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사회, 환경의 조화로운 발전과 보전
- 문태훈 중앙대 교수 · 환경정책
어느 가정의 수입이 한 달에 300만원이라면 한 달 총지출이 300만원을 넘지 않아야 어려움 없이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수입을 초과하는 지출을 계속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계는 빚을 지고 파산에 이를 것이다. 수입이 허용하는 지출 한도를 넘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소비행위’를 한 탓이다.
어느 마을이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고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살고 있다고 하자. 목초지에서 생산되는 풀로 기를 수 있는 가축의 수는 최대 100마리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100마리가 넘는 가축을 방목한다면 그 초지는 오래지 않아 망가지고 마을 사람들은 더는 그곳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초지가 지탱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는 수의 가축을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제활동’을 한 탓이다.
만약 수입이 300만원인 가계가 300만원 범위 내에세 지출을 하고 저축을 했더라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100마리 범위 내에서 가축을 방목했더라면 그들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윤택한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월수입 300만원, 최대 방목 가능한 가축의 수 100마리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한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을 한계용량(carrying capacity)이라고 한다. 이 한계용량의 범위를 넘지 않는 경제행위를 하고 그 한계를 초과하지 않는 발전을 하자는 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 중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은 ‘미래 세대가 그들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 ‘자원의 이용, 투자의 방향, 기술의 발전, 그리고 제도의 변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현재와 미래 세대의 필요와 욕구를 증진시키는 변화의 과정’이다. 그간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하여 사용하는 사람마다 용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경제, 사회, 환경의 균형되고 조화로운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1972년 스톡홀름회의에서 개념 형성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의 가장 가까운 뿌리는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환경문제를 의제로 채택한 유엔회의,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일명 스톡홀름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회의는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가들 사이에 환경문제에 대해 현격한 시각차를 드러내 수사학적 성과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구환경보전을 위한 국제적 협력과 의무를 밝힌 스톡홀름선언이 채택되고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이 설립된 것은 이 회의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때 설립된 UNEP는 1983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ECD), 일명 브룬틀란트위원회(당시 위원장이 노르웨이의 수상 브룬틀란트였던 데서 붙여진 이름)를 설립하여 2000년대를 향한 장기 지구환경보전전략을 수립하도록 한다. 이 위원회에서 작성한 보고서가 1986년 ‘우리들의 미래(Our Common Future, 일명 브룬틀란트보고서)’로 출간되어 ‘환경적으로 건전하며 지속가능한 발전(ESSD : 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의 개념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88년 유엔총회는 브룬틀란트보고서에서 권고된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유엔 및 각국정부의 기본개념으로 삼을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유엔총회에서는 스톡홀름회의 20주년을 기념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을 범세계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의한다. 이렇게 해서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리우회의(지구정상회담, 유엔환경개발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지구환경질서의 기본원칙을 규정한 리우선언과 환경실현계획인 의제21(어젠더 21)이 채택되는데 이로 인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전기를 맞게 된다.
리우회의는 환경에 대한 관심을 세계적으로 고취시키고, 환경과 개발의 문제를 조화시키는 세계전략의 이념적 방향을 설정해 지구환경보호를 위한 기본적 원칙과 대책을 제시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개도국들은 방만한 선진국의 소비행태가 지속가능한 발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 주장했다. 민간단체들은 선진국간 이견으로 리우회담이 실질적으로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즉 리우정상회의에서 지구헌장의 초안이 폐기되고 그보다는 약화된 리우선언이 채택됐으며, 소비패턴의 변화를 위한 조항들은 미국과 OECD 국가들의 반대로 ‘의제 21’에서 전면 삭제됐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자연파괴적인 개발행위와 자원소모적인 소비패턴은 변화시키지 않은 채 환경기술을 개발하여 기존의 소비패턴을 유지하면서 환경보전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민간단체들은 다국적기업의 공해 수출을 규제하고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 환경보호에 있어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리우회의에서 다국적기업의 공해수출문제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비판했다. 인류의 생존 터전인 지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한계용량을 넘어서는 경제성장을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기존의 경제성장 우선논리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인가 ‘지탱가능한 발전’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의 핵심인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엽 독일의 ‘지속적 산출(sustained yield)’이란 용어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독일은 삼림에서 생산되는 목재가 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는데 인구 급증과 경제규모의 팽창으로 삼림이 점차 쇠락해갔다. 삼림자원 고갈에 위협을 느낀 독일은 삼림의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삼림자원 추출률을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하고 이를 준수함으로써 삼림자원의 고갈을 막고 지속적인 경제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다.
후에 지속가능성의 개념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으로도 전파되는데 미국에서도 이 개념은 독일에서와 같이 국가의 자연자원을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과 미국 모두 지속가능성의 개념은 ‘자연자원에 대한 현명한 사용’, 그리고 이에 바탕한 ‘지속적 경제성장’에 그 핵심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유럽 계몽사상, 자연을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과학이 그러한 관리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지속가능한 발전 역시 전통적인 ‘지속적 산출’의 개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그 관리의 대상이 이전에는 지속적 산출을 위한 삼림이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유행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전통적 개념에 어느 정도 입각해 있는가에 따라 그것이 인간활동의 궁극적 기반인 자연보전을 위해 경제성장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과의 거리가 정해진다.
이러한 입장을 크게 소극적 견해와 적극적 견해로 갈라진다. 우선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소극적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전통적인 입장에 가까워진다. 각종 계획과 공공의사결정에 있어 환경에 대한 관심의 비중을 높여 환경파괴와 자원고갈의 속도를 늦추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발전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낙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극적인 견해는 지속가능한 발전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의 한계용량 내에서의 개발을 의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현재의 한계용량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환경창조’의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은 환경이 지탱할 수 있는 한계용량의 범위를 초과하는 인간활동을 억제할 뿐 아니라 삼림이나 녹색공간, 그리고 자연생태계의 보전과 회복을 통해 주어진 한계용량을 점진적으로 확대해나가는 여러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시행되는 각종 환경정책 수단의 유형들을 ‘생태전략’이라 칭하기도 한다.
브룬틀란트위원회나 UNEP, 국제환경자치협의회(ICLEI) 등 국제기구들이 규정한 지속가능성의 개념도 적극적 견해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표현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임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성장과 보전의 단순한 조화가 아닌 ‘한계용량의 범위내’라는 제약조건하에서 경제, 사회, 환경의 조화로운 발전과 보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한계의 범위를 확대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함하는 적극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sustainable development’라는 것은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이란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보다는 ‘지탱가능한 발전’이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방정부 역할 강조한 ‘의제 21’
지속가능한 발전은 이제 하나의 유행어처럼 되어 인간활동의 가이드라인이 되었으며 많은 국가에서 정부의 구성 및 행정과 정책 과정에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원칙이 되었다. 또 많은 국가의 지방정부들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1992년 리우회의에서 채택된 의제21이다. 의제21은 환경보전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행동계획을 담은 지침서로서 21세기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의제21의 제28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지방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방정부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위기에 직면한 환경문제의 해결은 그 뿌리를 지방자치단체의 행동에 내리고 있으며 따라서 지방정부의 참여와 협력이 결정적 요소다. 지방정부는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하부구조를 구축하고 작동시키고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환경정책과 규제책을 수립하고 그 계획과정을 평가하며 국가환경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정부는 주민들에게 가장 친근한 정부로서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주민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며, 책임을 부여하는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여야 한다.”(의제21 제28장)
이를 위한 정책수단으로 의제 28장은 지방정부가 주민, 단체, 민간기업 등과의 대화를 통한 협의와 공감대 형성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담은 ‘지방의제 21’을 작성하고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94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개최된 지구환경회의의 핵심주제는 도시와 지속가능한 개발로 정해졌으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구체적 논의는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이 지방의제 21의 작성에는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청년단체, 여성단체, 과학자, 농부, 기업, 노조, 원주민, 환경그룹과 같은 주요 단체들이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마련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은 이들 단체들과 지방정부가 주민들과 함께 실천하게 된다.
지방의제 21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실현시키는 가장 중요한 실천수단이 되었는데, 2001년 12월말 기준으로 113개국에서 총 6416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의제 21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는 2003년 6월 현재 전국 248개 자치단체 중 73%인 181개가 지방의제 21의 94%가 지방의제 21을 추진하고 있어 높은 참가율을 보이고 있다.
기존 발전모델에 대한 대안적 가치
산업혁명 이후 서구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삶의 최고 가치로 삼아왔으며 발전은 곧 물질적 풍요로움의 달성을 의미했다. 이 꿈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실현됐다. 그러나 그 대가도 만만찮았다. 지나친 물질적 풍요의 추구는 국가 ? 지역간 격차를 확대시켰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켰으며, 삶의 터전인 자연환경을 파괴했다. 물질만능주의는 전통과 역사를 뒷전으로 밀어냈으며, 함께 사는 공동체적인 삶의 기반을 약화시켜 우리의 삶을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개인의 이익만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메마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것인데 발전이 인간 삶의 기반인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약자를 외면하고, 전통과 역사를 소홀히 하고, 고유의 문화를 외면하고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게 한다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그러한 발전을 계속 추구해야 하는가?
지속가능한 발전은 바로 이러한 기존의 발전모델에 대한 대안이자 앞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가치로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발전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장을 포기할 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이 지속가능한 발전이 끊임없는 이윤 재창출을 근본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다국적기업과 거대 기업군의 영향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의 모든 면에 깊이 침투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노력은 과연 얼마나 기존의 생산양식과 소비패턴, 삶의 양식을 바꾸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시민의 요구수준을 충족시키기에는 이미 모든 부분에서 역부족이 되어버린 공공부문을 그대로 두고 과연 지속가능한 발전은 얼마나 달성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지속가능한 발전 그 자체보다는 이를 위한 노력들이 가지고 올 예기치 않은 결과들인지도 모른다. 의사결정권한의 분권화, 사회구성체의 광범위한 참여, 정부 ? 기업 ? 민간의 협동체인 거버넌스 체제의 등장, 다양성의 인정 등이 사회의 다른 변화들과 함께 예기치 않은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