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908년 “경주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는 말이 인근 일본인들에게 퍼져갔다. 이 말을 전한 게 우연히 그쪽을 들렀던 조선인 우편배달부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를 보고받은 경주의 일본인 우편국장은 당시 경주 군수와 일본인 부군수, 고적 전문가와 함께 토함산을 올라 폐허가 된 석굴을 발견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지 약 1200년 만에 석굴암이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어느 정도 아는 얘기다. 석굴암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다.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선 석불사(석굴암의 옛 이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 것들로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와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 등에서 석굴암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1912년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가 이곳을 방문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석굴암이 중수됐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부다.
“일반인은 잘 모르는데 1924년 일본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가 발굴·소개한 ‘석굴중수상동문(石窟重修上棟文)’이 있어요. 1891년 석굴을 중수할 때 그 내력을 적은 일종의 상량문이죠. 일본인에 의해 석굴암이 재발견되기 전에 원형이 어땠는지, 중수 당시 상태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동국대박물관 임영애 관장의 말이다. 석굴암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 ‘발견’됐고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단 얘기다. 1891년이라면 총독부의 중수 공사로부터 20여년 전이다. 게다가 상동문에 따르면 이 중수공사를 집행한 사람은 당시 세도가였던 풍양조씨 집안 출신의 경상도관찰사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잡풀과 폐허 속 석굴암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우리 손으로 보수 복원이 이뤄졌단 뜻이 된다.
이 상동문 목판 원본이 동국대박물관에 있다. 세간에 공개된 것은 2018년 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전단지향’ 전시 때가 유일하다. 실은 목판에 새긴 글씨가 오래돼 닳고 흐릿해져 맨눈으로 알아보기 힘들다. 언뜻 보면 그냥 넓적한 나무판대기 같다.
발견 당시에도 나무판대기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이를 매의 눈으로 골라 불쏘시개로 사라지지 않게 건져낸 이가 동국대박물관 초대 관장 황수영(1918~2011) 박사다. 1963년 9월 1일 개관한 동국대박물관은 국내 유일 불교종립대학의 종합박물관으로서 다채로운 유물과 함께 독보적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사라질 뻔한 석굴암의 중수 상동문 발견을 돌아보기 전에 먼저 일제 강점기 때 파란만장했던 석굴암의 사연부터 파헤쳐 보자.
석굴암 통째 서울로 옮기려한 조선총독부
“엄명이었다. ‘불국사의 주조불과 석굴불 전체를 경성(옛 서울)으로 수송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즉각 운송 계산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경주 군수 등은 복종하는 태도였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야말로 폭명(暴命)이었다.(후략)”
대한제국의 관리로 경주에서 일했던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가 1924년 남긴 회고문의 일부다. 한마디로 석굴암을 뜯어서 불국사 불상과 함께 서울로 운송하라는 엄명이 있었단 거다. 기무라는 이 같은 명령이 1910년께 있었다고 회고한다. 한일강제병합이 있었던 해다.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일까. 훗날 여러 기록으로 미뤄볼 때 처음 추진한 이는 한일합병 직전 조선의 2대 통감으로 온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1849~1910)였고 실제 이를 집행하려고 한 이는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로 보인다. 계획대로라면 석굴암을 해체해 석불과 기타 모든 석재를 동해안의 감포를 통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하기로 돼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병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려는 중이었다. 석굴암은 발견 당시부터 심각하게 훼손돼 있어 보존처리가 시급했는데, 이를 핑계로 경성으로 옮겨와 조선물산공진회 때 전시하자는 꿍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즉각 반발을 불렀다. 1912년 10월 30일자 『매일신보』는 “경주에 있는 신라 고도의 다보탑과 석굴암의 불적 등을 총독부에서 경성으로 이전·보관한다는 유설”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완전한 오보로 전혀 근거가 없다. 총독부는 절대로 경성으로 이전할 의사가 없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석굴암의 유지·보수와 관련된 총독부의 우려만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석굴암은 현장에서 당시 최신 공법이었던 콘크리트 보강 처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데라우치 총독부는 석굴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에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한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을 가져와 전시했다. 약사여래좌상은 미술관 중앙홀에 모셔졌고, 주변에 석굴암 부조상 14체의 석고 모형을 배치하는 등 석굴암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석굴암은 이미 전 국민적 관심사였단 얘기다.
공사판 변소 문짝에 웬 글씨? 70년 만의 기적
해체·이송이 무산된 후 석굴암은 세 차례 중수됐다. 1차는 1913∼1915년, 2차는 1917년, 3차는 1920∼1923년 사이였다. 최신 공법인 시멘트를 써서 누수와 침수, 내려앉는 현상을 막고자 했지만 당대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결로와 침수도 계속됐고, 그때그때 땜질 처방도 이어졌다. 해방 후 석굴암의 근본적인 보수에 대한 논의가 나온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앞서 언급했듯 오노 겐묘는 자신의 저서 『극동(極東)의 3대 예술』(1924)에서 석굴암 상동문 탁본을 소개했지만, 이 탁본의 입수 경위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책이 상동문 원문을 소상히 소개했음에도 이후 학계에선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61년 황수영이 석굴암 중수공사의 총책임을 맡으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살아났다. 이왕 보수·복원하면서 최대한 원형을 갖추고 싶다는 바람이었던 것 같다. 수년간의 노력은 어느 날 기적처럼 결실을 맺었다.
“당시 황 박사님이 석굴암 공사 현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상동문 목판을 찾아 헤맸다지요. 그런데 어느 날, 공사판 가설 변소 문짝 생김새가 이상하더라는 거죠. 자세히 보니까 판대기 하나에 희미한 글씨가 보였대요. 얼른 뜯어서 자세히 판독하니, 그게 몇 년을 찾아 헤맨 바로 그 상동문인 거예요.”(임영애 관장)
황 박사도 생전에 관련 글을 남겨놓았다. 2006년 학술원논문집(인문사회) 제45집(대한민국학술원)에 실은 ‘석굴암본존 명호(名號)에 관한 고찰’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필자는 이 글(*오노 겐묘의 글)이 전하는 현판을 찾아서 석굴암 중수공사에 참가했던 3년간(1961. 9. 13~1964. 6. 30) 현장에서 전후 3차에 걸쳐 공사 인부를 동원해 석굴 경내를 수색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3차 동원 끝에 이르러 마침내 경내의 일가건물(一假建物) 문비(門扉)에 못질하여 있는 것을 찾아내고(중략)…. 상동문 현판은 경내의 작은 가변소문짝(假便所門扉)에 거두절미하여 전하고 있었다.
건물 공사를 하면서 건축 경위 등을 적어서 보관하는 상량문이 어쩌다가 변소 문짝 목재로 사용된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만, 이처럼 가까스로 발견돤 사실도 기적 같다. 다만 황 박사가 밝히고 있듯 “이 목조현판의 앞과 꼬리 두 부분이 절단돼 있어서” 오노 겐묘의 탁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황 박사는 이를 소중히 수거해 동국대박물관에 귀속시키고 석굴암 측에는 복제 편액을 보냈다.
풍양조씨 세도가 1891년 중수… ‘목조전실’ 원형 논란
한국전통문화대 무형유산학과 최영성 교수가 논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1891) 연구’(2017)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상동문의 본문은 총 617자로 도입과 결미 부분이 잘려나갔다. 이를 포함해 훼손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글자가 160자로 전체의 26%에 달한다. 최 교수는 대신에 오노 겐묘의 원문 판독에 무리가 없어 그대로 신뢰할 만한다고 전했다.
연구에 따르면 상동문을 작성한 사람은 손영기(孫永耆)로 본관은 월성(月城)이며 순조 21년(辛巳, 1821)생이다. 상동문의 품격과 수준이 높고 불교에 대해 해박한 것으로 보아 유자(儒者)이면서도 거사불교(居士佛敎)의 대열에 선 사람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석굴암 중수상동문. 1891년 석굴암 중수 배경과 의미를 담은 상량문으로 동국대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낸 황수영 박사가 석굴암 중수 공사(1961~64) 중 현장에서 발견했다. 가로 83㎝, 세로 34㎝, 두께 3㎝로 발견 당시 공사장 임시 변소 문짝 목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다. 사진 동국대박물관
이와 별개로 공사를 시주한 사람은 ‘조순상’이라고 돼 있는데 ‘순상’은 ‘순상국(巡相國)’의 줄임말로 관찰사 겸 순찰사의 별칭이다. 즉 조씨 성을 가진 상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1891년 석굴암을 중수한 셈이다. 최 교수는 연구를 통해 그가 풍양조씨 세도가 집안의 조강하(趙康夏: 1841∼?)일 것으로 추정했다. 조강하는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 조카로(신정왕후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비이며 헌종의 생모) 1883년 4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1886년 1월 공조판서로 전임할 때까지 3년 가까이 재직했다. 석굴이 ‘조가네 절’이라 불렸다는 증언도 있어 조강하가 관찰사 재임기에 눈독을 들였던 석굴암을 훗날 중수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상동문은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뉘는데, 형식과 내용이 당대 최고의 한문학으로 뒷받침되고 있어 오늘날 독자에겐 바로 와닿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불국사와 석굴의 위상에 대해 언급하고 그 조성 배경과 의의, 가치를 설명한 뒤 퇴락한 석굴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어 새 모범을 보이는 차원에서 이전의 중수와 다른 새로운 불사를 초창(草創)한다면서 중수한 뒤 석굴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축원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이 상동문은 황수영 박사가 주도한 석굴암 중수와 ‘목조 전실’ 증축 문제와 관련해 학계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황 박사는 상동문 등을 근거로 목조와즙(木造瓦葺:기와를 올린 목조건물)의 전실을 설치하는 등 오늘날과 같은 석굴암 전체상 복원을 이끌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891년의 중수 불사가 이미 석굴의 외형을 바꿔버린 것이었기에 이를 준거로 한 건 제대로 된 원형 복원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과 20여 년 만에 석굴암은 폐허가 된 채 일본인 등에게 ‘재발견’됐다. 최 교수는 그 사이 강력한 경주 지진 등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하면서도 1891년 중수 공사가 제대로 된 게 아니었을 가능성을 짚는다. 그러면서 “1891년의 중수는 유자들이 유교적 건축관에 따라 시공한 것으로, 석굴암 원형 보존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고 조심스레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