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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의 치명적 실수"
노키아의 수석디자이너였던 프랭크 누오보는 10년여 전 이동통신사와 투자자들 앞에서
모바일인터넷의 미래를 예측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기 7년여 전에 버튼 하나 위에 컬러 터치스크린이 있는 휴대전화를 선보인 것이다.
음식점을 찾고 레이싱게임을 하고 화장품을 주문할 수 있는 기기였다.
1990년대 후반 노키아는 비밀리에 또 하나의 제품을 개발했다.
인기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애플 아이패드처럼 무선인터넷연결과 터치스크린이 탑재된 태블릿컴퓨터였다.
당시 슬라이드를 보면서 누오보는 “우리가 완전히 잡을 수 있는 시장이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기기는 출시되지 않았다.
연구개발에는 엄청난 돈을 들이면서도 제품출시기회를 낭비하는 노키아 기업문화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1990년대 무선혁명을 이끈 노키아는 스마트폰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지금, 노키아는 주가가 폭락하고
수천 명의 직원이 정리해고되는 가운데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내놓기 위해 고투 중이다.
14년 동안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제조사였던 노키아는 올해
삼성전자에 1위 자리를 내주었으며 저가 휴대전화 제조사에 점유율을 빼앗기고 있다.
시장데이터업체 IDC에 따르면 2007년 말 40.4%라는 점유율을 누렸던
노키아의 올해 일사분기 휴대전화 시장점유율이 전년 동기의 27%에서 추가 하락한 21%를 기록했다고 한다.
금년 일사분기 재무보고서에서도 노키아가 처한 상황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3억4,440만 유로 이익을 기록했던 전년 동기와는 달리 9억2,900만 유로 손실을 기록한 것이다.
매출은 29% 하락한 74억 유로였으며 휴대전화 판매대수는 24% 하락한 8,270만 대였다.
올해에만 64% 하락한 노키아 주식은 현재 1.37유로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애플이 지출한 연구개발비보다 약 4배나 많은 400억 달러를
연구개발에 지출했음에도 노키아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다.
휴대전화산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파벌싸움 때문에
개발노력이 분열되고 휴대전화를 시장에 출시하는 부문과 연구개발부문이 유리된 데 따른 결과이다.
베스트셀러 기기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대신 연구개발에 돈을 뿌린 결과,
2개 이상의 개발중단된 운영체제와 60억 달러 규모의 특허만이 남게 되었다.
현재 특허가치가 노키아 시장가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스테판 엘롭 최고경영자는 전세를 역전시킬 때까지 노키아를 연명시키기 위해 특허매각에 들어갈 예정이다.
“연구개발을 통해 개발된 기기들이 실제로 출시되었다면 노키아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고
엘롭 최고경영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변동이 심한 휴대전화시장에서 길을 잃은 기업은 노키아 뿐만이 아니다.
블랙베리 덕택에 우위를 누려왔던 리서치인모션 역시 아이폰에 대적할 만한 기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리서치인모션의 시가총액은 약 90% 감소했으며 리서치인모션 최고경영자는
투자자들에게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 중이다.
시장을 파악한 제품을 개발하지 못한 리서치인모션과는 달리,
노키아는 오늘날 소비자들이 열심히 사들이고 있는 제품과 비슷한 종류의 기기를 개발했으나 출시하지 않았다.
아이폰이 스마트폰시장에 변혁을 가져온 시점에 스마트폰에서
일반 휴대전화로 중점을 변경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애플이 우리가 생각했던 개념의 제품을 내놓았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프랭크 누오보는 말한다.
“아이폰이 고유한 개념이며 기기라는 말을 들을 때면 화가 난다.”
캐나다 출신으로 2010년 노키아 최초의 외국인 CEO가 된 엘롭 최고경영자는
시장우위 때문에 자기만족에 빠졌던 노키아의 집중력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취임 직후 엘롭 최고경영자는 자체 스마트폰 운영체제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윈도우 모바일 운영체제를 쓰겠다고 발표했다.
윈도우로 갈아탄 덕에 자체 운영체제를 고수할 때보다 훨씬 빠른 1년이라는 기간 내에
신규 라인 루미아를 출시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루미아폰은 저조한 매출을 보이고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발표하지 않은 노키아는 4월에 초기 매출성과가 “반반”이라고 밝혔으며
2개월 후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6월 중순 엘롭 최고경영자는 연구개발을 중심으로 한 17억 달러 비용삭감과
1만 명 직원감축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주 일요일 노키아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루미아 가격을 반으로 깎았다.
노키아는 오랜 세월 동안 시장의 거대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왔다.
1865년 제재소로 출범한 노키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력생산과 고무제품으로 사업부문을 다각화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무너지고 유럽 경기침체가 닥침에 따라
다양한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말라붙으면서 노키아는 위기에 처했다.
시티뱅크 출신으로 1992년 취임한 요르마 올릴라 최고경영자는 휴대전화 집중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글로벌 휴대전화 수요를 다른 제조사보다 빨리 충족시키기 위한 물류전략의 일환으로
독일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 노키아 공장이 지어졌다.
이익이 급증했으며 주가가 따라 오르면서 2000년 전성기 당시 노키아 시가총액은 3,03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핀란드에서 유명인사 반열에 오른 올릴라 최고경영자 등
고위임원이 음식점에 갈 때면 전용연회실을 요구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올릴라 최고경영자는 취임 초기부터 노키아 차세대 혁신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임원진은 통화기능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는 휴대전화가
2000년 즈음에는 수익성을 잃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에 따라 노키아는 모바일 이메일과 터치스크린,
빠른 무선통신망 연구개발에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기 시작했다.
1996년 노키아는 자사 최초의 스마트폰 노키아 9000을 내놓으면서
이메일과 팩스, 인터넷기능이 있는 최초의 모바일기기라고 홍보했다.
중량은 450그램 가량이었다.
2006년 최고경영자직에서 물러났으며 금년 5월 회장직에서 은퇴한 요르마 올릴라는
“스마트폰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했었다. 업계보다 5년이나 빨랐다”고 말한다.
커뮤니케이터라고도 불린 노키아 5000은 영화 ‘세인트’에 등장했으며
일부 사업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는 했으나 대중적 성공은 기록하지 못했다.
2004년 말 미국업체 모토로라는 얇은 휴대전화 레이저로 글로벌 히트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경쟁업체가 값비싸고 “기능이 별로 없는” 휴대전화시장을 잠식하고 있는데도
노키아가 고기능 스마트폰에 너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고 비난했다.
최고재무관리자였다가 2006년 최고경영자 직에 오른 올리페카 칼라스부오는
스마트폰과 일반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통합했다.
그 결과 수익성이 더 높은 일반 휴대전화사업이 스마트폰 사업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고 임원들은 전한다.
2004년 노키아가 스마트폰에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 회원이며
현재 벤처자본가로 활동하고 있는 야리 파사넨은 “노키아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반 휴대전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고 말한다.
노키아 스마트폰은 일반소비자와 이동통신사가 준비도 되기 전에
너무 일찍 출시되었고 그 후 아이폰이 등장했다.
노키아는 아이폰의 위협을 인식하지 못했다.
노키아 엔지니어들이 내놓은 분석보고서는 아이폰 제조단가가 비싸며
노키아의 3G에 비해 원시적인 2G네트워크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 보고서는 아이폰이 1.5미터 높이에서 전화기를 다양한 각도로 떨어트리는
노키아의 엄격한 “추락테스트”를 전혀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아이폰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2008년 노키아 임원들은
아이폰의 세련된 운영체제에 대항할 만한 운영체제를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키아 스마트폰 대다수에 탑재되어 있던 구식 운영체제 심비안을 개선하려는 팀도 있었고
처음부터 운영체제를 새로 개발하려는 팀도 있었다.
당시 프로젝트 관계자에 따르면 두 팀이 사내에서 지원을 이끌어내고
고위임원의 관심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쟁은 노키아 연구개발에 있어 고질적인 문제였다.
“사내정치싸움에 디자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수석디자이너로 근무했던 알레스테어 커티스는 말한다.
“조직구조가 워낙 복잡했기에 일관적이고 미적인 경험을 완성해 내기가 어려웠다.”
2010년 외부개발자가 노키아 스마트폰에 호환되는 앱을
쉽게 개발하게 해주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세부사항에 대한 회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이러한 의사결정이 회의실에서 이루어지지만, 노키아의 경우에는
엔지니어 100여명, 중국과 메사추세츠 등 각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제품관리자들이 독일 호텔 연회장에 모여 회의를 벌였다고 한다.
회의가 진행된 3일 동안 직원들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 이젤에 메모를 했다.
각 프로젝트 대변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모두 자기 일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각 팀은 가장 경쟁력 있는 휴대전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핵심 협력업체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애플이 2007년 7월 아이폰을 출시한지 얼마 후 칩공급업체 퀄컴은
노키아를 상대로 한 오랜 특허 법정전을 합의로 마무리짓고 프로젝트 협력을 시작했다.
폴 제이콥스 퀄컴 최고경영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8년 노키아와 처음 협력하면서 놀랐던 점은
노키아가 다른 기기제조사에 비해 전략수립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었다.
노키아에 큰 기회가 될 만한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면
기회를 당장 포착하는 대신 6~9개월을 들여 기회를 평가했다.
그때쯤이면 이미 기회가 지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10년 엘롭 최고경영자가 취임했을 때 노키아는
전체 휴대전화산업의 총 연구개발비 30%에 이르는 50억 유로를
매년 연구개발에 지출하고 있었음에도 아이폰에 대항할 만한 스마트폰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비용삭감 결정이 있기 전부터 노키아는 유용한 연구개발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각국의 연구소를 방문해서
핵심우선순위가 아닌 프로젝트를 직접 폐기했다.
인도 소비자들이 정부 신규 식별번호에 휴대전화를 연결하게 해주는 프로젝트도 이중 하나였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2008년 80억 달러에 내브텍을 인수하면서
수중에 들어온 위치 및 지도서비스에 대한 집중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이 호응하는 스마트폰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신 스마트폰 루미아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소비자들이
올해 말 출시예정인 윈도우 8을 기다림에 따라 매출이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엘롭 최고경영자 취임 직후 스마트폰 부서장으로 임명된 조 할로는 화웨이와 같은 저가스마트폰 제조사와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수개월 내에 루미아 저가라인을 출시할 예정이라 밝혔다.
또한 태블릿시장 진출에도 “매우 관심이 있다”고 한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루미아 출시 이후 제리 드바드 최고운영관리자 등
고위임원 3명을 해임하면서 영업 및 마케팅부서를 개편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으로 노키아 북미사업부문을 이끌던 크리스 웨버가 신임 최고운영관리자로 선임되었다.
드바드 전 최고운영관리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노키아는 여전히 좋은 아이디어를 제품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올해 상반기 2007년 이래 최대 건수의 특허를 등록한 노키아가
3만 개 이상의 특허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일부는 현금확보를 위해 매각할 수 있다고 한다.
“특허 중 매각해서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결정할지도 모른다.
재기를 위해서는 현금확보가 중요하다.”
"소니와 삼성전자: 브랜드 인지도 역전"
지난 10년 동안 소니와 삼성전자는 서로 대조되는 길을 걸어왔다.
소니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TV제조사로 떠오른 삼성전자는
애플 아이폰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여겨지는 스마트폰 라인을 내놓으면서
고급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반면, 소니는 4년 연속으로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지금까지 글로벌 스마트폰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최근 설문조사결과에서도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디어잡지 ‘캠페인 아시아퍼시픽’과 조사업체 닐슨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공동수행한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한 ‘아시아 최고 브랜드 1,000’에서
삼성전자가 처음으로 브랜드인지도 1위를 기록한 것이다.
2003년 본 조사가 출범한 이래 삼성전자가 소니를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애플은 2위를 차지했으며 2011년까지 4년 연속으로 1위를 기록했던 소니는 3위로 밀려났다.
작년 삼성의 순위는 2위, 애플은 6위였다.
이번 설문조사는 아태지역 12개국 응답자 5,136명이 자동차와 스포츠의류, 맥주와 TV, 스마트폰 등
최대 73개 부문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브랜드 2개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부문에서 획득한 총 점수를 기반으로 순위가 매겨졌다.
물론 여느 설문조사와 마찬가지로 이번 설문조사에도 편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73개 부문 중 18개가 전자제품과 소프트웨어, IT서비스 관련이었던 반면,
자동차산업과 연관된 부문은 3개(자동차, 오토바이, 타이어)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니와 삼성전자와 같은 IT업체가 자동차제조사보다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올해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자동차제조사는 혼다였다(23위).
이번 설문조사는 비슷한 종류의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니 및 삼성전자와 같은 IT기업을 서로 비교할 때 더 유용하다 할 수 있다.
IT부문에서는 태블릿과 스마트폰 등 휴대용 기기가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인식을 형성하는 데 과거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다수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부문에서 애플과 삼성을 1위 또는 2위 브랜드로 꼽았다.
반면, 소니는 태블릿 부문에서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IT기업 중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니와 삼성전자가 제품포트폴리오가
소규모인 애플보다 유리했음에도 애플이 지난 몇 년 간 순위 급상승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2005년 조사에서 애플은 아태지역 브랜드 인지도 77위, 삼성전자는 15위, 소니는 1위를 기록했다.
아이폰 3G가 출시된 다음 해인 2009년 애플은 8위를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10위권에 진입했다.
순위추세를 살펴보면 노키아의 인지도가 크게 하락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2007년만 해도 1위였던 노키아는 올해 25위까지 밀려났다.
캠페인 아시아퍼시픽의 에디터 졸렌 오트렘바는
급변하는 소비자행동과 취향에 발맞추지 못하는 기업의 브랜드 인지도가 순식간에 폭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9년간 꿈 좇던 이 남자… 은행 보일러공에서 지점장 됐다"
운전사 7년→보일러관리 별정직 8년→정규 기능직 4년→사무직 10년만에 부지점장…
■ 이철희 기업은행 신당동 지점장, 땀으로 일군 인생역전 스토리
“지금 생각해도 저 같은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입니다.
임원 운전사로 운전대를 잡으면서 ‘기사만 해야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임원의 저녁 약속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차에서 불을 켜고 자격증 공부를 했습니다.”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IBK기업은행 신당동지점 이철희 지점장(53)이 스스로 밝힌 성공신화의 요인이다.
이 지점장은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인생행로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기업은행에 운전사로 들어와 보일러공으로 일을 바꿨고
은행에 발을 내디딘 지 29년 만에 12일 마침내 ‘은행원의 꽃’으로 불리는 지점장으로 올라섰다.
그는 이날 기업은행 하반기 인사에서 그가 일하는 신당동출장소가 지점으로 승격되면서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특히 그는 올해 1월 부지점장이 된 지 6개월여 만에 지점장으로 승진해
통상 걸리는 4년의 기간을 건너뛰는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이 됐다.
○ 운전사에서 지점장까지
전남 영암군 출신으로 고교만 졸업한 채 상경해 공장과 건설현장 등을 전전하던 그가
기업은행에 입사한 시점은 29년 전인 1983년 9월 30일이었다.
비정규직 운전사로 들어가 7년간 비서실장 등 임원 차를 몰았다.
입사한 지 3년이 되자 정규직 직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은행에서 정규직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보일러공이 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일러 관련 공부를 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았지만
오늘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꾹 참았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부터 기업은행 성동지점에서 별정직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별정직은 정규직과 급여는 거의 같지만 그는 ‘화이트칼라’인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일부러 지점에서 보일러와 관계없는 일을 찾아 하면서 서무 보조일을 많이 도와줬다.
그 사이 인덕전문대를 졸업하고 서울산업대로 편입을 하면서 학력도 쌓아나갔다.
입사 15년 만인 1998년 드디어 정규 기능직이 됐다.
그래도 금융 관련 업무를 하고 싶다는 목마름은 가시지 않았다.
주말을 이용해 한국공인재무설계사, 증권투자상담사 등 자격증 9개를 땄다.
과장 승진에 필요한 ‘책임자 시험’도 2000년 통과했다. 그
는 “금융 업무를 하고 싶은 생각에 일을 찾아서 하다 보니 지점에서 일을 하나씩 맡겨줬다”고 말했다.
○ “상품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팝니다”
그는 2002년 은행 창구에 앉던 날 아침의 설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 설렘을 마음에 품은 채 발로 뛰었다.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갑게, 진심으로 대하다 보니 이곳저곳에 소개해 주는 고객이 늘어났다.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소문도 났다.
지점장으로 승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 고객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작년에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기업의 부사장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왜 직급이 그렇게밖에 안 되느냐’며 물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남들이 늦어도 40대 중반이면 되는 차장을 52세까지 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자 그 부사장이
‘당신이 우리 회사를 주거래 고객으로 맡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고 말했다.
단번에 400억 원을 유치해 ‘예금왕’에 올랐고 올해 1월 차장에서 부지점장으로 승진했다.
특히 그는 매일 아침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스스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그는 “일반 직원들과는 달라야 된다는 생각에서
나도 모르게 열심히 하다 보니까 고객이 나를 키워주었다”라며
“지금도 최고의 은행원이 되기 위해서는 상품보다
나 자신을 먼저 고객에게 팔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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