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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왕룽은 지금것 긴 생애를 살아오며 이곳저곳의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젊었을 때 남쪽 도시에서 겨울을 보냈던 때 말고는 직접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었다. 아이 때부터 올해는 서쪽에 전쟁이 있다든가 전쟁이 동쪽이다, 북동쪽이라든가 하는 소문은 늘 듣고 있었지만 그때보다 더 몸 가까이 겪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전젱이라는 것은 하늘이나 땅 혹은 물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왜 그런 것이 발생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자고 하는 말도 흔히 들었다. 그런 말은 먹고 살길이 없어서 빌어 먹는 일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그의 사촌처럼 집안에서 살 재미가 없으니까 병정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원인이야 어떻게 됐든 전쟁은 항상 알 수 없는 먼곳에서만 일어났다. 그런 전쟁이 하늘에서 부는 때 없는 바람처럼 갑자기 그의 가까이에서 일어났다. 왕룽이 전쟁 이야기를 들은 것은 상점에서 점심을 먹으로 돌아온 둘째로부터였다. "곡가가 갑자기 뛰었어요. 남쪽의 전쟁이 차츰 이리로 가까이 올라오는 모양이에요. 군대가 가까이 올수록 곡가가 올라가니까 당분간은 곡물을 팔지 말아야겠어요. 조금만 있으면 많이 오를 테니까요......" 왕룽은 밥을 먹으면서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음, 그래. 괴이한 일이로구나. 난 평생에 말만 들었지 한 번도 전쟁 구경을 해 본 적이 없다." 왕룽은 지난날 남방에서 전쟁에 붙들려 갈 뻔했던 일을 회상했다. 지금의 그는 늙어서 붙들려 갈 염려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또 그는 부자이기도 하다. 부자는 무슨 일에도 겁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전쟁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 관심 없이 도리어 호기심이 일어날 뿐이다. "곡식 처리는 네 마음대로 하렴. 네게 맡겨 둔 거니......" 그 후 왕룽은 마음 내키는 대로 손자와 놀고만 지냈다. 눕다가 먹다가 담배를 피우는 등 때로는 뜰의 양지쪽에서 놀고 있는 천치를 보기도 하며 평화롭게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둠도 걷힌 어느 맑은 아침, 서북방에서 갑자기 벌떼처럼 수많은 군대가 몰려왔다. 왕룽의 손자가 머슴과 함께 문 앞에 나서서 거리 구경을 하다가 회색 군복을 입은 긴 군대 행렬이 들이닥치자 황급히 달려와서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것 봐." 그는 손자와 함께 문밖으로 나갔다. 군대는 거리가 비좁을 만큼 들끓었다. 우렁찬 군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왕룽은 한동안 얼떨떨했다. 자세히 보니 모두가 묘한 무기 끝에 칼을 달아 가지고 메고 있었다. 병정들은 하나같이 야수처럼 무서운 표정들이었다. 어떤 군인은 아직 어린애 같으면서도 역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룽은 황급히 손자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얼른 들어가서 문을 걸자. 저 사람들을 보면 못써, 아가야." 왕룽이 채 돌아서기도 전에 그 많은 군대 가운데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사촌 형님이 아닌가." 이 소리를 듣고 있던 왕룽이 그쪽을 보니 그것은 삼촌의 아들이었다. 그도 똑같은 먼지투성이의 때묻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다른 누구보다도 야만스럽고 흉측해 보였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자, 전우들 여기서 묵게. 이 집은 부자고 내 친척이야." 왕룽은 그만 질겁을 하고 한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물밀 듯이 그의 집안으로 쏟아졌다. 그는 그들 속에 휩싸여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군인들이 넘치는 봇물처럼 앞 뜰의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밀려 들었다. 어떤 자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기도 하고 어떤 자는 연못의 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화려하게 조각된 탁자 위에다 함부로 총을 내던지기도 하고 아무 곳에나 침을 칵칵 내뱉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이 모습에 기가 질려 정신이 나간 왕룽은 손자를 끌고 장남의 방으로 들어갔다. 장남은 책을 읽다가 그의 아버지가 들어오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남도 허겁지겁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어쩔 줄 몰랐다. 그저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에 있는 아버지에게 신음하듯이 말했다. "다들 총을 가졌군." 그는 은근한 태도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오셨습니다." 오촌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웃었다. "병사들을 데리고 왔지." "아저씨 친구분이시라면 반가운 일이지요. 곧 식사 준비를 하지요. 앞길이 바쁘실 텐데......" 오촌은 여전히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음, 그렇게 바삐 서두를 건 없어. 우리들은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여기서 머무르게 되니까 대엿새가 될지 한 달이 될지, 혹 2년이 될지 모르지만 한동안 신세를 져야겠구먼." 이 말에 왕룽 부자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총칼이 번쩍이는 것이다. 싫은 얼굴을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장남은 억지로 웃음을 띠어 가며 간신히 야릇한 표정을 지어서 말했다. "좋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세요." 장남은 접대 준비를 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살며시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며 부리나케 안채로 들어와 빗장을 굳게 닫았다. 그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어쩔 줄을 몰라 한동안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둘째가 쫓아와서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자 넘어질 듯 황급히 들어선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집집마다 가난뱅이 집까지도 군인이 꽉 차 있어요. 거절했다가는 큰일나겠어요. 저는 그 말을 하러 돌아왔어요. 왜냐하면 오늘 우리 상점 점원으로 나도 잘 아는 사람이 --- 매일 책상을 맞대고 있는 그 사람이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가 보니 아내가 병으로 누워 있는 그 방에까지 군인이 들이 닥쳐서 몇 마디 퍼부었더니 그놈들은 마치 산적꽂이를 꿰듯 그 사람을 칼로 찔러 버렸대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쿡 찔러 죽였대요. 등까지 꿰뚫렸다는군요. 놈들이 달라는 것은 뭐든지 주는 것이 좋겠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전쟁이 딴 곳으로 옮겨지기를 빌 수밖에 없어요." 세 사람은 침통한 얼굴로 서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이 혈기 왕성하고 굶주린 사나운 병정들로부터 어떻게 여자들을 보호할 것이냐가 근심스러웠다. 장남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 예쁘고 현숙한 아내를 염려했다. "여자들은 제일 뒷방으로 옮겨 있도록 해서 밤낮 지키기로 하고 앞 문은 꼭 닫아 두고 뒷문으로 언제나 달아날 수 있도록 해야겠어."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지금까지 렌화가 뚜챈과 하녀만 데리고 살고 있던 안채에 하녀와 아이들을 전부 몰아넣고 불편이나 혼잡을 참게 했다. 그리고 장남은 낮이나 밤이나 이들을 지켰다. 둘째도 형편 대로 집에 돌아와서 아녀자들을 지켰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왕룽의 사촌 동생은 친척이기 때문에 출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당히 두들겨 열게 하곤 번쩍거리는 칼을 뽑아 들고는 아무 데나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장남은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번쩍거리는 칼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장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 오촌은 여자들을 하나하나 둘러 보고 비평을 했다. 장남의 아내를 보곤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침하고 기품 있는 여자로구나. 성안의 여자로군. 연꽃 봉오리같이 작은 발을 갖고 있군." 그리고 둘째의 아내에게 하는 말은 이러했다. "이 색시는 시골 태생의 소담한 홍당무로군. 억센 붉은 고기야." 둘째 아들의 아내는 뼈대가 굵고 몸이 비둔했다. 그러나 혈색이 좋은 얼굴이어서 결코 밉상은 아니었다. 장남의 아내는 얼굴이 마주치기만 하면 질겁을 하고 소매로 얼굴을 감추지만 둘째의 아내는 그렇지 않고 활발하게 웃으면서 말대꾸를 한다. "뜨거운 홍당무나 붉은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걸요." 오촌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음, 나도 좋아하지."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는 시늉을 했다. 장남은 말을 건네서는 안되는 남녀간의 이 도리에 어긋난 수작을 보는 것이 수치스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자기보다 훨씬 지체 있게 자라온 아내 앞에서 오촌과 제수의 추태를 보이는 것이 역겨워 아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오촌은 그런 눈치를 알자 심술궂게 말했다. "그렇지. 나는 저런 쌀쌀맞고 멋도 없는 생선보다는 언제나 붉은 고기가 먹고 싶어." 이 말을 듣자 장남의 아내는 새침하게 일어나 구석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촌은 조심성 없이 웃어 젖히며 이번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렌화에게 말을 걸었다. "성안에서 자란 여자는 참 융통성이 없어요. 그렇잖습니까, 마님?" 그는 물끄러미 렌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로 마님이십니다. 이렇게 고깃덩이가 된 부인을 보니 종형이 부자라는 것이 실감나는 군요. 얼마나 먹었으면 이렇게 커다란 고깃덩이가 될까. 부잣집 마님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당당한 풍채를 지닐 수 없을 테니까요." 렌화는 마님이라고 불린 것이 매우 기뻤다. 이 호칭은 큰 부잣집의 큰마누라에게만 쓰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찐 목구멍을 울리면서 웃었다. 담뱃대의 재를 털어서 종에게 새로이 담배를 재우게 하곤 뚜챈에게 말했다. "이 실없는 친구가 농담을 하는군." 그리고 사촌 동생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렌화는 그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매혹할 아무런 힘도 없었으나 그래도 오촌은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나이 많아도 여전한데요." 그는 또 한번 소리내어 웃었다. 그동안 왕룽의 장남은 시무룩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이윽고 왕룽의 사촌은 자기 어머니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왕룽은 그를 숙모의 방으로 안내했다. 숙모는 아들이 들어와도 눈을 뜨지 않을 정도로 침대 위에서 잠만 자고 있었다. 아들은 그의 어머니 침대 머리를 총부리로 쿵쿵 울렸다. 겨우 눈을 뜬 그의 어머니는 꿈결인 양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들은 참을 수 없는 듯이 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제가 왔는데 언제까지 잠만 잡니까?"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아들을 보고는 이상한 듯이 말했다. "아들이라니...... 이것이 아들......" 그녀는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양 아편대를 아들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그밖엔 아들을 반길 방법이 없는 것으로 생각함인지 몸종에게 천천히 말했다. "아편을 넣어 드려라." 그러나 아들은 그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더니 맥없이 말했다. "아니, 난 싫소." 왕룽은 침대 곁에 서 있다가 사촌이 "왜 우리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나무라지나 않을까 해서 겁먹은 목소리로, "너무 아편이 심하신데...... 날마다 은전이 한 움큼씩이나 들지. 그러나 나이 많으신 분에게 거역할 수도 없고, 자꾸만 청하시니......" 왕룽은 일부러 탄식을 하곤 힐끗 사촌의 눈치를 살폈다. 사촌은 아무 대꾸도 없이 너무나 달라진 처참한 어머니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어머니가 다시 눕고 잠이 들어 버리자 일어서서 총을 지팡이처럼 흔들면서 나와 버렸다. 왕룽의 가족들이 집안에 아무렇게나 진을 치고 있는 그 많은 병정들보다도 가장 미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이 사촌 동생이었다. 물론 다른 병정들도 난폭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원수의 가지들을 함부로 자르기도 하고 화초를 마음대로 꺾으며 그 흉한 신발로 곱게 조각한 의자에 흠을 내기도 하고 금붕어를 기르는 곳에 더러운 것을 자꾸만 넣어서 죽은 붕어가 물에 떠다녀 썩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약과였다. 왕룽의 사촌 동생이 가장 큰 골칫덩어리였다. 그는 마음대로 안채를 드나들면서 계집종들을 못살게 굴었다. 왕룽 부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눈이 멍하게 되었으며 서로 어이가 없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보다 못한 뚜챈이 의견을 말했다. "별 도리 없어요. 그 사람이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종을 한 사람 안겨 주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지 않고는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이제 이 이상은 귀찮은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왕룽은 뚜챈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게 좋겠군." 그는 뚜챈을 사촌 동생에게 보내서 그가 본 계집종 중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가를 물어 오게 했다. 뚜챈이 돌아와서 대답했다. "마님 침대 곁에서 시중드는 얼굴이 희고 조그만 계집애가 좋대요." 사촌이 선택한 종은 리화(梨花)라고 하는, 흉년이 들던 해에 작고 가련한 모습으로 거의 죽어가는 것을 렌화의 간절한 청으로 왕룽이 산 아이였다. 가족들이 모두 불쌍하다고 가엾게 여기고 뚜챈의 하는 일을 거들게 하고 렌화의 담배 심부름이나 차 심부름 등 힘이 안 드는 일만 시켜왔던 것이다. 뚜챈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침 온 가족이 안채에 모여 있을 때였다. 리화는 렌화의 차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 그만 주전자를 떨어뜨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온 방바닥에 찻물이 흥건했으나 리화는 정신 없이 렌화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면서 애원했다. "마님, 살려 주세요, 저는 그 사람이 무서워요. 나는 죽어도......" 렌화는 못마땅한 듯이 성을 발끈 내며 소리질렀다. "그도 남자다. 남자는 다 마찬가진데 뭘 그래." 그리고 뚜챈을 돌아다보고 말했다. "이 애를 그 사람에게 데려다 줘라." 리화는 양손을 꽉 쥐고 죽을 듯이, 갈대처럼 호리호리한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울다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호소하듯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아내 되는 렌화에게 거역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내들도 남편들이 아무 말도 없었으므로 따지고 들어서 이러니 저러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셋째도 팔짱을 끼고 그 검은 눈썹을 한일자로 찡그리곤 역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이들 가족이나 종들은 모두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방안에는 리화의 떨리는 울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왕룽은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계집애를 바라보았다. 렌화의 마음을 거슬르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계집애도 불쌍했다. 그는 본래 마음씨가 여린지라 이 사실을 안 리화는 그만 왕룽의 앞에 엎드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가엾은 모습을 보자니 그 사촌 동생의 그 억센 몸집이라든가 벌써 중년이 된 그의 나이가 떠올랐다. 그는 뚜챈을 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글쎄, 이 어린 것을 억지로 보낼 필요는 없는데......" 왕룽의 말은 지극히 부드러웠지만 렌화는 팩 쏘았다. "시키는 대로 해라. 여자란 누구나 한 번씩 있는 일을 가지고 왜 그래. 왜 울고불고 이 야단이냐, 야단이......" 그러나 왕룽은 인정이 많고 인자했다. 그는 렌화에게 다시 말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다른 종을 사 줘도 좋고 뭐든지 원하는 것을 사 주겠어. 다만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 전부터 괘종 시계와 루비 반지가 갖고 싶었던 렌화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왕룽은 뚜챈에게 말했다. "그 녀석한테 가서 그 애는 나쁜 병을 갖고 있다고 해라. 그래도 좋다면 보내겠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서우면 튼튼한 계집을 주겠다고 말해 보아라." 왕룽은 곁에 있는 계집종들을 둘러보았다. 누구나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면서도 킥킥 웃는다. 그중에 나이 스물이 넘은 듯한 계집 하나가 얼굴을 붉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라도 좋다면...... 그 사람보다 훨씬 우락부락한 사람도 있으니까......" 왕룽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 네가 가 줘." 뚜챈은 재빨리 그 계집에게 일러 주었다. "내 뒤에 꼭 붙어 오너라. 어쨌든 그 사람은 여자면 우선 해치우고 보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그러나 울음을 그친 리화는 아직도 왕룽의 발목에 붙어 앉아서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왕룽은 조용히 리화를 끌어 일으켰다. 리화는 부스스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인자한 주인 앞에 섰다. 왕룽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타원형으로 예쁘고 불그스레한 입술을 가진 귀여운 얼굴인 것을 발견했다. 그는 친절하게 말했다. "마님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2,3 일 동안 곁에 가지 말아라. 그리고 그 녀석의 눈에 안뜨이도록 숨어 있어. 언제 그 녀석이 들어와 너를 달라고 할지 모르니까......" 리화는 정열이 가득 찬 눈으로 왕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고요히 물러갔다. 사촌 동생은 달반 가량 이곳에서 지내며 생각이 날 때마다 시골 여종과 함께 지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배고 그 말을 온 집안에 퍼뜨리며 다녔다. 그 때 별안간 전쟁이 시작되어 병사들은 겨가 바람에 흩날리듯 갑자기 떠났다. 뒤에 남은 것은 오물과 그들이 저지른 파괴의 흔적 뿐이었다. 사촌 동생은 허리에 칼을 차고 총을 어깨에 메고 집안 사람들 앞에 서서 빈정대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두번 다시 돌아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나의 후손을, 어머니의 손자를 남기고 간다. 한 달이나 두 달 묵은 곳에다 아이를 남기고 간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것이 군인 생활의 장점이지. 뿌린 씨가 뒤에서 싹이 트면 남이 길러 주는 거야!" 그리고 모두에게 코웃음을 안겨 주고 동료들과 함께 떠나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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