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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fue enviado por Dios el ángel Gabriel a una ciudad de Galilea, llamada Nazaret, a una virgen desposada con un hombre llamado José, de la casa de David; el nombre de la virgen era María.
Y entrando, le dijo: «Alégrate, llena de gracia, el Señor está contigo». Ella se conturbó por estas palabras, y discurría qué significaría aquel saludo. El ángel le dijo: «No temas, María, porque has hallado gracia delante de Dios; vas a concebir en el seno y vas a dar a luz un hijo, a quien pondrás por nombre Jesús. Él será grande y será llamado Hijo del Altísimo, y el Señor Dios le dará el trono de David, su padre; reinará sobre la casa de Jacob por los siglos y su reino no tendrá fin». María respondió al ángel: «¿Cómo será esto, puesto que no conozco varón?». El ángel le respondió: «El Espíritu Santo vendrá sobre ti y el poder del Altísimo te cubrirá con su sombra; por eso el que ha de nacer será santo y será llamado Hijo de Dios. Mira, también Isabel, tu pariente, ha concebido un hijo en su vejez, y éste es ya el sexto mes de aquella que llamaban estéril, porque ninguna cosa es imposible para Dios». Dijo María: «He aquí la esclava del Señor; hágase en mí según tu palabra». Y el ángel dejándola se fue.
«Y entrando, le dijo: ‘Alégrate, llena de gracia, el Señor está contigo’»
Rev. D. David COMPTE i Verdaguer
(Manlleu,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toca un acorde compuesto por tres notas. Tres notas no siempre bien afinadas en nuestra sociedad: la del hacer, la de la amistad y la de la coherencia de vida. Hoy día hacemos muchas cosas, pero, ¿tenemos un proyecto? Hoy, que navegamos en la sociedad de la comunicación, ¿tiene cabida en nuestros corazones la soledad? Hoy, en la era de la información, ¿nos permite ésta dar forma a nuestra personalidad?
Un proyecto. María, una mujer «desposada con un hombre llamado José, de la casa de David» (Lc 1,28). María tiene un proyecto. Evidentemente, de proporciones humanas. Sin embargo, Dios irrumpe en su vida para presentarle otro proyecto... de proporciones divinas. También hoy, quiere entrar en nuestra vida y dar proporciones divinas a nuestro quehacer humano.
Una presencia. «No temas, María» (Lc 1,30). ¡No construyamos de cualquier manera! No fuera caso que la adicción al “hacer” escondiera un vacío. El matrimonio, la vida de servicio, la profesión no han de ser una huida hacia adelante. «Llena de gracia, el Señor está contigo» (Lc 1,28). Presencia que acompaña y da sentido. Confianza en Dios, que —de rebote— nos lleva a la confianza con los otros. Amistad con Dios que renueva la amistad con los otros.
Formarnos. Hoy día, que recibimos tantos estímulos con frecuencia contrapuestos, es necesario dar forma y unidad a nuestra vida. María, dice san Luis María Grignion, «es el molde vivo de Dios». Hay dos maneras de hacer una escultura, expone Grignion: una, más ardua, a base de golpes de cincel. La otra, sirviéndose de un molde. Ésta segunda es más sencilla. Pero el éxito está en que la materia sea maleable y que el molde dibuje con perfección la imagen. María es el molde perfecto. ¿Acudimos a Ella siendo nosotros materia maleable?
<거룩하고 흠 없는>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전체 설계도를 잘 모르고,
그 역사의 세부적인 과정도 잘 모르지만,
시작과 끝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든 사탄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저주인데,
메시아를 약속하신 첫 말씀이기 때문에
구원 역사의 시작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께서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예언이고,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서로 상처를 입히기만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죽이는 것으로,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가벼운 부상만 입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사탄과 그의 추종 세력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즉 메시아가 발꿈치에 상처를 입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일 것입니다.
안 믿는 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죽음만 보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예수님께 아무 해도 입히지 못했습니다.)
구원 역사의 끝은 묵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3-5)."
사탄을 저주하는 것으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고,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는 상태로 그 역사가 마무리됩니다.
사탄의 세력이 모두 소멸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햇빛이 필요 없다는 말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상태,
또 하느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는 완전하고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창조 이전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메시아를 약속하실 때 시작되었지만,
하느님의 '좋으신 뜻'은 이미 창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여기서 '좋으신'이라는 말에는 '기뻐하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창조 이전부터 그 기쁨을 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았다는(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각자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데,
인간들 쪽에서 노력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또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베풀어지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구원을 못 받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창조 이전의 순수하고 영원한 상태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고,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에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선택된' 것이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응답한 것은 성모님의 의지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응답을 충실하게 지키신 것도 성모님 자신이 스스로 하신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또 하느님의 사랑은 '강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처럼 우리 쪽에서도 하느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응답과 순종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붙잡혀서 끌려가는 나라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응답하고
그곳을 향해서 스스로 걸어가는 사람만이 들어가게 되는 나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순수한 영혼으로 되돌아가는 길잡이 ♣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교의는 성서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초대 교회 때부터 그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비오 9세 교종은 1854년 12월 8일 이를 다음과 같이 교의로 선포합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 32항)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교의에 따르면,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아들과 성령께서 머문 그분의 태중은 흠도 죄도 없음이 마땅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구세주라면, 적어도 한 사람, 곧 마리아를 원죄의 물듦으로부터 보호했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중개와 구원 작용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은 것입니다(Duns Scotus).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 하고 말합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라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1,29). ‘은총이 가득한’이란 표현은 하느님께서 앞서 오직 마리아에게 이루어주신 그 사랑, 특별한 은혜, 아름다움, 거룩함 등의 상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마리아께서는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라는 말씀을 듣고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하고 응답하십니다. 마리아는 “순명으로써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고”(성 이레네오, Adversus haereses, III, 22,4), 그 결과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순종함으로써 ‘은총’을 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였고, ‘인간성’이 새롭게 창조되도록 하였으며, 그 ‘인간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범이 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마리아는 성부의 뜻을 완전히 행하였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일은 그리스도의 모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순수한 영혼으로 되돌아가는 길잡이입니다.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교의는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고, 우리의 죄가 하느님의 구원에 걸림돌이 됨을 가르쳐 줍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창조 때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렇게 지음 받았을 때의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누구나 육(肉)의 정신에 치우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곤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빛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행복과 구원은 나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처럼 우리도 그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순종하고, 항구한 기도와 말씀의 경청을 통하여 창조 때의 그 순수함을 계속 간직하며 사랑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렇게 깨끗한 임종
어제 아침 제가 머물던 수녀원 바로 옆집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할머님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물론 할머님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어 숱한 고초를 겪으셨지만,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는 수녀님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님은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얼마나 "감동적이고 화끈하게" 마무리 지었는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느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른 것에 신경 전혀 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할머님은 다른 임종자들과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돌봐주시던 수녀님들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첫 번째 유언은 자신이 미리 사 둔 묘 자리를 다른 할머니에게 양보 할 테니
당신은 화장을 시켜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유언은 그간 아껴 모아둔 꼬깃꼬깃한 용돈을 내놓으시면서
당신이 돌아가시거든 당신 대신 한번 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어를 돈 되는 대로 사서 수녀님들과 할머님들, 고마운 분들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어제가 양로원 김장하는 날이었는데,
할머님 유언대로 홍어를 잔뜩 사서 김장하러 오신 봉사자들, 수녀님들, 할머님들에게 돌렸습니다.
모두들 유언을 남기신 할머님을 생각하며 맛있게 홍어를 먹었습니다.
여행길을 떠나기 직전 깨끗이 정리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웃을 생각하셨던 할머님의
따듯한 마음이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숭고하게 여겨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창조 때 주어진 그 최초의 순결함과 순수함을 끝까지 잘 간직하셨다가
다시 하느님 앞에 봉헌한 성모님의 생애 앞에 너무도 닳아빠진 제 영혼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하루입니다.
본성 상 나약한 우리는 수시로 죄에 떨어지고 동일한 악습을 반복하면서
영혼의 순수성을 상실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할머님의 임종을 바라보며
다시금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느님 앞에 너무도 부당하고 때묻은 우리이지만
그 할머님처럼 매일 떠나는 노력, 매일 준비하는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삶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그 빈자리에 하느님이란 새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떠날 때
그래서 그 떠난 자리에 하느님 그분께서 머무르실 때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비우고, 모든 집착에서 떠나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묘미는 쌓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허물어트리고 바닥으로 끊임없이 내려가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정화와 쇄신의 여정을 출발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낳아 드리기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은총이 가득한 이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가 많기에
행복한 줄을 모릅니다.
중세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가 은총이 가득하지 않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느님의 아드님이 내 안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성모님이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세상에 낳아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여 세상에 낳아드려야 합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을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마음과 삶으로 되새길 때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달을 수 있고,
마침내 세상에 말씀을 낳아드릴 수 있습니다.
거듭된 불순명으로 하느님과 멀어졌던 인류의 운명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성모님의 응답으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모님 태중에서 처음 들은 말씀이었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지탱해 온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날마다 이 말씀을 반복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선 오늘 대축일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가 붙은 이유를 살펴보면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인가하고
수호성인으로 성요셉을 지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조선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하지 못하고 북경에서 병사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엥베르 주교(1796-1839)가 임명됩니다.
1837년 북경에서 주교품을 받고 조선으로 입국한 엥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공동수호자로 모실 수 있기를
교황청에 청원하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청을 받아들여 엥베르 주교가 순교한 후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성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공동 수호성인(Compatroni)으로 선포합니다.
다음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에 대하여 살펴보면
우선 이 축일에 대한 생각이 마리아의 탄신축일에서 거꾸로 계산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9월 8일로 지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5세기말경 마리아 성당을 지어 봉헌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교황 세르지우스가 재임기간(687-701) 중에
"성모영보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 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교의(敎義)와 신심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탄생 장소와 일시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지만
탄생은 분명히 있었고, 탄생이 있으면 잉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12월 8일이 곧
성녀 안나가 마리아를 잉태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3월 25일이 주님탄생예고,
즉 주님의 잉태축일로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동방교회가 10세기경부터 12월 8일을 지정하여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잉태 축일"로 지냈고,
서방교회에서는 1100년 캔터베리의 안셀모 주교가 자기 교구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습니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1708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대축일로
전세계 교회에 선포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1855년부터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된 셈입니다.
개신교회와 동방교회가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하여
교리상의 문제를 삼고 있으나 325년 니체아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칭호를 드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당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죠.
유추해 본다면 후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잉태의 순간에
원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가 대미사를 마치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올 때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경외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나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심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교의(敎義)로 확실히 선언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모든 신자들은 이를 확실히 믿을 것을 선포한다..."
낭독을 마친 교황의 눈에서 기쁨과 경외의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4만명의 목소리가 <떼 데움>을 노래했고,
로마의 모든 성당에서 종이 울렸으며,
그날 밤 로마는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바깥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성모무염시태" 교의를 두고 좀 지나쳤다고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교의를 성모님 스스로가 나중에 추인하시게 됩니다.
그것은 1858년 2월 11일 루르드의 작은 동굴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에서 시작됩니다.
성모님은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당시 14세의 소녀 벨라뎃따에게 발현하셨는데,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 12번째 발현한 성모님께 벨라뎃다가
"부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고 침묵을 지키던 성모님은
소녀의 세 번째 물음에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하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성모님 스스로가 4년 전에 선포된 "무염시태" 교의를 추인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그 한마디 속에는 원죄(原罪)의 교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강생구속 교리가
한꺼번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원죄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의는
결코 마리아를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아닙니다.
마리아 또한 분명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그녀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두가 불가능하게 여기는 엄청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잉태"를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종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몸에 품어 하느님께 인간의 생명을 선사한 마리아는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이 엄청난 은총에 동참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전교구 민병섭 신부
첫댓글 평소에 저는 자신을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Agnostic)라 여겨 왔습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었지요. 그런 면에서 가톨릭 교리 중에도 특히 마리아 신심은 제게는 미루어 두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마리아의 원죄 없으심이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에게 얼마나 큰 희망인지 깨닫게 됩니다. 원죄 없으신 어머님 마리아의 존재 자체가 구원의 증거요 기쁨 가득한 희망임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