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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시대에는 염불만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대집경)
이 시대에는 어떤 수행(신행)을 닦는 것이 가장 좋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대집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법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더라도
한 사람도 도道를 얻기 어려우니, 오직 염불을 의지해야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말법시대에는
가르침도 많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가르침과 사람의 근기가
서로 맞지 않아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드물다.
염불법문을 수행하는 이만이 나고 죽음의 고해를 뛰어 넘어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빛 가운데 빛이고 부처님가운데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앞서 말법중생들에게
해탈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정토법문을 남겨 주셨다.
불자라면 부처님이 일러 주신
이 정토법문을 기쁘게 받아 지녀야 할 것이다.
죄업이 깊고 무거운 중생도 아미타불을 부르면 구제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그대로 믿고 정토에 태어나기만을 바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틀림없이 구제 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중생이 오계, 팔계, 구족계 같은 청정한 계율을
깨트리고 살면서도 참회하지 않는 마음이 없다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대부분은
“이제는 영영지옥을 피할 길이 없겠구나.” 하고 체념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때라도 좋은 스승을 만나 광명이 끝없는
아미타불의 공덕과 서원을 찬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염불하면 80억겁의 죄업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무서운 지옥불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 되어
가지가지 하늘 꽃을 흔들고 그 꽃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부르는 중생을 맞아 주시니
한 생각에 극락정토의 연꽃 속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죄업이 무겁고 깊어 지옥, 아귀, 축생 같은 삼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죄업을 받을 이라도 염불하는 한 생각 속에 80억겁의
죄업을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극락정토에 태어나 길이
윤회의 바다를 건너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니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한 생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됨이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님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인과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질 이가 어떻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한 생각으로 무서운 인과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부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인연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의
씨앗이 무르익어야 피어난다.
지옥불앞에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마음이야 말로
무르익은 인연이요 공덕의 끝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한 결 같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염불하는 공덕은 금강을 먹는 것과 같아서 결코 없어 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전에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큰 호랑이를 만났다.
나그네는 너무 바쁜 나머지 “나무불!!”하고 외쳤다.
이 한마디의 공덕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염불수행자는 결코 염불공덕을 의심하지 말고
나고 죽음을 생각하는 참마음으로 용맹스럽게 염불해야 한다.
염불이야말로 죽음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어떤 중생이라도 염불하면 해탈한다.
정토법문은 위, 아래, 가운데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함께 끌어안고
율종, 선종 같은 여러 종파들을 다 아우르는 법문이다.
정토법문은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때 맞춰 내리는 단비와 같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큰 바다와 같다.
변(邊),원(圓),돈(頓),점(漸)의 모든 가르침이 다 이 법문 가운데서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을
한데 아울러 모두 참 진리를 얻게 하고,
성인과 범부를 함께 이끌어 정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구계(九界)가 모두 귀의하고 시방삼세가 함께 찬탄하고,
경전마다 이 가르침을 밝히고 논장마다 이 가르침을 펴니,
이는 가르침의 가르침이고 일승에 큰 빛이라 이를 만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이 정토법문에 귀의해 해탈하라고 가르치셨다.
관음세지, 문수, 보현 같은 모든 위대한 보살들도
정토법문을 수행하고 아미타불을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
물러섬 없는 땅에 이르러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라고 권하셨다.
염불법문에는 어떻게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루는 힘이 있는가?
이런 힘의 뿌리는 아미타불의 48원의 알맹이인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는 원력과
열 번의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원력이 있다.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극락정토에 태어난 이는 이미 지은 업장의 무겁고 가벼움에
가릴 것 없이 한 결 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는 원이다.
그렇다면 정토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렇게 된다.
“열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아미타 부처님은 과거 원력보살로 수행할 때
“내가 만약 성불하면 시방중생이 나의 국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고
내 이름을 열 번만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만약 한 중생이라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 는 원력을 세웠다.
시방중생이란 사람뿐만이 아니다.
중음세계 중생이든 나아가 짐승, 아귀, 지옥 중생할 것 없이
신령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은 그대로 이니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정토에 태어나 성불하고 만다.
더욱이 중음세계의 중생은 그 영성이 생전보다 아홉 배나 밝으니
이 같은 영성으로 지극하게 부르면 아미타불을 원력을 타고
한 생각 사이에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룬다.
중음세계가 아무리 험해도 아미타불만을 부르면 벗어날 수 있는가?
성불하기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중음신에게 보이는 온갖 밝은 빛, 기쁨과 성냄에 모습을 나투는
여러 성상과 나찰, 맹수, 우박 같은 현상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식이 바뀌어 나타난 모습이다.
살아 있을 때 중음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어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경계를 만나면
그런 경계들의 참모습을 알지 못해 자성불(自成佛)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제할 기회를 놓쳐 윤회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만다.
이와 같이 참으로 위험한 상 황속에서도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면
문득 허망된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고 변화해 나타난
허망한 경계들이 사라진다. 아미타불은 결코 스스로 세운
서원을 저버리시는 일이 없다.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바로 오시고
이끌어 정토에 태어나신다.
부르는 중생이 비록 삼천 대천 세계의 큰 불로 가득 찬 곳에
있다 하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활활 타는
불꽃 바다를 뛰어넘어 정토에 태어나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염불문은 늙은이에게나 맞는, 낮은 수행법인가?
정토법문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이
것은 지혜 있고 공덕을 짓는 이의 말이 아니다. 왜 그런가?
정토법문을 믿고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수많은 생을 통해
수행공덕을 쌓는 큰 지혜인으로 낮은 근기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이미 복덕과 지혜를 닦지 않은 이는
이 정토법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하셨고
또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켜 우러러 아미타불께 귀의하고 염불수행을 한다면
이런 이는 작은 근기가 아님이라. 그런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제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참으로 정토법문을 듣고 맑은 믿음으로 받들어 실천하는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난 생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수행한 복덕과 지혜가 크고 깊은 이들로서
으뜸가는 부처님의 제자인 것이다.
부처님조차도 찬탄하신 이 법문을 힘써 수행하는
염불행자를 얕잡아 보는 일은 참으로 삼가 할 일이다.
염불법문의 수승한 공덕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도 잘 밝혀 주고 있다.
더 깊이 공부해 보려는 이는 『정토 삼부경』을 보면 된다.
무량수경에서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관무량수경에서는 염불법문이 높고 깊은 유식수행의 뿌리임을 알 수 있고
아미타경에서는 근기가 서로 다른 중생들이 염불수행으로
빠짐없이 구제를 받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알 수 있다.
마(魔)는 수행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인데 ,염불법문을 수행하면 마가 없을까?
『수능엄경 오십음마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러 귀신의 무리들과 함께하는 말법시대에 이르면
천마(天魔), 외도, 귀신, 요정, 같은 기운들이 불길처럼 일어나
모든 수행자들을 괴롭힌다.
참선이나 밀법을 닦는 이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바른 견해가 없으면 바로 마군의 그물에 걸려들고 만다.
그러나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고
염불법문을 받아 지닌 이는 삿된 마군의 괴롭힘에 걸려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십왕생경』 말씀을 보자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태어나길 원하면
아미타불께서 스물다섯 큰 보살을 보내어 수행자를 보살펴,
가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밤이거나 낮이거나
어떤 때 어떤 곳을 가림 없이
악귀나 악신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또 아미타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경을 받아 지니거나
여러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이 선남자 선여인들은
모두 부처님들께서 보살펴 주시나니,
모두 물러섬이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듯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자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들의 보살펴 주시사
언제나 40 리에 뻗치는 밝은 빛 속에 있어 어떤 마도 가까이 할 수 없다.
염불법문이야 말로 이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쉽고 간단하고, 가장 근기에 맞는 수행법이자
생사해탈을 가장 완전하고 빠르게 이루어주는 성불의 문이다.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빈틈없는 해탈공부
어렵고 어려운 일은 죽음뿐,
모든 것이 사라 질 때 죽음이 올 때 그대여, 죽음을 죽음이라고
알아서 그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나고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그대는 공부를 해 두었는가?
『화엄경』<보현행원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 모든 감각은 다 흩어져버리고
가족도 이웃도 다 떠나버린다. 명예도 위엄도 재물도 다 사라진다.
따르던 이들도 헐뜯던 이들도 함께 갈 수 없는
죽음의 길에 오직 함께하는 것은 정토를 그리던 이 마음뿐.
자나깨나 아미타불을 그리던 마음의 빛이
죽음의 길을 환하게 비추어 한 순간에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정토에 태어나면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같은 수많은 보살님께 에워싸여 연꽃 속에 태어나며
부처님께 수기를 받으리라. 죽으면 가장 아끼던 몸이며,
눈, 귀, 코, 혀, 같은 모든 감각기관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 그뿐인가.
사랑하던 가족과 이웃들도 영영 헤어지게 되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도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부리던 이라도 숨길 한번 끊어지면
한 사람도 뜻대로 부릴 수 없다.
이 같은 죽음을 맞이하여 창자를 끊는 듯한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중음의 세계는 친척도 없고, 벗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
시커먼 어둠의 두려움 속에는 살려달라고 부를 이름도 모습도 없어
지은 업대로 곤두박질치며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살아 있을 때 가족이나 이웃이 이런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 이 같은 중음의 고통 속에 빠져있을 때를 대비해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나고 죽음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깔끔히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온갖 현상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음을 깨달아
욕심과 애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아미타불을 그리는 마음을 키워나가고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원을 닦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이렇게 힘써 수행한 이는 죽음에 이르러 한꺼번에
온갖 세상 인연들이 사라질 때 불보살님의 가피의 빛살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하여 한 순간에 극락정토의 연화 속에 태어나
아미타불님의 수기를 받고 자기가 성불할 때와
나라와 이름을 밝게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뛰어나고 시원한 일인가!
이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죽음을 뛰어넘어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아가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까지도 인연 따라 구제하게 될 것이니
어찌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윤회의 깊은 강에서 건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인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 정토의 맑은 가르침을 따른 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보기가 어려운 모든 근심과 집착을 놓아 버리게 된다.
또 정토의 부신 빛살에 눈이 뜨여 한마음 한뜻으로
정토에 태어나길 소원하게 되나니,
다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게 되더라도 끝내 정토를 향한
큰 소망을 남김없이 어느 생엔가는 이루게 된다.
사람 몸을 받고서도 정토의 길 안 닦으면 보배산에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옴과 같도다.!
출처 / (중음신제도법) - 정토와 밀교의 핵심 되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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