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랑 이지석(正郎 李志奭)
[생졸년] 1652년 (효종 3)~1707년(숙종 33) / 향년 55세
[생원]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生員) 3등(三等) 43위(73/100)
[본관] 벽진(碧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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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랑 이공 묘갈명(正郞李公墓碣銘)
내가 젊은 시절 사관(史館)에서 숙직할 때, 이지석(李志奭) 공은 형조 낭관이었는데 자주 찾아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공을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는데, 기상과 풍모가 시원하여 속세의 사람과는 달랐다.
지금은 30년이 지나 공의 묘소에 심은 나무가 이미 한 줌이 되었고 나도 백발이 무성하다. 고아(孤兒)들이 묘도문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병들어 글을 짓지 못하지만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눈물을 거두고 서술한다.
공은 자가 주경(周卿)이며 성주(星州) 사람이다. 시조는 고려의 벽진장군 총언(悤言)이며 우리나라의 평정공(平靖公) 휘 약동(約東)이 유학과 청렴결백으로 이름났다. 휘 상일(尙逸)이라는 분이 있어 문과에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냈다.
동춘(同春) 선생이 조정에 나아가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할 적에 그분은 대각에 있으면서 그 일을 함께하였으니 공에게는 조부가 된다.
부친 휘 파(坡)는 군수를 지냈다. 청렴하고 신중하게 관직 생활을 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았다.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장령을 지내고 찬성에 추증된 형(逈)의 딸이다.
공은 효종 임진년(壬辰年,1652, 효종 3)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관찰공(觀察公)이 기특하게 여기고 아꼈다.
문예를 일찍 성취하였으나 과거공부를 좋아하지 않아 나이 31세에 비로소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이 되었다.
기사년(己巳年,1689, 숙종 15) 중궁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우암(尤菴) 선생이 이어서 사사(賜死)되었다. 공은 뜻을 같이하는 유생들과 상소하였으나 상소가 성상께 들어가지 않자 서로 이끌고 궐문 밖에서 통곡하였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문학으로 스스로 즐겼다.
갑술년(甲戌年,1694), 정국이 바뀌자 즉시 금부 도사에 임명되고 빙고 별검으로 바뀌었으며, 얼마 후 사재감 주부로 옮기고 외직으로 나가 영산 현감(靈山縣監)이 되었다. 영남 좌도는 풍속에 구애가 많아 크고 작은 상(喪)을 당했을 때 집안에 전염병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성복(成服)하지도 않고 장사 지내지도 않아 달을 넘기거나 해를 넘기기까지 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사찰을 찾아가 부처에게 공양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이 탄식하기를,
“영남은 평소 문헌의 지방이라 불리는데 잘못된 풍습이 이와 같으니 몹시 개탄스럽다.”
하고, 고을의 어른들을 불러 간곡히 타이르니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다.
또 관찰사 이세재(李世載) 공에게 보고하니, 가상히 여겨 마침내 온 도에 두루 금령을 내렸다. 이후 또 용궁 현감(龍宮縣監)에 임명되어 법으로 통렬히 단속하니 토호들이 숨을 죽였다. 공은 예전에 창강(滄江) 조속(趙涑)이 관직에 있을 때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음미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후 대신(臺臣) 때문에 쫓겨나 보임되었다가 체직되어 전설사 별제가 되고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 얼마 후 정랑으로 승진하여 다시 의령 현감(宜寧縣監)이 되었다. 당시 군수공은 여전히 무탈하여 성주(星州)에 있었다. 공은 세 번 고을 수령이 되었는데 모두 편의를 보아 고향 가까운 곳으로 갔으며, 힘을 다해 봉양하니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정해년(丁亥年, 1707) 여름, 우연히 병에 걸려 8월 13일 임소에서 세상을 떠나고 10월 8일 본주(本州) 가평촌(加平村)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시에 뛰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 공이 그 풍격이 침착하여 호음(湖陰 정사룡)과 소재(蘇齋 노수신)를 이을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묵죽(墨竹)에 뛰어났는데, 정재(定齋) 박태보(朴泰1654~1689)가 공을 칭찬하여 “서법이 묵죽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한 적이 있다. 공은 이 때문에 명성을 얻었다. 집이 평소 가난하였으나 생계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의복과 음식이 좋지 않아도 태연히 지냈다. 관직에 있더라도 집에 있을 때와 같았다.
자제들이 간혹 이야기하면 “이와 같으면 충분하다.” 하였다. 아랫사람을 관대하게 다스려 회초리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죄를 지은 자가 있어도 즉시 다스리지 않고,
“한창 화가 날 때 장(杖)을 쓰면 지나치기 쉬우니, 화가 풀리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다.”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신중하여 항상 선조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으며, 파직되어 돌아와 가족이 입에 풀칠할 방도가 없어 여종을 팔기까지 하였다. 지금 벼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벼슬한 날과 벼슬하는 맛을 따지기를 좋아하는데, 공은 한마디도 이를 언급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시를 말할 뿐이었다.
부인 이씨는 중종의 별자(別子) 금원군(錦原君)의 후손으로 두한(斗漢)의 딸이다. 절약하고 검소한 덕이 공과 알맞았다. 공보다 뒤에 무오년(1738)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세성(世聖), 차남은 세영(世瑩)이고 딸들은 최맹손(崔孟孫), 윤덕귀(尹德龜), 참봉 유항명(柳恒明)에게 시집갔다. 세영의 계자(繼子)는 정인(挺寅)이다. 명을 덧붙이니, 명은 다음과 같다.
삼절이라는 호칭 / 三絶之稱
예로부터 드물었네 / 蓋尠古來
이것은 귀할 것 없으니 / 斯未足貴
덕이 재주보다 뛰어났네 / 德勝于才
그 덕은 무엇인가 / 厥德維何
사람들은 효도라 하네 / 人曰孝哉
부친은 〈귀거래사〉 읊으며 / 大人賦歸
고향에서 늙었네 / 邱原白首
아들은 가정에서 배우며 / 小子趨庭
세 번 수령의 인끈 찼네 / 三嚲墨綬
집안에서 전수한 청렴결백 / 廉白傳家
이밖에는 아무 것도 없네 / 此外無有
드높은 대궐의 숙직하는 곳에서 / 岧嶤禁廬
누차 맑은 풍모 보았지 / 屢接淸芬
무덤가 나무 서글프고 / 宰木生悲
구름 덮인 고개 아득하네 / 遙遙嶺雲
공은 실로 불후하리니 / 公實不朽
어찌 내 글이 필요하랴 / 何待余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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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정랑 이공 묘갈 :
이 글은 이지석(李志奭)의 묘갈명이다. 이지석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주경(周卿)이다. 1652년(효종3) 태어나 1707년(숙종
33)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