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서 있으면 멀어지기 쉬운 안개가 있고, 여럿이 모이면 가까워지기 어려운 바람이 있습니다. 오직 다섯이 만나니 안개도 바람도 다 순조로워 서로 부둥켜 안기도 하고 종종 둘 만의 대화도 어질고 무엇을 먹자 무엇을 마시자 맥을 짚자 건강하자며 나누는 우정들도 반가웠습니다.
카페 공지를 보지 않고서는 참가할 수 없는 모임이니 우리가 좀 비싸긴 비싸죠?^^
강양구샘은 토요방과후 인솔로, 서재준샘은 가족모임으로, 나병후샘은 집 흙공사로 이래저래 빠지고 제 옆사람은 함께가자며 서두르다 느닷없이 발목이 꺾여 통통 부어오르는 거예요. 이런 부재 속에서 조촐하니 우린 여덟 봉우리 마지막 바위능선 앞에 앉았습니다. 저는 집에 손님 오는 날이나 요런 산행날 아니면 쉴 날이 없었으니 모처럼 맞은 가벼운 행장에 들뜬 기분...
그리하여 한 차로 보성에서 순천쪽으로 또 꺾이어 고흥 팔영산 너른 들을 내달립니다. 차 안에는 문희옥회장님과 우순일, 최혜숙, 백귀덕, 김진수 요렇게 오붓하죠. 백귀덕선생님은 요날 처음이었는데 낫낫하여 워디 휴게소에 커피가 맛나고 워디 백운동 풍암동 봉선동 삼겹살이며 새코시며 오리탕도 척척 잘 알아서 박사신데, 막걸리 없는 고깃집에서 내가 막걸리를 먹고 싶다카니까 슈퍼에 나가 또 세 병을 사오시는 겁니다. 지난 오색 꽃들은 스러졌어도 오늘 우리들 쑥부쟁이는 제철을 제대로 만났답니다.
별 목표 없이 별 욕심 없이 별 기대 없이 만나고 떠나고 닿고 내리고 걷고 말하는 이것이 풀 같고 숲 같아서 가뿐했죠. 어언 풀 이름도 약도 직장도 나이도 그래서 어찌나 한가한 가을인지요.
팔영의 마지막 령 앞에 앉아 콧등에 얹힌 산을 바라보는데 비가 오려나봐요. 남자가 갈등하는 건 여자들 걱정이 보통인데 두 여선생님의 기운은 펄펄 날아서 훌쩍 앞장서는 겁니다. 두 사람이 앞서고 우리 셋은 뒤에서 쫄쫄 따라댕겼죠. 백귀덕 선생님은 주에 두 번 산을 타시는 '오지형' 다리였고 싸이클러 최혜숙선생님은 시도때도 없이 짓치는 '벽지형' 다리'였으니 너무 든든합디다...
휴게소에서 받아든 원두커피를 따끔따끔 빨다가 가을 들길을 바라보는데 "아, 이 늘그막의 원숙한 가을이 뜨거웠던 옛날보다 좋구나."를 외며 "누런 벼도 익고 검은 벼도 읽어 홍시도 떨어지고 밤톨도 굴러다니느니!" 했죠.
바라는 것이 크질 않으니 쫓기는 것도 별로 없고 구름은 흩어지고 바람 낮은 맛이 곧 시원한 빗줄기도 내리겠구나 싶더니 팔봉에 이르러 흠뻑 젖고 말았어요.
이를테면 절정!
말하자면 카타르시스!
사방이 안개로 문을 닫고 오롯 솟아오른 팔봉의 지붕 위로 아우성치는 환호!!
그 옛적 장대비 속 논길 밭길을 내달리던, 그 비닐 우산 속 팀파니 소리처럼 경쾌한 본능!!!
훅 날려버릴 것같은 세찬 비바람 속에서 우리 모두 입이 찢어지게 걀걀 웃었죠.
우리들 인생도 이처럼 세찬 마루의 비바람 속에서 미친 듯 웃어재끼는 희열이었으면 좋겠다 했어요.
표정은 지워졌으니 몸매로 하랬더니 우순일샘 내외가 번쩍 일어나 부둥켜 안습니다. 나는 흥분하여 그만 안갱을 벗어 던졌답니다.~~~ 내 안경 셋에 하나니 그 하나쯤은 두고두고 팔영산의 세찬 봉우리에 걸어두고 이 짧은 순간을 아쉬워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젖은 옷은 덜덜 떨며 에어컨이 다 말리고 회장님의 젖은 양말은 우리 집에서 갈아 신고 새 집결지 봉선동 어디 고소한 삽겹살집을 향했겠지요. 없던 뒷풀이를 한 잔 했더니 이성을 잃고 그만 아무나 보듬고 내 지갑은 회장님 차에서 다음 날 발견되었다죠.
전설처럼 숙취가 다가 오고 아련히 어떤 취객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저는 또 벙어리가 되어 벽돌을 져나르고 밤까지 '속죄'의 바닥을 깔았답니다.
그러매 다음 만남은 바람처럼 웃돌기로 했답니다. 아쉬운 빈자리들 부르고 까먹은 이름을 외우고
아프거나 아쉽거나 아깝거나 한 벗들 모셔서 또다시 세찬 바람 한 번 맞자 이겁니다...
덕분에 행복하였습니다. 모두들 붉고 아름다운 가을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