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다윗의 믿음을 최고의 경지로 예시하신 것처럼(마22:41-46)
우리가 다윗과 같이 주를 노래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베드로는 역설하고 있습니다(행2:14-36) 교회가 복음주의라는
말로 복음의 본질보다 복음운동의 특성만 좇다가 그만 내용이 텅 비고
말았습니다. 이를 테면 로마서와 같은 내용이 없이 사도행전적인 전도운동만
하다가 역동적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예산은 넘치는데 그만 핵심이
빠져 버린 교회가 되어 철학이나 도덕의 조롱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103편에서 다윗은 왜 하나님을 노래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12절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적시합니다. 우리는 죄과 곧 불법을
잘 알면서도 안 고쳐집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야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보지 않으면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13절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불쌍히 여기십니다.
안타까워하시고 민망스럽게 여기십니다. 언제나 철이 들까? 이건 도덕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영적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생각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항상 주여 제발 철이 들게 하소서 하고 부탁합니다.
14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인간의 체질은 바로 먼지와 땅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사고방식,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의 본성과 구조를 다 아십니다.
15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인생은 인간 곧 인류입니다. 이는 도저히 재생이 불가능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3:19) 하신 인생들입니다.
그런 인간의 날은 이렇습니다. 한참 자랄 때는 풀이며 장성하면 꽃입니다
이런 존재뿐이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요즘 많이
떠드는 복제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반역입니다. 아주 고약한 짓입니다.
AI로 만들어진 인간지능을 가진 로봇 인간은 핵보다 더 무서운 반역입니다.
16절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왜냐하면 그 속에 바람이 통과해 버리면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바람이 지나가면 풀들이 말라버리는 것과 같은 모양이 됩니다.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바로 인생의 허무입니다.
그런 곳이 있었던가? 이와 같이 다음 세대를 모르고 보이는 이 세상만
알고 달음박질하다가는 절벽을 만나고 마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꼭 자신만은 아닐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내 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바람(프뉴마)이 내게 구원이 되느냐 심판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17절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그러나(but)하고 문맥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을 베푸십니다. 주께 가까이 나아 갈수록 경외감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대대로 그 의가 미치게 됩니다. 다윗의 가문은 사울과
다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의 징계는 있어도 멸망시키지는 않습니다(삼하7:14)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주의 임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긴장해야 합니다.
18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어떤 사람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시는가?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올라타야 합니다.
곧 말씀육신이 되어야 합니다(요1:14) 그러나 육신이 말씀이 되려 한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이후에는 그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스며듭니다. 바로 새 언약입니다(요14:20-21)
육신은 풀이며 육신의 영광은 꽃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하십니다(벧전1:23-25)
19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들, 안에)에
세우시고(예비하시고) 하십니다. 주께서 요14장에서 ‘처소를 예비하리라’하십니다.
그 왕권으로 만유 안에서 만유를 통치하십니다. 주께서 만유를 직영통치하십니다.
시103편은 11절부터 차원이 달라집니다.
12-14절에는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십니다.
15-16절 심판해 버리십니다. 구원을 위한 심판입니다.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심판은 허무입니다. 이는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옛 사람의 심판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17-19절은 영원한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20절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드디어 너희는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십니다. 처음(1절) 시작할 때에는 자신의
영혼을 향해 송축하라고 합니다. 천사여 이는 그의 사역자들이여 하는 말입니다(히1:14)
예수님이 부활의 때에는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능력이 있는
천사들이여! 힘 있는 천사는 바로 빌4:13절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사역자들입니다.
첫째는 그의 말씀의 음성을 듣는 자, 곧 성령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엔 여호와 말씀을 행함으로 이루는 자 곧 이루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21절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사는 전령이고 천군은 싸움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임금 앞에 문무백관이 있듯이 하나님 앞에는 가브리엘 천사도 있고
미가엘과 같은 천군도 있습니다. 천사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천군은 섬기는 자들이며 집행자들입니다. 주의 사역자들입니다.
초림의 주님은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이시지만 계시록의 주님은 백마를
타시고 싸우시는 왕이십니다. 하늘의 군대들도 백마를 타고 그를 따릅니다(계19:14)
22절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5:17)
이는 20-21절의 천사와 천군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 다스리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그의 성, 그의 통치 안에 있는 너희여,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존재는, 천사와 천군 그리고
새로 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토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다윗은 이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그 안에서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구원의 시작부터 결과가 시103편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도 한 사람의 선지자입니다.
또한 다윗 안에 계시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다윗의 시가 우리의 시가
되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를 송축하라 새로운 피조물들아 주를 송축하라.
‘송축해 내 영혼 내 영혼아 거룩하신 이름 이전에 없었던 노래로 나 주님을
경배해’ 이 찬양 시는 천사가 되고 천군이 된 새로운 피조물들의 노래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