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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상지음부골공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일말의 희망이 생기자 삶을 단념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대가없이 치료해 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살아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대답했다. “소형이 내 독상을 치료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시키는 대로 실행하겠소.” 지신도 소대천은 껄껄 웃었다. “청룡형은 참으로 총명한 사람이구려. 나에게 마침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이다. 그러나 독상을 치료한 다음에 얘기해도 늦지 않을 터이니, 우선 그 독상부터 좀 보여주시오.” 청풍명사는 찢어진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상처를 내보였다. 조금 전까지 벌겋게 부어올랐던 살은 이미 부기가 빠지고 다만 붉은 반점만 남아 있었다. 그는 속으로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다. “처음 중독되었을 때 매우 심하게 부어올랐었는데 치료도 하지 않고 이렇게 부기가 빠졌구려. 그리고 또한 반신이 마비되었던 것이 이제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된 것 같소.” 지신도 소대천은 조용히 웃었다. “청룡형, 부기가 빠졌다고 좋아질 현상은 아닙니다.” 청풍명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소대천은 다시 계속했다. “사실 그것은 독기가 혈관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칠일 후에는 독이 발작하여 전신의 살이 썩어서 죽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 빨리 서둘러 치료해야 하겠소.” 소대천은 왼손을 내밀어 청풍명사의 오른쪽 팔의 관절을 꼭 잡았다.그리고 오른손으로 은침을 꺼내 청풍명사의 혈도와 근맥을 계속 찔렀다. 그는 청풍명사의 눈앞에서 은침을 흔들어 보이고 말했다. “이 은침을 보시오. 벌써 시꺼멓게 변하지 않았소?” 청풍명사는 까맣게 변색만 은침을 보고 속으로 한탄했다. ‘그의 독이 얼마나 지독하면 저렇게 되었을까? 아! 이 자의 마음이 나보다 얼마나 더 악랄한가 알 수 있다.그러니 장차 어떠한 일을 꾸며서 그는 나를 괴롭힐 것인가?’ 지신도 소대천은 또 다른 은침을 꺼냈다. 그리고 그 끝으로 붉은 반점을 찌르자 즉시 시꺼멓게 죽은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는 상처에서 마냥 솟아나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팔과 손이 자줏빛 피로 물들어 버렸다. 피에서 나는 비린내가 코를 찌르듯 풍겨왔다. 그는 내심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한 차례 느끼며 몹시 놀랐다. 지신도 소대천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청룡형은 정말 운이 좋았소. 한 시간만 더 지났더라면 독이 전신의 혈관에 퍼져 도저히 구할 길이 없었을 것이오.” 청풍명사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여우처럼 내게 자비를 베푸는 척 하지만 나는 안다. 온 천하를 통 털어서 산송장을 훈련시킬 수 있고 또한 흑백사를 무형(無形)의 독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너 소대천 말고 누가 또 있단 말이냐? 이 악독한 놈아! 언젠가 너도 내 계략에 넘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겉으로 오히려 미소를 띠고 상냥하게 말했다. “소형! 정말 감사하오.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으나 내게 할 말이 있다니, 무엇이든지 분부만 내려주시오.” 지신도 소대천은 천천히 은침을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조그만 흰 병과 분홍색 알약을 두 개 꺼내들었다. 그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해독약이오. 제가 이것을 지금 청룡형께 드리겠으니 지금 한 알 잡수시고 나머지는 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복용하시오. 그러면 몸 안에 남았던 독기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오.” 청풍명사는 이내 별다른 의심 없이 알약을 받아서 한 알을 먹었다. 그러자 곧 속이 시원하고 정신이 매우 상쾌해졌다. 지신도 소대천은 그가 약을 삼키는 것을 보자 얼굴에 한 가닥 미소를 띠었다. “저는 평소에 청룡형과 무관한 사이인데 오늘 저녁 상처를 고쳐 주었다고 해서 대단히 큰일이라고 생각지 않소.그러니 이 이야기는 하든지 안하든지 별로 큰 관계가 없으니까… 역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오.” 청풍명사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소대천이 또 무슨 농간을 부리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소형, 저는 원래부터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남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바이오.” 지신도 소대천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지금 여기 쓰러져 있는 두 남녀는 나에게 풀 수 없는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오. 그러니 이들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과 모습을 짓이겨 놓아 주시오.” 그는 이와 같이 잔인하고 악독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청풍명사는 그 말을 듣자 그가 너무나 음흉하고 독랄하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고 속으로 몸서리쳤다. 지신도 소대천은 그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넌지시 말했다. “저는 평소부터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청룡형이 차마 그 짓을 할 수 없다면 그만두시오. 그러나 장차 어떠한 결과가 생길 일인가 깊이 고려하시기 바라오. 그럼 이만 가겠소이다.”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소대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졸지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소대천을 바라보았다. 소대천은 이미 일 장 가량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소형, 잔금섭혼신편을 가져가지 않소?” 지신도 소대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 물건은 제 것이 아닌데 왜 제가 가져갑니까?”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청풍명사는 소대천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신도 소대천은 어째서 잔금섭혼신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리고 갔을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방금 받아먹은 환약이 혹시 일종의 독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벌컥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나머지 한 알은 먹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그 약이 반드시 독약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청풍명사에게 또 다시 다른 상상이 떠올랐다. 그러자 소대천에게 가던 의심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하기를 소대천이 채찍을 가져가지 않은 원인은 지금 강호 무림에서 일부 사람들이 채찍을 소대호가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 단정했다. 그리고 또한 그 일부 사람들이 소대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지령보의 소대천과 소대풍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목표로 삼고 찾을 것이다. 소대천의 무공과 독술이 제아무리 당세에 필적할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강호 무림의 고수 전체와 대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가 지금 채찍을 가져가지 않는 것은 반드시 이 점을 계산에 넣은 이해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채찍을 주고 간 것은 강호의 무림 인물들로 하여금 청풍명사 뒤를 추격하게 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내 무공의 조예로 봐서 황천선구 한 사람이면 충분히 나를 사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터인데… 아니 내가 죽는다면 잔금섭혼신편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어지게 될 게 아닌가.… …’ 따지고 보면 소대천의 음흉하고 악독한 마음은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그 자는 이보다 더 잔인한 수단도 능히 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청풍명사는 또 다른 수수께끼가 번개같이 뇌리를 스쳤다. ‘지신도 소대천은 뭣 때문에 자기가 직접 흑백사와 비류신 그리고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황천선구와 청색혈마가 복수를 할까봐 그것이 두려워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나 그것이 원인의 전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평소에 청풍명사는 자기가 남달리 뛰어나다 여겼으며, 또한 간교하고 음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청풍명사로서도 소대천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런 의심을 씻어버리자면 아까 나타났던 키 큰 괴인은 지신도 소대천이 아니라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괴인은 분명 소대천이었다. 만약 소대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일파의 사람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면 소대천의 무공은 실로 놀라 우리만큼 고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좀 전에 나타났던 키 큰 괴인의 무공 조예는 소대호와 선우휘 그리고 황천선구, 청색혈마 등에게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성난 파도가 소용돌이치듯 들끓고 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청풍명사는 비류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내 양심을 저버리고 소대천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한단 말인가?… 저 두 남녀를 꼭 죽여야 된단 말이냐?” 청풍명사는 물끄러미 땅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저들을 죽인다면 나와 어떠한 이해관계가 있을 것인가?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청풍명사는 오른손에 잔금섭혼신편을 꽉 쥐고 비류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이와 같은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들을 죽여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인 정리 상으로나 또는 강호 무림의 도의상으로 보아도 죽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과거에는 그다지 교활하고 흉악하지 않았었다고 생각했다. 근 삼사 년 이래로 자기의 성격이 이처럼 거칠어진 것은 순전히 의제(義弟)의 횡사로 인한 충격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의제의 복수를 위해서 자기의 무공만으로는 보복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단정했다. 그래서 기지와 악랄한 수단을 써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청풍명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잔금섭혼신편을 비류신의 곁에 조용히 내려놓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뒤에서 백옥 같은 손을 뻗쳐 채찍을 낚아채려고 했다. 흠칫 놀란 청풍명사는 잽싸게 왼발로 채찍을 일 장 가량 밖으로 걷어차 버렸다. 날아간 채찍은 탁 소리를 내며 딱딱한 땅 위에 거꾸로 꽂혔다. 청풍명사가 지체 없이 몸을 날려 번개같이 덮쳐가서 땅 위에 꽂힌 채찍을 잡으려는 순간-- 한 가닥 싸늘한 바람이 곧바로 그에게 밀어닥쳤다. 청풍명사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풍파를 수없이 겪어온 인물이었다. 그는 즉시 한 가닥 냉풍이 대단히 무서운 것임을 알고 급히 석자 밖으로 몸을 날려 무서운 암격을 피했다. 그러자 이때 흰 그림자가 번개처럼 그의 앞을 스쳤다. 청풍명사가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자세히 보니 한 날씬한 여자가 몸을 날려 곧바로 채찍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풍명사는 이내 호통을 쳤다. “썩 물러나라!” 동시에 쌍장을 맹렬히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고 요동치듯 풍랑을 밀어젖히며 부상당한 오른손으로 채찍의 자루를 꽉 잡고 가볍게 뽑아 들었다. 그러자 채찍을 향해 뛰어가던 백의녀는 그의 장력에 부딪혀 기세가 자연히 둔화되었다. 그녀는 채찍이 청풍명사의 손에 들어간 것을 보고 몹시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비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한 번 흔들고 또 다시 쌍장을 들어 청풍명사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가했다. 쌍방의 기세가 너무나 놀랍도록 빨랐기 때문에 청풍명사는 상대가 누군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흰 옷을 입은 여자라는 것밖에는… … 그는 상대방의 장세 속에 교묘한 경력이 잠재해 있는 것을 감지했다. 이에 울컥 화가 치민 청풍명사는 손에 든 채찍을 번쩍 들었다. 금빛 뱀이 꿈틀대듯 채찍은 날카로운 소리를 발하며 상대방을 후려쳤다. 그러자 이때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살 언니, 그 채찍은 몹시 예리해요! 그러니 함부로 무리해서 받아서는 안돼요!” 백의녀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덤비려던 몸을 급히 멈추었다. 청풍명사는 채찍을 한 번 휘두름으로서 공격해 온 상대방을 격퇴시킨 후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왼쪽으로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날씬한 여자 두 명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바로 흑룡강 일파의 복면 남의소녀와 매혹적인 백미소녀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자기와 상대하고 있는 눈앞의 여자는 몹시 교만하고 싸늘하기가 얼음장 같은 백살소녀였다. 그는 내심 크게 놀랐다. ‘아차! 귀찮게 됐구나. 흑룡강 일파의 세 여자를 만났으니 채찍을 보관하기 어렵게 됐군. 일은 점점 복잡하게 되어가는 구나… …’ 백살소녀는 사람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드는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음장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잔금섭혼신편은 본래 우리 흑룡강 파의 물건이오. 그러니 그것을 빨리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어도 아마 편히 묻힐 곳조차 없게 될 거요.”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감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 그런 무리한 말은 하지 마시오. 채찍은 여기 있는 비류신의 물건이지 당신들 흑룡강 파의 물건은 아니오.” 백살소녀는 싸늘하게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그 잔금섭혼신편을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알기나 해?”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싸늘한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왜 모르겠소? 이 채찍은 비록 흑룡강 일파의 기인이신 애원석(哀怨惜) 한원한(恨怨恨)이 만든 것이지만 그 노 선배는 중원 무림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채찍을 중원에 유전(遺轉)하신 것이오.” 청풍명사의 말을 듣고 백살소녀는 냉랭하게 받았다. “별말씀! 유전이 아니라 유실(遺失)된 것으로 그 어른께서는 이것을 넘겨줄 제자가 근본적으로 없었던 것이지.” 청풍명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 채찍은 삼백 년을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들 손을 거쳐 오늘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 후세의 사람들은 채찍의 근본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당연하오. 그래서 채찍이 누구의 수중에 들어가든 바로 그 사람의 물건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이때 남의소녀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땅에 쓰러져 있는 비류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사람은 당신이 살해한 것이 아니에요?” 청풍명사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아가씨!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함부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요!” 남의소녀는 마치 꾀꼬리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저 물어봤을 따름이에요. 사실 당신의 무공으로는 아마 저 사람을 상대하지 못할 테니까.” 청풍명사는 이 말을 듣고 대뜸 안색이 변했다. 그는 남의소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아가씨는 이미 진상을 다 알고 하는 말이 아니오?” 이때 옆에 있던 백미소녀가 갑자기 청풍명사를 향해 방긋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리 소저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시죠?” 청풍명사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웃는 모습을 보고 마치 넋을 잃은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때 틈을 노린 듯 백의소녀는 몸을 약간 흔들더니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왼손을 가볍게 내젖고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쫙 벌리더니 잽싸게 청풍명사의 오른팔을 움켜잡으려 들었다. 백미소녀의 미모에 홀려 있던 청풍명사는 싸늘한 검풍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오른팔은 백살소녀의 백옥 같은 손에 맞은 뒤였다. 동시에 그의 수중에 쥐어져 있던 채찍은 맹렬한 진동으로 인해 손에서 벗어나 튕겨져 나갔다. 퍽! 하고 채찍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먼 채찍은 쓰러져 있는 흑백사의 얼굴에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채찍은 흑백사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세 치 가량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급습을 받은 청풍명사는 그녀의 공격에 맞아 채찍을 떨어뜨리는 찰나 재빨리 왼손에 공력을 모았다. 그리고 번개같이 후려치며 달려드는 백살소녀의 공세를 똑바로 받아넘겼다. 그 순간-- 청풍명사는 신음소리를 발하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비틀비틀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는 게 아닌가. 한편 백살소녀 역시 얼굴빛이 약간 변한 채 어깨를 흔들며 석 자 가량 물러섰다. 이것을 보고 있던 백미소녀는 은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한바탕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 채찍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그 사람이 바로 채찍의 임자라고 했지요? 그러니 채찍은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되었군요.” 그녀의 매혹적인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날씬한 몸매를 흔들며 흑백사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바로 이때, 돌연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그 채찍은 내 것이오!” 소리 없이 죽은 듯 쓰러져 있던 흑백사가 손을 쑥 뻗치더니 잽싸게 채찍을 주워들었다. 백미소녀는 천만 뜻밖에도 힘들이지 않고 얻었다고 생각했던 잔금섭혼신편을 제 삼자에게 뺏길 줄 꿈에도 몰랐던 터라 화가 발끈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흔들더니 재빨리 흑백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신속하게 오른손을 내뻗어 손끝으로 흑백사의 오른팔을 낚아채려고 했다. 흑백사는 보통 사람같이 만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왼손을 들어 번개같이 백미소녀의 왼팔 맥문을 눌렀다. 그러자 백미소녀는 갑자기 발을 들어 흑백사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흑백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도 왼발을 들어 비호같이 덮쳐들며 백미소녀를 걷어찼다. “앗!” 두 여자는 동시에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살짝 뒤로 물러섰다. 잔금섭혼신편은 여전히 흑백사의 손에 꼭 쥐어진 채였다. 순식간에 흑백사와 백의소녀는 빈손으로 몇 초를 겨룬 것이다. 이 몇 초의 겨룸으로 그녀들의 무공은 모두 고강하고 초식이 괴이하며 또한 신속하고 악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쌍방은 일시에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했다. 백미소녀는 물론 흑백사의 손에 있는 잔금섭혼신편이 매우 두려웠던 것이다. 흑백사는 왼쪽 발끝으로 땅에 떨어져 있는 자기의 장검을 끌어올려 왼손에 쥐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채찍을 단단히 쥐고 싸늘한 눈빛으로 차례차례 세 여자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흑룡강의 세 아가씨, 그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군!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당신네들은 알아야 해요.” 남의소녀는 아름다운 자태로 바람에 날리듯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리고 흑백사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신의 모습은 몹시 흉악하군요!” 그녀의 말소리는 꾀꼬리 울음같이 아름다웠으나 말 속에 담은 뜻은 칼날같이 매서웠다. 흑백사는 그녀를 한 번 훑어보더니 경멸하듯 냉소를 흘렸다. “이 아가씨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강호에서 쟁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지옥혈녀 흑백사이지. 흥! 당신이 알아서 어찌할 셈이오?” 남의소녀는 흑백사의 말을 깍듯이 받았다. “아, 그래요? 실례했어요! 이제 보니 중원의 낭자군(娘子軍)이었군요.” 흑백사가 발끈 성을 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낭자군이라면 또 어쩔 셈이냐? 너희들이 정 그렇게 무례하게 나온다면 모조리 죽여서 너희들의 뼈를 중원에 묻어주마!” 남의소녀는 냉랭히 비웃으며 야유를 보냈다. “중원의 여자들은 모두 저렇게 흉악하고 얼굴도 저처럼 잘 생겼구먼!” 흑백사는 눈썹을 거꾸로 세우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죽고 싶어 까불어 대느냐?” 그녀는 몸을 슬쩍 흔들며 다가서더니 장검을 홱 치켜들어 옆으로 내려쳤다. 찌르는 것같이 후려치는 기세로 눈 깜작할 사이에 남의소녀의 가슴을 맹렬히 찍었다. 관전하던 백살소녀가 저쪽에서 소리쳤다. “안 돼! 손을 멈춰! 우리 소저를 살해하면 안 돼!” 남의소녀는 바로 눈앞에서 검이 찔러오는 데도 추호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태연한 자세로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본 흑백사는 속으로 슬그머니 놀랐다. ‘혹 무슨 악랄한 독기라도 갖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렇게 생각이 들자 찍으려던 장검을 재빨리 거두었다. 이때 백살소녀는 남의소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날쌔게 주먹을 들어 흑백사를 공격해 왔다. 흑백사는 별안간 한 가닥의 거대한 장력이 불어 닥치자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남의소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백살소녀를 향해서 말했다. “백살 언니, 저 여자는 나를 살해하지 못할 테니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한편 청풍명사는 격동하는 혈기를 조절하고 나서 비류신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비류신의 몸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빳빳해진 비류신의 입가에 피 흔적이 있었고, 입은 꼭 다문 창백한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과 흡사 했다. 그는 비류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젊고 늠름한 사람이 이렇게 요절을 하다니… …” 흑백사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비류신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는… 그는… 죽었나요?” 청풍명사가 흑백사의 놀란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처량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그는 이미 죽었소!” 흑백사와 비류신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흑백사는 청풍명사의 말을 듣자 마치 청천에서 벼락이 떨어진 듯 흠칫 놀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치 비류신의 죽음과 그녀와 어떤 막대한 관계가 있는 듯. 남의소녀는 백살과 백미 두 소녀의 곁에 천천히 다가오더니 애교가 있게 웃으며 물었다. “두 분 언니, 비류신이란 사람이 저 여자에게 어떻게 되는 사람이기에 저렇게 상심을 할까?” 지옥혈녀 흑백사는 그녀의 말에 대뜸 날카로운 목소리로 응했다. “내 친구란 말이야! 너희들이 무슨 간섭이지?” 남의소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참동안 웃어대더니 다시 말했다. “두 분 언니, 저 여자는 자기 입으로 비류신과 친구라고 하네요. 그런데 어째서 친구지간에 그의 채찍을 뺏으려고 할까, 정말 우습지 않아요?” 남의소녀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내 생각에는 말이에요. 옛 부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고로 다정한 사람은 헛된 한만 남긴다고 하였는데 정말 어리석은 여인과 잘 부합되는 얘기라고 생각되는 군요.” 그녀의 말은 흑백사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녀는 몹시 화가 치민 듯 창백해진 얼굴로 살기등등하게 남의소녀를 노려보았다. 남의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비류신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나직이 탄식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중원 무림에도 무상지음부골공을 연마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군요.” 흑백사는 그 말을 듣자 전개하려던 장세를 즉시 멈추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요? 그럼 비류신이 무상지음부골공에 당했단 말이오?” 남의소녀는 갑자기 쌀쌀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그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나요?” 흑백사는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비록 그런 무공을 알지 못했으나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무상지음부골공은 몹시 지독해서 빙선일월장과 함께 이대 무공의 절초라고들 했다. 남의소녀는 또 다시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극독으로 내부에 침투하여 한 시간만 지나면 독이 양 미간에 나타난단 말이야. 그것이 나타나면 도저히 구할 길이 없게 되지. 참, 애석도 해라… 그렇듯 훌륭한 인재가 이제 영원히 사라지겠군!” 지옥혈녀 흑백사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듯 얼굴을 들고 남의소녀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이 독상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요?” 남의소녀는 비류신에게서 눈을 돌리고 흑백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싸늘하게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 거지요?” 흑백사는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물론 당신에게 묻는 거지요.” 남의소녀는 코웃음을 쳤다. “이 세상에서 나 이외에 아무도 무상지음부골공과 빙선일월장의 두 가지 음공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남의소녀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 비류신에게 다시 눈길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 원수지간이니 고쳐줄 수 없지요. 그러니 그는 죽는 길밖에 없을 거예요.” 지옥혈녀 흑백사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몹시 초초했다. 성질이 매우 강한 그녀로서는 남에게 애걸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다만 속으로 초조함을 금치 못하고 안절부절 못할 뿐이었다. 시간은 벌써 오경이 가까워져 왔다. 바람은 차고 아침 이슬은 촉촉하게 내려 있었다. 삭막한 묘지--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