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희 선생님의 연하편지
봉건이.
잘 지나고 있으며 婦人의 건강은 好轉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지난여름에 백두산과 만주 松花江을 다녀 왔단다
그래서 글을 몇 자 만들어 봤는데 한번 읽어 주시면 고맙겠구나
새해에는 家內 和平과 건강하기를 祈願한다.
2005. 12. 20. 이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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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을 찾아가다(Nostagia for lost)
내 어릴 때 중국 만주 땅에서 살았었다.
송화강이 흐르는 길림성 풍만이었다.
길림시에서 기차를 타면 종착역이 되는 곳이다.
백두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막아 큰 댐을 만들고
풍만 수력발전소가 있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그곳에 어린 두 동생이 죽고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린 나는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지만
늦게서야 어머니가 나의 하나님인 것을 깨달았다.
나는 평생 그 곳을 잊지 못한다
조롱 속의 새가 옛 둥지를 그리워하고
연못의 고기는 고향의 시냇물을 잊지 못하듯
송화강 흐르는 물과 긴 다리를
꿈속에서 헤매고 꿈꾸었다.
세월은 60년이 흘러서
머리 흰 고희(古稀)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곳을 잊지 못하고
죽기 전에 그곳에 가보기를 소망하였다.
그것은 오직 나의 바람일 뿐
말도 못하고 길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세상 일이 우연처럼 다가온다.
나의 경남공고 제자를 만났다.
그가 사업상 중국을 다닌다고 하기에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다.
성격 좋은 그 제자는 내 청을 쾌히 받아들이고
백두산도 가보고 고향에도 동행하기로 하였다.
더욱 반갑게도 서울 동문회 회장도 동참하였다.
나는 생애 최고의 귀빈이 되었단다.
내가 담임을 했던 제자들이기에
더없이 편하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중국 심양(沈陽)에서 조선족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구하고
심양 - 길림 고속도로 이천리길을 달린다.
차창 너머로 끝없이 옥수수 밭이 펼쳐있고
고속도로는 한가하여 홀로 달리며
중국산 폭스바겐은 한없이 속도를 낸다.
김지애의 정겨운 트롯 노래 들으면서
조선족 기사는 손장단을 맞추며
이 노래가 자기에게 딱 맞는다고 좋아한다.
아 이것이 송화강이고 풍만교 다리인가
눈앞에 펼쳐있는 당당한 수풍댐의 모습
세월이 수없이 흘렀건만
송화강 물은 유유히 흐르고
긴 다리는 말없이 서 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다리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걷는다
내 어릴 때 아침저녁 이 다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고
다리 난간 사이에 머리를 내 밀고
강물위로 꽃을 던지면
강바람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을 즐기곤 했었다.
지금은 다리 폭이 두 배나 넓혀지고
기관차가 다니던 철로도 철거되고
회색 다리가 초록색으로 변했구나
나의 마음은 옛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옛집은 보이지 않고
낯선 집들이 그곳에 있었다.
분명 이 곳인 듯한데
그 곳에는 푸른 잔디밭과 소방서가 있고
문 앞에 경찰관이 꼿꼿하게 서 있다.
옛날 이곳 마을은
송화강 발전소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들이
긴 집을 만들어 살았었고
우리 집은 그 첫 번째 집이었다.
촌로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에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쪽에는 아파트가 총총하게 들어섰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차역이 있었는데
역은 폐쇄되고
역사(驛舍)와 풍만역(豊滿驛) 간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콘크리트 침목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병원을 찾아갔다.
그 병원도 보이지 않고
풍만의원(豊滿醫院)이라는 낯선 병원이 곁에 있다.
길은 옛길 그대로인데
옛날 건물은 찾아볼 수 없구나.
한 밤중에 동생과 함께 병원에 불려갔다.
엄마는 싸늘한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버지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엄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새 엄마를 만나 잘 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가슴을 치며 후회한다.
아무리 어린 아이지만
나는 엄마의 품에 덥석 안겨서
엄마 엄마 하고 엉엉 소리 내어 왜 울지 못했는가?
엄마는 두 자식을 가슴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차를 몰아 어릴 때 다니던 학교를 찾아갔다.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조선인 학교였다.
맞은편 언덕에는 붉은 벽돌로 만든 2층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다.
그때는 식량이 배급제도였는데
일본계, 조선계, 만주계로 차별화했다.
내가 다녔던 조선인 학교는 없어지고
건물과 운동장은 남아 있고
길림시 밀봉(꿀벌) 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일본인 소학교는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다.
벌써 해가 기우는데 송화호로 올라갔다.
백두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막아 만든 넓은 인공호수이다.
70년 전에 만든 호수이다.
홍수가 나면 강물이 수풍댐을 넘쳐흘러서
물보라와 폭포 소리 요란하게 울리고
백두산 곧은 소나무가 둥둥 떠내려 온다.
호수입구에는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청산녹수송화호(靑山綠水松花湖) 휘호(揮毫)가 있다.
드넓은 호수 속에 금구도(金龜島) 섬이 있어
석양빛에 섬 모양이 금 거북 같았다.
배 한 척을 빌려 섬으로 가서
정자에 올라 호수를 바라보았다.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빙어 튀김과 송화강 잉어찜을 안주로 하여
오늘밤은 특별히 귀거래사(歸去來辭) 장시(長詩)를 암송했다.
두 제자는 귀를 기울이며
시(詩)가 좋다고 칭찬해 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나는 혼자서 거리를 걸었다.
인적은 드문데 청소하는 노인이 지저분한 거리를 쓸고
거리는 깨끗해진다.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학교로 갔다.
이른 아침인데 길거리 식당이 있고
사발 그릇에 따뜻한 콩국을 담아
꽈배기 튀김을 한 족자 떠 넣어 아침 요기를 한다.
작은 다리를 지나서 옛 학교에 들어섰다.
선생님도 친구도 없는 허공 속에서
아득한 추억에 취하여 이리저리 거닐었다.
1학년 입학 면접을 보았을 때
선생님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가리키며
한 장만 들고 오라고 하셨는데
예 하며 들고 간 것이 두 장이었다.
아이들과 놀이에 신이 나서 어머니가 깨끗이 입혀주신
상의 옷에 흙을 담고 흙 놀이했던 일.
학교 텃밭에서 기른 토마토를 선생님이 나누어 주셔서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드렸더니
시퍼런 토마토를 잡수시고
참 맛있다고 하시던 말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 그 일이
가슴 깊이 남아있다.
그 삼삼한 추억을 뒤로하고 나는 옛 산길을 밟았다.
이 동산에는 높다란 돌배나무가 있고
까마귀 무리 지어 소리 내어 날고
빨간 열매가 얼마든지 많아서
호주머니 가득 따서 먹었었지.
그 산길은 가로수 에워싼 도로가 되고
까마귀도 돌배나무도 불 수 없구나.
우연히 새벽시장에 들어섰다.
아파트 곁에 있는 좁은 길거리에
원시적인 시장이 길게 열렸다.
흙바닥 위에다가 깔개를 펴고
텃밭에서 기른 채소도 놓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갖가지 있다.
왁자지껄 사고팔고 손저울 달고
생기 넘치고 정겨운 곳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있어 다가가 보니
할머니가 빨간 열매를 팔고 있다.
내 어릴 때 학교 동산에서 따먹은 그 열매이다.
찔과 또는 산자(山柘)라고 하는데
명의(名醫) 화타가 소화에 특효라고 했다한다.
꼬챙이에 끼워서 엿ㅇ르 발라 겨울철에 빙과(氷菓)로 판다.
지폐 5원을 주며 열매를 달라고 했더니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준다
나는 그 장터가 좋아서 호텔로 돌아오자
박원병 원장을 이끌고 새벽시장으로 갔다.
김정규 총무는 나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송화호에서 건져 올린 펄떡이는 잉어,
시골 순대며 선물과자 월병(月餠)이며,
볼거리가 여기저기 많이 있구나.
박 원장은 5월(700원)을 주고 산 다래 한 보따리를 받았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기둥에 묶여있는 당나귀였다.
당나귀는 작은 체구에 귀가 쫑긋하게 서고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있구나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타고난 당나귀 운명을 감수하고
삶을 달게 받아들이듯
평화로운 그 눈매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당나귀에게
부처님과 같은 존경의 뜻을 보낸다.
나의 옛 고향 풍만을 뒤로하고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넓은 고속도로 위에서
맑고 구슬픈 이자연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눈물이 복받쳐 올라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애타게 그리던 이곳에 왔건만
아직도 마음속에 그리움은 남아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나 이 눈물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고향을 찾은 행복한 눈물이리라.
2005. 9. 12. 이 석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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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가슴 북받쳐 오르지 않는 동기 있으십니까?
선생님 살아계실 때 자주
문안 전화 해 드리도록 합시다.
이석희 선생님 연락처입니다.
tel) 524-1317
첫댓글 가슴이 뭉쿨하구만..., 생전에 아버님께서 일제시대 봉천에 사신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나도 한번 가고푼 곳인데.. 지금은 두분다 않게시니, 더욱 섭섭하구만... 동창생들 어디 한번 이석희선생님 한번 모시는 주선을 해봐!!!!!!!
글을 읽으면서 마치 선생님과 함께 송화강가를 다녀온듯한 느낌.... 무서웠던 그 선생님의 고향이 만주였었구만...
선생님께서는 등산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제 함께 가까운 곳으로 가도록 합시다. 봉건아 스케쥴 만들어라.
아~~ 세상 사는게 무엔지, 너무 소원했던 것 같다. 리플 단 정환님, 상국님 말 처럼 화동회 모임에 우선 한번 모시고 또 날씨가 풀리는 4월 경에 등산 한번 합시다.
마음이 찡~하네.
살아있다는것 그 자체가 축복일세. 다들 건강 잘 챙기며 살아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