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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륙조선사 연구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현상태
아시아가 왜 조선인가 (중원을 찾아서, 프롤로그 2 : 실크로드의 악마들 ) 其一
증기기관의 발명→오리엔탈리즘→서세동점, 특히 서세동점이 본격적으로 마무리 단계를 맺을 무렵, 유럽의 신생 제국주의 열강은 앞을 다투어 유물 탐사대를 파견한다. 명목상으로는 당시 서양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에 대한 지리학적 탐사인 이 파견은 당대 최강의 양대 제국, 러시아와 영국간이 중앙아시아 주도권을 두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과 맞물려 벌어진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서구열강들은 페르시아지역과 중앙아시아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정치, 경제, 문화, 교통,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의 지형측량과, 지도 측정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가가? 특히 서세동점, 민족주의, 민주주의, 라는 단어의 우리 안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강역을 유라시아대륙간 지역의 문명교류로 세계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재해석 한다면, 오리엔리즘, 실크로드 이론의 탄생은 바로 유라시아의 중심부 해체와 분열을 위한 기획과정이며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은 그 중앙지역에 있는 조선의 중앙정부 즉 중국, 중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실행과정인 것이다.
지도는 교통,무역,군사 목적을 위해 주로 제작되며, 더군다나 서세동점의 시기에는 무력을 수단으로, 한 지역의 정치 중심부를 장악하여, 해당지역의 경제와 물류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이며, 실제로 19세기의 서구 열강은 전쟁과 학살, 정보전, 사상교육을 실천하였으며 그중 전쟁은 가장 효과적인 목적의 달성 방법중의 하나였다.
전쟁은 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정의할 때,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국공내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구 소련의 아프칸 침공, 중공의 베트남 침공, 미국이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펼친 수많은 군사작전, 이라크와 아프칸 침공, 최근에는 나토의 리비아 공습등은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실현의 목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한 지역의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 즉 중앙정부의 기능이 상실 되었을 경우 과거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은 고금을 막론하고 통상 존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기점으로 영국의 증기기관의 발명은 력사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비정상적으로 돌려 놓았다. 그것은 조선의 중앙정부가 있는 중국의 해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서세는 한편으로는 전쟁을 일으키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 중앙정부가 무너지는 1860년 혹은 1900년을 기점으로 국가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중앙아 유물 쟁탈전을 기획, 지원한다 특히 중국령 투르키스탄 지금의 신강 위구르자치구와 감숙서부에서 벌어진 소위 실크로드 선상의 탐험의 력사를 서술한 피터 홉커스는 '외국의 악마들'을 자신의 저서 제목으로 정하면서도 그들 오렐 스타인, 스벤헤딘, 폰 르콕, 폴 펠리오, 오타니, 랭던워너 등등이 행했던 도굴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애써 회피한다. 이것은 그책의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투르키스탄 유물 , 특히 현재 런던과 파리에 분산돼 있는 대량의 돈황 필사본에 관한 문제는 극히 감정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중국인의 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사안이다. 북경에서 중국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의 소장이 그 자신 일급 실크로드의 발굴자인 하내 박사와 속 깊은 이양기를 나누었을 때도 나는 이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중략....... 벽화, 조상, 고사본들이 데이빗슨이 말한 이른바' 고고학적 도적질'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본래의 장소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과연 얼마나 많은 유물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자. 또한 아무리 그것이 당시 구출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한 민족에게서 영원히 그들의 유산을 박탈해 버린 것이 과연 도덕적인가 하는 것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자. 그러나 중국인들이 처음에는 왜 유물들이 실려나가는 것을 허용했는지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다。”<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스 김영종 역주 사계절 21p~22p.>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몇 가지 대목이 있다.
1. 투르키스탄 유물 , 특히 현재 런던과 파리에 분산돼 있는 대량의 돈황 필사본에 관한 문제는 극히 감정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중국인의 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사안이다.
돈황 필사본, 고대 고문서는 펠리옷과 스타인에 의해 가장 많이 해외로 빼돌려졌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중국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 책은 1981년 영국 도서상의 논픽션상에 선정된 책이다. 1981년대 이전과 근대의 19세기에 신강과 감숙에 거주하던 이들이 과연 중국인인가? 중국이라는 것이 중화민국의 탄생으로 새로운 의미로 인식, 각인 되었다는 것은 대륙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이 아닌가?
중국은 천자 직할지를 말한다. 위 책의 필자가 인식하고 있는 중국인의 분노는 우리에게 두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한족이라는 이름하에 민족주의의 노예가 되버린 지금의 대륙인들은 중국인이 아니며 또한 지금의 신강지역이 가장 력사적으로 유래있고 문명적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2.벽화, 조상, 고사본들이 데이빗슨이 말한 이른바' 고고학적 도적질'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본래의 장소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과연 얼마나 많은 유물이 지금까지 보존될수 있었을까
또한 아무리 그것이 당시 구출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 한 민족에게서 영원히 그들의 유산을 박탈해 버린 것이 과연 도덕적인가 하는 것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도록하자. 그러나 중국인들이 처음에는 왜 유물들이 실려나가는 것을 허용했는지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고학적 도적질과 구출을 위한 유물반출 그리고 중국인들이 처음에 유물반출에 대해 허용한 것’ 이라는 구절에 집중해 보자. 여기서 고고학적 구출은, 당시의 지역에 살던 무슬림들의 벽화나 성벽에 대한 파괴행위 및 도굴을 말한다. 즉 서양 탐험대의 유물 반출을 정당화 하는 주장이다. 또한 무슬림들은 이 책에 보면 이 지역에 대한 아무런 애착도 갖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다. 인도 원주민이라는 무함마디 하미드 즉 문시(moonshee)를 이용하여 인도 측량국 소속의 몽고메리 대위가 인도와 그 주변을 지역의 지도작성을 위한 계획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 사실을 1866년 5월 14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지리학회에 보고한다. [자세한 내용은(실크로드의 악마들 57~58p참조)]문시의 행동과 신강의 원주민들의 문물 도굴 행위는 당시 신강의 사람들이 대대로 그 지역에 살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 할 수 있으며, 당시의 중국인들이 유물에 대해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소위 우리가 말하는 중국인의 정체는 그들을 비하시키는 되놈이라는 집단과, 무슬림, 그리고 서구열강은 한 패거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서구열강의 대기업 , 무슬림과, 되놈, 그리고 일본이라는 정체불명의 국가는 그 하청업체 인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돈과 시간,인력을 파견하면서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수많은 돈황과 쿠차 , 베제클릭 천불동, 호탄등등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발굴한 벽화, 조상, 고문서, 즉 수많은 예술품을 얻기 위해 목숨 걸고 많은 양귀자들이 파미르를 넘어다닌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는 그들의 사상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철저한 자본주의적 인식이다. 눈 앞의 금은보화에 ?겨 이성을 잃는 그들의 사고 방식과 철저한 개인주의, 수천년에 걸친 문명의 성과와 그로 인해 축적된 철학이 스며든 유물이, 그들의 눈에는 단순히 아름답고 우와한 예술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나 보다.. 마치 보물섬을 찾아 나서는 해적들 처럼......그리고 그 지역에 대대적으로 무슬림들이 거주하게 된다. 혹은 무슬림으로 개종을 강요 받았을 것이다.(보충설명은 차후에 설명하겠음)
타클라마칸은 중앙아시아의 모래 바다라고 불린다. 이 사막은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래 폭풍으로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유명한 약탈가 스벤헤딘은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막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 사막을 횡단한 두 사람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다. 인도 주재 영국군 정보장교 마크 벨 대령과 당시 청년이었던 허즈번드이다. (허즈번드는 후에 卿이 된다) 이들은 북경에서 인도까지 누가 먼저 횡단하는 지를 경쟁했는데 벨이 5주 먼저 주파했다.
"훗날 벨은 고비사막에 대해 약간 우쭐거리는 듯한 투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물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지표면 가까이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많았다. 여행자들은 사막을 건너는 것에 대해 대단한 일 처럼 떠벌이지만 사실 별로 힘들 것은 없다. 우리는 카쉬카리아를 출발하기 전에 카쉬카리아의 사구와 평지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카쉬가리아의 사구와 평지라는 것은 타클라마칸의 변두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도 다른 여행자들처럼 이 사막을 조심스럽게 우회하였던 것이다."
위의 책 29~30p
타클라마칸에 대해 지구상 가장 최악의 사막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여행을 하는 데는 별로 힘들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고비사막에 대해서도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무리 타클라마칸의 변두리라 할지라도 여행자들에게는 타클라마칸, 롭사막, 고비사막은 지금도 매우 악명 높은 사막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투르판은 화염산, 열하지방으로 까지 알고 있다. 카쉬카르에서 현 북경, 현재의 옥문관을 통과해야 현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것 상식인데 그 악명높은 사막들을 건너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쉽다니.... (이 스토리는 100%조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보면, 당시의 즉 20세기 초까지 만해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정도는 되었던 것이 아닐까?그런 투르판의 동쪽에 엄청난 크기의 사원인 베제클릭 천불동이 있다. 승려 수천명이 거주하고 수련할 수 있는 ,그리고 투르판에는 카레즈라는 첨단 수로시설이 있다.
베제클릭 사원
피터홉커스는 서역 남로의 가장 큰 오아시스라 불리는 호탄(우전국) 에 대해 법현의 ‘불국기’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나라는 토지가 기름져서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하였고 모두 불법을 받아들여 불교가 생활화 되어 있었다. 승려들의 숫자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는 왕의 새로운 사원의 장엄함에 감동을 받았는데 이것은 삼대에 걸쳐 80년동안 공사를 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높이가 스물다섯 길 약 80미터 나 되고 조각을 한 위에 금은으로 장식을 하고 칠보(七寶)로서 단장을 하였으며, 탑 뒤에 세운 불당도 장엄하기 그지 없으니 서까래며 기둥, 문과 창이 모두 금박으로 치장되었고.... 큰 가람만 14좌가 있었고.주민들은 친절하였다. 사 방에 승방을 지어 놓고 승려들에게 제공하였으며 그외에 필요한 물자들도 마련하였다.......궁정에서 열린 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4월 1일이 되면 성안의 도로들은 깨끗이 청소되고 물이 뿌려지며,거리는 장엄하게 꾸며진다. 성문위에는 갖가지장식으로 꾸며진 장막이 쳐지고 그 아래에왕과 왕후가 그리고 궁녀들이 자리잡는다."그리고 법현이 머물던 절의 승려들이 이끄는 행렬이 시작되는데 성에서 3~4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사륜으로 된 수레를 만드니 높이가 세길(약 10미터)이 넘고 형상은 마치 칠보로 꾸민 움직이는 전당과 같았으며, 비단으로 된 기(旗)와 천개(天蓋)를 매달았다. 고 하였다. 이수레의 한 가운데는 부처가 서있고 두명의 보살이 양옆에서 시위를 하고 있으며 여러 천신을 말을어 시중들게 하였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46p
같은 지역을 대당서역기에서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구살단나국(호탄)의 둘레는 4천여리이며, 모래와 자갈이 태반을 이루고 있고 땅은 좁다. 농사가 잘 되며 온갖 과일이 많이 난다. 양탄자와 가는 털을 생산하는데 가늘게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 또 백옥과 예옥을 생산하고 잇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아다닌다.
풍속은 예의를 알며 사람들의 성품도 온화하고 공손하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능을 익히며 여러 기술에 널리 통달해 있다. 인민들은 부유하고 집집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음악을 숭상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춤과 노래를 즐긴다. 소수의 사람들은 털옷이나 모직물의 옷을 입고 대부분은 명주를 기운 옷이나 흰 모직물의 옷을 입는다.
행동거지에는 예의가 있고 풍속에는 기강이 있다. 문자와 법률, 제도는 인도의 것을 따르고 있지만 필법이나 양식을 조금 바꾸었으므로 상당히 새로운 부분이 있고 말은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가람은 백여 곳이 있으며 승도는 5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대당서역기 P383
아래는 법현전에 호탄에 관한 인터넷 검색기록이다.
행상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성문의 누각에 있던 왕비와 시녀들은 많은 꽃을 뿌렸는데,그 흩날림은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우전에는 14개의 대사찰이 있었으며, 한 사찰을 행상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그러므로 모두 14개 사찰의 행상이 끝나는 것은 4월14일이었다.이 14일동안 성 안에는 석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상의 행렬로 붐볐던 것이다.
『법현전』은 우전의 또 하나의 사찰인 왕신사에 관해서도 기록하는 있다.왕신사는 성의 서쪽으로 7,8리 되는 곳에 있으며,창건한 지 이미 80년이 되었다고 한다.3대의 왕에 걸쳐 건립된 이 사찰은 탑의 높이가 75미터나 된다고 하므로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건물은 금․은으로 칠해져 있고 여러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탑 뒤쪽에는 불당이 있는데, 그 기둥과 창문도 모두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또한 아름답게 장식된 승방도 있었다고 한다.이것으로
5세기 초에 우전의 사찰이 얼마나 장관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pds2&y_number=49
법현전(法顯傳)〉에서는 그 모습을 “불상을 그 수레 안에 세워 두 보살로 하여금 모시게 하였고 여러 천신들을 만들어 모시게 했는데 모두 금과 은으로 조각해 공중에 매달았다. 불상의 수레가 성문 100보 전에 이르자 왕은 왕관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서 손에 꽃과 향을 들고 맨발로 성문으로부터 걸어 나와 불상을 맞이하여 이마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절하고 꽃을 뿌리고 향을 살랐다. 불상이 성으로 들어올 때 문루 위에 있던 왕비와 채녀들이 꽃을 뿌리자 그 꽃들은 나부끼며 밑으로 떨어졌다. 이같이 장엄하게 꾸며진 수레들은 수레마다 각기 달랐는데, 한 승가람이 하루씩 행상을 했으므로 백월 1일에 시작해 14일에 행상을 마쳤고, 행상을 마치면 왕과 왕비는 궁으로 돌아갔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9630
여기서 수서의 호탄 열전을 보자.
隋書/列傳 凡五十卷/卷八十三 列傳第四十八/西域/于闐于闐
于闐國,都葱嶺之北二百餘里。其王姓王,字卑示閉練。都城方八九里。國中大城有五,小城數十,勝兵者數千人。俗奉佛,尤多僧尼,王每持齋戒。城南五十里有贊摩寺者,云是羅漢比丘比盧旃所造,石上有辟支佛徒跣之跡。 于闐西五百里有比摩寺,云是老子化胡成佛之所。1)俗無禮義,多賊盜淫縱。王錦帽,金鼠冠,妻戴金花。其王髮不令人見。俗云,若見王髮,年必儉。
土多麻、麥、粟、稻、五果,多園林,山多美玉。東去鄯善千五百里,2)南去女國三千里,3)西去朱俱波千里,北去龜茲千四百里,東北去瓜州二千八百里。大業中,頻遣使朝貢。
위의 붉은 색 글씨는 기존 번역본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 내용은 여타의 정사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불교국가이고 승려가 많다는 내용과 석상에 피지불도의 발자국이 새겨저 있다. 우전의 서쪽 오백리에 비마사가 있다는 것과 노자가 호(오랑캐)들을 성불시키기 위한 곳이다. 토질이 좋아 오곡이 있고, 산에 아름다운 옥이 많으며 동북으로 과주와 이천팔백리, 동으로 선선과 천오백리 떨어져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위의 검은색 굵은 글씨로 표시한 其王姓王 : '그나라 왕은 성이왕씨이다. '
1)俗無禮義,多賊盜淫縱 : 풍속이 예의가 없고, 도적이 매우 많으며,음란한 것을 좋아 한다.
법현전: 주민들은 친절하였다 . 정사가 잘못기록한 것일까 법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불교를 숭상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문화와 예절이 있는데 어떻게 풍속이 문란하고 도적이 많다는 것일까, 그리고 군대가 수천이나 된다는데.. 그래서 25사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방견문록에도 이렇게 모순 된 기록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 주된 내용은 불교도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혐오이다. 주민들은 음란하고 도적이 많다. 정사의 기록과 동방견문록 교감자들의 불교도들에 대한 생각은 매우 공통적이고 일관됨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사서를 조작한 장본인들은 기독교도들과 이슬람이 아닐까?
2)南去女國三千里: 남쪽으로여국이 삼천리 떨어져 있다.
남쪽에 여국이 있다? 총령의 남쪽에 여국이라, 여국은 발해라고 하기도 하고 여진이라고 하기도 하고 는데 지역은 북인도 지역이다. 그럼 혹시 발해 즉 대진국이 북인도에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이지역을 박트리아라고 하기도 하고 1856년 제작된 페르시아 지도에는 대 불가리아 Great Bulgar 라고 표기 되어 있기도 하다.
3)西去朱俱波千里,北去龜茲千四百里: 서쪽으로 주구파가 천리 북쪽으로 쿠차(구자)천 사백리 떨어진 곳에 있다.
魏書/列傳凡九十二卷/卷一百二 列傳第九十/西域/于闐國
위서 열전 서역 우전국호
自外風俗物產與龜茲略同。... : 풍속과 물산이 쿠처(구자)국과 대략 같다.
自高昌以西,諸國人等深目高鼻,唯此一國,貌不甚胡,頗類華夏。
고창의 서쪽 제국(제후국등)은 눈이 깊고 코가 높다. 오직 이나라만 그런데 용모가 호(오랑캐)와는 다르며, 매우 화하(중원)과 그 생김새가 유사하다.
《通典》卷一百九十二 边防八/ 于阗
其地多水潦砂石。气候温,土良沃,宜稻麦,多蒲萄。有水出玉,曰玉河。国人善铸铜器。其居曰西山城,有屋室市井蓏蔬,与中国同。(蓏,力果反。)王所居加以朱画。其人恭敬,相见则跪,其跪一膝至地。书则以木为笔札,以玉为印。国人得书,先戴於首,而后开封。自高昌以西,诸国人多深目高鼻,惟此一国,貌不甚胡,颇类华夏。
그러면 속칭 호인 오랑케는 눈이 깊고 코가 높지 않다는 것인가? 그리고 화하가 중원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라면, 이곳이 중원 지역이것이 당연한 것 아닌것인지.. 중원은 중화로 중국(천자 직할지)와 그 주변의 사왕들에게 봉한 지역을 포함한, 해내海内지역을 말함인데 중원 힌두쿠시와 파미르를 중심으로 사방 3천리리가 되고 그래서 애국가에 조선을 무궁화 삼천리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또한 이 지역은 고구려가 있던 곳이다.
通典 邊防典 第 七 西 戎 三 西 戎 總 序
樓 蘭 且 末 杅 彌 車 師 高昌 附 龜 茲
車 師 高 昌 附
전략) 諸城各有戶曹 水曹 田曹 。每城遣司馬 侍郎相監檢校 名為城令 。服飾,丈夫從胡法 , 婦人略同華夏 。 兵器有弓 箭 刀 楯 甲 。 文字亦同華夏 , 兼用胡書 。 有毛詩 論語 、孝經 、歷代子史 集學官弟子 以相教授 。雖習讀之 而皆為胡語 。 賦稅則計田輸銀 無資輸麻 布 。 其刑法 風俗 婚姻 喪葬與華夏大同 。 其人面貌類高麗 俗事天神 兼信佛法 , 度沙磧 一千餘里 ,四面 茫然 , 無有蹊徑 。 欲往者 , 不可準記 , 唯以人畜骸骨及駝糞為驗 。 路中或聞歌哭之聲 ,行人尋之 ,多致亡失,蓋魑魅魍魎也 。故商旅往來 多取伊吾路 。
같은 통전 변방전 16 동이전에 거의 똑같은 문구들이 있다.
邊防二 東夷下
高句麗 東沃沮 挹婁 勿吉又曰靺鞨 扶桑 女國 文身 大漢 流求 閩越 高句麗
高句麗,後漢朝貢,云本出於夫餘先祖朱蒙。朱蒙母河伯女,為夫餘王妻,為日所照,遂有孕而生。及長,名曰朱蒙,俗言善射也。國人欲殺之,朱蒙棄夫餘,東南走渡普述水,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句麗,以高為氏。及漢武滅朝鮮,以高句麗為縣,屬玄菟郡。賜以衣幘、朝服、鼓吹,常從玄菟郡受之 遂名此城為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
其國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而為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其俗節於飲食,而好修宮室。以夫餘別種,而言語法則多同,而跪拜申一腳,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消奴部為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大加、主簿、優台、使者、皁衣先人。其俗淫,皆潔淨,國中邑落男女,每夜群聚為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為奴婢。婚娶之禮略無財幣,若受財者謂之賣婢,俗甚恥之。父母及夫喪,其服眺於華夏,兄弟則限以三月。兵器有甲、弩、弓、箭、戟、槊、矛、鋋。樂有五絃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賦稅則絹布及粟,隨其所有,量貧富差等輸之。其馬皆小,便登山。本朱蒙所乘馬種,即果下也。
畜有牛、豕,豕多白色。其人性凶急,有氣力,習戰鬥,好寇抄,沃沮、東濊皆屬焉。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漢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之別種,依小水作居,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中国古籍全录 晉康帝建元初,慕容皝音晃率兵伐之,大敗,單馬奔走。皝乘勝追至丸都,焚其宮室,掠男女五萬餘口以歸。釗後為百濟所殺。其後慕容寶以句麗王安為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安始置長史、司馬、參軍官,後略有遼東郡。至孫高璉,東晉安帝義熙中,遣長史高翼獻赭白馬,以璉為營州諸軍事、高麗王、樂浪郡公。宋元嘉中,又獻馬八百匹。自東晉、宋至於齊、梁、後魏、後周,其主皆受南北兩朝封爵,分遣貢使。初後魏時,置諸國使邸,齊使第一,高麗次之。南齊武帝永明中,高麗使至,服窮蔥,冠折風。中書郎王融戲之曰:「服之不衷,身之災也。頭上定是何物?」答曰:「此即古弁之遺像也。」中国古籍全录
自東晉以後,其王所居平壤城,即漢樂浪郡王險城。自為慕容皝來伐,後徙國內城,移都此城。亦曰長安城,隨山屈曲,南臨浿水,在遼東南千餘里。城內唯積倉儲器械,寇賊至,方入同守。王別為宅於其側。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皆置官司以相統攝焉。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其國中書籍,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玉篇、字統、字林。
<해동역사>
○ 경자에 제군이 유주(幽州)에 모두 모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부 소감(少部少監) 구행엄(邱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몸소 손익을 따져 편리하고 좋은 것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이때 고구려에 나이가 많고 매사에 익숙한 대로(對盧)가 있었는데, 설거정(薛居正)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관직 가운데 높은 자를 대대로(大對盧)라 하는데, 1품직으로 국사를 총괄한다.” 하였다. 그가 고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秦王)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베어 없애고, 밖으로 이적(夷狄)들을 굴복시켜 홀로 황제가 되어 우뚝 섰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뛰어난 인물이다. 지금 중국의 모든 군사를 몰아 왔으니, 맞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생각 같아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은 채 오래도록 날짜를 끌면서 기병(奇兵)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돌아갈 길이 없어서, 곧 이길 수 있을 것이다.” Re:서경(西京)과 기린각(麒麟閣) 참조『해동역사 세기 6,7,8』 「고구려」문무의 조선사 카페 글쓴이 현상태 2011.07.27. 10:47
이글을 쓸 때만 해도 솔직히 필자는 조선의 서경이 파미르 이서 인지 이동인지 많이 했갈렸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아래의 인용 글을 우선보자.
모용(慕容) 선비(鮮卑)와 고구려(高句驪)| -문무의 조선사 카페 2011년 06월 01일 <글쓴이 : 문 무>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t__nil_cafemy=item
《新 五 代 史 / 卷 72 / 四 夷 附 錄 第 一 / 글란(契丹) :
是謂黃水之南,黃龍之北,得鮮卑之故地,故又以為鮮卑之遺種. : 황수의 남쪽, 황룡의 북쪽인데, 선비(鮮卑)의 옛 땅을 득하였다. 當唐之世,其地北接室韋,東鄰高麗,西界奚國,而南至營州.中略.距幽州北七百里有榆關,東臨海. : 당(唐)나라 세상 때, 그 나라의 땅은 북쪽으로 실위(室韋)와 접하였고, 동쪽은 고려(高麗)와 이웃하고, 서쪽은 해(奚)국과 경계하고, 그리고 남쪽은 유주(幽州)에 이른다.(중략). 유관(楡關)은 유주(幽州)의 북쪽으로 700 리 떨어져 있고, 동쪽은 바다(海?)에 임한다.》
필자 주: 是謂黃水之南,黃龍之北,得鮮卑之故地,故又以為鮮卑之遺種. : 황수의 남쪽, 황룡의 북쪽인데, 선비(鮮卑)의 옛 땅을 득하였다. 황수는 시라무렌강=시르다리아 라고 전회에 설명하였다. 황남은 모용황이 다스리던 燕 지방인데 운중,삭방,계, 등등으로 불리운다. 즉 시라무렌의 남쪽 지방이 선비이고 유주이며, 글안이 돌아다니던 지역인 것이다. 현재의 사마르 칸트 혹은 샤흐리브즈= 케쉬 지역 인데 이곳은 걸사국이고 영주지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안록산이 있었고 그 전에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있던 곳이다.
當唐之世,其地北接室韋,東鄰高麗,西界奚國,而南至營州.中略.距幽州北七百里有榆關,東臨海. : 당(唐)나라 세상 때, 그 나라의 땅은 북쪽으로 실위(室韋)와 접하였고, 동쪽은 고려(高麗)와 이웃하고, 서쪽은 해(奚)국과 경계하고, 그리고 남쪽은 유주(幽州)에 이른다.(중략). 유관(楡關)은 유주(幽州)의 북쪽으로 700 리 떨어져 있고, 동쪽은 바다(海?)에 임한다
필자주 :여기서 당나라 시절이라 함은 당의 건국 초기에 해당한다. 북쪽에 실위가 있는데, 시르다리아의 북쪽 키질오르다 지역. 동쪽은 고려 경계 지금의 타슈켄트, 안디잔, 코칸트가 있는 페르가나 지역이다.
서쪽은 해국 지금의 카자흐 서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 남쪽은 유주 사마르칸드,케쉬,테르메즈,발흐 즉 아무다리아 경계 ,
유관은 유주 북쪽700리 즉 사마르 칸트의 북쪽 시르다리아 유역 부하라
혹은 발흐 북쪽 karlyuk 남쪽 12km지점 (아무다리아 경계) 부하라 보다는 karlyuk 지방의 성채가 더 적절하겠다.
동쪽으로는 바다(海?)에 임한다. 동쪽이 중원지역이니 당연히 海內지방이다. 그리고 그 동쪽에는 또한 시르다리아 중류의 큰 호수 밀집군이 있다. 실제로 동쪽에 Sirdarya 라는 지명의 작은 도시가 있다.
즉 글안의 전성기 중심강역은 시르다리아와 아무다리아 사이의 서쪽지방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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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너 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 것은 아닌지요?^^ 기회가 되면 올리겠읍니다. 요즘 시간에 쫒기느라 글이 졸필입니다.
<아시아/조선>을 주장하는 님의 주장과 근 근거로 하는 옛 기록을 잘 보았습니다. 또한 사막에 대한 근세기의 몇 분 기록도 있군요. 그러나 수천년전, 일천여년전의 타클라마칸이나 백용퇴지역등을 기록한 역사서를 보면, 아주 험난하여 길 가에 동물들의 시체가 즐비했으며, 여행 역시 집단으로 모여 갈 수밖에 없다는 여러가지를 적어 놓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본시 불교국가였으나 점차적으로 회교국가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근세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중앙아시아가 조선의 변두리지방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나 조선의 중국지방이라는 것에는 여러가지 난제가 있습니다. 이는 곧 지리, 지형, 방향적인 문제입니다.
만약 중앙아시아가 조선의 중원(중국)지방이었다고 한다면 평안도, 함경도, 항해도 지방은 어디어야 하며, 충청도 전라도는? 강원도는 현 신강성? 중요한 것은 아시아/조선을 주장하는 분들이 인용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근세기의 기록입니다. 만약 군국주의, 해상세력등이 조선을 해체하려 그곳지방을 철저하게 파괴했다고 한다면, 이러한 그들이 근세기의 기록을 그대로 놔 둔 이유는 무엇일까? 고심해야 될 사항입니다. 동방견문록을 봐도 당시 중앙아시아는 사막지대와 초원지대가 많았다고 합니다. 님의 주장을 무조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지리, 지형, 방향적인 면을 먼저 설득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님께서 올리신 사진을 보십시요. 그곳 지방이 풍요로운 중국지방이나 많은 인구가 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삶은 먹을 것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저런 기후대는 일, 이백년만에 바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저도 젊었을 때 회사에서 파견되어 중동지방에서 5-6년을 살았습니다만, 그들의 삶은 수백년, 수천년전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지형, 지리, 기후는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주장하는 대륙조선의 변경지방이 현 신강의 서쪽지방입니다. 그것은 옛 역사서 원전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님의 연구에 발전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이렇게 큰 사원이 있다는 것은 즉 승려가 대략 5천에서 1만 정도 된다는 것은 그 지방 인구가 적어도 50만 이상은 된다는 것입니다. 옛 역사서 원전을 붓들고 평생을 찾아봐도 아 똑같은 기록 뿐입니다. 현 서안을 중심으로 한 서북방을 서역의 한 계로 고정하고 비 논리적인 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절가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 무슨 도적이 창궐하고 풍속이 음란하다 하며, 그 풍속과 문명이 화하와 같다면 그곳이 중원인 것입니다. 지형지리의 오류에 대해서 선생님깨서 주장하시는 조선의 서북변방 이론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기본적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동방견문록/대당서역기/각종 여행기 정사 현대사료 문집
다 손을 탓지요. 그나마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서세동점시기의 서구열강들이 펼친 식민지 쟁탈전과 그 유물발굴사를 통해 가려진 부분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것이구요.. 동방견문록의 내용들에 중앙아시아는 초원지대도 있으나 매우 비옥한 지역도 많았습니다. 중앙아시아와 그루지야 러시아사에 대해 좀더 연구 시도를 부탁드립니다. 중국 정사 원전과 한문사료 로는 많은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연구에도 많은 성취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언젠가 같이 조선을 찾고자 하면 동일 선상에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무조건 저의 사관이 옮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니다. 자세한 지리 비정은 차우 글에서 보여 드리겠읍니다. 기대하세요 ^^
승려는 그 지방 인구와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황연구에 대한 서적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서역이란 서쪽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서역은 당시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누가 서역이란 말을 사용합니까. 서안의 서쪽과 서북방은 현재의 중앙아시아 지방을 포함합니다. 방위 개념으로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시아/조선은 너무 폐쇄적 구조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론이나 주장이나 반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지요. 그곳을 중국이라 주장하는 것보다 문제는 딴 데 있습니다. 학문이란 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지름길, 돌아가는 길, 반점에서 다시 오는 길등등 많지요.
사막에서 왜 중국을 찾으려는 건지..... 중국인이 극기훈련을 좋아하는 것도 아닐텐데요. 옥야천리였던 타클라마칸과 고비를 사막화 시켰을까요? 백 여년 전의 그곳의 기후가 정말 궁금하기는 합니다.
현 상태님께서 열심히 연구하시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의 카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은 못드립니다만, 또한 같은 조선사 연구를 하면서 헛점을 노리는 듯한 그런 주장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말은 하지 못합니다. 다만 반론의 여지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주장이 꼭 옳다는 것이 아니며, 반도조선, 대륙조선, 그 외 지방의 조선도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 논리와 그 논리를 증거, 고증하는 것만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추정, 비정, 추측, 추리를 여러 회원님들께 설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님의 주장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니 결코 오해는 없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심정 이해 합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보충할 내용이나 반론의 헛점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사를 연구하면 연구할 수록 지형, 지리방향 등은 원전의 기록을 참고 할 망정 상식선에서 합당한 부분, 즉 조작사와 참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연구할 생각입니다.
무슨 우려를 하시는건지 저는 잘 와닿지가 않는군요. 지금 대조연에서도 사료를 들어가며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이제는 외계인이 조상임을 알때가 되었다지요. 또다시 말씀드리지만 논리가 합리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사료만 찾다가는 평생가도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반드시 역사를 찾고 사료를 해석해야 합니다.
사료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것은 대조연만으로 충분합니다. 건방진 발언일진 모르나 해석에 가장 앞선 분은 현상태님이고, 논리에 가장 앞선 분은 러브선입니다. 물론 몇가지 과장은 있지만, 적어도 역사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원자력이나 외계인에 대한 것은 동의하지 않으며, 서양의 산업혁명이 역사적 사건인지 아직
동의하지 못합니다. 이는 과학적 접근과 검증을 시도해야 밝힐 수 있는 사안이라 봅니다. 문무님께서 걱정하시는 헛점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생각합니다. 지금의 역사가 거짓이고 지금의 국가와 세계질서가 그에 기반한 것일진대 연구에 스스로 제약을 가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좋은 약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조연이 망
망하여도 역사는 점점 밝혀질 것이며 그것을 지켜보는 민심은 망설임없이 깨어날 것입니다. 자유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논리적 타탕성에 맞추어 논쟁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러브선님으로 수정합니다. 폰으로 쓰다보니 오타가ㅠ.ㅠ
피라미드가 외계인이 세운 것일까 추측하는 분들을 보면 참 그 일관성 없음이 의아스럽습니다. 경주의 신원미상인 무덤들은 기필코 신라인의 무덤이 확실하고, 세계도처의 피라미드들은 외계인이 세웠다고 여기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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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이란 용어자체가 서구의 사상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차라리 문화혁명이라 우겼으면 더 오래 속았을 겁니다. 국가와 민족을 포함한 체제의 성장은 경제적, 과학적, 문화적 기술수준의 발전을 요구합니다. 문제는 문화적 기술수준입니다.
문화수준안에 과학기술이 과학수준안에 경제기술이 발전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포함한 체제의 쇠퇴는 내부의 약화와 외부의 도전이 합쳐져 일어나는데, 조선의 경우 외부의 세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부의 붕괴가 망한 이유입니다. 그에 따라 문명까지 쇠퇴한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양반도 배가 도덕도 찾고 하는 것이 지요. 배고프면 눈앞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즉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앙정부가 천하의 패권을 잡는 것이지요.. 원시 상태에서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현명한 머리를 가진 사람입니다.다 먹고 살자고 기술도 연구하고 그러는 겁니다 기술도 발전하고 하면 문화 철학 종교까지 올라가게 되지요. 그리고 자신을 방어 할 수 있는 군대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모두 경제격에 근본을 둔다고 봅니다. 도시 형성 조건에는 축성을 할 수 있으며 방어가 유리한 고개가 있어야 되고 그 고개를 넘으면 평지가 나오는 곳이 가장 좋지요.
경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상호작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체제가 아닌 국가경제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경제구조는 문화적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이 부정부패입니다. 만일 지금의 미국이나 유럽이 붕괴한다면, 이유는 금융중심의 구조에서 비롯하는 것이지, 먹고살기 어려워 붕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으로, 조선도 경제의 이익을 유럽에게 빼앗겨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정치적 붕괴로 경기침체가 발생한 것이라는 겁니다. 유럽이 얼마나 대단했다고,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리겠습니까?
원인과 결과를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합니다. 그것은 시점의 문제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그 때에 시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뀝니다. 조선이 세계의 패권국이었다면, 전쟁은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 내부 왕실의 붕괴에서 비롯합니다. 거기에 양이와 왜가 개입한 것이지요. 지금의 역사도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봅니다.
문제는 조선을 명, 청으로 분리하고, 왕실의 실체를 숨겨버린 것입니다. 망하기 직전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왕실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권력이 조선에서 영국으로 넘어간 것 뿐입니다. 아직도 공화정인 것이 문명의 현실입니다. 내년 미국, 영국, 프랑스..한국의 대선이 있습니다. 민주정과 공화정이 격돌하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역사가 전진할지는, 인류사적 전환점을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대한>님의 의견은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당시의 사회로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사고한다면 가장 이해가 빠른 편이 될 것입니다. 그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서를 읽고 그 사회상을 이해해야 된다는 점이겠지요.
<원인과 결과를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합니다>라는 말씀은 아주 훌륭한 사고의 테크닉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것은 없습니다 쌓여가는 거품이 원인이고 그래서 혁명이고 진정성있는 중심일수록 오래가고 탐욕과사기성의 혁명일수록 짧븐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