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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대원사 법문자료> 불기 2553년 9월 27일 (90)
모세의 10계명과 불교의 5계의 비교
오늘 은 基督敎의 10誡命이라고 하는 모세의 10誡命과 佛敎의 5戒를 비교하여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기독교의 10계명인 모세의 10계’는 ‘하느님의 10계’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2면의 돌 판에 써서 계시했다고 하는 10조의 律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제20장과 <신명기> 제5장에 나오는데 거의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맨 앞에 전문(前文)이 있는데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라고 하느님이 스스로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10조의 律法을 내려주고 있는데
1. 너희는 내 앞에서 감히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2. 너희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 따 새긴 우상을 모시지 못한다.
3.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5.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6. 살인하지 못한다.
7. 간음하지 못한다.
8. 도둑질하지 못한다.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0.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이상 10개의 조문을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듯이 전반은 종교적 규정이고 후반은 윤리 규정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세의 10계의 배경에 있는 思想은 하느님은 이집트의 땅에서 노예가 되어 있던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했다는 것입니다. 나(하느님)는 너희들(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출했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에게 전면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느님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계는 하느님이 인간이게 일방적으로 내린 명령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되는 것이며 만약 지키지 않으면 人間은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금방 滅亡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태교의 생각이며 그리스도의 律法은 이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律法인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태오의 복음서> 제22장).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律法과 예언서의 골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기본 戒律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불교의 계율을 살펴보면 불교에는 재가자의 5계가 있는데
1. 불살생계(不殺生戒)
2. 불망어계(不妄語戒)
3. 불투도계(不偸盜戒)
4. 불사음계(不邪淫戒)
5. 불음주계(不飮酒戒)
가 그것인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개조인 釋迦가 제정한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釋迦와 같은 무렵에 마하비라(大雄)라는 宗敎家가 있어 자이나교라는 종교를 열었는데 불교와 자이나교는 비슷한 종교로 학자들은 자매종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도 5계인 오대(五大誓라고도 함)를 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1)불살생 (2)진실 어(眞實語) (3)불도(不盜) (4)불음(不淫) (5)무소유(無所有)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의 4개는 불교와 똑같지만 다섯 번째가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음주계’이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무소유계’인 것입니다. 왜 釋迦는 음주를 금한 것일까. 무소유계 쪽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세의 10계는 神으로부터 人間에게 가해진 일방적인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가 제정한 불교의 5계는 결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5戒를 ‘죽이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음란하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하고 바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戒는 산스크리트어로 ‘실라’라고 하는데 그것은 ‘습관성’(버릇)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얼굴을 씻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살아있는 것을 죽이면 기분이 좋지 않아지도록 그런 습관을 몸에 지니도록 하라는 것이 不殺生戒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하면 기분이 좋지 않게 되도록 거짓말을 하지 않는 습관을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 不妄語戒인 것입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불교의 5戒를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첫째의 불살생계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10계의 ‘죽이지 말 것’은 영역으로 보면 You shall not commit murder 로서 殺人이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므로 우리는 이를 간신 히 나 마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 즉 파리나 모기. 바퀴벌레 등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 지키기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거짓말을 해버리게 되는데 좋지 않은 것이긴 하나 이것은 사람의 약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10계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재판에서 위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정도라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불교의 5계는 지키려 해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금지가 아닌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불교의 戒는 어기기 위해서 있다고까지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겼을 때 우리는 참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한 人間이고 또 다시 파계(破戒)의 행위를 해버렸다고 깊이 참회하기 위하여 5戒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약한 人間이라는 것을 인정하여 그가 거짓을 했을 때도 그것을 용서하는 것이 계(戒)의 정신인 것입니다. 戒는 그것을 어긴 人間을 규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불교에 있어서 ‘계(戒)’와 ‘율(律)’은 다른 것이다. 戒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의지(意志)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戒를 어겨도 아무런 벌칙은 없습니다. 在家信者에게는 이 戒만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의 경우에는 戒만으로는 곤란할 것입니다. 스님은 단체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집단질서(集團秩序)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있었을 경우 이를 처벌해야 하며 그 벌칙규정을 律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律은 出家者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고 在家信者에게는 律이 없는 것입니다.
또 出家者에 가해진 ‘戒律’ 즉 ‘律을 동반한 戒’는 비구(比丘:남자수행자)의 경우는 250계 비구니(比丘尼:여자수행자)의 경우는 348戒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戒律은 ‘음계(淫戒)’ ‘도계(盜)’ ‘살계(殺戒)’ ‘망어계(妄語戒)’인 것입니다. 이 4개의 戒律에 의해 다음과 같은 경우는 바라이죄(波羅夷罪)라 해서 교단에서 추방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바라이죄는 比丘나 比丘尼의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니까 말하자면 死刑에 해당하는 중죄인 것입니다.
1. 음계- 음계에 있어서는 모든 섹스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수간(獸姦)도 안 되는 것 입니다.
2. 도계- 5 마사카 이상을 훔친 경우 5 마사카가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는 잘 모르지만 4 마사카일 때는 바라이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3. 살계- 사람을 죽였을 때에 해당하며 동물을 죽였을 때는 다른 죄에 해당됩니다.
4. 망어계- 아직 깨닫지 않은 사람이 나는 깨달았다고 거짓말을 할 때 그 거짓말을 대망 어(大妄語)라고 합니다. 보통의 거짓말은 바라이죄가 아닙니다.
만약 바라이죄가 적용되어 교단에서 추방된 比丘나 比丘尼는 속인(俗人)이 되는 것입니다. 俗人이 되면 그 삶은 國法의 적용을 받게 되는데 예를 들면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한 사람은 국법에 따라 사형이나 징역형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比丘는 250계. 比丘尼는 348계라고 말했는데 왜 比丘尼가 많은가 하면 여자는 섹스 등에 있어서 아무래도 受動的이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積極的으로 戒를 어기지 않아도 예를 들면 강간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戒의 규정이 복잡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라이죄는 比丘의 경우는 4개이지만 比丘尼의 경우는 아래의 4개가 추가되어 8개가 되는 것입니다. 열거해보면
5. 애욕의 마음으로 남자와 겨드랑이보다 밑에 무릎보다 위를 어루만질 경우.
6. 애욕의 마음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가만히 있었을 경우.
7. 다른 比丘尼가 바라이죄를 범한 것을 알고도 숨겼을 경우.
8. 문제를 일으킨 比丘를 따르고 그로 인해 다른 比丘尼로부터 세 번의 충고를 받은 이후에도 그만두지 않았을 때.
그런데 바라이죄에는 5戒에 있던 ‘불음주 죄’가 없습니다. 比丘. 比丘尼가 술을 마셨을 때는 바일제(波逸提)라는 罪가 되데 그 比丘는 다른 比丘들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比丘는 오전 중외에는 식사를 해서는 안 되는데 정오 이후[‘비시(非時)’라고 한다]에 식사를 하면 그것도 바일제가 되는 것입니다. 比丘 · 比丘尼에게는 이런 자세한 戒律들이 많이 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戒를 어겼을 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이 佛敎의 참회에 해당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고백성사(告白聖事)’인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는 반드시 告白室이 설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조그만 방에 중앙이 벽으로 칸이 막혀 있고 벽 너머에는 신부가 이쪽에는 신자가 앉게 되어 있고 벽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고 철망이 쳐져 있습니다. 이 구멍을 통해서 신자는 신부에게 스스로 자신이 범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얼굴이 신부에게는 보이지 않으므로 신자의 익명성(匿名性)이 보장되므로 안심하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부는 고백의 비밀을 지켜야 하며 만일 殺人의 告白이 나와도 그 秘密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백을 들은 신부는 신자에게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하여 잘 타이르고 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죄를 용서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그러한 ‘죄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이러한 의식이 없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목사에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자의 죄를 용서할 권리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많은 미국에서는 정신분석의(精神分析醫)나 카운슬러가 번창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분석 의사나 카운슬러가 가톨릭 신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백할 수가 없고 자신이 범한 罪에 대한 죄책감을 혼자 견뎌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게 된 프로테스탄트 信者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사단 군 포교분야 1팀 포교사 惠山 李 勝 老 合掌(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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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지요..? 하느님은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받들어 오던 하느님이구요.. 애국가에도 나오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 어쨌든 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 전지전능하고 우주만물을 만들었다는 그 하나님은 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인간에게 구차하게 이런 저런 주문을 해야 하는지.. 그래도 말도 잘 안 듣는 인간들 때문에 골치를 썩여야 한다는 건지..? 애초부터 그런 잔소리 할 필요 없는 인간을 만들면 될 것을.. 그럼 지금의 인간들은 실수로 잘 못 만들었단 얘기인지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너무 말이 안 되는 얘기들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