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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함께한 국군70년 발자취>
창군의 빛나는 주역들이자 조국을 수호한 '영웅'
대한민국 국군 원로 모임인 창군동우회의 모체 ‘군사영어학교’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의 군사영어학교 본관 모습(왼쪽 위)과 1970년 육군사관학교 26기 졸업식 모습(오른쪽 위).군사영어학교는 곧 육군사관학교로 확대 발전하고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은 대한민국 창군(創軍)의 주춧돌이 됐다. 필자 제공 |
대한민국 국군 원로들의 모임에는 창군동우회(創軍同友會)가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을 주도하며 군을 이끌었던 군 원로(元老)들의
모임을 일컫는다. 창군동우회는 광복 후 미 군정 하에서 설립된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 출신들로 구성됐다.
군사영어학교, 국군 창설에 필요한 간부 요원 양성 목적
군사영어학교는 미 군정 시기 우리나라에 왔던 미군들의 가장 큰 애로 사항이었던
‘언어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설립됐다. 하지만 미 군정청에서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장차 국군을 창설함에 있어 필요한 간부 요원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1945년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신학교에 설치됐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5개월 동안 총 110명을 장교로 배출했다.
이들은 졸업하면서 모두가 소위로 임관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때의 군사 경력에 따라
소위부터 대령까지 차등(差等)해 임관했다.
그때 대령으로 임관한 사람은 군사영어학교 설립의 산파역을 담당했고 나중에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이응준 장군이다.
그다음 소령으로 임관한 이는 6·25전쟁 때 반공포로 석방을 주도했던
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이다. 대위 임관자들은 군번 1번부터 5번을 차지한
이형근·채병덕·유재흥·장석륜·정일권 등 5명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군번 4번인
장석륜만 장군이 되지 못하고 대령으로 끝났다. 중위로 임관한 이들은
과거 군사경력이 있는 이성가·백선엽·김백일·최남근 등 4명이다.
이들 11명을 제외한 나머지 99명은 소위로 임관했다.
1945년 12월 5일 설치,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5개월 동안 총 110명 장교 배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대한민국 육군 창설의 주역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미 군정 하에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전국 각지로 파견돼 중대, 대대, 연대를
차례로 창설했다. 그리고 6·25전쟁 이전에는 여단과 사단을 창설했다.
6·25전쟁 때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대령 이상 계급장을 달고
육군총장을 비롯해 육군본부 국장 그리고 야전의 사단장과 연대장 직책을 거의 독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애환도 많았다. 6·25전쟁 이전 공산주의에 가담한 죄로
19명이 사형 또는 파면됐고, 전사·순직 및 사고로 8명이 희생됐다.
그 결과 6·25전쟁에는 그들 27명을 제외한 83명이 참전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6·25전쟁을 거치며 군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했다.
6·25전쟁 당시 남아 있던 83명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78명이 장군으로 진출했다.
5명만 장군을 달지 못했다. 그만큼 6·25전쟁에서 그들이 남긴 공적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이승만과 장면 그리고 박정희 정부를 거치며
군의 주요 직책을 거의 독점했다. 이들은 1960년대 말까지 군의 요직인
합참의장과 육군총장을 거머쥐고 있었다.
6·25전쟁 거치며 83명 중 78명이 장군으로 진출
그렇다보니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의 군 경력은 화려했다.
육군대장이 8명(백선엽·정일권·이형근·김종오·민기식·김용배·김계원·장창국),
중장이 26명, 소장이 23명, 그리고 준장이 21명이었다.
그 가운데 국무총리 2명(정일권·강영훈),
국방부 장관 6명(송요찬·장도영·박병권·정래혁·최영희·유재흥),
합참의장 7명, 육군참모총장 13명을 배출했다. 대단한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군뿐만 아니라 정계와 실업계로 진출해 국가발전에도 공헌했다.
그들의 삶은 곧 대한민국 태동의 역사요, 군의 시발점을 알리는 역사였다.
그들은 군과 함께 성장하며 대한민국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렇지만 군사영어학교 출신들도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그들도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군을 떠나게 됐다. 대체로 3차에 걸쳐 군문을 벗어났다.
1차는 1960년 4·19 이후였다. 그때 백선엽 대장을 비롯해 송요찬 육군참모총장과
유재흥 1군사령관 등이 떠났다. 2차로는 5·16 이후 반혁명으로 지목된
이한림·강영훈·김웅수·장도영 장군 등이 떠났고, 마지막으로 1960년대 말에는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김계원 육군참모총장과 장창국 합참의장이 군을 떠나면서
찬란했던 군사영어학교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그때가 1960년대 말이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20여 년이었다. 20대 중반에 군문에 들어온 그들이 장년의 나이에
군을 벗어나게 됐다.
군문 벗어난 출신들이 친목단체 ‘창군동우회’ 결성
군문을 벗어난 이들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에게는 아직도 국가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들은 정부 각료, 국회의원, 외국 대사, 공기업 사장 등으로 진출해
국가발전에 마지막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하나둘씩 제2 또는 제3의 직장에서
물러나면서 옛 군대 향수를 되살리기 위해 친목회를 만들었다.
자연스러운 모임이었고, 활동이었다. 그렇게 해서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로 구성된
창군동우회가 결성됐다.
어려울 때 군대를 창설해 이끌었던 그 당시를 회상하기 위해 만든 친목단체였다.
나아가 군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한 노병(老兵)들의 충정이
담긴 모임이기도 했다.
창군동우회는 2000년 6·25전쟁 발발 50주년을 계기로 크게 활성화됐다.
모임은 대한민국 첫 대장 계급장을 달았고, 육군총장을 두 번이나 지냈으며,
합참의장을 끝으로 군문을 떠났던 백선엽(白善燁) 대장을 중심으로 뭉쳤다.
시간이 흐르면서 창군동우회 멤버들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차츰 세상을 등졌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40∼50명에 이르던 창군동우회 멤버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이제 몇 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러 분이 돌아가셨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끝으로 군문을 떠났던 강영훈 국무총리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군참모총장·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계원 장군도 세상을 떠났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장군의 영원한 오른팔
황헌친 장군도 돌아가셨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세월의 무게 견디지 못하고 현재는 3명만 생존
2018년 현재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창군동우회 멤버는 이제 모두 합해 3명만 생존해 있다. 국내에 2명, 해외에 1명이다. 국내에는 백선엽 대장과 육군정보국장을 지낸 김종면(金宗勉) 장군이 생존해 있고, 해외에는 인사통으로 유명한 임선하(林善河) 장군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분들의 나이도 모두 90세를 훌쩍 넘었다. 그야말로 망백(望百)을 넘어 백수(白壽)에 가까워진 나이다. 모두가 창군의 산 역사이자 증인들이다.
오로지 나라만… 대한민국 수호한 애국자이자 전쟁영웅들
6·25전쟁 때는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대한민국을 수호한 이 땅의 진정한 애국자이자 전쟁영웅들이다.
오늘날 60만 대군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국군은 모두 그분들의 손끝을 거쳐 발전했다.
그런 점에서 창군동우회의 마지막 남은 그분들에게 60만 국군과 함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첫댓글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몰랐던 내용들이네요.
구상낭님! 댓글 감사합니다. 사진속의 창군주역 4분에 대한 사후평가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있네요
대한민국 창군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