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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7 - 제임스1세의 마녀사냥 재판과 처형당한 찰스 2세에 폐위된 제임스 2세!
얼마전 영국 16 제임스 1세를 근세편에 올렸는데 그후 탤레비젼 TV n 의 "벌거벗은 세계사"
에서 마녀사냥 재판을 보고 그럼 제임스 1세를 중세에 올려야 하는데 근세에 올렸나
싶어 자료를 찾아보니...... 저를 비롯해 인간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는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마녀사냥에 열심이었던 제임스1세는 근세편이 맞습니다.
TV n 의 "벌거벗은 세계사" 에서 임승휘 교수가 진행한 "마녀사냥" 에 중세시대 가톨릭 국가 성당
에서 시작됐지만 개신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도 3천명을 재판에 넘겨 상당수를 화형시켰다
라는 말을 듣고는 아니?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중세시대에 벌어졌는데
그럼 마녀를 수없이 죽인 제임스 6세 이야기는 중세편에 실어야 하나 하고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제가 가졌던 편견은 1. 마녀사냥과 재판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중세시대에 벌어졌다. 2. 마녀
사냥과 재판은 주로 카톨릭 국가에서 벌어졌다. 3. 마녀사냥과 재판은 700년동안 이교도인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등 유럽 남부 국가에서 주로 벌어졌다. 4. 문화와 과학
이 발달하지 못한 게르만 프랑크족이 세운 메로빙거와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에서도 벌어졌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저 4가지가 모두 틀렸습니다. 저 미개한(?) 게르만족의
프랑크(프랑스)는 오히려 프랑크족 가운데 하나인 살리카족의 고대 부족법인
살리카법을 적용받았는데... 이 법에서는 “피해자가 있어야 고소” 를 할수 있었
으니 마녀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없는지라 고소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마녀사냥은 게르만 살리카법 대신에 가톨릭법의 적용을 받게된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대해 루터의 항의로 촉발되어 벌어진 근세라 할수 있는 1618년 부터 1648년까지
가톨릭과 개신교간에 피비린내 나는 30년 종교전쟁 기간에 독일에서 가장 심했는데, 그리스 정교
나 유대교, 이슬람교에 힌두교와 자이나교, 시크교, 불교, 도교 및 유교 국가들에는 드문 현상입니다.
마녀재판은 유럽 기독교국가에서 기록에 남은 것만 8만건이 재판에 회부되어 4만명 가까이 화형
당한 것으로 보는데 이중에 신성로마제국은 5만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3만명 가까이 화형에
처해 졌으니 독일 뷔르츠부르크 주교 율리우스는 300명을 화형시켰고 어떤 마을에서는
8살 아이를 증인으로 내세워 여자가 2명만 남고 모두 차례차례 마녀로 모두 화형당했다고 합니다.
700년만에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낸 스페인에서 이단재판이 성행한 것은 맞지만 오히려 마녀사냥
은 적었고, 30년 종교전쟁중 독일이 가장 극심했으며 가톨릭국가만이 아니라 독실한 개신교
국가인 영국의 스코틀랜드도 심했고 스웨덴과 청교도들이 건너간 미국의 매사츠세츠주
세일럼에서는 1692년 까지도 기승을 부렸으며...... 무려 20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장로교로 개신교 국가인 스코틀랜드에서는 16세기 이후 5차례 대규모 마녀사냥 재판이 있었
으니 첫번째는 제임스 6세 치세인 1590~91년이고 2차도 역시 제임스 6세때인 1597년
이며 기록으로 남은 것만해도 40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200명이 화형됐다는데, 제임스
6세는 전 해에 마법에 관한 책 Daemanologie 를 출판했고 9일 동안이나 재판에 참여했습니다.
애버딘에서 마녀 Janet Wishart 와 공범들은 캔트립(주문) 으로 사람들을 오한에 시달
리게 하고 요술로 사람들이 죽을뻔 했으며 활탄을 던져 폭풍을 일으키고 악몽 고양이
를 사용해 끔찍한 피해를 입혔다고 하며 3차 마녀사냥은 찰스 1세때인 1628년
~31년, 4차는 크롬웰 집권시인 1649~50년이고 5차는 찰스 2세때인 1661~62년입니다.
마녀 사냥을 중지시킨 것은 오히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태양왕이라고 불리던
루이 14세이니...... 그는 왕에 올라 종교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마녀들을 풀어주고 교회가 몰수한 재산을 되돌려주라는 명령을 자주 내렸습니다.
루이 14세는 재위 40년째인 1683년에 지방 영주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에 왕의 법 하나로 통일돼야 한다면서 공식적으로 마녀재판을 중지
시켰는데...... 오히려 미국은 수백년 이상 더 계속되었으니 청교도들의 저 완고함이라니???
1603년에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를 뒤이어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에 올라 제임스 1세를 칭해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 으로 불리웠는데
1625년에 죽자 아들이 즉위하니 찰스 1세로 신앙심이 깊었지만 왕권신수설을
고수한 전제적인 통치방식 때문에 의회와 마찰을 빚어 내란이 일어나 1649년 처형당합니다.
찰스 2세는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장남으로 청교도 크롬웰 집권동안 10여년 망명생활 끝에
왕정복고로 영국왕이 되었는데.... 타협적인 정책을 펼치며 통치권 회복, 해군력 강화,
식민지 확장 등에 주력했으며 종교 정책에서 포용력을 펼치고자 했고 청교도
혁명후 침체된 과학, 지식, 문화 전반에 관심을 보였지만 종교문제가 걸림돌이었습니다.
궁정은 앙리에타 왕비를 중심으로 가톨릭뿐 아니라 대륙의 문화적 취향에 너그러운
분위기였지만 찰스가 12살되던 해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었고, 2년 뒤 14살의
나이에 찰스는 왕당파의 서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니 이후 청소년기와
20대를 보내며 수많은 정치적 대립과 타협, 모략과 배신, 망명생활까지 겪었습니다.
1644년 7월에 앙리에타 왕비는 어린 자녀만 데리고 프랑스로 피신했고 부친을 돕기위해
동분서주하던 찰스는 1649년 1월 30일 네덜란드에서 부친 찰스 1세의 처형소식
을 들었는데 이후 스코틀랜드에서는 반(反) 잉글랜드 정서가 나타났으니 스코틀
랜드 출신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 찰스 1세를 처형한 사건은 과도한 처사로 여겨졌습니다.
1649년 2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선언하자 그는 부친 찰스 1세의 기도서 보급
정책에 반발해 스코틀랜드 교회가 제출했던 국민의 맹약을 받아들이니 자신의 왕권을 주장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측의 종교적 타협을 수용하였는데 그럼에도 찰스와 스코틀랜드군
은 1650년 던바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651년 9월 우스터에서 크롬웰 군에 대패 합니다.
찰스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에 들어갔는데 앙리에타 왕비의 친정이자 찰스의
외가지만 프랑스 왕실의 대접은 소홀했으니 왕족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검소하게
살았는데 강대국에 기대어 재기를 노려보았지만 크롬웰 정부의 외교수완 때문에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찰스에게 냉담했고 스페인과 동맹을 추진했지만 지지는 미약했습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 사망후 리처드 크롬웰이 아버지를 이어 호국경직을 떠맡았지만
공화국 체계는 위태로워 보였으니 왕이 통치하던 시절이 그립다는 얘기가 나돌았고
군대의 지휘관들은 사분오열된 나라를 위해 변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했으니 1660
년초에 군의 실세였던 몽크 장군이 네덜란드에 있던 찰스에게 은밀히 복위를 언급합니다.
찰스는 1660년 4월 브레다 선언을 제시했으니 첫째, 대역죄를 대폭 사면하고 몰수된
토지를 원상회복 시킨다. 둘째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시행한다. 셋째 군대의 체불
임금을 지급하고 군을 해산한후 국왕이 임명하는 소수의 군대를 재임용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으니 5월 의회 표결을 통과하자 찰스 는 의회의 복위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1660년 5월 25일, 찰스는 영국의 합법적인 군주 찰스 2세의 자격으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땅 켄트에 상륙했으니 왕의 귀환은 대중 이벤트처럼 치러졌고 안정과
질서를 갈망하던 시민들은 5월 29일 런던에 입성하는 찰스 2세를 환호로
맞이했으니 청교도혁명후 10년 남짓의 공화국 체제에서 왕정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복고왕정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할 국정 총책임은 클래런든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에게
맡겨졌으니 국교도이자 왕당파였고 망명시절에도 찰스와 관계를 지속했던
클래런든은 이성적이고 강직한 인물로 균형감 있게 찰스 2세의 국정 초반을 이끌었습니다.
찰스 2세 역시 ‘왕정복고’ 라는 왕실의 대의를 이루기까지 젊은시절 정치적 시련속에 단련된 인물
이었으며 무엇보다 부친 찰스 1세의 완고함이 부른 파국을 지척에서 경험했는지라 그는 부친
찰스 1세나 후임인 동생 제임스 2세에 비해 상황 판단이 빠르고 정치적 결정의 순간에 유연했습니다.
브레다 선언을 이행하는 ‘과거청산 및 진상규명’ 작업은 단순하지 않았지만 찰스는 호방 쾌활한 성격
대로 결단과 타협, 포용과 사면이라는 대원칙을 유지했으니 특별 재판정에서 아버지를 단두대로
내몰았던 주동 13명을 포함해서 26명만 사형하고 그외 50여명을 따로 처벌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과거의 적과 동지를 가려내는 과거청산 작업을 최대한 간단히 매듭지음으로써 과거의 비극에
연연하지 않고 타협과 상생을 통해 향후 국정운영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여전히
재정이 견실하지 못했던 찰스 2세의 왕정은 난파를 면하는 수준을 유지하는중에
1665~1666년은 ‘삼재’ 의 해로 기록될 것이니 역사상 악명 높은 ‘런던 대역병’ 이 발발합니다.
짐승의 사체에서 벼룩이 옮긴 페스트균에 감염되는 이 질병은 ‘흑사병’ 이라 불렸으니
1665년 런던에서 발발한 역병은 인류사에 나타났던 흑사병 중 거의 마지막에 해당
했던 만큼 그 규모도 압도적이었는데 런던 인구 45만 가운데 7만 5,000명이 사망
했으니 주로 런던의 빈민가에서 속출했으며 왕실 일가도 한달 동안 피난을 했습니다.
가공할 이 흑사병은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재앙으로 꺼졌으니 1666년 9월 발생한 ‘런던 대화재’ 로
도심의 열악한 가옥구조를 이루고 있던 빈민가 일대가 전소되었는데.... 이 대화재로 역병의 최적
환경이 사라진 셈이었으니 이후 대역병은 기세가 누그러들어 1667년에는 완전히 수습 되었습니다.
런던 대화재는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새벽 런던 동부 푸딩 레인에서 시작되었으니 불은 바람
을 타고 삽시간에 주변을 집어삼켰는데 당시 런던의 주거환경은 흑사병은 물론 화재
에도 취약했으니 옹색한 목조 가옥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탓에 불은 나흘동안 쉬지않고
타올랐고 세인트 폴 대성당을 비롯해서 예배당 87개, 가옥 1만 3,200 채가 소실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찰스 2세는 해양에서의 무역 이권을 놓고 네덜란드와 두차례의 해상 전쟁까지 치렀
는데 15~16세기 신대륙 항로를 개척하면서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17세 후반에는 네덜란드가 해양을 통해 식민지 거점을 확보해 가고 있었으니 찰스
2세는 신대륙 확장이나 식민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미래 산업이라 생각했습니다.
해군력을 키워 해상 통제권을 강화하고 교역에 선박 이권을 확보하려다 보니 선발주자
네덜란드와 충돌하게 되었는데 찰스 2세는 1664년 동생 요크 공 제임스의 주도로
네덜란드가 북미 식민지로 개발한 뉴욕을 무력으로 빼앗었으며 17세기 후반 찰스
2세 때 벌어진 두차례의 ‘영란 전쟁’ 은 식민 수탈 역사의 본격적인 2막을 준비했습니다.
찰스가 해양에 관심을 가진 것이나 전쟁 명분 자체가 터무니없지는 않았지만 의회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 빈약한 재정 상태로 장기전을 치르는 것은 무리였으며 더욱이 1665년 시작된
2차 전쟁은 시기적으로‘런던 대역병’과 ‘런던 대화재’등의 악재들과 맞물렸던 터라 찰스
2세는 휴전할수 밖에 없었고 클래런든 해임이라는 처방으로 국내의 비판을 잠재워야 했습니다.
1672년 3차전은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를 동맹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입
했는데 그 과정에서 1670년 프랑스와 맺은 비밀협정이 큰 문제가 되었으니, 찰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전쟁반대
여론이 들끓고 찰스의 지지도는 바닥으로 추락했으니 그만 전쟁에서 발을 빼야 했습니다.
찰스 2세의 친 가톨릭 성향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 왕실 전체가 종교문제에서
의회와 국민들로 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지 못했는데 과거의 종교 갈등으로
비롯된 국난을 반복하지 않기위해 나름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매번 가톨릭 세력을 비호하려는 속셈이라는 의혹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또한 왕정복고 이후 의회는 국교회가 중심 세력이었지만 이전 크롬웰 시기를 주도했던
청교도파도 의회에서 기반이 견고한 상태였는지라 종교 관용령 같은 찰스 2세의
자유로운 종교 정책들이 가톨릭뿐 아니라 비국교도 프로테스탄트와 여러 종교를
포괄하는 내용임에도 의회의 반발에 부딪쳐 시행된 지 얼마 안되어 폐기되곤 했습니다.
1677년 찰스 2세는 동생 제임스 2세를 설득해 조카딸 메리를 네덜란드 왕가의 윌리엄과 혼인시켰
으니 전쟁으로 악화된 네덜란드와의 관계도 개선하고, 한편으로 막강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국가와 혼인을 성사시킴으로써 자신과 왕실을 향한 종교적 불신을 떨어뜨리려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후계와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의혹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불씨를 키워갔으니..... 특히 캐서린 왕비로 부터 정식 왕위 후계자
를 얻지 한채 찰스 2세의 나이가 많아지자 왕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범 개신교 측은 가톨릭 신앙을 고집하는 요크공 제임스가 후임 왕위에 오를 경우 또다시
종교 전쟁이나 국가분열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했으니 증폭된 불안과 불만은
급기야‘제임스 왕위 배척 사건’과 찰스 2세와 제임스를 함께 암살하려고 도모한
‘라이하우스 음모사건’ 으로 표출되었는데 엄정하게 대응하고 동생 제임스를 비호합니다.
1685년 사망시까지 후계를 둘러싼 종교적 불만은 더 이상 표면으로 불거지지 않았고
나라 안팎에서 안정적인 기간이 이어지는데, 찰스 2세는 친가인 스튜어트 가문
보다는 외가쪽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특질이 우세해 보이니찰스의 이목구비
는 선이 굵고 관능적이었고 시선에서는 냉소와 고집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습니다.
찰스 2세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처럼 완고한 원칙주의자는 아니었으니 일찍부터 접한
전쟁과 정치판, 또 망명생활을 통해 한 가지 터득한 게 있었던 것 같으니 현실의
군주로서 양보하고 타협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포기하지 말고
즐겨야 될게 있다는 사실이니 현실에서 누릴수 있는 유쾌하고 생동적인 삶을 중시합니다.
찰스는 스포츠, 여흥, 지적인 관심에도 적극적이어서 왕정복고와 더불어 영국의 문화와 지식
전반은 이전과 다른 활력을 얻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연애에서만큼 찰스는 절제하는 법을
몰랐으니 재상 클래런든 마저도 찰스의 방종함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졌었다는데 성적 자유
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약간의 방종은 신께서도 눈감아 주실 것” 이라며 받아넘겼습니다.
찰스 2세는 1660년 영국왕으로 복위하고 1년뒤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 출신의 캐서린과 포츠머스
에서 결혼했는데 시부모인 찰스 1세와 앙리에타 왕비의 성혼식에서 그랬듯이 국교회의 전례에
따라 진행된 찰스 2세의 성혼식에서도 가톨릭교도인 캐서린은 왕비의 관을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찰스 2세와 캐서린 왕비는 사이가 좋았지만 수차례 유산을 거듭하다가 자녀를 볼수 없었지만
재기와 사교성이 넘치던 찰스는 개인적인 쾌락을 쫓는데 거리낌이 없던터라 공공연
하게 여러명의 정부(情婦)들과 연애를 만끽했고, 17명에 달하는 혼외 자녀들을
보았는데 국민들의 혈세로 왕손들의 생활이 유지되었으니 조롱과 불만거리가 될만 했습니다.
찰스 2세는 1685년 2월 6일 런던 화이트홀에서 임종했고 눈을 감기 직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모두의 우려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동생 제임스 2세가 왕권을 물려받았는데 시동생 제임스
2세가 만든 궁정 분위기는 가톨릭에 너그러워서 가톨릭 신자인 캐서린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2세의 통치는 불명예스럽게 짧게 끝났으니.... 뒤이어 프로테스탄트인 조카 딸
부부인 메리 2세와 네델란드의 윌리엄 3세가 공동 즉위하게 되자 더 이상 가톨릭 교도
로 살기는 어려운지라..... 캐서린은 친정 포르투갈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1685년 형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요크공 시절부터 찰스 2세의 궁정에서 정치력
을 인정받았고,즉위 초반까지도 통치 군주로서 확고한 면모를 보여줬으나 전제적인 종교
정책을 시도하면서 의회와 국민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고 1688년 후계를 둘러싼 불안 사태를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프랑스로 도피함으로써‘명예혁명’으로 1689년 정식으로 폐위당합니다.
제임스 2세는 둘째 왕자에게 주어지는 요크 공작 작위를 부여받았는데 형 찰스에 비해 진지하고 고집
과 강단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부친 찰스 1세를 모범삼아 경건한 신앙심을 키웠고, 성장할수록
종교적 신념에서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외골수였으니 부친 찰스 1세와 조부 제임스 1세를 닮았습니다.
제임스가 만 10살도 되기 전에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었으니 그는 1649년 1월 30일 네덜란드
에서 부친 찰스 1세의 처형 소식을 들었는데, 아버지 찰스 1세를 존경했기에 상실감이
남달랐으니 망명 초기에는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형 찰스가 스페인과의 동맹을 추진하자
스페인군서도 복무했는데 전투에서 수차례 공을 세우며 뛰어난 군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660년 5월 찰스 2세의 왕정복고와 더불어 요크공 제임스도 귀국해 1673년 심사법
사태가 일어나기 까지 복고왕정의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형을 도왔
으니 10여년간 해군 사령장관직을 맡아‘왕립해군’을 통솔했는데 향후 해군력으로
해상 통제권을 확장시키고 식민지 개척을 통해 국부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는데 국가적 사활을 걸던 시기였는데 1664년에 요크공
제임스는 네덜란드가 개발을 착수했던 뉴암스테르담을 무력으로 확보했으니 뉴욕이며,
해군의 수장으로서1665년 이후 2차, 3차 영란 전쟁(1차 1652~1654년)을 진두지휘
했으며 1666년 9월 발생한 끔찍한 ‘런던 대화재’ 당시 화재 진압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형 찰스는 상황판단이 빠르고 정치적 언사에 능란했으며 또 타협과 결정의 순간에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았으며.... 호방하고 쾌활한 성격대로 친화력이 뛰어난 반면, 도덕적 진중함이 부족해 정치
기술은 있으나 성군은 아니었으나 제임스는 성실하고 진지했으며 형 찰스 처럼 경박하지 않았습니다.
또 군에서의 경력이 말해주듯 강단있게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있어서 제임스는 분명 통치자
로서 뛰어난 면이 있었으니 그는 실리를 따지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기술이 부족했으니
신념에 있어서만큼 강직하고 투철했던 제임스의 성품은 타협을 용납 못하는
경직된 태도로 드러났으니...... 제임스 2세로 즉위하고 3년의 짧은 재위 기간에 드러납니다.
제임스는 어릴적부터 찰스 1세를 닮아 종교에 열정적이었고 가톨릭 신자였던 모친
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청교도 혁명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에 머물면서
가톨릭 문화에 더욱 친숙해졌고 이후 자연스럽게 가톨릭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2세의 재위때에 제임스의 가톨릭 신앙은 의회와 마찰을 빚어왔으니 제임스는 1669~1670
년쯤 부인이 죽기 전 부부가 같이 가톨릭으로 완전 개종했으며 다만, 형 찰스 2세의 권고와
왕가가 따라야 할 국교회 헌신 의무를 지키기 위해 국교회 의례에 형식상 참여했을 뿐입니다.
1673년 5월 의회는 심사법을 통과시켰는데 모든 공직자들은 의무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국교회에 충성한다는 서약을 해야 했으니 우선적으로 제임스의 가톨릭
신앙이 문제가 되었는데 모두 우려했던대로 제임스는 국교회 헌신 서약을 거부
하고 해군 총사령장관을 비롯해 맡고 있던 모든 관직을 내놓고 국정에서 물러납니다.
자신의 가톨릭 신앙이 확고하다고 공개적으로 확인시킨 준 것인데, 게다가 같은 해 11월 제임스는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공국의 메리와의 결혼을 선택했으니 제임스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나이가
15살 밖에 안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왕비를 ‘교황의 대리인’ 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1677년 찰스 2세는 국내 여론과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동생 제임스의 장녀 메리와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 왕가 윌리엄의 혼인을 추진했는데 제임스는 자신의
종교와는 별개로 사별한 전 부인과 얻은 두 딸 메리와 앤을 영국 왕실의 법도에
맞게 국교도로 양육해 왔으니 딸 메리의 결혼도 반대하지 않고 형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정작 찰스 2세의 후계가 문제였으니 찰스 2세와 캐서린 왕비 사이에 정식 왕위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찰스의 나이가 들어가자 왕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
는데 범 프로테스탄트측은 만약 가톨릭 신앙을 고집하는 요크공 제임스가 후임
왕위에 오를 경우 또다시 종교 전쟁이나 국가 분열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증폭된 불안과 불만은 급기야‘제임스 왕위 배척 사건’(1678~1681년)으로 표출되었는데
이 사건의 발단은 타이터스 오티스 라는 사람이 퍼트린 낭설에서 비롯됐으니
소문인즉 교황청과 영국 내 가톨릭교도가 합심해서 현왕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 제임스를 왕으로 옹립해서 대영국을 가톨릭 세력권으로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소문이 삽시간에 잉글랜드 전체에 퍼져 전국을 광란적인
집단 공포에 빠트렸고 소문은 점점 괴담으로 번져 곳곳에서 가톨릭교도를 향한
테러와 방화가 일어났으니 제임스 반대파는 물을 만난 듯이 여론몰이를 했는데
의회는 제임스로 촉발된 후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갑론을박 요동칩니다.
1683년 6월에는 또 다른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으니‘라이하우스 음모 사건’ 으로 요크공
제임스와 동생을 감싸는 국왕 찰스 2세를 동시에 암살하려는 계획이었으니 찰스 2세
는 두 사건 모두 엄정하게 대응해서 자신의 통치권을 확실히 입증하며 동생 요크 공
을 비호했으니 1685년까지 제임스의 후계를 둘러싼 종교적 불만은 잠시 가라앉습니다.
제임스 2세는 형 찰스 2세의 임종 2달 후인 1685년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왕위
에 올랐으니.... 51살로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군주로서 제임스 2세의 통치능력
자체는 형 찰스 2세의 궁정에서 왕실 최측근으로 국정을 도우면서 이미 검증되었으니
가톨릭 신자라는 화약을 안고 있었지만, 의회나 국교회의 소란없이 순조롭게 즉위합니다.
1685년 6월 잉글랜드 남서부를 거점으로 대규모 반(反) 제임스 군사 반란이 일어나 즉위후 최초
의 위기 국면에 처했는데 반란 지도자는 찰스 2세의 혼외 아들인 몬모스 공으로 1683년
‘라이하우스 음모 사건’ 에도 연루되어 네덜란드로 피신해 있던 자로 가톨릭 신앙을 문제
삼으며 피흘려 지켜온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무너뜨릴수 없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웁니다.
같은시기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도 몬모스와 뜻을 같이해 스코틀랜드에서 무장 반란을
으켰는데 몬모스의 반란은 한달만에 무자비하게 진압되어반란 지휘자들은 참수당했고
몬모스공의 시신은 5조각으로 참혹하게 잘려나갔으며 반란에 가담한 병사들은 서인도
제도 바베이도스로 추방되었고 주동자급 병사 200여명의 잘린 머리통이 전시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첫해 불거진 반역사태를 발본색원하여 가차없이 응징했고 이 사건을
본보기 삼아 향후 왕권에 도전하는 그 어떤 것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경함을
분명히 했으니 이 사태는 국왕의 강력한 지도력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보여줄 기회였습니다.
한편으로 제임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 반대론자들의 주장, 혹은 국민적 정서를 어떻게
조율해 나갈지 고민하며 타협의 방안을 모색했어야 했으나 제임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
신앙에 대한 거센 위협을 절감했고 이때 부터 종교문제에 있어서 매우 방어적으로 대응해 갑니다.
첫해의 반란 정국이 지나고 1686년 이후 제임스 2세는 자신이 의도한 정책에 병적으로 집착했고
극단적인 비타협 자세를 취했으니 로마교황측 인사를 궁정에 불러들이는가 하면 가톨릭
신자를 국가 고위직과 대학의 중책에 임명하고 반발하는 국교회 인사를 해임하거나 투옥시킵니다.
1687년에 포고된‘종교 관용령’은 제임스 2세의 완고함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태였으니 로마 가톨릭
에 적용되어 온 형법상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법령이었으며 가톨릭을 포함해 비국교파
프로테스탄트, 유대교도, 이슬람교도가 자유롭게 자기 종교의 예배에 참석할수 있게 했습니다.
심지어 종교를 갖지 않은 비종교인의 신념의 자유 까지 보장했는데 현재의 관점에선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포용함으로써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령이었지만..... 당시 국교회와 청교도의
입장에서 이 포고령은 숨어 지내던 가톨릭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닐 발판을 마련해 준 셈이었습니다.
또 제임스 2세는 국교회 중심의 개신교 전통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거대 가톨릭
수호국의 속국으로 전락시켜 로마 교황을 신으로 떠받들게 할 것처럼 보였으며 더욱이 제임스는
이 포고령을 국교회 주일 예배에서 사제들이 2주 연속 신도들에게 분명히 공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사실 제임스는 부친 찰스 1세와 조부 제임스 1세의 정치적, 종교적 기반이었던 국교회 보수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1673년 심사법 파동 때 제임스가 국교회 헌신 서약을 거부하는
정치적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국교회 보수파와 제임스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제임스의 신앙심은 그 자체로 경건한 것이었고 요크공 시절부터 성실하고
진중한 성격이라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에 2~3년 가톨릭 비호정책으로
관계가 불편해지긴 했어도 국교회 보수파는 제임스 2세에게 일말의 지지를 남겨
두고 있었지만....... ‘종교 관용령’ 을 기점으로 제임스로 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제임스 2세는 4년간 권좌에 머물렀다가 ‘명예혁명’ 으로 1688년 12월 폐위되는데 명예혁명의 불씨는
후계문제에서 당겨졌으니 1688년 5월 ‘종교 관용령’ 으로 어수선한 상태에서 6월 가톨릭신자 메리
왕비가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를 출산하자 의회와 국교회, 대다수 국민들은 제임스 2세의 종교
정책이 과도하긴 하지만 50대 중반에 이른 나이를 고려할 때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혈의 내전을 치른지 불과 30년 안팎이고 또다시 국왕의 목을 자르는 국부 살해를 경험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게다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왕녀 메리와 앤이 제임스 2세의
뒤를 잇게 되면 나라는 다시 안정을 찾으리라 예견했는데..... 느닷없는 왕세자의 탄생
으로 로마 가톨릭의 속국이라는 가상의 시나리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공포가 됩니다.
왕자 탄생 직후인 6월말 의회는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에게 국사와 관련된 조언을 원한다는 구실
로 비밀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니 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의 큰 사위(장녀 메리의
남편) 이자 조카이기도 했으니 그는 11월 5일 예상 밖의 대군을 이끌고 영국 땅에 상륙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승리를 장담했으나 개신교 병사들이 이탈하는등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났으니 12월초 갓난 아들과 메리 왕비는 먼저 프랑스로 도피하고
윌리엄 수중에 붙잡혀 있던 제임스 2세도 프랑스로 탈출하면서...... 국왕의
옥쇄를 템스강에 던져버리니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킬 훌륭한 명분을 얻었습니다.
1689년 1월 의회는 제임스 2세의 폐위를 공식 선언했고 2월에는 권리선언과 이를 강화한
권리장전을 발표해 군대 조직 및 조세와 관련된 세부 사항을 의회의 원칙을 따르
도록 법적으로 명시했고 왕위 후계가 의회가 정한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내용을
법으로 규정했으니 전제적인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대폭 확대한 것입니다.
권리선언과 권리장전에 따라 1689년 2월 13일 화이트홀에서 폐위된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
와 윌리엄 부부는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되어 공식적인 공동 왕위가 주어졌으니
무혈의 ‘명예혁명’ 이 완수되고 사상 최초로 세습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의 막이 열렸습니다.
제임스 2세는 1688년 12월 프랑스로 도피해 망명정부를 세웠고 루이14세는 제임스2세를 영국의 정식
군주로 인정했으니 제임스는 외가 쪽인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일부 세력과
연합해 재기할 기회를 노렸으니 아일랜드는 2년간 버티다가 1690년 더블린 북쪽 보인강 전투에서
윌리엄 3세가 직접 이끈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 대패하니 제임스는 무기력해져서 1701년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