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마을 개관
정도리 전경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에 속한 정도리(正道里)는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라씨와 정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고, 이후 무안(務安) 박씨와 수성(水城) 최씨 등이 이주하면서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돌이 샘처럼 많이 고여 있는 곳이라 해서 정돌리(井乭里)라 부르다가 1916년 리․동 통폐합 때 불교용어 정도(正道)에서 인용 마을이름을 정도리(正道里)로 개칭하였다.1)
현재 마을에는 13개의 성씨가 있다. 최씨가 주민 구성의 1/3을 차지하며, 김씨, 이씨, 박씨의 성이 골고루 많고 강씨성을 가지는 가구 수가 20여호 정도이다.
① 지형
정도리 지도 |
정도리는 마을 서쪽으로 정주산이 있으며, 마을의 뒤쪽으로는 바다와 구계등(九階燈)에 닿아있다. 구계등은 길이 800m, 폭 200m의 갯돌해변인데, 이 갯돌을 주민들은 용돌(龍乭) 또는 청환석(靑丸石)이라 일컫는다. 구계등은 바다 속에서부터
해안의 상록수림에 이르기까지 아홉 개의 고랑과 언덕을 이루고 있어 구계등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해변은 지난 73년에 명승 제3호로 지정되었다.
마을은 마을안쪽의 논을 중심으로 동쪽마을과 서쪽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은 밭으로 개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콩이나 조 등의 잡곡을 재배하다가 지금은 파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앞쪽은 간척지로서,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1920년대에만 하더라도 마을 ‘궁개논’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간척지 안에 있는 ‘돔바위’의 여부로 이 지역이 이전에는 갯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 인구
행정리 |
인구합계 |
남 |
여 |
세대 |
정도리 |
379 |
194 |
185 |
159 |
정도마을의 가구 수는 총 159가구이고 379명이 살고 있으며 각 가구에는 대체로 2인 이하의 구성원이 거주하고 있다. 남성의 수는 194명이고, 여성의 수는 185명이다.
정도마을에서 젊은층에 속하는 45세 이상 55세 이하의 주민은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60세 이상의 인구가 마을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연령대가 65세 이상이 되어야 마을에서 노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 2004년 현재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기혼자는 여성으로 31세이며, 마을 최고령자는 남성으로 84세이다. 마을에는 초등학생10명, 중학생 4명, 고등학생 5명이 있으며, 스쿨버스를 이용해서 완도읍으로 학교를 다닌다.
③ 생업
정도리는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과,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비슷하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주로 김․미역․다시마 등을 생산하며, 마을에서 40호가 해산물을 취급한다. 마을소유의 어장에서는 삼각망을 이용해 멸치를 잡거나 통발을 이용해 전어나 숭어를 잡는다. 어장은 마을 어촌계에서 할당을 받는데 구간당 행사료가 10만원이다. 어장은 마을단위로 구역이 정해져 있으며, 5년에 한번씩 추첨을 통해 개인 구간을 할당 받는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정도리의 농토는 ‘한창들’과 ‘주래등’, ‘구러시골’, ‘안창들’이 전부로 매우 협소하였다. 이들 토지의 대부분은 마을 내 양성(陽城)이씨와 수성(水城)최씨 등 20여 호의 자작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마을주민 대부분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소작을 하거나 남의 집에서 품팔이와 일꾼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가 1915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이루어 졌고, 이 간척지를 1929년에 마을주민이 자금을 모아서 간척지를 공동소유로 매입하여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소유의 땅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 총 경지면적 1413.6㏊로 완도읍에서 가장 많은 농경지(전101.6㏊, 답 44.4㏊)를 소유하고 있다.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품앗이를 통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요즘에는 영농기계의 발달로 품앗이 형태의 경작은 거의 행하지 않고, 대부분 기계화되었다. 기계를 사용할 때에는 기계를 소유한 마을 사람의 기계를 사용하는 것을 마을내의 규칙으로 하는데, 기계사용 시 트랙터는 평당 130원, 이앙기는 평당 100원의 돈을 지불하는 규약이 마을에 정해져 있다. 농사지은 쌀은 갈문리에 있는 완도농협소유의 건조장에서 수곡해 가고 돈은 통장으로 입금된다.
대파밭 |
현재 정도리의 밭작물로는 대파농사가 대표적인데, 약 7만평의 토지에서 11월부터 1월까지 대파농사가 이루어진다. 대파를 재배하기 이전에는 주로 콩을 많이 경작했는데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반면에 소득이 적어서, 콩에 비해 노동력이 적게 필요하고 소득도 높은 대파 농사를 많이 선호한다. 보리는 올해 1500가마 정도를 2모작으로 재배하였다.
④ 신앙
정도리에는 감리교 소속의 은평교회가 있지만 교회를 다니는 마을주민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마을에서는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을 모시면서 음력 1월 2일에 당제를 한다. 할아버지당은 동쪽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고, 할머니 당은 구계등의 방풍림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당제는 매년 음력 1월 2일에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을 같이 지내며, 당제를 지내는 시각은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이다. 마을남자 중에서 그 해에 부정1)을 안탄 사람 2~3명을 뽑아서 당제를 진행시킨다. 마을에서 당제 진행을 위해서 뽑힌 남자들은 당제를 행하기 1주일 전부터 몸을 깨끗이 하고, 당에 금줄을 치고 청소를 하면서 제를 지낼 준비를 한다. 당제에 필요한 음식은 당제를 진행하는 남자들이 시장을 봐오고, 나물 같은 경우는 당제 준비기간 동안 직접 키운 것으로 음식을 만든다. 과거에는 소머리를 썼다고 하는데 소머리는 바로 잡은 것을 사용하고, 음식에 쓰이는 물은 마을에서 정한 샘의 물을 사용한다. 과거에는 ‘며느리당’에서 당제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였다고 하는데, 과거에 외지에서 온 여자가 실수로 이 곳에 들렀다는 이유로 당제 음식을 다시 준비했을 정도로 당제준비과정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음식을 준비하던 며느리당은 45년전에 없어져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도 음식들은 마을에서 정한 깨끗한 곳에서 만들어 진다. 당제는 먼저 동쪽마을에 위치한 할아버지당에서 행해지고, 그 후에 할머니당에서 행해진다. 당제가 끝난 후에 제사에 사용한 음식은 아침에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나눠먹는다. 당제에 필요한 금액은 마을 공동자금을 사용하고, 한번에 150만원 정도가 소요된다. 당제는 마을 남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여자들은 당제에서 제외된다.
할아버지당 |
할아버지당 |
할머니 당 |
2) 정도리의 계 ‘신농조합’
① 신농조합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1910년대 이전에는 정도리의 경작규모는 매우 협소했다. 1915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마을 앞에 22정(町)에 달하는 농지가 만들어 졌는데, 원래 바다였던 땅을 간척한 것이라 염분이 많아서 실질적인 경작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 지주는 소작료를 경미하게 받는다는 조건으로 정도리 마을 사람에게 경작을 허용하면서 사실상 농토를 개간하도록 하였고, 농사짓기에 충분한 농토가 없던 영세농가들이 소작을 하면서 간척지는 수확이 가능한 땅으로 변했다. 그 후 1922년에 마을사람에서는 ‘좀드리운동1)’이 일어났고, 그렇게 모인 수익금을 매달 15일에 예금하였다. 1928년에 정도리 간척농장 지주가 빚을 갚기 위해 싼값으로 그 농장을 매매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때까지 좀드리운동 으로 모은 돈으로 간척농장을 사기로 하고 부족한 금액은 마을 전주민이 공동으로 해초(새모, 불둥이 등)를 채취해 마련한 자금을 보태어 6만 6천평에 달하는 농지를 구입하게 된다. 이후 경작 소유권을 획득한 마을 사람들은 그 간척지를 ‘신농장’으로 정하고 1929년에 ‘신농조합’을 결성한다. 당시 조합장은 박인선 씨 이고 조합원수는 조합 창단시 정도리의 가구주 93명으로만 한정하였는데, 그동안 사망, 이전, 탈퇴 등으로 현재는 85명의 공동명의로 되어있다.2)
신농조합 조합원들은 개인당 6백 평의 신농지를 경작할 수 있고, 그 이상은 경작할 수 없다. 조합원이 타지로 이주할 경우에는 다른 조합원에게 경유를 알려야 하고, 신농지의 경작권을 매매할 경우에는 정도리의 거주자중에서 신농조합 조합원에게만 그 매매가 가능하다. 마을 사람들은 신농조합 소유의 땅에 경작권만 가지고 있을 뿐 그 소유권은 마을 사람 전체 공동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개인적인 매매가 불가능 하다. 또한 마을 사람들의 균등한 경작을 위해서 신농지의 경작구역은 4년에 한번씩 추첨을 통해 정한다. 과거에는 토지의 질에 따라서 각각 3백 평씩 두 등급(좋은 땅과 나쁜 땅)의논을 가졌지만, 지금은 좋은 땅과 나쁜 땅의 구분이 없어서 6백 평씩 추첨을 한다. 신농지는 조합원당 3백 평 까지는 토지용도변경이 가능하다. 단 이때 변경의 목적은 쌀 저장을 위한 창고나 축사 같이 농사와 관련한 것이어야 한다. 그 이외의 목적으로는 용도를 변경할 수 없다.
신농조합은 조합장아래에 전무와 수감이 있고 그 아래에 조합원으로 이루어져있다. 수감은 저수지나 농토 전반에 관해 감독하는데, 신농조합에서 관리하는 안창제(3천5백 평)와 사정제(3천 평)가 신농장의 농수로 이용된다.3) 수감은 배수 날짜를 정해 우선적으로 신농장에 물을 공급하고 나서 인근의 ‘한창들’과 ‘구러시들’, ‘주래등’에도 물 공급을 의논해서 결정한다. 신농조합의 임원의 임기나 직책의 규정 등 신농조합 전반에 관한 규약은 신농조합 결성당시 총 4장 19조로 만들어진 신농조합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규약 내용에 따르면 마을 주민은 공평하게 1인 1주의 땅을 소유하도록 되어있다. 현재에는 1인이 6백 평의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평수를 제한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규약을 준수하지 않거나 태만하게 운영하면 조합에서 지분의 돈을 주고 제명시킨다. 땅을 매매할 때는 땅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조합에 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조합에서는 마을에 3년 이상 거주해서 신농조합에 가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중매를 서주고 조합원으로 받아들인다. 신농조합은 3년 단위로 조합장을 선출하고, 1년에 한번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다. 모임은 12월 27일 이나 28일에 하는데, 이때 못하면 다음해 1월 5일에 모임을 가진다.
신농지 |
신농지의 위치 |
② 현재의 상황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일어나기 이전인 1910년대만 하더라도 정도마을은 전답도 얼마 없고, 그것마저도 몇몇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농가는 매우 영세하였다. 그러한 영세 농가들과 그 밖의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공동으로 토지를 구매하고 이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졌기에 마을 내에서 신농조합은 주민들의 자랑거리였다. 신농조합이 형성되고 나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그 목적도 달성하였고, 마을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조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러한 조직을 통해서 마을이 결속되고, 그러한 결속력이 신앙적인 측면이나, 마을 관리의 측면에서 잘 나타났음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에는 이러한 조직의 변화를 바라는 몇몇 의견도 조사과정에서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신농장의 평당 거래가격이 매우 싼 편인데, 예를 들어서 다른 일반 육답이 평당 1만원에 거래가 된다면 신농장은 평당 3천원선 정도에 거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는 땅의 주인이 땅의 경작권만 가지고 있을 뿐, 소유권은 공동소유이기에 거래가 불가능하고, 용도변경이 불가능하기에 땅을 사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조합원 일부에서는 신농조합이 조합원들에게 땅의 소유권을 넘겨서 자기소유의 신농지를 개인적으로 매매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신농조합측 에서는 조합창단시의 목적인 공동의 이익추구에 위배되고, 토지를 분배할 때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분할 때 형평성에 따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고 있다.
(5) 조사단 의견
정도리 마을에서 일본인 지주에 의해서 간척사업이 일어난 1915년부터 마을 주민들이 공동의 자금으로 간척지를 매입하고 신농조합을 결성한 1929년을 거쳐서 현재의 2004년까지 오는 기간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15 광복을 통해서 일제의 강점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혼란을 겼었다.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피폐해진 상황에서 채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겪은 혼란이었기에, 당시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이었다. 모두들 잘 살아 보자는 생각이 1960년대의 경제 개발 5주년 개획과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과 연결되어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모든 국민이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던 경험이 있다. 정도리의 신농조합은 우리나라의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정도리의 주민들이 ‘잘살아보자’는 마을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생겨난 조직이다. 신농조합은 땅이 없던 주민에게 땅을 제공함으로써 마을 전체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를 통해서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써 묶어주는 역할도 하였다. 과거의 신농조합이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면, 오늘날의 신농조합은 경제적인 발전의 역할보다는, 과거의 정도마을의 모습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마을에서 65세 이상의 노인 분들은 신농조합 이라는 조직과. 자신들의 마을에서 아직까지도 당제가 행해지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현재 마을 내부에는 당제를 미신이라고 여기면서 당제를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당제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있고, 신농장을 개인소유로 만들어서 개인이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없는 농사를 짓기보다는 땅을 팔고 남은 생을 편하게 살겠다는 의견도 조사과정에서 적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정도리는 다른 지역의 농촌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인구의 노령화, 산업구조의 변화와 수입시장 개방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마을의 변화를 희망하는 의견과, 지금의 마을을 있게 한 옛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 이 두 가지 의견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5. 종합 및 결론
조사단은 장좌리의 당제와 정도리의 계 ‘신농조합’을 통하여 마을 공동체의 결속과 유지를 살펴보았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마을들 가운데 이 두 마을을 선택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의 유지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연원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형태가 변화한 것이라 본디 모습과 차이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각기 다른 두 마을은 모두 그들만의 방법으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주변의 이웃들과, 가족들과의 화합과 유대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한 규약들과 서로를 위해 상부상조하며, 크고 작은 경조사에 동참하는 일 등을 통하여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유대감 속에서 살고 있는 마을 공동체를 살펴 볼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마을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마을 내의 공동체적 유대감이 형성되고 화합과 결속이 이어진다면 마을의 이익향상을 위한 자발적인 참여와 농어촌의 인구감소 문제와 노령화 문제도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