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일기(15) : 역답사(진부역-서원주역)
1. 오늘의 역답사는 겨울 답사에서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에서 시작했다. 기온은 영하 10도에 채 못 미쳤고, 어젯밤에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백설의 공간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하늘은 청량함을 가득 품고 빛과 생기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겨울의 느낌, 겨울의 감각을 제대로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날씨였다.
2. 겨울의 중심을 향하여 걷게 되자, 정확히 40년 전 겨울 한 달 동안 전국을 헤메던 기억이 다시 난다. 이문열의 <그해 겨울>과 최인호 <고래사냥>에 영향을 받고 떠난 겨울의 무전여행은 3년 간의 대학 서클생활의 허무와 불필요한 욕망을 잠재우고 남은 대학생활 동안 원래 내가 계획했던 것을 찾으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떠나는 것’은 무언가를 버리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떠나는 순간부터 걷는 내내 나는 욕망에 시달렸다. 버리려 했던 시도가 집착의 행위로 변모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행기간 동안 어느새 가까웠던 여자후배들의 동선을 따라 걷고 있었다. ‘비움의 여행’은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여행 마지막 일정, 특별한 느낌을 가졌던 후배와의 술자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저 버리고 시작하려 했지만, 직접적으로 관계의 실체와 형태를 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학 4학년 1학기는 또 다른 허무에 허우적거리며 살아야했다.
3. 이성적 사유와 욕망의 괴리는 젊은 날의 상처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하나의 자발적인 사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슬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욕망에 휩쓸려 일상적인 삶을 선택했다고 해도 특별하게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디오게네스가 말한대로 ‘육체의 광기’에서 벗어난 지금, 여전히 젊은 날의 도전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시도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만들어낸 현재의 상황이 그 시절의 허망하지만 의미를 가졌던 도전을 반복할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오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걸으며 다시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향해 걷는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일지 모른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걸어갈 뿐이며, ‘무엇’에 대한 해답은 그 끝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 <진부(오대산)역>은 KTX만 정차하는 역이다. 주변에 큰 규모의 숙소가 많은 관계로 겨울을 보기 위해 찾은 외국인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진부역> 주변은 황량하다. 여기서의 답사는 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하여야 한다. 버스의 시간 동선은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진부역에는 정선으로 가는 ‘와와버스’도 정차한다. 우선 <진부 터미널>로 가서, 그곳에서 월정사-상원사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시간은 약 30분 정도 간다. 눈이 내린 도로를 천천히 이동하면서 버스 밖 눈으로 덮힌 오대산의 아름다운 겨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지만 언제든지 멋진 광경이다. 종점인 상원사에서 내려 약 1시간 동안 미륵암을 향해 눈길을 걸었다. 조금 늦은 시간인지 올라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려오고 있었다. 여유롭게 2023년 시즌 첫 번째 눈다운 눈과 만나며 산과 하늘 그리고 눈의 조화를 즐겼다. 길은 혼자 걸을 때, 왠지 더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게 된다.
5. 내려오는데,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조심하였지만 중간지점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엎어지면서 팔을 짚었는데 다행히 충격은 크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소한 충격이 언제든지 치명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팔굽혀펴기와 스쿼드한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돌아가는 버스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렀다. 다음에 오게 되면 좀 더 일찍 와서 여유롭게 상원사 주변과 오대산의 봉우리를 오르고 싶다. 오늘은 오대산에 대한 정보를 얻고 간다.
6. 오늘의 메인 역답사는 <진부역>이지만, 기차이용 관계로 중간에 <서원주역>도 답사했다. 서원주역에서도 좋은 길을 발견했다. 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섬강 자전거길>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약 40분간 걸으면, <간현관광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역에서 출발하는 길을 찾게 되어 흐뭇했다. 섬강 줄기를 따라 편안하게 걸을 수 있고, 거리도 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코스도 섬강길과 간현휴게소를 결합하면 하룻 동안의 일정으로 적당해 보였다.
7. 오늘의 역답사는 겨울의 느낌과 과거의 시간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그 결합이 만들어낸 추억이 오늘의 내가 ‘해야 할 것’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누구의 간섭이나 걱정도 없이 철저하게 혼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현재의 내가 좋다. 다만 그것을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했고, 힘들게 얻은 것이라면 의미있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느슨하지만 목표는 존재해야 한다. 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이 없다면 시간은 철저하게 파편으로 부서지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집결, 그 속에서 집중해야 할 것을 찾는 작업은 살아있는 동안 지속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제 과거와 같이 답사 중에 느껴지는 술에 대한 집착과 욕망과 허무의 느낌이 약해진 것이 다행이다. 시간의 흐름은 육체의 퇴락을 가져오지만, 반대로 정신의 여유를 선물해주었다. 오늘은 과거와 현재를 겨울 풍경을 통해 되짚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첫댓글 - "나는 무엇을 향해 걷는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다만 걸어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