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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178주(2013.5.8)
노자 도덕경 읽기 (12)
이태호(철학박사/통청아카데미 원장)
Ⅰ. 도덕경 20장
(1) 원문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不可不畏,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선지여오, 상거약하. 인지소외, 불가불외, 황혜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아독박혜기미조, 여영아지미해, 래래혜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담혜기약해, 료혜약무지.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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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唯) : ‘예’라는 공손한 대답, (다듬어진 말), <긍정적 대답>
아(阿) : ‘응’이라는 공손치 못한 대답, (질박한 말) <부정적 대답>
기하(幾何) : 얼마
약하(若何), 하약(何若) : 어느 정도
황(荒) : 거칠다. 허황하다. 어리석다. 모자라다.
앙(央) : 다하다. 끝나다. 중앙
희희(熙熙) : 밝게 웃는 모양
향(享) : 누리다. 드리다. 제사지내다.
뢰(牢) : 우리, 둘러싸다. 가축을 기르는 곳, 희생(소, 양, 돼지)
박(泊) : 배를 대다. 정박하다. 머무르다. 머무는 곳.
조(兆) : 조짐, 점쾌.
해(孩) : 어린아이가 웃다.
래래(儽儽) : 나른한 모습. 고달픈 모습. 지친 모습
유(遺) : 끼치다. 잃다. 버리다.
돈돈(沌沌) : 물이 크게 도는 모양. 어둡다. 만물 생성의 원인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
소소(昭昭) : 세상 물정에 밝음. 밝다.
혼혼(昏昏) : 세상 물정에 어두움. 어둡다.
찰찰(察察) : 눈치를 살핌. 살피다.
민민(悶悶) : 번민하는 모양. 번민하다.
담(澹) : 조용하게 움직이다. 맑다.
료(飂) : 높이 부는 바람
이(以) : ~서, 쓰임.
완(頑) : 완고하다. 무디다. 둔하다. 고집스럽다.
비(鄙) : 비루하다. 다랍다(언행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조금 인색하다. 때나 찌꺼기 따위가 있어 조금 지저분하다.) 인색하다. 어리석다. 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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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왜냐하면 근심은 구분 짓는 일에서 생기는데 학문은 바로 구분 짓는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분 짓는 일은 是와 非를 가리는 것이고, 시와 비는 긍정과 부정의 차이를 분명히 해서 중간을 없애는 것이다.) (실재세계인) 유(唯, 긍정)와 아(阿, 부정)가 서로 떨어짐이 얼마이며, (가치세계인) 선(미)과 악(추)이 서로 떨어짐이 얼마이겠는가. (실제로는 이 두 세계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학문은) 남(세속인)들이 두려워하는 바를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학문이) 허황하게도 아직 (진리의) 끝(핵심)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학문은 진리인 것으로 인정되어) 사람(세속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학식이 쌓인) 뭇 사람(학자)들은 밝게 웃으며 큰 상을 받은 것 같고 봄철에 누대에 오르는 것 같은데, 나만 홀로 (학문이 진리의) 조짐에도 미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생각에 머물고 있도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 같고, 지친 몸을 쉴 (집이 없어)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못 사람(학자)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 홀로 버려진 것 같다.
나는 어리석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혼돈스럽구나. 세속의 사람(구분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학자와 일반인)은 세상의 물정에 밝은데, 나 홀로 세정에 어둡구나. 세속의 사람은 눈치가 빠르지만(세련되어 있지만), 나 홀로 눈치가 없구나.(세련되지 못하구나.) (학문에서 밝히는 이치를 진리의 닻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넘실거려 파도치는 바다와 같고, 높은 바람이 휙휙 멎지 않는 것 같다. 못 사람(학자)들은 모두 (전문가로서)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쓸모없이) 완고하며 비루한 것 같다. 나 홀로 남(세속인)과 달라서 (학문으로 구분 짓지 않는) 식모(만물의 어미, 생존의 소유)를 귀하게 여긴다.
(3) 해설
노자는 여기(20장)에서 당대에 누구 못지않게 학문을 많이 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장기인 학문을 끊으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학문을 깊이 연구한 그에게 학문의 한계와 문제점이 제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현대 서양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그의 대표작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학문의 한계를 구체자로 전도된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사고 속에서 구분 짓는 작업부터 해야 하는데, 이때 구체적인 실재 사태(사실이나 사물)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도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벌써 이러한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잘못 인식된 사태가 진리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가치문제와 연결되면 쓸데없는 근심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구별을 하지만,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에서는 차별을 낳는다. 아름다움은 좋은 것이고 추함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는 무엇이며, 실제로 아름다움과 추함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에 이러한 경계가 인위적(人爲的)이고 객관적으로 그런 것이 없는데도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쓸데없는 근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뱀이나 할미꽃보다 공작새나 장미꽃이 아름다운가?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차별은 있을 수 없다. 부귀영화(富貴榮華)와 발전(發展)은 좋은 것이고, 빈천소박(貧賤素朴)과 쇠퇴(衰退)는 나쁜 것인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것이다. 젊음이 있으면 늙음도 있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자연현상과 우주의 원리에는 미추와 좋고 나쁨이 없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며,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차별을 하면서 잘났다고 뽐내며, 못났다고 위축되는가? 그것은 가진 자들이 뽐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가치관을 의심 없이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르도록 하는데 학문이 기여하고 있다고 노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기여하는 학문을 하는 학자들(衆人)은 소유자(권력자)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뽐내고 있다. 일반 사람들도 당연히 그들이 구분해 놓은 가치 서열을 그대로 믿으면서 편승하고 있다. 물론 좋은 것을 소유한 경우에는 유쾌하지만, 소유하지 못했거나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근심이 된다. 노자는 아예 빼앗길 무엇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일희일우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이 잘못은 학문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심리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은 그의 대표작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생존의 소유는 존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소유를 지향하면 필연적으로 소유를 지향하는 다른 존재와 충돌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그런 경우를 성격학적 소유라고 불렀다. 노자도 이 장의 마지막에 식모(食母)를 존중한다고 하였을 때 식모는 생존의 소유이며, 자신은 최소한의 소유에 만족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 것이다.
노자 자신은 최소한의 소유(생존의 소유)에 만족하면서 세속의 사람들이 추구하는(잘나고 못나고가 구분되는) 가치관에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눈으로 볼 때는 홀로 못나 보이는 자신을 이 장에서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노자 자신은 내심 두 가지 확신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학자들이 학문에서 주장하는 대다수는 깊이가 낮아 전 존재의 연대에 이르지 못해 분리시킨다는 것이며, 그 낮은 학문이 가치관과 연결되면 근심거리를 증가시키고 만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노자는 외로워 보인다. 자신의 관점이 올바른데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며, 잘못된 관점의 흐름은 너무 강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자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학설을 펼쳐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인위적이라 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두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스스로 되돌아보는 독백의 글이기도 하면서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가슴에는 오히려 강한 불을 지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