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그런 황당한 일을 겪고 나서 잠시 몽을 뉘었다가 아침 일찍 호텔뒤 호수변을 산책하기 위해 나섰는데 부지런한 동료들은 30분 여 걸리는 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박선생도 아침 식사에 늦지 않게 서둘러 호수산책에 나섰는데 그곳에서 어제 만났던 경북도의회 의원 연수 수행원들과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자욱이 피어나는 물안개를 끼고 도는 호수는 높이 30M 침엽수림과 잘 어우러져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침을 먹고 난 우리들은 폴란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유독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고 덜 뜨기 까지 한 버스기사인 조지가 폴란드가 고향으로서 오늘 여행 끈날 무렵 우리와 헤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었다. 너무 친절하고 마음 좋은 기사였는데 앞으로는 이런 멋진 기사를 만나기 힘들다는 인솔 가이드의 말에 우리 일행 모두 6일간 정이 듬뿍 들어서 아쉬움이 컸다. 뒤에 바톤을 이은 기사도 폴란드인이었는데 조지보다는 못한 느낌이었다.
폴란드로 가는 길은 4시간 가량 걸렷는데 시골길 같은 꾸불꾸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서야 폴란드로 가는 고속도로와 만날 수 있었다. 날씨는 약간 찌뿌둥 하여 꼳 비나 눈이 쏟아 질 듯한 날씨였는데 다행히도 이번 여행 11일 동안 눈이나 비가 한번도 오지 않아서 날씨 만큼은 우리에게 큰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북동쪽으로 러시아연방, 동쪽으로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슬로바키아, 체코, 서쪽으로 독일에 접하며, 북쪽은 발트해에 면한다. 남북길이 649km, 동서길이 689km로 거의 4각형의 국토를 이룬다.
폴란드는 고유언어로 서슬라브어를 쓰며, 외적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았고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에게 나라를 뺐겨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국토는 한반도의 1.4배 정도이고 농업에서 도시문화로 점차 변해 가는 발전 단계에 있고 동유럽 공산권에서 가장 먼저 바웬사가 이끄는 시민 혁명으로 민주화를 가장 먼저 이룬 나라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시절 농지사유화 허용으로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음악의 천재 쇼팽이 태어난 나라, 전국민의 90%가 카돌릭을 믿고 있어서 국민 생활 모두가 카돌릭과 연관이 되어 있어 교황 바오르 2세가 태어난 나라이기도 하다. 국민 모두가 영국을 모델로 하여 여성을 존중하고 친절하고 70%가 맞벌이를 하며 ,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많고 매너가 좋은 나라로서 세계 최대 석탄 생산지이기도 하다.
교육제도는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고 대학까지 무상교육이고 학원이 없고 의료비가 무상지원 되며 , 58세가 되면 연금을 받는 복지국가로서 동구권에서 그런데로 살기 괜찮은 나라에 속한다고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 하였다.
우리 일행은 한참을 달려 비엘리카로 이동하여 700년의 역사의 유네스코 지정 지하 130M 의 소금광산의 고장인 크라쿠프에 도착하였다. 잠시 내려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은 우리들은 짠뜩 찌부리고 쌀쌀해진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관람 입장권을 내고 지하 130M 소금광산 관광에 나섰다.
이 소금 광산은 크라쿠프 동남쪽 15Km에 위치한 이곳은 세계 12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유네스코 최초로 자연 및 문화 유산에 선정 되었다. 전통적인 인사말인 “신의 영광(God Bless You)”은 오래전부터 이 비알리츠카 소금광산 인부들이 서로 지나갈 때 쓰던 인사말이다. 비알리츠카 소금층은 180만년에서 200만년 전에 형성된 자연이 만든 경이로움이다. 오랫동안 바다였던 이곳은 물이 증발한 후 소금(염화 칼슘)만 남았고 암염이 되기 까지 약 1만 5천 년이 걸렸다.
그 뒤 발생한 지각변동은 이 소금 층이 복잡해진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진흙과 점토로 쌓인 소금은 지하에 흐르는 물에도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다. 소금 층은 서에서 동으로 약 10km정도 뻗어 나갔으며 두께는 500m에서 1.5km에 이른다. 가장 깊은 소금 층은 340m를 내려 가야 한다. 비알리츠카 소금광산은 약 5,000년이 넘게 존재해 왔다는 것은 11세기에 알게 되었다. 그 뒤 괄목 할 만한 발전이 뒤따랐으며 1996년 까지 소금을 채취 했었다.
지금은 소금 채취를 중단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14세기 현명한 카시미르 대왕은 소금에 대한 일반법을 성문화 했는데 이 것은 ‘회색의 금’을 캐는 광부들의 법과 특권을 규정한 것이기도 하다. 항상 국가 권력자들의 소유였던 소금 광산의 경영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 위탁하든지 임대하였다.
크라쿠프의 전성기인 야기엘로 왕조 때에는 국가 제정의 1/3이 소금무역에서 얻을 정도였다. 광부들은 소금광산에 대해 천천히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알게 되었고 광산의 비밀과 부를 알게 되었다. 소금을 캐고 난 뒤 남은 공간은 나무를 세워 버티게 하였고, 안으로 흘러 들어온 물은 소금을 얻기 위해 끓였다. 700년이 넘게 존재해 오는 동안 소금 7,500만 톤을 캐내었는데 화차에 싣고 열을 세우면 적도의 1/5길이에 해당한다.
수직 처럼 깍아지른 1명이 겨우 다닐만한 통나무로 만든 계단 같은 통로를 따라 줄서서 지하 30M쯤 내려가니 놀랍게도 소금덩어리를 까고 거기에 통나무 기둥을 바쳐 수많응 통나무 굴을 만든 5명이 일렬로 서서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은 통로가 나타 났다. 꼭 우리나라 전방견학에서 본 북한이 파놓은 제 1땅굴 같은 소금굴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졌다.
잠깐 손으로 맛을 보았더니 약간 짭잘 한 것이 영락없이 소금이 맞다. 이런 소금도르 소금절벽등이 혹은 종유석처럼, 동굴처럼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소금캐는 광부들의 생활상 조각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는데 우리을 안내하는 폴란드에 유학온 젊운 대학생의 설명과 재촉에 걸음을 따라가기 바빴다.
드디어 지하 100M 를 넘어가니 거기에 큰 연못도 있었고 100명이 모일 만한 넓은 광장도 나타나고 , 어떤곳은 깍아지른 절벽 같은 곳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소을 파 내며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이 크라쿠프 마을은 아주 조그만 시골 마을 이었는데 소금이 나는 면적이 경상북도 만하다는 말에 놀라웠다. 옛부터 소금은 富의 상징이었는데 이 수많은 소금을 생산한 폴란드는 과거에 부유한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고 내일 견학 할 유테인 대학살의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더불어 1년에 폴란드를 찾는 2천만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폴란드가 자랑하는 2대 관광지 중 한 곳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무척 부러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하 130M 에 위치한 소금으로 만든 수백명이 겅어 다닐 만한 거대한 광장의 성당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및 성모마리아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카돌릭 조각품들이 우리의 눈길을 확 잡아 끄는 이유는 이렇게 깊은 지하동굴에 그것도 소금으로 빚은 멋진 예술품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신이 특별히 폴란드에게 베푼 은총이 아닌가 싶어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성당을 구경하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길은 철골로 만든 것 같은 재래식 엘리베이트를 타고 130M 올라오는 편의를 마다 않는 폴란드인의 지혜에 1시간 30분동안 미로 같은 소금광산을 걸어다닌 피곤한 내다리를 위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소금광산구경을 다 마치고 나온 입구에 조그만 가게에서 소금팩, 소금 천일염등의 선물을 조금 샀는데 우리나라 죽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질이 별로라는 가이드의 말 때문에 일행모두 많이 사지는 않았다.
(소금 성당에서 카메라로 밑에서 찍은 크리스탈 등)
(소금캐는 광부상)
(소금 광산 내부)
(소금 마리아상)
(넓은 소금성당)
(소금 성당 내부)
(소금성당 최후의 만찬 조각 앞)
(소금광장 지하 110M 표지판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