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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동강~금계)을 다녀와서
산 행 지- 지리산둘레길(동강~금계)
산 행 일-2018,1,20(토)
누 구 랑-통영축산농협산악회정기산행
산행코스-동강-용유담-벽송사-서암정사-금계
이동거리 15.45km 소요시간 4시간52분 이동시간 4시간 52분 휴식시간 -0- 분 평균속력 3.17km/h
오름 1,089m 내림 1,012m 출발지해발 179m 도착지해발 246m
ㅡㅡ 산 행 지 도 ㅡㅡ
ㅡㅡ 산 행 기 ㅡㅡ
이번달은 겨울산행으로 소백산으로 정해놓고 안내보내니 참석하는회원이 적어서 칼바람을 피해서 지리산 둘레길로 정하고 회원들에게 다시참석을 독려해도 겨울산행은 겁부터 내는지 겨우30여명이 참여의사를 보내온다 그래도 강행한다
(07:00) 고려병원앞을 출발하여 죽림중앙매장앞에서 일행 태워 고속도로을 질주한다 산청휴게소에서 잠쉬 쉬어 간다
(08:50) 휴천면 동강마을 건너편도로변에 도착하여 하차하고 산행준비하여 동강마을로 긴다리를 건너간다 다리밑에는 강물이 얼지도 않고 여유롭게 흐르고 있다 말라버린 강가의 갈대들만이 겨울을 알려줄뿐 기온은 봄기운이다
(09:06)동강마을에서 단체사진박고 출발한다 이정표의 적색표시방향은 1코스에서 부터시작되는 순레길 방향인데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흑색화살표 방향으로 올라간다 포장도로 따라가는 이길을 3번째걸어본다 몇년전에 이길을 여름철에 걸을때 시멘트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뜨거운열기가 괴롭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09;12)동강마을 당산쉼터에 도착한다 당산은 길좌측에 있어 확인하려가본다 안내문을 읽어보고간다 김종직의"유두류목"은
1472년(성종3)8월14일부터 8월18일까지 지리산을 행한 기록문이며 유두류목에 동강마을당산쉼터를 화암이라 기록하여 놓았는데 바로 이곳이다 이당산쉼터뒷산의 산봉우리모양이 연꽃봉우리 모양이고 옛부터곷봉산이라 불리어졌으며 꽃(화)마을(암)에 연유되어 이곳을 화암이라 기록하였으리라 여겨지고 이화암의 위치를 지리99유두류목탐구 산행팀이 여러 고증을 거쳐 찾아낸곳이라 함양관아에서 출발한 김종직선생의 일행은 염천을 지나 이곳화암에서 쉬고 지리산 둘레길인 구시락재를 넘어 함양독바위를 거쳐 지리산 산행을 하였는데 당시에 유호현,임정숙,한백원,조대허,승려해공도 이곳에서 함께 쉬어간 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중요한지점이며 1970년대 중반까지 음력섣달 그뭄날 저넉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이곳에서 지냈던곳이고 오랫동안 지역민들의 쉼터역할을 한곳이다 당산나무는 팽나무이며 수령이600여년이며 수고 15m 나무둘레3.8m의 거목이다
(09:22)구시락재을 넘어선다 (운서마을쉼터) 이곳은 운서마을에서 동강으로가는 고갯길이며 옛날 김종직선생이 지리산 유람을 할때 이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10:09) 송전가든을 지나 강변쪽으로 내려선다 강물은 수량이많아 우렁찬소리를 내며 흘러내러간다 논두렁길을 지나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이길을 걸을때마다 생각해둔것이 있다 나이팔순이넘어 겨울에 눈이 많이 쌓여서 높은산에 갈수없을때 이편한길을 걸으면 좋겠다라고 눈구경도하고 편한길이라 안전할것같고 겨울이라 따가운 햇볓도 그리 싫지않을무럽에 걸을것이라고 아껴놓은 지리산둘레길이다 그런데 오늘걸어도 유유자적하며 걸으니 좋다
(10:41)당나들골입구을 지나친다 당나들골은 마적동의 세진대에서 모전마을로 내려오는 당나들골이 있다 옛날 마적도사의 나귀가 마적동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던 길이다 당나들골 중간에 화암대라는 넓고큰바위가있었다
(10;46) 모전마을 회관을 지나간다 이길은 지리산둘레길 전설탐방로이다 그전설은 옛날 용유담에 아홉마리의 용과 마적도사가 살고 있었다 마적도사가 쇠도장을 찍어 나귀에게 보내면 나귀가 생필품을 싣고와 용유담가에 와서 크게울면 마적도사가 쇠지팡이로 쇠다리를 놓아 나귀가 건너오게 했다 어느날 지리산천왕할매와 장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마적도사는 용들이 여의주를 서로차지하여 하늘로 용천하려고 싸우는 소리에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지못했다 결국 나귀는 울다지쳐서 죽고 말았다 화가난 마적도사는 자신을 질책하며 장기판을 던져버리고 용들을 쫏아버렸다 그때 던진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에 있는 바위들이다
(10;50)용유담가기직전 모전마을 삼거리에서 우리는 좌측길로 벽송사를 가야한다 그러나 용유담을 보고가야할것 같아서 용유담까지 내려간다 용유담의전설을 읽어보고 간다 엄천강의상류에 있는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게인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계곡들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합류되어용유담에 이르러서는 해가쨍쨍내리쬐는 화창한 대낮에 우뢰소리같은 폭포의 쏫아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장방향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된다 화강암으로된 기암 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이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유천지로 옛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았던 곳으로 여름이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휴식처를 찾아 모여들어 붐비는곳이다 서편의 벼랑으로는 절경을 이루는 풍차와 청아한물빛 거울같은 물에 비친 산그림자,푸른못의 반석에 펼쳐진 모래는 가히 도원경의 경지에 이르는듯 황홀한 풍경은 보는이로 하여금 하염없이 되취되게 하곤한다 길언덕위에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이용유담가에는 당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용유담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마적도사와 당나귀 관련전설이 내려오고있다 신라무열왕(659년)때 마적도사가 용유담에 와서 마적사를 짓고 나귀를 기르고 있었다 식량과 부식물이 떨어지면 쪽지를 써서 쇠도징을찍어 나귀에게 부쳐 오도재를 넘어 관동장에 보냈다 상인들이 물품을 챙겨주어 싣고 다시 돌아와 나귀바위에서 울면마적도사가 쇠지팡이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건너오게 하였다 천왕할매와 장기삼매경에 빠져 나귀울음소리도 못듣고 나귀를 죽게한탓으로 장기판을 던져버렸고 아홉마리의 용들중 눈먼용한마리만 제외하고 쫏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 오고있는곳이다 용유교에서 바라보는 용유담의 모습은 과히 절경이다 용유담을 되돌아 벽송사 가는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포크레인으로 새로운길을 만들고 있어 둘레길을 찾아가는데 이정표도 보이지 않고 헷갈리게 한다 한참을 새로만든길 따라올라가다보니 길이 없어지고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감을 잡을수 없다 멀리 건너편 숲속에 길이 보인다 저길이다 싶어 가보니 또럿하게 길이 나있다 산길이라 낙엽이 덥혀있어 미끄럼도 다소있어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숲속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져있다 공사현장에서 산길안내를 해놓아야 할것인데 싶은 생각을 해보며 그나마 반가운 이정표이다
(11;35)숯가마터를 지나친다 주변에 굴참나무가 많아서그런지 숯가마터가 있는데 가락국 구형왕이 이곳에서 숯을꿉고살았다는설이 있던데 가락국이 망하자 칠선계곡국골로 피신하여 살기일환으로 숯을 굽은 가락국 마지막왕의 흔적인듯 싶다 오름길이 당차게 숨가픈길이다 등장에는 땀이 흘러내릴정도로 온화한날씨로 봄날의 산길을 걷는 기분이다
(11:56)능선삼거리에 올라선다 10여년전에 벽송사을 거쳐 이곳을 지나 와불산,함양독바위,공개바위,꽃봉산을 넘어 9시간 넘게 걸어간 기억이 난다 이제부터는 능선길이다 벽송사까지는 1km 정도 남았을것이다 내려가는길 좌측은 칠선계곡이다 길도 부드럽고 완만하여 좋은데 솔잎양탄자 까지 깔아놓아 솔향기 그윽한 솔밭길을 걸으니 올라올때의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12;28)벽송사에도착하여 참배하고 벽송사의 내력을 알아보고간다
벽송사는 조선중종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에서 보면 벽계정심,벽계지엄,부용영관,경성일선,청허휴정(서산),부유선수,송운유정(사명),청매인호,황성지안,호암채정,회암정혜,경암응윤,서룡상민등 기라성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회하여 조선불교의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을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연꽃)이 활짝핀것과 같은 부용만개 혹은 푸른학알을 품고 있다는뜻의 "청학포란"의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구름위하늘세계),별유천지(인간세상밖에 따로 있는),부용정토(연꽃이 활짝핀극락정토),조인만대(조사의깨달음만대에이어지리)" 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의 수려한 풍광속에 위치하고 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유,벽계정심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을 전해받아 조계정문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선사는 무자화두에 의해 무명을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첫번째조사가 된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조정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조사에 오른분이 부용영관선사이다 부용선사는 도가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특히 영호남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도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심으니 다른나무들도 향기가 난다"라고 하는말이 널리 유행하였다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뒤 벽송산문의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한국선문의거장 청허휴정(서산대사)이 벽송조정의 제3대 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수없다 서산대사의 문하의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불법을 떨치게된다 벽송사는 빨치산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다 지리산은 민족의기상과 혼 정서 그리고 애환이 깃들여 우리와 함께 숨쉬어왔다 이러한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한때 우리역사에 있어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빨치산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빨치산사건의 배경은 8,15해방 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일르킨 여순반란사건부터 시작되는데 반란자들이 국군의 토별작전에 의해 진압된이후 잔여병력 약200여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인근 좌익세력과 함께 지리산 유겨대(빨치산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들이 빨치산으로 활동하면서 6,25한국전쟁시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경찰관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등 그폐해가 심하였으며 휴전협정이후 1953년8월 병단장인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 까지도 수년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전투로 인하여 피로 젖었던 민족의 비극이 묻혀있는곳 지리산 빨치산루트에는 당시의 인민군 총사령부 야전병원(벽송사) 이은조 사살지(선녀굴)을 비롯하여 빨치산들이 은신하던 비트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벽송사등 유서깊은 역사 자원이 있다 벽송사의 목장승을 보고 내려선다 예전에는 목장승뒤편의 숲속에 빨치산 루트로 총을든빨치산의 모형을 볼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 흔적을 없애 버렸는지 찾아볼수 없다 가파른 도로를 따라 내러가는데 익살스런 목장승이 도로양옆에 서있다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이 지방에 따라 벅수,벅시,법수,수살목,당산할배등으로도 불렸다 장승은 소속과 위치에 따라 마을을 지키는 마을 장승, 사찰입구나 사방경계에 세워진 사찰장승, 지역관의 경게, 성문,병영,해창,관로등에서있는 공공장승등이 있다 이장승은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무서운것 같으면서도 순박하고 위풍당당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라서 보는이의 눈을 즐겁게한다 도로는 앞으로 꺽어 넘어질정도로 가파른데 어떻게 차가 올라오는지 의문스럽다 서암정사로 내려간다
(12:48)서암정사에 들려 참배하고 서암정사의 내력을 본다 서암정사는 해동 삼대명산중의 하나인 지리산의 큰줄기위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석굴법당은 원응큰스님께서 6,25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영혼들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도 부터 10여년간에 걸쳐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 었다 석굴법당안에는 아미타부처님상과 제불보살상등으로 불교의 이상세계을 상징하는 극락세계가 정교하게 장엄되어 있다 서암정사에서 유유자적하며 여러곳을 둘러보고 내려선다 정문앞에서 우측으로 나있는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니 한적한 오솔길이 이어지고 길이 걷기좋은 길이라 여유롭게 힐링하며 걷는다 대나무숲길도 지나고 양지바른 폐농로도 지나며 40여분걸어 발품을 다 팔아 갈무럽에 마을어귀에 도착한다
(13:34)의중당산에 도착하니 전형적인 농촌 마을 냄새가 물씬풍긴다 중말 고려시대 의타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성리 칠선계곡 입구에 있다 마을 안에는 800여년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어 매년음력7월7일 에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함양박씨,경주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정조때는 경주이씨가 입촌 정착해오고 있으며 본마을 출신인 은계 이진우선생(1897년)에 태어난 천석지기를 한 향토교육가로서 사유재산 일백두락을 저당하여 마천초등학교 설립에 공헌하였고 현재 도계공원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마천면민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의 후손이 생가를 보존하고 있다
(13:49)금계(노듸목) 도착하여 산행 종료한다 금계마을은 냇물을 건너다니는 징검다리 노듸의목이라는뜻에서 노듸목이라 한다 가락국의 구형왕(양왕)이 추성리 국골에 은거하면서 이곳에서 참나무숯을 굽었다고 하며 인근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양왕의능 돌무덤이 있다 정감록에 나오는 금대산밑에 금계동이고 이곳이 지리산 피난민들이 하나둘식 모여서 이룬 마을이다 서쪽에는 감투바위,동쪽에는 둥둥바위,북쪽에는 맹맹이바위,물방울골,새별골,흥골등이 있으며 1520년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송지엄)가 법계정심대사곁을 떠나다가 되돌아서 도를 받은 살바당(벽송정)도 있다 6,25직후 공비소탕시 추성의탄리주민 200여호가 이마을로 소개되기도 했다 정말걷기좋은길 5시간가량 걸었으니 세속에서 찌든때 다씻어 버리고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서 일상에서 좋은일하며 살아보련다
ㅡㅡ 산 행 사 진 ㅡㅡ
동강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위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단체 사진
동강마을 당산쉼터
구시락재 몇년전 여름철에 이곳을 지나면서 쉬어간곳이다
송전가든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는 논두렁길을 걷는다
엄천강의 모습 수량이 제법 많은 편입니다
모전마을 회관
용유담 입구 겨울철이라 한적합니다
벽송사 오르는 숲속의 이정표
구형왕이 굽었다는 숯가마터
능선삼거리 오름길은 끝난것 같습니다 약한시간동안 올라왔습니다
벽송사를 700m 남았다고 안내합니다
벽송사의 소나무
벽송사에 보관중인 목장승 대부분이 노천에서 비을 맞으며 있는데 이장승은 집안에 있는것이 특이 합니다
서암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서있는 익살스런 목장승
서암입구
사천왕문이 특이 합니다
윗부분에 조각된 용그림작품이 셈세 합니다
서암경내의 연못이 얼어 있습니다
석굴법당의 곁모습
이배롱나무의 수령이 몇년이나 되었을 까요
이대웅전을 2012년에 준공했다하는데 내가 다녀간지가 6년정도 되나 봅니다
경내의 모든 불상 탑들이 조각품으로 보입니다
이돌탑도 연윤을 말해주는듯 담쟁이 넝쿨이 웨어싸고 있습니다
이런 운치있는 대나무숲길도 지나갑니다
의중당산
이의탄교을 건너면 걷는길이 종료 됩니다 예전에칠선계곡갈려면 이길다리밖에 없었는데
윗쪽에 새다리를 놓아 이다리는 거위 사용하지 않는듯 합니다 건너편 폐교운동장이 주차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