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돌아와 청소하고 빨래하고 나니 전화가 따르릉....
"선생님 전화가 안돼 애 먹었는데 받으시네요."
"오늘 모임 충무로역에서 있어요 무조건 나오세요 선생님은 작년에 보고 못 봤잖아요."
숨 넘어가듯 자기 말만 하고는 기다린다며 끊는다.
남은 시간 푹 쉴려고 하였으나 털고 일어났다. 송정역 주변 인도에는 할머니들 서너명이 몇가지 야채를 놓고 팔고있다.
그중 한 사람 잔잔한 토종밤을 두어 되 놓고 앉아있다. 맛이 있어 보였다.한 되 샀다.
모임 장소에 가니 한 사람만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과도칼을 식당에서 빌려 밤을 까 먹었다.
하나 둘 모여드는데 30 여분이 걸린다. 오는 사람마다 깐 밤으로 인사를 나눈다. 식후에도 밤을 까 나누며 환담은 나누었다.
아직 현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어 이 모임은 평일이 아닌 토요일에 만난다.
점심 후 영화를 한 편 보는데 놀토(학생까지 노는 토요일)라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젊은이들 틈에 노친네들이 끼어 들 수가 없단다.
그래 포기하고나니 시간이 널널 하단다. 식당에서 수다나 떨다가 헤어지잔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생님 한 분 나 보다도 4살 위 그는 북한에서 목숨걸고 야간 도주한 사람으로 목사 부인이지만 교직에
있으면서도 80 년대 초 한시택시를 두 대 사서 운영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다.
삼양동에서 교회를 개척해 40여년을 목회하던 남편 이제는 원로목사이고 그도 교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노후를 즐기고있다.
한 마디로 똑순이다.
그가 우이동에서 100평이 넘는 단독주택 2층집에서 큰 아들네 가족과함께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24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이다.
남편이 원로목사로 물러날 때 우이동 단독주택을 장만하여 나왔다. 아들이 셋인데 둘째와 셋째에게 32평정도의 집 한 채씩은
사 주었단다. 물론 결혼 시킬때는 전세로 살게 하다가 4년정도 잘 버텨나간 다음에...
그리고는 아들며느리를 불러 모아 놓고 변호사와 보증인 두 명 까지... 유언장을 공증하기 위해서란다.
작은 아들들에게는 아파트 한 채 사 준것으로 이제 더 이상은 주지않을테니 바라지도 말고 우이동 자기집은 자신과
큰 아들몫이니 꿈도 꾸지 말라고 하였단다.
당시 이미 큰 며느리는 시집와 5년동안 살림만 하면서 병이든 시아버지 뒷바라지를 착실히 해온 상태라 아무도 말을 못 하더란다.
그러나 작년에 큰아들 내외가 자식들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를 해야겠다고 하여 우이동 집을 팔아 강남으로 재개발할
낙후된 저층 아파트로 가게 되는 과정에서 결국 자기네 내외는 전세로 강북에 남기로 하였단다.
아들 내외는 임시로 사시다가 강남집이 재개발되면 큰 평수로 받을 수있으니 그 때 다시 합치자고 한단다.
교회에서 나오는 원로금으로 생활하고 본인은 퇴직시 일시금으로 받아 한 푼도 없단다.
그의 말
자식 주지말고 다 쓰자 쓰자 하지만 일정 시대와 6.25를 격은 우리세대는 사치할 줄도 모르고 낭비 할 줄도 모르니 어찌 쓰겠어...
자식 주지 말자고들 하지만 그건 다 남의 이야기일때지 막상 본인의 일이면 그리하기 힘들어....
잔뜩 쥐고 살다가 불시에 가게되면 자식들 반드시 재산 갖고 싸움 나거나 우애 끊어져...
그러니 살아 있을때 정신 멀쩡 할 때 확실하게 해 놓아야 해....
그에 강의아닌 강의를 진지하게 듣던 다른 교사 한명
자기는 홀 어머니의 외동딸인데 장남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니 혼자 살면서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들
뒷바라지 했는데 그래도 할머니가 영리하시어 시골에 재산은 몽땅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단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는 재산 정리를 못하고 돌아가시어 양자로 몫지은 작은 아버지의 아들에게 다 넘어갔단다.
그 작은 아버지가 장로라며 어머니에게 뭐 하나 팔아야 치료비 한다고 도장 가져가 다른 재산 까지도 다 옮겨 놓았단다.
더 놀라운 일은 작은 아버지다니시는 교회 목사가 상속정리 다 하셨느냐며 한 번 알아보고 빨리 하시라고 하더란다.
상속된 재산이라 해도 1년 안에 다른 상속자가 고소를 하면 조정 재판을 한단다. 하마터만 하나도 없이 다 넘어갈 뻔 하였단다.
작은 아버지에게 너무 서운하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였더니 잘못하였노라고 무릎꿇고 용서를 빌더란다.
그래도 그냥 다 줄 수는 없어 변호사를 대고 법정 투쟁을 하여 일부는 찾았지만 억울하다고 한다.
남편은 사립고등학교 교사로 부부교사인 그는 생활이 윤택하여 여의도의 복합 건물 60평에 살며 아들 하나는 의사로
키워 놓았지만 가진자가 더 갖고 싶다더니 친정 재산 빼았긴 걸 못내 아쉬워 한다.
물론 작은 아버지와 양 아들과는 절교하고 말았단다.
오늘은 유산 문제 법을 공부한 날이다.
한 평의 땅도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한 나로서는 남의 일 일 뿐이다.
나 또한 어떻게 정리를하고 가야 할지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아 착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