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마디는커녕 열마디로도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배우가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섬> <거미숲>을 통해 신비로운 이미지를 보여줬던 서정이 바로 그런 배우. 허나 막상 단정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인터뷰에 임하는 서정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도 많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며, 때로는 도도하고 우아한 교태를 뽐내는 지극히 밝고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말없고 속내를 알 수 없는 공허한 영화 속 캐릭터가 서정의 밝게 웃는 얼굴과 오버랩 되며 내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영화 속의 그 서정이 맞나?’라는 의심이 문득문득 들곤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녹색의자>의 문희와 현의 사랑이 너무나 부럽다며 수줍게 웃는 서정을 보면서 “저도 연하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속으로 “넣어둬~ 넣어둬~ 너 자꾸 이러면 회사 짤린다!”를 연신 외치며 겨우 진정할 정도로 서정은 매력적이었다. 바쁜 스케줄로 인한 짧은 인터뷰 시간을 ‘혼자’ 못내 아쉬워하며 다음번에 서정을 만나면 이 배우를 기필코 명쾌하게 한마디로 정의 내리고 말리란 다짐을 해본다.
<녹색의자>가 2년 전에 촬영을 마쳤는데 개봉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웃음)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 사이에 저는 <거미숲>이라는 영화도 개봉했구요. 지금 홍보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머리가 많이 아파요. 그때 기억이 다시 살아나서요. 오늘 영화를 보니 아주 객관적으로 어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것 같이 ‘내가 어떻고...’ 이런 개념이 안서요. 그리고 두 사람이 아주 깊이 사랑에 빠진 모습들이 굉장히 부럽더라구요. 요즘 저의 상황에서는... (웃음)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녹색의자>로 선댄스 영화제 다녀왔고, 요즘은 <녹색의자> 홍보하고 있고, 다른 시나리오 준비 중이에요.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인지는 말씀 안해주실껀가요?네. 나중에 인사드릴게요(웃음).
<녹색의자>에 캐스팅은 어떻게 되었나요? 박철수 감독님이 서정 씨의 어떤 면을 보고 캐스팅했는지 궁금하네요.모르겠어요. 감독님께서 저를 많이 부르시더라구요. 그래도 박철수 감독님인데 제가 인사는 드려야할 것 같아서 찾아갔어요. 인사드리고 얼굴 뵙는 자리에서 대화하다가 감독님이 시놉을 이야기 해주셨어요. “나 이런 영화 만들고 싶은데 나하고 작업하자, 서정!” 딱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쭉 듣고 약간의 고민을 하다가 박철수 감독님과 작업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제가 갈증이 많은 상황이어서 아주 인연이 잘 닿았던 것 같아요.
박철수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하셨나요?아니오(웃음). 좀 걱정이 많이 됐어요, 사실. 그런데 감독님은 새로운 거, 내추럴 한 거, 독창적인 거를 추구하고 싶다고, 이 영화를 통해서 바꿔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강조하셨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호감이 가더라구요. <녹색의자>도 완성된 걸 보니까 기존의 작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네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요.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해 알고 계셨나요? 몰랐어요. 그 사건은 제가 감독님 만나서 처음 듣게 되었어요.
두 인물의 사랑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상황인데 부담되지는 않았나요?부담보다는 소재가 참 재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서가 그렇잖아요. 19살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사랑에 빠지고 보니 그 남자가 19살이라더라... 그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여자가 구속까지 되는 실제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코믹하면서도 생각해볼만한 소재였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대한 가치를 좀 더 발견하게 되고 무언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 고뇌의 정답은 없죠. 하지만 고뇌를 하고 있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거죠.
영화를 보면서 참 연기하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크게 웃으며) 제 영화가 다 제 자신을 좀 괴롭히는 영화들이죠.
실제로 연하의 남자와 사랑해본 경험이 있나요?아니 저는 사랑을 못해봤어요... 아직(웃음).
그런 거짓말을...진짜요? 제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현과 문희 같은 그런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갈망하고 있죠(웃음).
서정 씨를 영화에서 보면 참 독특한 분위기의 배우에요. 어떤 한이나 사연 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까... 그러한 것들을 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기보다 오히려 비어있는 느낌을 보여주거든요. 무어라 명료하게 정의하기 힘들지만 그런 서정 씨만의 연기를 주로 해오셨는데 실제 모습과 연관이 있나요?아니에요(웃음). 저는 어우 (손사래를 치며) 참 안타까워요. 제 평소의 모습은 굉장히 그냥 뭐라 그래야하나... 밝아요. 워낙 영화에서 무겁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뭐라 색깔을 표현 못하고 묘하다 이런 느낌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젠 좀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웃음) 보여주어야 될 때가 아닌가...(웃음)
다음 작품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제가 독립 영화하던 습성이 있어서 아직까지 저는 배우라는 이름이 어색하구요, 이제 시작을 해보려면 좀 더 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차원이죠. 지금까지 작업은 공부하고, 학습하고, 경험하고, 만남을 갖고... 이런 차원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겸손하시네요.아니 정말인데...(웃음)
수상도 많이 하고 좋은 평가도 많이 받으셨잖아요.아니에요. 그건 참 행운이었던 거죠.
말씀을 들어보니 서정 씨의 변화된 모습이 기대되면서 빨리 만나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정 씨만의 색깔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서정 씨 같은 배우가 국내에는 거의 없잖아요.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박철수 감독님은 영화에서 성욕과 식욕이라는 코드를 항상 사용해요. <녹색의자>에서도 출소 후 여관에서 반복적으로 섹스하고 자장면 먹는 장면이라든지, 현이 요리를 해주고 자신을 요리의 재료로 쓰라고 하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오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연기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하셨거나 이런 식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과정들이 있었나요?그 장면들은 굉장히 재밌는 것 같아요. 먹고 자고 하는 그건 감독님이 너무나 강조하셨던 삶의 기본적인 욕구들이고,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선댄스 영화제에서는 관객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거예요. 한국과 비교해보니깐 웃는 코드가 많이 달라요. 그게 문화적 차이겠죠. 별것 아닌 단순한 상황에 폭소를 터트리더라구요. 남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들을 감독님이 자꾸 건드려주니까 마치 자기의 일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서 재미가 있었나봐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비중을 두었던 것은 연기가 어떻고 대사가 어떻고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심지호 씨하고도 늘 이야기 했어요. ‘관객이 영화를 봤을 때 정말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영화는 실패한 영화다.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연기 못해도 되니깐 우리 그 감정만은 솔직하게 뽑아서 보여주자.’ 그렇지만 한계라는 게 있잖아요. 이 배우와 제가 소통할 수 있는 시간도 그렇구요. 진실을 계속 호소하면서 본인이 계속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이런 측면에서 영화 찍는 내내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랑의 경험이 없으셨음에도 표현을 잘하셨네요.표현이 잘 되었나 모르겠어요.
전 둘이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너무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웃음).
사회의 고정관념이나 통속적인 도덕, 윤리 이런 것들로부터 사랑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사랑이 뭐가 우선인가라는 질문을 하자면 끝도 없지만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미성년,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요. 며칠 후면. 그 며칠이란 상황 때문에 이 여자는 구속까지 돼 버린단 말이에요. 옛날로 치면 마녀사냥 당하듯이 사회로부터 매장당하고, 그런 상황이 굉장히 우습죠. 이 여자는 진심으로 사랑했단 말이에요. 이 둘은. 그걸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건데, ‘무엇이 진실이냐?’, ‘무엇이 사랑이냐?’ 이런 질문은 끝이 없잖아요. 그건 자신 안에 있는 거고 늘 자신에게 질문하는 거니까 그 자유는 자신이 찾아가는 것 같아요. 룰이나 정해진 틀 안에서 본다는 시각자체가 모순이죠.
주변의 시선은 그렇다고 해도 32살이란 나이는 음... 서정 씨는 서른둘이란 시절을 거치셨잖아요.아...(웃음). 그때는 안 거쳤을 때에요.
저는 조금 남았지만(웃음), 제가 그 나이라면 상대방은 열아홉, 스물이란 좋은 시절을 자신으로 인해 제약받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며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놓아주어야 하진 않을까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아요.영화 안에서도 계속 갈등을 하잖아요. 여자가 모텔에서 갑자기 신경질 적으로 나오는 것 또한 자기가 의도한 거고, 이 남자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황이고, 그건 현이 계속 조장하고 만들어가고... 현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매력 있죠. 정말 나이가 그게 뭐가 중요한지, 정말 사랑하는데... 그 자체가 참 즐거운 것이지, ‘내가 좀 더 성숙한데 이 어린아이의...’ 이런 차원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영화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이 ‘아유, 철이 없다’ 이런 것은 단 한 코드도 못 느끼실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기자의 표정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며) 느끼셨어요?
저는 간혹 느꼈거든요.어떤 장면에서 느끼셨어요?
(당황하며) 정확한 장면은 기억 안 나지만 영화 초반부에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그런 느낌은 없어졌지만요.그건 철이 없다는 느낌 보다 너무 순박한 것 아닌가... 그런 느낌이었겠죠.
역시 어리긴 어리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근데 그 것 또한 감독님이 의도하셨던 장면이에요. 몰카 장면이라던가... 그죠? 일부러 19살의 풋풋함을 보여주려고, 또 만약에 얘가 정말 날라리였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장면을 의도해서 넣으신 것 같구요. 그렇지만 철이 없고 뭔가 더 계산된 어린아이라는 색깔은 없다는 거죠.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잖아요. 국내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 것 같나요?오늘 처음 보니까 생각보다 더 많이 웃고 폭소가 터지고... 무슨 코미디 영화보고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것을 잘 살릴 수 있다면 요즘 심각한 거 싫잖아요. 정말 무겁고 이런 거 싫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와서 서로에 대해 좀 더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소중함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워낙 박철수 감독님 영화는 외국에서 더 호응이 좋은 편이고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아주 시기적절하게 이 영화가 나오게 된 것 같아요. 오히려 2년 전보다 지금 시점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대중들에게 좀 더 얼굴을 알리고 싶은 이유였나요?(웃음) 아니요. 그런 것 보다 <섬> 촬영 후에 <섬>의 연장선에 있는 시나리오들이 계속해서 들어왔어요. 제가 노련한 배우였다면 얼마든지 다른 색깔로 그 영화들을 소화할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 저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마침 그때 [청춘의 덫]이란 드라마를 만드신 정세호 감독님이 프로포즈를 강하게 해주셨어요. 환경이 너무 좋았어요. 상대배우도 그렇고 일류 스텝, 일류 작가... 이런 상황에서 굳이 거부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섬>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니까 서정이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브라운관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구요. 근데 방송이란 것은 예상을 뛰어넘더라구요. 3부 때부터 대본이 없었어요. 대본이 없어서 작가와 PD간의 마찰,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들이 진행되더라구요. 그래서 정세호 감독님이 나중에 저한테 “서정, 앞으로 살면서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죠. 배우들이 평생 이런 일 처음 겪었다고 할 정도로 아주 혹독한 상황에서 방송을 했어요. 그날 대본으로 그날 촬영해서 그날 방송 나가고... 그 나름의 매력을 제가 뒤늦게 발견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좋은 기회가 생기면 또 다른 모습으로 방송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녹색의자>에서 문희와 현의 사랑이 계속 진행될 꺼라 보세요?네. 그럴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조이씨네 회원 여러분께 <녹색의자>에 대한 소개와 인사 부탁드려요.안녕하세요. 조이씨네 회원여러분. 저는 <녹색의자>라는 영화로 6월 10일 날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사랑영화에요. 어떤 분이 보셔도 사랑에 대해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또는 회상에 젖게 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재밌는 요소들을 경쾌하게 담았어요. 심각한 소재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구요, 시사회를 통해 보니까 참 재밌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많이 봐주시고 많이 글 남겨주세요. 여러분들 이야기가 더 궁금하거든요. 그럼 제가 다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정리| 서정환 ppalma@joycine.com
촬영, 편집| 강재욱 media@joyc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