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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봉법룡
생사초탈하고 자리이타 실천해야 불자
한국불교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정화불사에 앞장서고, 통합종단 출범의 주역으로 활동한 해봉법룡(海峰法龍, 1891~1969)스님.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법룡스님은 근현대 불교의 초석을 놓은 선지식이다. 스님의 행장을 1960년대 <대한불교(현 불교신문)>기사와 장례식 당시 호상(護喪)을 맡은 흥교스님(범어사 전계대화상)의 증언을 통해 정리했다.
“생사초탈하고 자리이타 실천해야 불자”
정화불사 앞장…통합종단 출범 주역
조계종 총무원장·불교신문 사장 역임
○… 법룡스님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총무원장 재직시절인 1963년 5월1일 통합종단 출범 첫돌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에는 법룡스님의 이 같은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담화문에서 법룡스님은 “지금 주변은 살펴볼 여지없이 혼돈긴박(昏頓緊迫)하고 형용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우리를 휘몰아 넣고 있다”면서 “이 때를 당해 과연 불보살의 후계자인 우리의 믿음과 행동은 부끄러움이 없을까 (돌아본다)”면서 ‘한국불교의 바른 자리매김’에 대한 고뇌를 토로했다.
○… 지난 2005년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한 흥교스님(興敎, 현 범어사 전계대화상)은 법룡스님의 제자들을 수소문했다. 당시 보현사에는 90세의 노스님이 한분 있었는데 법룡스님의 상좌였다. 짧은 대면이었지만 그 스님은 “우리 은사스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공부를 많이 한 분”이라면서 “매우 양심적으로 살았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법룡스님의 입적소식을 전해들은 노스님은 말년에 시봉을 한 흥교스님의 손을 잡고 “고맙다”면서 눈물을 보였다. 평양의 조선불교도연맹을 방문했을 때 박태호 위원장도 “어렸을 때 보현사에서 법룡스님을 모신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진>법룡스님의 모습.
○… 보현사 주지로 있으면서 법룡스님은 매해 20~30명의 젊은 스님들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조선 제일의 부자 절’로 명성이 높은 보현사 주지로 있던 법룡스님이 도제 양성을 위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님은 평소 “모든 것이 부질없으니, 욕심을 내지 말고 스님 노릇 잘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법룡스님 말년에 간병을 한 흥교스님은 법룡스님에 대해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분으로 얼굴이 매우 맑았다”면서 “그 모습만 보아도 신심(信心)이 저절로 생길 정도였다”고 말했다.
○… 내외전을 두루 겸비한 스님은 불경(佛經)을 우리말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질 것을 발원했다. 1963년 5월 <대한불교>가 ‘우리말 팔만대장경’ 출간을 앞두고 마련한 좌담에서 이 같은 뜻을 분명히 했다. 운허스님, 김법린 박사, 박종홍 박사 등이 참석한 좌담에서 법룡스님은 “역경사업이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국가적.종단적으로 중대한 일”이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이어 법룡스님은 “일제시대에도 여러 스님들이 시도했다 좌절하고 말았다”며 “완전한 팔만대장경을 번역하여 출판함은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평생 출가사문의 길을 묵묵히 걸은 법룡스님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인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지난날의 회고와 자신의 반성할 기회를 갖는다”면서 “(이는) 서글픈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고 간에, 인간은 송년일(送年日)에 당하여 순간이나마 그 지난날을 회고해 보는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라고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법룡스님은 1963년 12월1일자 <대한불교>에 실린 송년사에서 “1963년도는 우리 종단에도 커다란 흔적들을 남긴 해”라면서 “이른바 통합종단의 기틀과 그 육성이며 또한 각 사찰의 통일종단에의 등록과 그 성과, 동대(東大)의 새 정리, 실로 큰 일들이 행해진 해”라고 소회를 밝혔다. 특히 스님은 역경불사(譯經佛事)가 새해에도 활발해지기를 발원했다.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스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엿장수’를 했다. 검정색 물을 들인 군복을 입고 지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청담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 염천교 천막촌에 머물고 있던 법룡스님을 찾아가 조계사로 모셨다고 한다.
○… 법룡스님은 생명을 지닌 존재는 ‘생로병사의 길’을 어김없이 걸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숙명적 운명’을 벗어나는 적극적인 삶을 강조했다. “인간은 분명히 삶의 멍에를 메고 360단골(段骨, 작은 뼈)이 빠져 닳도록 100년의 고개를 넘나드는 꼭두각시인양 어쩔 수 없는 숙명적 운명이라면 너무도 허전하고 비장한 감이 있다”면서 불자들의 수행정진을 당부했다. 다음은 스님의 육성이다.
“우리 불자는 생사를 초탈하고 자리이타의 대자비사상으로 출세간의 무루법(無漏法)을 궁행(躬行)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자아발견.인격도야.현실계에서의 증과(證果) 등 억겁(億劫)이 지나도 변이(變移)와 간단(間斷)이 없는 불타(佛陀)의 교법에 의해서만 무상과 허탈(虛脫)과 부자유를 초탈한 무상대도(無上大道)의 피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묘향산 보현사 주지시절 출자한 인연으로 노년에는 대동학원(大東學園) 이사장으로 인재양성에 나섰다. 수원 봉녕사에 주석하던 법룡스님은 노쇠하여 병석에 누었다. 평소 인연이 깊은 광덕(光德)스님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당시 수원포교당에 주석하고 있던 흥교스님에게 간병을 부탁했다. 흥교스님은 3~4달간 정성을 다해 간병을 했다. 어느 날 법룡스님이 “광덕수좌의 상좌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흥교스님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광덕스님의 사제지만, 병석의 노스님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흥교스님은 은사를 모시듯 정성을 다해 법룡스님을 간병했다. 법룡스님은 사바세계와 인연을 다하는 순간, 흥교스님의 손을 잡고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법룡스님이 입적한 후 장례는 3일장으로 수원 봉녕사에서 엄수됐고, 광덕스님과 흥교스님은 법룡스님이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장례식에는 월산.광덕.운허.능가스님 등 대덕스님들이 참석했으며, 봉녕사 앞 논에 마련한 다비장에서 다비를 엄수한 후 봉녕사 뒷산에 산골(散骨)했다. 광덕스님과 흥교스님이 법룡스님을 모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제자들(20여명이 일본에 머물고 있었음)이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 어록 ■
“(한국불교는) 고식적인 은둔으로 인해 민중과 괴리되고, 불교와 함께 민중은 각기 토착할 풍토를 잃고 내일에 대한 자세를 가누지 못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불교는 통합종단이래 꾸준히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모색하고 역사창조의 향도(嚮導)가 되고자 노력해 왔다.”
“통합종단으로 귀의를 망설이는 일부 불자들이 하루 속히 함께 모여 이 민족에게 그 풍토를 되찾아 주며 그 위에 쇠잔해가는 민족문화와 불교정신을 다시 흥왕케하는 불사를 이루어 한국불교 중흥의 새 기원이 될 것을 거듭 바라는 바이다.”
“법려(法侶) 자신들이 교양과 수련을 게을리 않고, 자체(自體)의 위치와 환경을 정화정돈(淨化整頓)하고 번민과 착란(錯亂)이 없는 적요(寂寥)한 청정도량에서 면벽관심(面壁觀心)하고 간경탐리(看經探理)함으로써 스스로 불자 된 진면목을 찾아야 하겠다.”
“성도재 기념행사를 보고 불교가 현대화하고 또 포교의 경지를 개척하려면 불교이념을 담은 영화 연극 무용 소설 등 문예 방면을 통한 교리가 승화된 작품을 대중에게 보급시켜야 한다고 느꼈다.”
“불교신문은 시종(始終) 종단의 전면에서 길을 트면서 앞장서 걸었다. 사실 불교신문은 확신을 가지고 한국불교가 있어야할 미래상을 뚜렷이 바라보고 종단 수레의 앞을 맡아온 것이다. … 중앙이나 지방이나 누구나 불교신문의 공을 높이 치하하지 않는 자 없으면서도 일부에서는 치하의 뜻을 행동으로 표시해 주지 못하고 거의 말없는 표정으로 꼬박꼬박 받고 읽어주고만 그친 감이 너무나 많다.”
“승단은 승려 위주의 승단이 아니고 승속일여(僧俗一如)한 자리에서 부처님의 계의(戒意)를 밝혀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하기에 승(僧)은 승의 자리에서 속(俗)은 속의 위치에서 나약해진 불심(佛心)을 전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 법룡스님 수행이력 ■
박초월스님 문하로 출가
묘향산 보현사 주지 지내
1891년 7월27일 중강진이 있는 평북 자성군(慈城郡)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김(金)씨. 속명도 법룡(法龍)이다. 본관은 은율. 1908년 7월15일 평북 묘향산 보현사에서 초월(初月)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초월스님의 속성은 박(朴)씨로 알려져 있다.
출가후 법룡스님은 내전은 물론 외전(外典)을 공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12년 9월15일 보현사 진상(眞常)학교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수료한 후 유학길에 올랐다. 1915년 일본 교토(京都) 임제대학(臨濟大學, 현 花園大學)을 졸업한 후 귀국해 보현사에서 정좌(靜座)스님에게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때가 1916년4월8일이다.
<사진>법룡스님은 총무원장 재직시절 부처님오신날의 공휴일 제정을 적극 추진했다. 사진은 1963년 4월1일자 <대한불교>에 실린 총무원장 명의 공고.
이후 평북 영변 오봉사 주지에 취임(1924년 9월)했으며, 1930년 5월에는 묘향산 보현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41년4월17일에는 보현사에서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수지하고, 1940년10월에는 경성에 설립된 총무원 서무부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에는 화광교원(和光敎園) 원장(1948년 3월), 서울 중동중고교(中東中高校) 교원(1953년 11월)으로 활동했다.
1962년 8월20일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被選)됐으며, 1962년 11월24일에는 재단법인 동국학원 이사 소임을 맡았다. 1962년 12월3일 대한불교조계종 제2대 총무원장에 선출되어, 정화불사와 통합종단 출범에 기여했다. 법룡스님의 총무원장 재직 무렵에는 경산스님(총무부장), 법안스님(法眼, 서무국장), 월주스님(기획국장), 광덕스님(종보국장), 행원.혜정스님(교무국장)이 종단 소임을 보았다. 당시 중앙종회의장은 청담스님.
법룡스님은 1963년 9월1일부터 1964년 1월31일까지 불교신문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대동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수원 봉녕사에 주석하던 스님은 1969년 11월23일(음력은 10월14일) 오후3시 30분 입적했다. 장례 당시 장의위원장은 광덕(光德)스님, 호상(護喪)은 흥교(興敎)스님이 맡았다. 상좌는 도행.도명.남전.도광.광섭.도철.선관스님 등을 두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