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택 시인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 에 「수배전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시집으로 『리트머스』(문학동네,2006)가 있다.
현재 문화예술마을 헤이리 사무국 근무하고 있다
* 시집 [리트머스]에서 몇 편 골랐습니다. 그런데 조금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 몇 편을 지웠는데도 그래도 많은 느낌입니다. 시인들의 시집에서 몇 편 적어 올릴 때 양이 많으면 도둑질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여 되도록 적게 올리려고 합니다만 소개하는 글이 되어서 여러 사람들이 읽게 되면 그것도 좋은 일이려니, 하는 마음입니다.
스테이플러
기차는 속력을 내면서
무게의 심지를 박는다. 덜컹덜컹
스테이플러가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입 벌린 어둠 속,
구부러진 철침마냥 팔짱을 낀 승객들
저마다 까칠한 영혼의 뒷면이다
한 생이 그냥 스쳐가고
기약 없이 또 한 생이 넘겨지고
아득한 여백의 차창에
몇 겹씩 겹쳐지는 전생의 얼굴들
철컥거리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촘촘한 침목을 박으며
레일이 뻗어간다
대학병원 지하주차장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을 솎아내느라
형광등 불빛은 가늘게 떨고 있다
그 경계를 잘라내는 환풍기는
울음이 엉겨 잘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이곳을 깨우기 위해 사이렌은
입구에서 검은 침묵을 매만진다
누구나 지상과 멀어지고 싶지 않듯
지하로 지하로 차를 몰고 내려온 이는
잘못 든 길처럼 숙명적이다
그가 홀연 빠져나와 차문을 닫을 때
지하층 전체에 일순 울리는 소리,
누군가 들뜬 페인트처럼 후들거리며
벽면에 기댄다 통곡이 지루하게
계단으로 이어진다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고 우회와 우회를 거듭하며
나선 방향으로 낙하한 하역의 공간,
지하로 내려갈수록 묵직한 나사가
조여 오고 있다 그가 못질하듯
구두소리로 걸어나간다 깊은 밤처럼
고요한 지하주차장, 길이와 폭으로
테두리를 두르던 주차선이 문득
영정 사진에 가 있다 또 누군가
차를 타고 지하로 내려올 것이다
리트머스
늦은 밤 공중전화부스에 사내가 들어 있다
꾹꾹 눌러낸 다이얼은 서른 번을 넘긴다
타국으로 젖어드는 신호음 저편
그리움이라는 색깔로 반응하는 목소리,
부스 안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수화기는 왼쪽 어깨로 넘겨져 데워지고
불러낸 이름을 유리창에 적어본다
글씨에도 뿌리가 뻗는지 흘러내리는 획마다
생장점이 먼지로 뭉쳐있다
바지에 묻은 톱밥이 발아중이고
뒷주머니에 삐죽 붉은 목장갑도 피었다
안개에 젖고 밤바람에 흔들려 후둑,
스포이드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뭇잎
가을은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 반응해 물들어간다
사내는 하늘을 봉숭아꽃처럼 물들이고 싶다
꽁꽁 묶어 보낸 소포를 풀 즈음이면
첫눈이 내릴 것이다
슈퍼 간판불도 꺼져버린 자정 무렵,
사내의 머리와 어깨의 실루엣이
공중전화부스 불빛에 흠뻑 젖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도 색이 뚜렷하다
수배전단
귀갓길,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 자로 수배중이다
납부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 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후회의 방식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분명하다
달리는 기차에 뛰어든
시간은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으깨어진 핏덩이와 뼈가 허공에 박혀 정지된,
플랫폼을 유령처럼 돌아본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목구멍에서
터널 같은 빛이 터져나온다
뢴트겐 차창을 달고 기차는
역에서 거꾸로 멀어져간다
기적소리를 비벼 끈 꽁초가
손가락 사이 불빛으로 켜질 때
살아 눈뜬 것이 죽음보다 외롭다
한밤중 삼킨 수면제가 움큼
손바닥에 뱉어지고 물과 파편이 솟구쳐
책상 위 유리컵으로 뭉쳐진다
어깨를 입은 외투는 캄캄한 밤길을 지나
저녁 어스름까지 데려다준다
수면제를 건네받은 약사가 수상한
처방을 뒷걸음으로 떼어온다 영안실
흰 천에 덮인 당신이 거실로 옮겨지고
비닐에서 피 묻은 칼을 꺼낸 감식반은
출입금지 테이프를 마저 철거한다
삐끗한 발목으로 창을 넘는
손이 떨린다 당신의 가슴에서 칼을 뽑자
턱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올라 눈에 스민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창백한 얼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용서될 수 있나
기차의 굉음이 레일에서 급히 멈춰 섰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허공을 찢는 호각소리를 듣는다
아파트나무
인부들이 몰려와 땅을 파고 아파트를 심은 건
고교입학 무렵이었다 맨 먼저 커다란 파일이 내려가
지하 깊은 곳에 붉은 뿌리를 박았다
모세혈관 같은 철근들이 묶이고
제법 단단한 각질이 덧대어지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음과 분진을 광합성하며
자고나면 조금씩 높아지는 아파트,
그 위를 크레인이 내려다보며 키를 재곤 했다
건물 층층마다 유리가 끼워지자 가끔씩
저녁 해가 모서리에서 붉게 터졌다
어느 날부터는 커다란 광고가 이파리처럼 매달렸다
분양사무실 칠판은 곧 수확할 열매를 위해
씨방의 규모를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이웃 학교 녀석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공사 중인 아파트로 도망쳐 숨은 적이 있었다
미로 같은 곳을 겨우 빠져나와 돌아보니
아직 꽃피지 않은 아파트는 외로워 보였다
너무 큰 꽃은 그늘이 깊다고 하는 것 같았다
주먹의 상처가 가려워질 무렵
아파트 외벽에 밝은 색이 입혀졌다
고층 사다리차로 해바라기 씨 같은 짐들이
올라갔고, 그날부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펌프질되기 시작했다 그런 밤마다
밝고 노란 열매들이 매달렸다
단지 둘레는 낙과처럼 가로등이 즐비했다
아파트가 해를 가린 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이삿짐 트럭을 몰고 꽃피러 떠났다
공터공화국
빌딩 자리만큼 철조망 두른 공터가 있었다
부도난 바람만 국적 없이 넘나들던 곳
원로의 냉장고가 풀숲으로 단독 영입되자
냉동칸 곰팡이로 담화를 피워냈다
빈 우윳곽은 빗물을 귀담아놓았고
부서진 의자는 밤늦게 고양이를 초빙했다
출근길 사람들은 철망 앞을 바삐 걸으며
공터를 어떻게 지지할 것인지 떠올렸다
부서진 싱크대, 헌 구두 한 짝, 폐자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랜 지지세력이었다
공터가 담배꽁초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도
취한 사내 지퍼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철조망 바깥 풀들이
유세에 동참해오는 동안,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던 것들이 공터로 몰려들고 있었다
주민회의가 있던 밤, 사방의 철조망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공터도 회의를 소집했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
만장일치로 밤새 비가 뿌려졌다 주민대표는
다음날 ‘외인출입금지’라는 공화국을 인정했다
그후로 풀들은 점점 무성하게 자랐고
국경을 넘어오는 일은 더욱 은밀해졌다
찢어진 우산이 국기처럼 펄럭이는 공터공화국,
들끓는 여름정권을 지나고 있었다
쓸쓸한 연애
백사장 입구 철 지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얽매여 군데군데 찢겨진 채였다
기어이 그녀는 바다에 와서 울었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과 라면봉지,
둥근 병 조각조차 추억의 이정표였다
해질녘 바위에 앉아 캔맥주 마개를 뜯을 때
들리는 파도소리, 벌겋게 취한
서쪽의 창에서 포말이 일었다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상처의 끈을 풀어준다면 금방이라도
막다른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녀,
한 줌 알약 같은 조가비가 놓인
밀물 드는 방에서 우리는 알몸을 기댔다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나는, 꺼질 듯한 모닥불에
찢겨진 플래카드를 던져 넣었다
탈수 오 분간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쳐 왔다
자폐증 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은
내 안 엉킨 것들이 한없이 원심력을 얻기 때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는 보풀이 되어
온 빨래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번진 마스카라,
흐느끼는 그녀를 안고 있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서야
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해져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동안
젖어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주유소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꽃 피는 시절
- 커뮤니티
꽃은 언제나 제 그림자 속으로 떨어진다
흩어져 있던 우리는 필연이었다는 듯
그 아래 의자를 꺼내놓고 둘러앉는다
밤마다 모니터 불빛으로도 뿌리가 뻗는 우리는
외롭고 파리했으나 결백했다
꽃잎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낙하하는 동안
자판으로 타전되는 철자들은 산과 들을 지나
나무와 나무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가지마다
링크되는 각각의 얼굴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실시간으로 교환되던 꽃의 윤곽이
화소처럼 격자 철조망에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표류하듯 그 시절을 떠나왔을 때
돌아갈 길은 점차 잊혀지고
초록의 잎들이 이교도처럼 돋아나
꽃들은 휴면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낮 그림자는 이제 꽃이 잘 드는 곳을 골라
검은 추억을 채탄한다 우리는 막장처럼
떠나온 그곳에 꽃씨를 묻어 두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내가 거기 있었다
청춘은 간다
내 청춘은 가스통처럼 옮겨다녔다
비바람이 헬멧을 거세게 흘러갈 때
달리지 않는 것들은 미끄러운 시선 밖으로
줄기차게 밀려난다
색색을 늘어뜨린 네온간판들
번번이 골목골목으로 사라진다
길은 사정없이 뻗어와
막다른 곳으로 쓸쓸히 흩어지는 것을
가스통을 짊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보았다
헤드라이트가 빠르게 난간을 더듬자
빗줄기가 즐비하게 몰려간다
턱을 바싹 당긴 채
굉음으로 앞바퀴 들어 달리면
앞서간 사랑까지 가닿을 수 있을까
흘깃, 덜컹거리는 가스통을 돌아본다
매여 있다는 것은 늘 괴롭다
가끔씩 물보라로 튀어오르는 잔 돌멩이들
방점처럼 귀퉁이에 찍힌다
몸을 납작 엎드려 발기된 엔진을 느낀다,
길들여지지 않는 길 위의 날들,
점화되지 못한 청춘을 싣고
나는야 폭탄처럼 달린다
경운기를 따라가다
나는 아직 아버지를 추월할 수 없네
|
첫댓글 다 올리고 나서 검색을 해보니 이전에 20편이 넘는 시를 올리신 분이 있군요. 3편인가 중복되는군요. 중복된 시를 읽어보니 시집을 내면서 고쳤는지 몇 구절이 다릅니다. 그 핑계로 수정하지 않고 그냥 둡니다.(그런데 어떻게 중복된 시가 이리 적을까...^^:::: 다시 시집을 읽어보아야 할 듯...크~)
꽤 많은 시인데, 한편 한 편 다 좋은 시라는 생각입니다. 시인의 신선한 상상력과 표현력에 눈꼽만큼이라도 전염될까 하여 읽고 또 읽습니다. 옮겨주신 수고에도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