱉었다.
  "당신이 구천무제라 해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오. 나 야혼에게 실패란 없으니 말이오."
  실로 광오한 태도였다. 철무독은 빙긋이 웃었다. 왜냐면 또 다른 만족감이 그의 가슴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흠! 좋아. 만일 그대가 실패하면 노부 앞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마침 손발이 모자라던 참이니 자네라면 노부의 수족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테지."
  "……!"
  야혼의 눈빛이 일시 복잡하게 변했다. 그는 특유의 무감정한 억양으로 내뱉었다.
  "그건 나중의 일이오."
  스스스…….
  그의 모습이 흐려졌다. 다시 안개의 입자처럼 변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흐려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딱!
  철무독은 검은 돌을 바둑판 한가운데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야혼이라? 네 눈빛은 무루일호를 닮았군. 하지만 좀더 비정한 점이 마음에 든다."
  딱!
  이번에는 흰 돌이 놓였다.
  "그러나 고검류향은 예측 못할 변수가 많은 아이야. 너마저 실패하면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노부가 움직여야겠지."
  철무독은 다시 바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두어 개의 돌이 놓여지자 이미 무릎 아래 세상은 까맣게 잊은 듯이 무표정해지고 만다.
  철무독은 그런 인물이었다. 당장 구천검맹이 와해된다 해도 이미 시작된 바둑은 끝내고서야 일어설 그런 배포의 위인이었다.
  
 

 <3>
  
  태양이 떠오른다.
  산정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벅찬 일이다. 목검추는 며칠째 산정 위에 좌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칠 일 간 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매번 희사령이 음식을 장만해 왔으나 그는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화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희사령은 끼니마다 새로운 음식을 마련했고 그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몰아경지에 취한 그를 방해할까 봐 숨조차 죽이며 물러가곤 했다.
  그녀는 변했다. 그것은 집념인지도 몰랐다. 아니,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속죄인지도 몰랐다.
  어찌됐든 그녀는 오로지 목검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만은 분명했다. 
  열흘째의 아침.
  "……."
  희사령은 눈을 크게 떴다.
  움직였다. 지난 열흘간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던 목검추가 드디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육 척의 몸이었으나 희사령은 마치 하나의 산악이 일어서는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번쩍!
  환상인가? 그녀는 목검추가 반검을 뽑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뽑았다고 느꼈을 때 검은 이미 검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아……!"
  목검추의 등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희사령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태양!
  정확히 말하면 막 새벽 운무를 뚫고 힘차게 솟아오른 조양(朝陽)이다. 한데 그 해가 갈라진 것이다. 바로 반검의 강렬한 검광에 의해 말이다.
  희사령은 눈을 비볐다. 태양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해를 자르다니…….'
  이때 목검추의 격동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완성했다. 조양검결(朝陽劍訣)... 이는 검도의 한 단계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완전히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얼마 전부터 그는 대지일검과 자신이 고안한 고검류향 그 두 가지 검식이 뭔가 연결되지 않는 듯한 결점을 발견했다.
  두 검식은 살상을 위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있으나 진정한 검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아검(自我劍)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한데 지난 열흘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 가물거리기만 하던 검결을 마침내 완성시키게 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조양검결이라 이름 붙였다.
  목검추는 천지를 휘어감는 거대한 태양을 향해 크게 심호흡했다. 이어 천천히 희사령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웃고 있었다. 늘 우중충하게 얼굴을 가렸던 죽립도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아아!'
  불길을 퍼붓는 듯한 새벽 양광 아래 미소짓는 목검추의 모습은 가슴 떨리도록 아름답다. 그의 흰 얼굴을 물들이는 불그레한 혈기와 뜨거운 열정을 감추어 두고 있는 듯한 부드러운 눈빛…….
  희사령의 가슴은 벅차게 뛰놀았다. 
  그녀는 목검추를 바라보며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이때였다.
  "사령, 너무 배가 고픈걸……?"
  목검추의 웃음 섞인 말을 듣고서야 희사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그로부터 이토록 다정한 말을 들어보았던가? 언제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보았던가?
  희사령은 급히 신형을 날리면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누지 못했다.
  "그… 그래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음식을 마련하겠어요."
  


  <4>
  
  목검추는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의 식욕은 놀라울 정도로 왕성했다. 저토록 먹어 치울 수 있는 식욕을 어떻게 그 동안 풀뿌리나 군만두 한 조각으로 때울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이곳은 사냥꾼들이 머물다 떠나곤 하는 허름한 모옥이다.
  희사령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목검추를 바라보느라 한 술도 뜨지 못했다. 그래도 배가 고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야릇한 행복감마저 들었다.
  '아… 언제까지나 이 분과 함께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라면 밥을 먹지 않고도, 잠을 자지 않고도 죽을 때까지 달콤한 꿈 속을 흐르듯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두 볼은 발갛게 익어 들었다. 그러나 이내 힘없이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 너는 주제 넘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예리한 비수로 베어내는 듯 날카로운 고통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산중의 밤은 빨리 온다. 
  희사령은 오랜 시간 정성스레 목검추의 잠자리를 손보았다. 
  곱게 정리된 양털침상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 차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는 거냐? 사령. 그에게 이토록 집착해 어쩌자는 거냐? 못난 계집애 같으니…….'
  그녀는 하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어 휘청휘청 구석에 깔린 짚단더미로 걸어갔다.
  목검추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던 것은 상심(傷心)이 너무 큰 탓이리라.
  그녀는 짚단을 깔아 만든 자리에서 구부린 채 곤한 잠에 취해 있었다. 그녀가 잠을 깬 것은 몸이 구름에 실린 듯 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
  눈을 뜬 그녀의 큰 눈이 더욱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을 안아든 것은 목검추가 아닌가? 목검추의 눈은 심해(沈海)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에 희사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 당신……?"
  목검추는 느릿하게 말했다.
  "바보 같으니… 언제까지 내 그림자 노릇만 할 건가?"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희사령은 가슴이 송두리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흑!"
  희사령은 그의 가슴으로 허물어지듯 안기며 흐느꼈다. 가슴 속에 묻어둔 슬픔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듯 흐느꼈다. 그녀의 오열에 목검추는 멈칫했다. 
  희사령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나… 날 놔줘요."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놓아주지."
  "……."
  희사령은 눈물젖은 눈을 들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했다.
  "날… 차라리... 날 죽이면 당신을 잊을 수 있어요."
  "알고 있소."
  목검추는 무겁게 말하며 더욱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은 한 치도 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되었다. 희사령의 숨결이 가빠졌다. 그녀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강렬한 성(性)의 충격이었다.
  "아……."
  희사령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목검추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목덜미에 퍼부어졌다.
  희사령은 가볍게 몸을 비틀며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쳤으나 두 팔은 더욱 굳게 그의 목을 조여들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양털 침상 위로 쓰러졌다. 목검추의 손은 무뢰한처럼 불쑥 그녀의 젖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흑!"
  희사령은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을 토하며 활처럼 몸을 웅크렸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오고 있었다. 
  목검추는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애무하며 허물 벗기듯 옷을 벗겨나갔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고 촛농을 녹여내는 촛불만이 모옥의 밤을 밝혀갔다.
  희사령의 몸은 달구어질 대로 달아올랐다. 그녀는 달뜬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입술을 목검추의 입술로 가져갔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치며 끈끈한 애정의 농액이 교류되었다. 
  희사령은 구름을 밟고 하늘을 오르는 듯한 아득한 나락을 느꼈다. 그녀의 양팔은 영원히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목검추의 목을 바짝 조이고 있었다.
  그녀는 한족과 이방민족인 구율부족(球律部族)의 피가 섞인 혼혈여인이었다. 열 세 살 때 숙부로부터 강제로 순결을 잃은 후 그녀의 더운 피는 이따금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스물이 넘어서부터는 밤이면 몸 전체가 한 덩어리 불꽃이 되어버렸다.
  그 넘칠 듯한 열정을 그녀는 갖가지 고문술을 발휘하는 것으로 대신 풀었었다. 아니, 어떤 때는 사내들을 침상으로 불러들여 마음껏 욕망을 불태우곤 했다. 하지만 어떤 사내도 지금껏 그녀를 만족시킨 자는 없었다.
  한데 지금 그녀의 억눌려 왔던 불길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녀의 입술은 목검추의 목을 더듬고 손은 근육으로 뭉쳐진 그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목을 더듬던 그녀는 타는 듯한 입술을 귓불로 가져갔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박 속같이 흰 이빨이 그의 귓불을 깨물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때론 강하게…….
  "하아!"
  가쁜 신음이 목검추의 귓전에 퍼부어졌다.
  하나 목검추는 그녀의 가슴을 애무할 뿐 더 이상의 동작은 취하지 않았다. 희사령은 자신의 열정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입술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빠르게 핥아 내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손 하나는 뱀처럼 뻗어내려 목검추의 하복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목검추의 손이 움직이더니 그녀의 허리 뒤로 돌아갔다. 그는 강하게 그녀의 탄력 넘치는 둔부를 움켜쥐었다.
  "아!"
  희사령은 탄성을 토하며 격렬한 몸짓으로 목검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애무는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목검추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결국 희사령의 열정에 동화(同化)되고 말았다.
  마침내 두 젊은 육체는 불꽃에 휩싸이고 말았다. 목검추도 희사령도 두 개의 불꽃이 되어 한 덩이로 합쳐지고 말았다.
  "......!"
  돌연 희사령의 교구가 활에 맞은 사슴처럼 파르르 떨며 휘어졌다. 그녀의 봉목은 한껏 부릅떠졌다. 하나의 뜨거운 물체가 자신의 깊은 곳으로 파고든 것이다.
  "아아......."
  그녀는 희열로 파드득 떨며 목검추의 목에 매달렸다.
  뜨거운 밤이었다. 
  두 젊은 육체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밤에 동화되어 끝없이 활활 타올랐다.
  


  <5>
  
  "......!"
  희사령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쥐었다.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텅 빈 침상을 바라보며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난밤 그토록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 그가 사라진 것이다. 한 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그녀만을 남겨둔 채 사라져버린 것이다.
  전신의 맥이 일시에 탁 풀렸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침상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언제고 오겠소. 기다려 준다면…….>
  희사령은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서찰을 꼭 움켜쥐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기다리고 말고요. 영원히라도 기다리겠어요. 설혹 돌아오시지 않는다 해도 말이에요……. 검추."


                                    <3권으로>

[덕산]

잘 보고 갑니다.

[여여풍]

감사합니다.

[얼음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