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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대학원 실험실에 배달된 신문에 난 ‘우주인 모집 공고’를 본 이후 삶은 달라졌다. 우주만큼. ‘3만6000대 1’의 경쟁을 뚫고 2008년 4월 8일부터 11일간, 지상에서 400㎞ 떨어진 우주정거장에 머물렀다. 착륙선이 불시착해 카자흐스탄 유목민들이 그를 캡슐에서 꺼내줬다. 돌아오니 루머가 번졌다. ‘착륙 때 사고로 골병이 들었다더라’ ‘우주 갔다 와 떼돈 벌어 집도 이사했다더라’…. 그리고 새로운 일상. 강연에 강연이 이어졌고 휴대전화로 인터뷰하고 또 집에 와서 이메일 인터뷰를 해야 했다. 아프리카 꼬마부터 힐러리 미 국무장관까지, 평생 만날 수 없을 만큼의 사람도 만났다. ‘대한민국 우주인 1호’ 이소연의 2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지난 2일 이소연 박사(32·항공우주연구원)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룡동 첨단과학단지에 있는 그의 모교, 광주과학고를 찾았다. 84년부터 남구 주월동에 있던 학교는 한 달 전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규모는 두 배나 커졌고, 시설은 대학 같다. “이제 학교 시설이 안 좋아서 공부 못하겠다는 말은 못하겠다. 니들 큰일 났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그녀는 재학생과 탁구 게임을 시작했다. 6㎝ 높이의 힐을 신고 이리저리 뛰며 스매싱을 날리는 그는 부임한 지 일주일된 새내기 교사 같았다.
“야, 나는 너 다른 거는 모르겠고, 여자 애가 태권도 한다고 했던 것만 기억난다.” 이소연씨 고교 시절, 독일어 교사였던 심제택 교장은 여고생 이소연을 ‘태권도’로 기억해냈다. 중학교 때 ‘영재반’ 마치고 교복을 입은 채 도장으로 달려갔고, 도장동기인 지게차 운전사, 건설인부 아저씨들과 치킨집에서 주스를 들고 회식도 했었던 그였다. 과학고 다닐 때도, 체대입시생들이 다니는 학원에 다니며 태권도 3단을 땄다.
“제가 고2 때 보는 카이스트 입시에 떨어져 재수까지 했거든요. 고3 선생님은 제 얼굴도 기억 못했을 정도예요. 우주인에 선발되니까 친한 친구들이 배신자라고 난리가 났어요. 우리들 신조가 ‘우리에게 1등은 없다’였거든요.” 이소연은 “1등을 한 게 아니라, 끝까지 서바이브(survive)한 것, 버틴 것”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그가 광주의 영재 후배들에게 들려준 강연의 요지는 이랬다. “우주선을 타고 하루에 지구를 16바퀴 돈다. 한 번에 90분씩 걸리는데, 그때마다 아래 보이는 나라의 이름이 러시아말로 나온다. ‘라시(러시아), 라시, 라시…’라고 20분이 나오다, ‘카레이(한국)’는 딱 한 번 나온다. 한국 땅덩어리 좁다. 나라가 어떻다, 교육제도가 어떻다 핑계 대지 말아라. 너흰 행운아다.”
‘1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안 해본 것’에 도전하는 덴 익숙한 그였다. 세상 사람을 늘 먹는 것만 먹는 사람, 안 먹어본 것만 골라 먹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그는 분명히 후자였다. 우주를 향하게 만든 것도 그 마음이었다.
“우리 공돌이들에겐 이상한 특성이 있어요. 실험실엔 위험한 약품이 많아서 실험할 땐 손만 집어넣고 해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어서 고개를 들이밀게 되거든요. 나이 먹어 고생한대도 어쩌겠어요. 우주에서 실험을 한다는데 어떤 느낌일까, 그걸 어떻게 남에게 맡겨요. 소녀적 환상은 아니었어요.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았죠.”
학교에서 나와 세 살 때부터 살았던 서구 광천동 집에 들렀다. 집은 작고 오래됐지만, 보일러를 직접 놓을 만큼 기계를 잘 다루는 아버지와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어머니가 야무지게 관리해 온 집이었다. “78년생이라 ‘80년 광주’의 기억이 없다”는 이소연. 그러나 그에게도 사건의 잔상은 남아 있었다. 송원초·중 등하굣길, 고문으로 사망한 이들의 사진이 든 포스터들을 맞닥뜨린 게 여러 번이다. “시위하는 대학생들이 붙여 놓았던 것들인데요. 전 그 상황이 싫었어요. 왜 저렇게 죽고, 죽여야 하며, 왜 포장마차 아줌마는 화염병에 맞아야 하나, 난 또 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학교에 가야 하나.” 세상은 세상대로 흘러가라 놔두고, 그는 과학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여느 애들처럼 선생님 몰래 치킨도 사먹으면서 광주의 10대 아이로 살았다.
그런 그가 ‘나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게 신기하다. “제3자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여전히 불공평한 건 많지만, 그간 투덜대느라 못봤던 것,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죠. 우주에 갔다 와 생긴 변화예요.”
억울한 순간도 있었다. “왜 당신 우주관광 하는데 200억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느냐, 불만이다”라고 면전에서 말하는 이도 있었다. ‘죄송하다’고 말해줬지만, ‘이소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가 필요해서 했던 일에 내가 지원해 뽑힌 것’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우주에서 돌아와 그는 ‘우주환경에서의 식물발아 생장 및 변이 연구’ ‘제올라이트 결정성장 실험’등 16가지 주제로 실험, 논문게재, SCI급 저널 발표, 특허등록 등 ‘우주인 이소연’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했다.
하지만 솔직히 요즘은 ‘바닥난 느낌’이다. 머릿속 질문에 답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융합과학인 ‘바이오시스템’ 박사학위자로서 뭘 해야 하나, 대한민국 1호 우주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과학자 이소연’은 길을 묻고 있었다. “이전 세대들만큼 애틋함은 없지만, 어머니 같은 곳 내 고향 광주”에 말이다. 확실한 건, 그는 우주를 버리지는 못할 것, 그리고 이번에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가게 될 것이란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