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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30 章 핏 속에 핀 友情
풍뢰곡(風雷谷)!
이름 그대로 사시사철 항상 뇌성번개가 몰아치는 깊은 절곡이다.
또한 황금만 주면 백련대황교주의 목이라도 자르겠다는 공포의 살인집단 암흑생사교가 위치
한 절곡이기도 했다.
암흑생사교!
살인무학을 극성으로 연성한 암흑등혈옥과 인간살인병기들이 강호상에 세운 임시방파로 지
금 이곳 풍뢰곡은 처절한 대혈전에 휩싸여 있었다.
치렁치렁한 백포에 백색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백여 명의 유령같은 인물들이 칠 인을 포위
한 채 가공할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콰르릉!
이들의 치열한 격전과 굉음 때문에 절곡은 무너질 듯 들썩거렸다.
말 그대로 경천동지의 대격전이었다.
한데 칠 인은 바로 고검만리향 적자혁과 기검하의 두 부인인 십전냉모란 단금봉과 난향대부
인 적설염, 그리고 활로태상천의 사대호법, 바로 그들이었다.
감히 이들 칠 인을 공격하고 있는 이 유령같은 인물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치열한 격전을 지켜보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용포를 걸친 외팔이 청년으로 두 눈 가득 살광을 폭사하며 한켠에 물러서서 상황을 주시하
고 있었다.
그는 맥궁왕자 주천업으로 황궁의 보이지 않는 비밀세력인 즙포사신 백 사십 명을 이끌고
기검하가 사랑하는 처자를 생포하기 위하여 풍뢰곡을 기습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기검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츠츠츳!
시간이 흐를수록 격전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맥궁왕자 주천업은 이를 갈아붙이며 즙포사신들을 독려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생포해라! 특히 저 두 계집을 놓치면 죽음으로써 대신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한 팔을 잃은 원한에 치를 떨고 있었다.
* * *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오늘 따라 하늘은 스산한 느낌을 주며 마치 한바탕 폭우라도 퍼부을 듯이 점점 어둡게 내려
앉았다.
풍뢰곡을 벗어난 산로로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십 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홍포를 걸친 그는 귀엽게 생긴 소동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힘겨운 발걸음이었으나 그의 신형은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동의 모습을 보라!
전신은 피로 목욕을 한 듯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난도질 당한 전신은 온통 피범벅이
된 것이 처참하기 이를데 없는 형상이었다.
군데군데 뼈가 허옇게 드러나 보였고, 복부에는 대접만한 구멍이 뚫려 그 사이로 검붉은 내
장이 흘러나와 지면에 질질 끌리다시피 하였다.
범인(凡人)이라면 골백번은 죽어도 더 죽었을 몸이었으나 소동은 그 만신창이 몸으로 신형
을 움직이는 것이 정녕 인간이 아닌 성 싶었다.
비틀!
소동은 힘에 부치는 듯이 휘청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누군가가 뒤를 추격하는 듯 힐
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득 일그러진 그의 입술 사이로 핏물과 함께 신음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빌어먹을! 나, 아정이 이렇게 우스운 몰골로 죽을 수는 없는데…… 형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기억하는가, 이 아정이라는 이름을?
소동은 바로 암흑등혈옥의 그 사악하던 마동, 아정이었다.
아정은 힘겹게 툴툴 웃었다.
"이놈이 오줌을 싸는 바람에 옷이 젖어…… 움직이기가 더 힘들단 말이야."
자신의 품을 바라보는 아정의 파리한 얼굴에 한 줄기 짙은 애정이 피어올랐다.
그는 소중하게 두 팔로 감싼 채 가슴에 꼭 껴안고 있던 보퉁이를 조심스럽게 추스렸다. 피
로 젖어 새빨갛게 변한 그 보퉁이 속에는 한 아기가 싸여있었다.
하늘의 선동인가, 옥동이련가! 하늘의 맑음과 땅의 선함을 한몸에 지닌 듯한 아기로 천사처
럼 천진한 미소를 지은 채 조그맣고 붉은 입술은 흡사 젖이라도 빠는 듯 오물거려면서 달콤
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기는 바로 기검하와 난향대부인 적설염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핏줄이었다.
아정은 이 아기를 위하여 생명을 도외시한 채 즙포사신들의 천라지망을 뚫고 그 처참한 몰
골로 그들의 추적을 피해 간신히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
아기를 쳐다보는 아정의 눈 속에는 짙은 애정의 빛이 가득했다.
한순간 아기에게 정신을 팔린 탓일까. 아정은 빨래줄처럼 길게 늘어진 자신의 창자에 발이
얽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악! 안돼……."
그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다급한 음성이 토해졌다. 동시에 아정은 엎어지는 몸을 사력
을 다해 뒤집었다.
쿵!
"크윽……."
그는 전신의 상처가 불이 붙은 듯한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이빨 저린 신음을 토
해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크으으…… 하나…… 이놈은…… 다치지 않았어."
아정은 숨쉬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웠으나 어린아기가 다치지 않은 것에 만족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이놈을…… 형에게…… 무사히 전해주고…… 자랑하려고 했는데…… 빌어먹을…… 왜 이리
숨이 가빠오지…… 하학……."
그는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긴 혈육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奇蹟)이었다.
이때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정의 몸을 부축하는 따스한 손이 있었다.
"아정! 정신 차려라. 이 형이 왔다."
손의 임자의 목소리는 걱정 때문인지 가늘게 떨려 있었다.
"혀…… 형아?"
무슨 힘이 작용한 것일까? 아정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며 가물거리는 의식을 잡으려 애를
썼다.
"……."
아정의 두 눈에 간신히 초점이 잡히고, 그 까만 동공에는 수려하게 생긴 한 사나이의 영상
이 맺혔다.
아정이 그토록 애타도록 찾던 형, 기검하였다.
그것은 처절하도록 숭고해 보이는 득의의 미소였다.
"혀…… 형! 나는 형을 좋아했어, 내 자신보다 더……."
"……."
"형! 이놈이 글쎄…… 내 가슴에 오줌을 쌌어. 자식…… 꿀밤을 먹이려고…… 했는데…… 빌
어먹을 놈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정!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기검하의 음성은 들끓는 분노 때문에 굉폭한 울림이 있었다.
"맥궁왕자 주천업과…… 즙포사신이란 놈들이…… 빨리, 풍뢰곡으로…… 형수(兄嫂)님들
이……곤경에……."
순간 기검하의 전신에서 뼈골을 에일 듯한 살광이 폭사되었다.
"주천업! 네놈이…… 끝내……."
"형! 콜록…… 콜록……."
아정은 기검하를 부르다가 갑자기 가래가 끓는지, 고통스럽게 기침을 했다. 그때마다 시뻘건
응혈과 함께 조각난 내장 부스러기들이 그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살광을 폭사하던 기검하의 표정이 안스럽게 변하며 눈가에 차디찬 경련이 치달았다.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라 기검하의 목젖을 틀어막았다.
"아정…… 힘들게 말하지 말고…… 우선 숨을 돌려라."
쉰 듯한 목메인 음성이었다.
"괘…… 괜찮아…… 형……."
웃으려 하는는 엷은 미소가 아정의 입꼬리에 걸린 채 기묘한 일그러짐으로 변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형의 얼굴이…… 흐릿해지지…… 눈물이…… 앞을 가리
나…… 빌어…… 먹…… 을……."
아정의 음성은 점점 나약해져 종내에는 잘 들리지가 않았다.
"……."
기검하의 눈이 순간 어둡게 변했다.
그는 본 것이다. 아정의 맑고 까만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죽음의 순간이 임박했다는 것이 아닌가?
"형…… 이놈에게……내가…… 얼마나…… 사랑…… 했었는지…… 나중에…… 꼬옥……
전…… 전해줘…… 형……."
그것이 끝이었다. 힘들게 달싹이던 아정의 말이 끊겼고, 그의 품 속의 아기를 기검하에게 넘
겨주려던 힘겨운 동작도 멈추었다.
아정의 굳어진 입가에 만족스러운, 책임을 완수한 자만의 행복만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정!"
기검하의 입에서 끝내 절규가 토해졌다.
번쩍!
하늘도 슬퍼함인가! 한 줄기 새파란 섬광이 천지를 꿰뚫었다.
우르릉!
고막을 파열할 듯한 엄청난 뇌성에 대지조차 울부짖고 있었다.
쏴아아!
상처입은 영혼들의 가슴을 적시려 하는가. 어둡게 변한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검하는 식어가는 아정의 몸을 부둥켜 안은 채 하늘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아정! 나의 허락없이는 너는 절대 죽을 수 없다!"
---나의 허락없이는 절대 죽을 수 없다!
"구유수명사 백리박! 명령이다. 이 아이를 살려라."
그의 폭갈은 산천을 떨어 움츠리게 만들었다.
슈악!
기검하의 신형은 풍뢰곡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그림자 무령상문신 한삭의 신형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기검하의 신형을 따르려다 말고 움찔 그 자리에 멈춰서며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소혈주님과 아정을 여기에 두고 가시면 내가 못따라가잖아. 아이고! 혈주님 혼자
서 재미나게 그놈들을 죽이려고…… 미치겠네, 정말 미치겠네!"
무령상문신 한삭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이곳은 풍뢰곡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풍뢰곡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투는 처절의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파파팟!
백여 명이 쏟아내는 병기들의 한광은 하늘마저 꿰뚫을 듯했고, 시뻘건 핏줄기를 뿜어내며
스러진 몇 명의 즙포사신들이 빗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나 고검만리향 적자혁을 위시한 칠 인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군데군데 상처를 입은 듯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기력이 탈진하여 위태위태한 지경
에 빠져있었다.
이제 반각 안에 이들 칠 인은 죽든지 생포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슈우욱!
바로 그때 구원의 신처럼 한 줄기 백광이 날벼락처럼 하늘에서 꽂히듯 그들 사이로 스쳐갔
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열 세 개의 몸뚱이에서 분리된 즙포사신들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
다.
아직도 고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들의 심장은 가느다란 핏줄기를 목이 잘려나간 자리를
통해 뿜어댔다.
투투툭!
머리와 생명이 떠난 동체가 빗물이 괴여있는 지면에 나뒹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모든 상황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이럴 수가……."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이 돌연한 상황에 넋을 잃고 싸움을 멈추었다.
환상일까. 그들의 동공에 들어있는 훤칠한 미장부 한 명이 있었다. 기검하로 애병 대륙지존
병을 뽑아든 채 즙포사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그는 바로 기검하였다.
"으으으……."
그들은 기검하의 시선을 접하는 순간 부지중에 이빨저린 공포의 신음을 토하며 주춤주춤 뒤
로 물러났다.
기검하의 두 눈은 지옥으로 통하는 두 개의 문이었다. 그 문은 활짝 열린 채 즙포사신들에
게 죽음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부르르!
구십여 명이 동시에 치를 떨자 빗방울이 튕기며 뽀얀 우막이 피어오르는 것은 착각일까?
그때 기검하를 발견한 칠 인은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워 했다.
"기랑!"
"혈주님을 뵈옵니다!"
"공자!"
호칭도 각양각색이었다. 하나 기검하는 그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말을 끊으
며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이들은 모두 내가 죽이겠소! 한 명도 이 순간부터 상관마시오!"
"……."
칠 인은 부지중 몸을 떨었다.
그들은 쏟아지는 빗방울마저도 진저리치며 흩날리는 기검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말리는 듯한 살기를 처음으로 본 것이다.
지금껏 그들에게 기검하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이 처음
인 것이다.
그만큼 기검하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즙포사신들을 향해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후후…… 죽어본 일이 있느냐?"
사신의 사악한 미소가 이러할까.
"으으으……."
즙포사신들은 동공을 꿰뚫는 듯한 공포 때문에 서 있는 것은 물론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
러웠다. 아마 그들이 황궁이 자랑하는 극강고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모든 심장마비(心臟痲痺)
로 숨이 멈춘 지 오래일 것이다.
"후후후…… 오늘 그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기검하는 섬칫한 어조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번쩍!
그 말의 여운이 허공 중에 흩어지기도 전 눈부신 섬광이 허공을 갈랐고, 기묘한 음향과 함
께 대륙지존병에서 부챗살처럼 펼쳐나온 아홉 개의 새파란 검날이 맨앞에 서 있던 아홉 명
의 즙포사신들의 미간에 깊숙이 박혔다.
신기였다.
장내의 어느 누구도 기검하가 언제 몸을 움직였으며, 어떻게 동시에 아홉 명의 미간에 칼날
을 박아놓았는지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살인무학의 정수인가?
시작에 불과했다.
아홉 명의 몸뚱이가 땅에 처박히기도 전에 그 옆에 서 있던 열 한 명의 목젖이 길게 그어졌
다.
"끄르륵……."
그들의 기도에서 괴이한 음향이 들리며 핏줄기가 배어나오는 순간 이번에는 그 뒤에 있던
팔 명의 허리가 양단된 채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파앗!
시뻘건 핏줄기가 허공에 솟구치며 비린내를 풍겼다.
기검하는 유령처럼 즙포사신들의 사이를 교묘하게 스쳐지나갔다.
"으악!"
그러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즙포사신들은 순번을 뺏기기 싫다는 듯이 앞을 다투어 짚단처럼
무너져갔다.
죽음의 향기가 장내를 휘감았다.
피의 축제!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피보라가 천공을 수놓고, 소용돌이치는 피의 광풍 속에서 기검하의 환
영같은 그림자만이 희끗거렸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풍뢰곡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즙포사신들은 기검하가 어떠한 무공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도륙하는지도 몰랐다.
단지 목 위가 허전하다고 느낀 순간 머리는 허공으로 솟구쳤고, 심장이 꿰뚫린 듯한 충격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뚫려진 상처를 통해 자신의 생명이 흘러나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사사삭!
기검하의 손이 한 번 허공을 그을 때마다 어김없이 대여섯 명이 이승을 하직했다.
"아……."
즙포사신들 중 제일 오래 살 수 있었던 행운아는 기검하가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과 같
은 살인무학에 도취되어 얼떨떨하게 찬사의 박수를 보내려고 손을 들었다.
그것은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파앗!
허공으로 솟구치는 자신의 머리통을 찾아 그는 두 손으로 허공을 허망하게 긁어댔을 뿐이
다.
철퍼덕!
그의 몸뚱이는 핏물로 진창을 이룬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
무거운 정적이 풍뢰곡을 짓눌렀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황궁 최고의 고수들이라는 백 사십여 명의 즙포사신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빠른 속도로 열을 갓 넘게 헤아렸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한데 보라!
칙칙한 지옥도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는 수십 개의 몸통 잃은 머리들, 그것들의 두 눈은 경악으로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그리고 피, 끊어진 육신과 내장 부스러기들, 혼을 소매치기 당한 사람이 이러할까?
맥궁왕자 주천업은 그림에 그려넣은 경악의 표정, 바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기검하는 천천히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으……."
맥궁왕자 주천업은 싸늘한 죽음의 발걸음이 그의 등뼈 위아래를 서서히 밟고 거니는 듯한
기분에 진저리를 쳤다.
저벅!
기검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태산이 다가서는가. 그 엄청난 기도에 짓눌리는 주천업의 얼굴이 점차 썩은 돼지간 빛처럼
검붉게 변했다.
이윽고 기검하는 주천업의 코 앞에 우뚝 멈춰섰다.
"주천업, 자금성에서 너는 다시 한 번 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돌아가라! 네놈은 여기서 죽이지 않겠다."
순간 맥궁왕자 주천업의 얼굴에 한 줄기 생기가 피어올랐다.
"기검하! 네놈은 언제고 기필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뒤로 튕겨지듯이 신형을 날리면서 기검하에게 그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
았다.
기검하가 아직 폭우가 그치지 않고 있는 암천장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때 주위로 단금
봉과 적설염, 적노, 그리고 암흑등혈옥의 사대호법들이 조용히 다가들었다.
* * *
대륙천하는 전율했다.
겨울의 밤비가 내리던 날부터 시작된 죽음의 대폭풍이 단 삼 일 만에 중원천하를 강타한 것
이다.
그것은 새로운 신화를 남기는 일대혈사요, 천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피의 전주곡이었다.
대륙천하는 태양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그 모든 내막이 밝혀지고, 세상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대륙천하에 산재한 백련대황교도 수뇌부 사백 팔십 삼 인이 동시에 살해되었다!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검은제국 백련대황교의 수뇌들이 단 삼 일 밤낮에
몰살된 것이다.
누가 있어 이토록 정확히, 그리고 신속하게 백련대황교의 요인들을 처치하였는가?
그 수뇌들 중에는 현 황궁의 재상도 있었으며…… 불문의 대고승도…… 천하의 대유학자도
있었다.
그 충격의 여파를 무엇으로 필설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흘러 세인들은 깨달았다.
---백련대황교는 점조직! 동료와 윗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나 상부조직은 하부조직을
알 수 있다.
고로 상부조직을 몰살한다는 것은 곧 하부조직의 와해와 함께 절로 소멸될 것이다.
이로써 백 오십 년 동안 대륙천하를 지배해온 백련대황교는 멸망된 것이다.
세인들은 이러한 것을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백 오십 년이라는 세월(歲月)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세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실감하여 한 인물에 대한 경이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십기대작 기검하!
중원에 뜬 태양의 위대함을 모르는 인간들조차도 그의 위대함은 실감할 수 있었다.
황제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도 그의 무서움을 안다.
인생을 동반하는 아내의 끈끈한 정을 깨닫지 못한 자도 그의 우정과 끈끈한 정을 깨달았다.
십기대작 기검하는 대륙천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나 모든 것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 * *
밤(夜)!
이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감추어 주는 좋은 점도 있지만 악의 꽃이 번창하는 나쁜점도 있
다.
그리고 모든 풍운과 역사를 종식(終熄)하는 역사의 밤도 있다.
바로 오늘같은 밤이다.
자금성!
대륙천하의 모든 길로 통하는 황궁의 요람이자 중원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역사의 산실이
다.
비록 역사의 오염이 때로는 그 웅자를 뒤덮지만, 그 자태는 대자연과도 같은 장엄함을 지니
고 있다.
특히 찬란한 불빛으로 밝혀져 흡사 불꽃의 성처럼 보이는 밤은 더욱 자금성의 웅자를 실감
할 수 있다.
그 자금성은 오늘 따라 더욱 오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한 대의 마차가 자금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화려한 팔두마차로 마부석에는 무령상문신 한삭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바로 십기대작 기검하를 태운 마차이리라.
마차를 막아서는 수십 명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암흑등혈옥과 구유조상혈의 인물들
이었다.
"……."
기검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시선은 구유조상혈의 육대공봉을 향하였다.
"육대공봉! 시킨 일은 어찌되었소?"
구유수명사 백리박이 육대공봉을 대신하여 말했다.
"혈주께서 시키신 대로 구유조상혈의 십만 제자를 자금성 주위 십 리 밖에 빈틈없이 배치하
였습니다."
"수고하였소."
기검하의 시선이 암흑등혈옥의 최대원로인 사대호법에게 고정되었다.
"사대호법! 암흑등혈옥은 어찌 되었소?"
"암흑등혈옥의 일천 제자들 역시 옥주님의 명이 떨어지는 대로 움직일 만반의 준비가 되었
사옵니다."
마지막으로 기검하의 시선은 마마파천황 단엽상의 충복인 지옥쌍혈검 철타에게 집중되었다.
"철타! 마마혈영사혼대는 어찌되었소?"
"이미 황궁 십 리 밖에서 포진…… 대종사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고하였소."
고개를 끄덕이는 기검하의 입가에는 차디찬 냉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일각 후, 어느 누구도 자금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금성 밖으로
빠져나가면 안된다! 만일 이를 어기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없애시오."
"존명!"
그들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밤비 속으로 사라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금성은 사상최강의 철통같은 경비망으로 통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자금성이 있는 쪽을 향하여 서서히 걸음을 옮기던 기검하의 눈가에 문득 이채가 스쳐갔다.
야심하기 이를데 없는 시각, 더욱이 밤비마저 내리는 이 시각에 자금성 주위에는 수많은 사
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또 특이한 것은, 그들은 양손에 크고 작은 휘황한 등을 들고 있다는 사실과, 연속적으로 수
많은 폭죽을 허공에 쏘아대고 있다는 것이다.
퍼퍼펑!
그야말로 주위는 완전히 화려한 불꽃 잔치와 함께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대축제라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천하의 어떤 시끌벅적한 야시난전도 이 요란함과 화려함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자금성 주위는 한 마디로 야시가 벌어진 성시같았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물건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요란함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킨 채 기검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백타국왕 합경경과 빙백마황자 백리대극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기검하가 알고 있는 몇몇의 천하의 대기인도 끼어있는 것이 아닌가?
"……."
기검하는 문득 대륙지존병을 뽑아들었다.
디디딩!
대륙지존병에 달린 자모비천쌍구가 맑은 기음을 내며 울려퍼졌다.
"대륙지존병 현신!"
빙백마황자 백리대극이 엄청난 대갈을 터뜨렸다. 뒤를 이어 합경경이 외쳤다.
"융천밀환세주! 만만세!"
순간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경악과 터질 듯한
흥분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목청이 터져라 벼락치듯 외쳤다.
"대륙지존병 현신!"
"융천밀환세주 만만세!"
연경 시가를 쩌렁 울리는 벽력음.
그들은 일제히 양팔을 들어올린 채 기검하를 향해 경배를 올렸다.
쿠쿵!
이마를 바닥에 찧는 소리야말로 절대복종의 표시가 아니던가?
하늘의 아들이라 해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없으리라!
"……."
조각처럼 정교한 기검하의 얼굴에는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삼천 년 동안 주인을 찾아 떠돌던 융천밀환세의 후손들이 바로 이들이란 말인가?)
백년야시세!
삼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융천밀환세 세주의 왕림은 격동 그 자체였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세인들은 경탄과 경외감을 금치 못하였다.
"아아…… 이, 이것은 진정한 대영웅의 탄생이다. 시…… 십기대작 기검하, 그가 인간괴물집
단인 융천밀환세의 세주였다니……."
이때 기검하가 융천밀환세의 인물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융천밀환세의 사나이들이여! 나 세주 기검하는 명을 내리겠다……!"
"……."
"그대들은 이제부터 자금성을 포위한다. 그 누구라도 나의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통과시켜
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에 불응하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죽여도 좋다."
"존명!"
그들은 일제히 자금성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신속함을 무엇으로 필설할 수 있으랴!
기검하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자금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감히 그의 앞을 막을 수 있으랴!
그의 태산같은 위세에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금성에는 수많은 황궁 고수들과 조정대신을 비롯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한 사나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포를 걸친 외팔이 사나이로 다름 아닌 맥궁왕자 주천업이었다.
맥궁왕자 주천업의 입가에는 패자의 질투같은 빛이 떠올랐다.
"십기대작 기검하! 네가 융천밀환세의 세주인 대륙지존병의 주인이었다니……."
그에게서는 이미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검하는 맥궁왕자 주천업을 직시했다.
"맥궁왕자! 본좌는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내 그대에게 호국천자의 이름으로 앞으로
일백 년 간 중원에 들어설 수 없는 유배를 명하겠다."
맥궁왕자의 미간이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으음……."
하나 맥궁왕자 주천업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그것은……."
"맥궁왕자! 본좌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기검하의 눈에서 위압적인 신광이 뻗어나오자 맥궁왕자 주천업은 발악을 하듯 외쳤다.
"나도 무인이다. 굴욕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
"어리석은 놈!"
기검하의 입가에는 싸늘한 조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파앗!
바로 그 순간 기검하의 허리에서 폭발하듯 한 가닥 광채가 쏟아져 여지없이 맥궁왕자 주천
업의 두 눈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 빠르기를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으랴!
"크윽……."
맥궁왕자 주천업은 두 눈을 감싸쥔 채 비틀거렸다.
"기검하, 네…… 네놈이 기습을……."
주르륵!
두 눈을 감싸쥔 맥궁왕자 주천업의 두 손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기검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와 맞서는 자는 그 누구라도 살려두지 않는다. 네가 황자라는 점을 감안하여 두 눈만을
취하겠다."
"……."
"탐욕에 젖은 너의 두 눈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을 볼줄 모르는 너의 두 눈은 어차
피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으으……."
털썩!
맥궁왕자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중원을 떠나라. 향후 일백 년 간 자중을 한다면…… 너는 또다시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될
것이다."
"기검하…… 너 이놈…… 흐흐흑……."
맥궁왕자 주천업은 굴욕과 패배, 죄책감에 끝내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호곡성을 터뜨렸다.
하나 기검하는 그를 뒤로한 채 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꽃을 가꾸는 노인은 태상태부 이홍장이었다.
보이지 않는 검은 제국 백련대황교를 자그마치 백 오십 년 동안 집권해온 절대자.
인간이면서도 신으로 불리웠고, 신보다 더한 숭배를 받았던 인간이 소담스러운 황국을 다듬
고 있었다.
기검하가 그의 등 삼 장쯤 다가섰을 무렵 이홍장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꽃을 가꾼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 앞으로는 가꾸어볼 생각입니다."
"자네라면 능히 꽃을 가꿀 수 있을 것일세."
태상태부 이홍장은 기검하는 아랑곳 없이 황국을 가꾸는 일을 계속하며 입을 떼었다.
"꽃이란 성심을 다할 때 비로소 제대로 피는 법일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세. 백련대황교는
바로 내가 가꾼 화원(花園)이랄 수 있지."
이홍장은 기검하를 응시하였다.
"백련대황교는 결코 마, 사, 악의 단체라기보다는 나의 화원…… 그 주인에 따라서 좋은 단
체가 될 수도 있지."
"……."
이홍장은 절실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에게 나의 후계자가 되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백련대황교를 맡아주게."
"……."
"모든 왕도(王道)는 피(血)보다 덕(德)…… 자네가 이제부터 백련대황교라는 화원을 새로이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이네."
"태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아마 이 말은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될 것일세."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의미있는 미소였다.
한참 후 백련대황교주 이홍장은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다."
기검하는 머뭇거리지 않고 천천히 대륙지존병을 뽑아들었다.
디디딩!
대륙지존병의 자모비천쌍구가 맑은 기음을 터뜨렸다.
"나는 최근에 연성한 초식이 있소이다. 대륙지존병의 마지막 초식, 건곤쌍십도(乾坤雙十
刀)…… 나는 이 초식을 태부께 펼칠 것입니다. 준비하십시오."
"하하하…… 건곤쌍십도라……."
백련대황교주 이홍장은 한 손에 쥐고 있던 백옥의 호미를 기이하게 움켜쥐었다.
"이 호미는 백천서(白天鋤)라는 기병일세. 만만히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네."
"……."
이미 신이라 불리우고도 남을 두 사람은 마주섰다.
그들에게 무슨 격식이 필요하겠는가?
번쩍!
한 줄기 천뢰가 허공을 치달리고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기검하와 대륙지존병은 백련대황교주 이홍장의 목젖에 겨누어져 있었으나 그는 웃고 있었
다.
"내가 패했다. 죽여다오."
기검하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왜……? 싸움을 포기하셨습니까?"
"이제 노부에게 남은 천수는 단 삼 일, 구태여 싸운들 무엇하고 아니 싸운들 무엇하겠는가?
자, 망설이지 말고 찌르거라."
"그럼……."
기검하가 이홍장의 목젖에 겨누어졌던 대륙지존병에 힘을 가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여인의
외침이 귓전을 때려왔다.
"안돼요!"
그러면서 두 사람 곁으로 날아내리는 한 소녀가 있었다. 태양천녀 이교홍으로 태상태부 이
홍장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핏줄인 그녀였다.
그녀는 이홍장을 껴안은 채 기검하를 쏘아보았다.
"이 바람둥이 날강도! 할아버지를 조금만 건들면 용서치 않을거야."
그녀는 아예 백련대황교주 이홍장을 턱! 막아선 채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이 파렴치한 도둑! 할아버지가 얼마나 너를 생각한 줄 알아? 만약 할아버지가 마음만 먹었
다면 너는 벌써 골백번은 죽어도 더 죽었을거야."
"……."
"흑…… 그것도 모르고…… 너는 이제 삼 일밖에 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너는 나쁜
사람이야……."
태양천녀 이교홍은 처연하게 두 손을 모았다.
"내가 이렇게 빌께…… 할아버지를 애대로 놔줘…… 그러면 할아버지는 스스로 백련대황교
를 해체할지도 몰라……."
"……."
"아니…… 백련대황교는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할아버지만 돌아가시면 그대로 와해될 것이
란 말야!"
"……."
이교홍의 말을 듣고 있던 기검하는 돌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만을 남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끝났어…… 모든 것이 끝났어…… 백련대황교주가 없는 백련대황교는 결코 나의 적수가 될
수 없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백련대황교에서 빼앗은 천하를 천하인에게 돌려주는
일…….)
승리한 기검하가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는 메마른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음성이 있었다.
"이 도둑! 나를 놔두고 혼자 가면 어떡해……."
태양천녀 이교홍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씨익! 고소가 떠올랐다.
"도벽이 있는 말괄량이…… 천하의 절대자보다 저런 티없는 평범한 여인이 더욱 행복할런지
모르겠군!"
그리고 한순간 그의 뇌리에는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며 죽어가던 부친 무적철혈신 기무빈
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님! 자신의 모든 영리마저도 포기한 아버님이 진정한 영웅이셨습니다.)
그는 갑자기 앞을 향해 치달렸다. 사슴같은 소녀 이교홍이 사력을 다해 뒤따르고 있었다.
"이 도둑! 도망가면 내가 포기할 줄 알구…… 내 하늘 끝까지 쫓아갈거야."
기검하는 스쳐가는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이 그렇게 행복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
다.
그리고 그는 천하인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가 보였다.
* * *
모든 것이 끝났다.
백련대황교!
대륙천하의 어떤 사람들도 백련대황교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제 백련대황교 역시 역사 속에 잊혀져가는 이름이 될 것이다.
대신 십기대작 기검하가 기거하는 풍운기가장이 대륙천하의 절대적인 성역이 되었다.
풍운기가장!
대륙천하의 새로운 성지가 된 풍운기가장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천하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
고 있었다.
적도 없고…… 명예도 없고…… 오직 친구만이 존재하는 질펀한 대축제였다.
승룡각(昇龍閣)!
바로 기검하가 거처하는 내실로 지금 이곳에는 단 두 사람만이 있었다.
기검하와 무령상문신 한삭, 바로 그들이었다.
무령상문신 한삭은 난생 처음 마신 술로 인하여 몹시 취해 있었다.
그런 한삭을 바라보며 기검하가 부드럽게 말했다.
"한삭! 그동안 수고 많았소. 내 그대의 노고를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소."
"혈주!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끄윽∼."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혀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져 있었다.
기검하가 그를 부축하여 침상에 눕히자 한삭의 기분은 그야말로 하늘을 날 지경이었다.
(크크크…… 역시 혈주는 나를 위해 준단 말이야. 암, 이런 날이 있어야 호위무사도 해 먹을
만하지.)
그런 한삭의 귓전으로 기검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한삭! 피곤할테니 오늘은 그냥 이곳에서 쉬도록 하시오."
침상, 그곳에는 오직 유일하게 기검하와 십전냉모란 단금봉이 덮고 자는 원앙금침이 깔려
있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한삭은 조금 찔리는 것이 있었다.
"이 침상은 혈주와 아씨만이 사용하는 원앙금침인데…… 어떻게 제가……."
기검하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한삭, 내 그대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소."
기검하가 원앙금침을 한삭의 몸에 덮어주기까지 하자 그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크흐…… 혈주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다니…….)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무령상문신 한삭은 뻔뻔하게 말했다.
"혈주, 그럼 조금만 실례하겠습니다."
"많이 실례해도 괜찮네. 그럼 잘 자게."
기검하는 내실을 나갔다.
무령상문신 한삭은 태어나 최대로 호강을 하는 날이었다.
"냄새 좋은데……."
땅 속에서만 잠을 자던 한삭은 원앙금침을 덮자 이내 잠이 쏟아졌다.
"이상한데…… 오늘 따라 왜 이리 졸립지…… 에이…… 졸리면 자야지……."
한삭은 이내 잠이 들었다.
내실의 불은 이미 꺼지고…… 한삭은 원앙금침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채 깊고깊은 잠 속
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십전냉모란 단금봉으로 그녀는 침상 위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요 계집, 조 계집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시더니…… 일찌감치 불까지
끄고 잘도 골아 떨어지셨군."
이게 웬 말인가? 그녀는 지금 침상 위에 자고있는 한삭을 기검하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 위로 다가가 마구 흔들었다.
"흥! 자는 척 하면 그냥 놔둘줄 알고……."
그녀는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천하의 바람둥이이니 여자 냄새만 맡으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날거야."
그녀는 속옷만 입은 알몸으로 원앙금침 속으로 들어갔다.
"흥! 오늘은 옷까지 입은 채로…… 아예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자시는군."
그녀는 원앙금침 속에서 상대가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벗겼을까. 그녀는 예전에 하던대로 금침 속에 있는 뼈다귀만 남은 한삭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이의 감촉은 이게 아닌데…… 마치 시체를 만지는 것 같으니…… 이에 웬일인지?)
쾅!
바로 그때 내실의 문이 완전히 박살났다.
"누구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때 내실의 불은 밝혀지고, 단금봉은 문을 차고 들어온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문을 차고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안색을 싸늘하게 굳힌 기검하가 아닌가?
그녀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당신이 왜 그곳에……?"
불현듯, 그녀는 무엇을 느낀 듯 금침을 내려다 보다 까무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엄마야!"
이때 주위의 소란에 무령상문신 한삭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하나 옆에 반나체로 있는 단금봉의 모습을 본 한삭은 역시 까무라치게 놀랐다.
"까아악! 아, 아씨가 왜 이곳에……."
그의 눈은 불신과 회의, 경악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기검하는 살얼음이 낀 듯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흥! 금봉, 이제보니 네가 나와 잠자리를 거부한 이유를 알 것 같구나."
십전냉모란 단금봉의 재지가 아무리 절세적이고 뛰어나다고 하나 이 순간 그녀는 눈앞이 캄
캄한 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애절한 어조로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기랑, 오해예요. 오해……."
기검하는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금봉! 현장을 발각당하고도…… 변명을 할 작정이냐!"
그의 시퍼런 서슬에 그녀는 당황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너무 급한 나머지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막 잠에서 깬 한삭은 안색이 똥빛으로 변한 채 그저 망연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때 기검하의 싸늘한 일갈이 그의 귓속을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한삭!"
"예! 존명!"
그는 얼마나 놀랐으면 금침 속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부동자세를 취했다.
"까아악!"
십전냉모란 단금봉은 까무라치게 놀라며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닌가?
한삭, 그의 볼썽 사나운 알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한삭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알몸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또다시 기검하의 차가운 일갈이 떨어졌다.
"없어져라!"
"존명!"
쒸아앙!
이게 무슨 빠름인가. 한삭의 몸은 번개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삭이 되게 급했던 모양이군.)
내심 고소를 짓는 기검하는 사라져가는 한삭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무령상문신 한삭…… 내가 꾸민 계책이니…… 걱정치 말고 땅 속에서 편히 쉬거라!)
그럼 이 모든 것이 기검하가 꾸민 계책이란 말인가?
혼자 남게된 단금봉은 체면이고 자존심같은 것은 아랑곳 없이 기검하의 다리를 잡고 애걸복
걸하였다.
"기랑! 이것은 오해예요. 저는 침상에 누운 사람이 당신인 줄 알고……."
기검하는 싸늘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같은 여인이 그런 실수를 하리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소?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 일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 당신을 쫓아내고 말겠소."
"쪼…… 쫓아낸다고요……?"
"그렇소. 내 당신을 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아시오."
"……."
그녀의 안색은 흑색으로 질리고 말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이 없었다.
그녀는 기검하의 무릎을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이 꽉!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기랑! 억울해요. 으앙…… 제발 믿어 주세요."
그녀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였다.
"으아앙……."
그때서야 기검하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내심 흉소를 머금었다.
(이쯤 됐으니 이제 정신을 차렸겠지. 후후…… 슬슬 달래볼까?)
기검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엄중하게 말했다.
"금봉! 내가 만약 그대의 말을 믿어준다면?"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그녀는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속사포처럼 이 세상의 모든 아부를 해대
었다.
"첩이라도 좋아요. 아니 시녀라도 좋아요. 제발 이곳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기검하는 내심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크…… 금봉, 네가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여자…… 진작 그랬어야지.)
기검하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좋아, 금봉! 너의 말을 믿어 주겠어. 하나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
"무엇인가요?"
"금봉, 너는 아직 초야를 치르지 않은 몸, 내 너의 순결을 확인하고 싶다."
한 마디로 초야를 치르자는 말이 아닌가?
그녀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입가에 교태를 머금은 채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눈웃음을 쳤다.
"기랑! 어서 확인해 주세요."
그녀는 스스로 자청해서 기검하의 팔을 끌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기검하는 느긋했다.
"금봉, 오늘 밤 너의 행동을 보아서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
"아이…… 소첩은 잘 몰라요. 기랑이 잘 가르쳐 주셔야 돼요. 소첩은 기랑의 뜻대로 따를 뿐
이예요."
세상에 이런 다소곳한 말이 어디 있는가?
세상에 이토록 애교스런 말이 어디 있는가?
하늘같은 지아비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호언했던 단금봉은 이렇게 순종적인 여인으로 변해가
고 있었다.
"기랑, 사랑해 주세요. 소첩은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 뿐이예요."
기검하는 내심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후훗…… 사랑해 주고 말고…… 내 사랑하는 정실인데…….)
그리고 기검하는 한 가지 진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천하를 평정하기 이전에 먼저 집안을 다스려야 한다.
불이 꺼지고 달콤한 사랑의 밀어(密語)가 꿈결처럼 오갔다.
모든 것이 끝난 좋은 밤이다.
한 여인이 한 사내에게 순종해 가는 밤이었으며, 한 사나이의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되는 밤이었다.
<大 尾.>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감사.
숫신제가치국평천하 잼 난글 감사합니다 씨인 쿨러
감사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