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
![]() |
경북 안동·의성·영천·상주 등지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는 부녀자들의 놀이. 여럿이 한 줄로 서서 허리를 굽히고 사람다리를 만들면, 공주로 뽑힌 사람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간다. 이를 다른 말로 ‘인(人)다리’ ‘동교(銅橋)’ ‘기와밟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었다. |
![]() |
놀이의 유래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공민왕(恭愍王)의 파천(播遷)과 연관된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상고시대의 원무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다. 먼저 안동지방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로, 지금부터 6백여 년 전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이 왕비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함께 안동지방에 피난 갔을 때, 마침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젊은 부녀자들이 나와 그 개울 위에 일렬로 엎드려 사람다리를 놓아 노국공주를 지나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고을 부녀자들은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해 명절인 정월 대보름날 밤을 택하여 이 놀이를 했고, 그 후 하나의 연중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주장은, 보름날 달밤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일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원초적인 놀이로, 원시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놀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조(正月條)〉에는 당시의 놀이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의 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이 흡사하여 흥미롭다. “안동(安東)의 풍속을 보면 시골 여인들 중 늙고 약한 여인들이 떼를 지어 성 밖으로 나와서, 밤이 되면 마치 물고기를 길게 꿰맨 형상으로 앞뒤로 길게 엎드려 눕는다. 그런 후 한 어린 계집애가 여인들이 엎드린 그 위를 걸어갈 때 좌우에서 부축하여 준다. 계집애는 그 위를 왕래하며 마치 다리 위를 걷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계집애는 말하기를 ‘여기가 무슨 다리인고·’라고 먼저 노래를 부르면, 엎드려 있던 여인들도 일제히 ‘청계산의 동교’라고 노래부른다. 이와 같이 큰길을 거닐 듯이 동서남북 자유로이 왕래하며 밤을 지새운다. 이 놀이는 밤이 깊어서야 끝난다. |
![]() |
다른 지역의 놀이방법보다 놋다리밟기의 대표적인 전승지역인 안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성 안의 놋다리’는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이동하는 가운데 진행된 ‘행렬형 놋다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 밖의 놋다리’는 행렬형과 아울러 쭉 둘러서서 원을 이루고 양편의 공주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서로 싸우기도 하는 ‘원무형’과, 두 줄로 늘어서서 경쟁을 하는 일종의 ‘경합형’ 등이 결합된 형태로 놀았다고 한다. 성 밖의 놋다리는 ‘동부’와 ‘서부’의 두 패로 나뉘어 저녁을 먹은 다음 동부는 현 옥정동에 소재했던 ‘초당집 마당’에 모여들고, 서부는 현 법상동에 소재하는 ‘잿집 마당’에 모여 총명한 소녀를 공주로 뽑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원무인 〈둥둥데미 노래〉에 맞추어 놀다가, 이어 ‘실감기’와 ‘실풀기’가 이어지면서 일행 모두가 원 안쪽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려 사람다리를 만든다. 이것이 ‘웅굴놋다리’가 되는데, 이때부터 공주가 양쪽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를 밟게 된다.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두 바퀴 돌고 나면 놋다리의 선두는 원형에서 벗어나 시가지 대로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이른바 ‘줄놋다리’가 시작된다. 동·서부의 놋다리가 행진 끝에 천리천 서문 둑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 비켜가기도 한다. 또 사이 좋게 하나로 합쳐져서 공주도 한사람만 세워 놋다리를 계속하기도 했다. 놋다리밟기를 해야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권장하기도 했으니, 양반집 처녀와 새댁들도 모두 다 참가했으며 성 밖의 놋다리는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성 안의 놋다리는 ‘삼웃들파’와 ‘관아앞파’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다고 한다. 삼웃들파는 저녁을 먹은 후 노래를 잘 부르는 노인들이 먼저 놋다리 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다니면, 젊은 부녀자들이 모인다. 그러면 놋다리를 구성하여 넓은 길을 따라 성안을 두루 돌았는데, 공주라는 명칭은 쓰지 않고 17~18세의 소녀를 뽑아 놋다리를 밟게 했다. 관아앞파는 별다른 앞놀이 없이 관아 앞에 모여 줄놋다리를 구성한다. 앞사람의% |
![]() |
이 놀이는 마을 대동놀이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제의이면서 부녀자들의 신명풀이의 기능과 지역 주민들 간에 유대감과 단결심을 다진 사회 통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지역문화와 함께 혈연 의식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놋다리밟기는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
![]() |
놋다리밟기와 강강술래는 유사한 점이 많으면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문화의 차이, 생업의 차이, 자연환경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보자.
출처 : 우리의 놀이문화 원형을 찾아서 |
|
첫댓글 따뜻하게 공부하고 갑니다~~~수고하셨습니다...
여고시절에 해봤던 놀이랍니다..^^
나는 지금 해보고 싶어 .. 저위에서 밟는거 .. ^^
클로버님 감사합니다 늘 밝고 창대하십시요
행운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