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꼬랄레스(Corrales)...'의 봄
a. 새 보금자리
마누엘이 짐을 실어다 준 덕분에, 인야는 이웃 마을 '꼬랄레스...(Corrales de Vino)'로 비교적 편하게 이사올 수 있었다.
그는 짐을 날라다 주고도, 주인 노파와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그냥 돌아가 버렸다.
노파는 그에게 안으로 들어와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했고, 인야로서도 내심 그가 자신이 살게 될 공간을 한 번쯤 둘러봐 주기를 바랐는데... 마누엘은 그런 것마저 마다한 채 그대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인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인야는 그와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늘 그런 식이었다.
짐을 2층으로 옮기고, 인야는 가방을 풀어 이곳저곳에 정리했다. 미숫가루와 한국에서 가져온 장류는 냉장고에, 옷은 삐걱대는 옷장에 넣어 두었다.
집 안의 모든 가구들은 주인만큼이나 낡아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기에, 기본만 갖춰져 있다면... 큰 불만은 없었다.
아무렴, 알베르게와 비교가 되겠는가 말이다.
인야가 집세 한 달치 250유로를 선불로 건네자, 노파는 다시 한번 세어보고는... 12일을 집세 내는 날로 못 박았다. 전기세는 35유로 선에서 나머지를 반씩 부담하자고 해서, 인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인야는 2층 거실을 작업하기 위한 공간으로 바꾸고 싶어,
"가구의 위치를 조금 변경해도 되나요?" 하고 노파에게 물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탁자와 소파 자리를 바꿔, 창을 정면으로 두고 앉을 수 있게... 옮겨 놓았다.
점심을 준비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산티아고였다.
"그렇잖아도 산티아고, 내가 방금 전에 그 옆 마을로 이사했는데..." 하고 인야가 반기자,
"그래? 그럼, 거기 사진을 찍어서 좀 보내 줘!" 하는 것이었다.
'? 도대체 그는 내 소식이 뭐가 그리 궁금한 걸까? 어떻게 생긴 집에서 사는 것인지조차 보고 싶다니......' 인야는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생각해 봐도, 그의 자신에 대한 과대한 관심이... 약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든든하면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집이 추웠다.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인야는 그나마 온기가 있는 침대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졸리기도 했던 터라, 그대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는데, 거실에서 잠깐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길 건너 옆집 담장 안에서 한 중년 남자가 낡은 기와집을 홀로 손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날씨는 오락가락했다. 해가 났다가도 이내 구름에 덮여 을씨년스러워지곤 했다.
유독 추위를 타는 인야는,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결국 노트북을 침실로 옮겼다.
잠바까지 입은 채 침대에 기대앉아, 정리하던 원고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빌랴누에바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그런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곳은 순전히 자신만의 공간이었으니까.
방 안의 온도계는 13도를 가리켰다.
거실의 전기스토브를 옮겨볼까 했지만, 벽에 고정된 것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저녁은 점심에 해둔 소스를 데워 밥에 비벼 먹었는데,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침실로 돌아오니 8시 반이었다.
실내가 춥다 보니, 침실밖에 몸 둘 곳이 없었다.
'오늘 아침 떠나간 그 떠돌이 커플은 지금쯤 어디서 밤을 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인야는 문득, 옛날 영화 '길(La Strada)'의 '젤소미나'가 떠올랐고...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 날, 인야는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 이사왔습니다.
이제,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이곳으로 이사오는 것 역시 '빌랴누에바...'마을의 마누엘이 맡아서 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 마을에 가게 되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힘 안 들이고 이사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수선하고 어설펐던 그 마을에서의 '알베르게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스페인에서의 본격적인 내 생활이 시작된 것인데요..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스페인에 온지 한 달만의 일이네요..
처음 보름 정도는 스페인 친구 산티아고의 집에서 머물었고(나에게 참 잘 대해주긴 했는데, 자유롭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예상에도 없었던 사모라지방의 한 마을에 찾아와서 또 생뚱맞게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처럼(?) 보름을 지내는 우여곡절 끝에...
이제야 겨우 내 자리를 잡은 건데요,
비록 그곳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마을에서 지내면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좋은 경험을 했던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잖겠습니까? 제가 언제 그런 특별한 경험을 해보겠느냐구요.
엉겁결에 그 마을에 왔다가, 뜻밖의... 까미노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도 되면서, 또 직접 겪어도 봤으니까요.
길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제법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돈으로 사려고 해도 쉽지 않을... 그런 경험을 한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이제 새 공간.
어차피 여기도 잠시 머물다 갈 곳이라, 큰 미련은 두지 않을 생각인데요,
이사온 집이 언뜻 보기엔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된 것 같았는데, 와서 보니... 집안의 거의 모든 가구와 집기들이 어찌나 낡았는지, 역시 1 층에(여긴 건물은 같은데 완전 독립된 집입니다.) 혼자 사는 노파의 나이와 연륜만큼이나 된 듯 하더라구요.
그러니,
'오기 전에 좀 더 세심하게 살필 걸......' 하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이마저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는 일이라... 견뎌 볼 생각이랍니다.
그저 내 일만 잘 된다면, 한두 달... 조금 악조건 속에서 견뎌내는 거야 뭐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어쨌거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내 일에 파묻혀야 할 상황이 도래했으니... 거기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이래저래, 다른 사람 집에 머물거나 알베르게에 있다는 핑곗거리(?)로... 일을 못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핑계의 여지도 없는 막다른 느낌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거지요.
아, 일이 잘 풀려줘야 할 텐데요......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빌어보고라도 싶은 심정이거든요?
4 . 12
그랬다.
인야의 상황과 각오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빌랴누에바...' 에서도 헛된 시간을 보냈던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상황과 비교해서도 안 될... 본인이 스페인에 왔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터'라는 개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꼬랄레스...' 로 이사온 그 며칠은 추위와 원고... 둘과의 씨름이었다.
아직도 13도를 기록한 실내기온이었지만 날이 새면서(해가 돋으면서) 기온이 조금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야는 우유와 미숫가루로 아침을 챙겨 먹고 샤워도 한 다음,
'사모라로 나갈까 아니면 여기 관청의 인터넷 방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오늘이 금요일이기도 해서 일단 이 마을의 관청으로 가기로 했다.
관청은 열려 있었고, 인야가 가서 그 사정 얘기를 하자... 한 여직원이 열쇠를 가지고 그를 안내했다.
여기는 지하 비슷한 곳에 인터넷 공간이 있었지만, 한 쪽은 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난방도 되는 듯 춥지 않아서 좋았다.
일단 그 방에 자리를 잡고 인터넷을 접속한 뒤, 인야는 까페와 메일을 점검하고... 홈페이지도 올렸다.
어제 인터넷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무리 할 게 많았는데, 또 빌랴누에바 알베르게에 머물 때 왔던 사람들에게 보낼 사진을 정리하고 메일을 쓰는 데에도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어느새 정오가 넘어가면서는 머리가 멍- 하기도 했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 한 패거리가 들어오던데, 여기도 역시 인터넷 방은 아이들 차지인 것으로 보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먹을거리가 문제였다.
이 마을엔 가게들이 있긴 했는데, 물건들이 풍성하지 못한 데다가... 주인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아(여자가 인야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가급적 다시 가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가르반소소를 하려고 보니, 거기에 집어넣을 초리소가 없어... 대신 남아있던 하몬 두어 조각을 넣고 하기로 했다.
점심을 해 먹고는,
'사모라에 나가 봐? 어차피 주말을 지내려면 뭔가 부족한 게 많은데......' 하기는 했지만, 관두고 말았다.
그러다 침대에 앉아, 바르셀로나의 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바로 받았다.
인야가 이사했다는 말을 하자, 그는 또 생뚱맞게...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세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지만 인야는,
"고생?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야. 한국에서 멀기 때문에, 정신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거지......" 하고 우선 둘러댔는데,
"집에서는 안 되나요?" 하고 그가 다시 물어왔다.
"안 돼..." 하면서, 인야는 그에게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그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글쎄, 그는 날 조금은 이해해 줄 수도 있고... 어쩌면 ‘왜 그럴까?’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는, 나의 이런 특성에 대해... 알고도 남음이 있는 친구이긴 하다...... 본인의 삶이 나와는 너무 다르지만......'
그런 뒤, 일단 '정상적인 생활'의 3장 ‘개인전’의 교정에 들어갔다.
어차피 한 번 보다보면, 당연히 수정도 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달라진 건 없을지라도, 뭔가 조금은 다져질 수는 있는 일이니까.
다음 날, 어쩔 수 없이 마을에 장을 보러 나갔다가, 인야는 빵 배달 트럭을 다시 마주쳤다.
그런데 차를 몰던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라, 아마도 그의 형인 듯했다.
인야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어?
그는 인야를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인야는 멈칫! 민망하기도 했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루이스의 형제일 텐데, 이렇게도 다른가?'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인사했던 게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정말, 재수 없게 생긴 놈이네!' 하면서도, 인야는 이럴 때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스페인 사람들은 참 착한데... 저런 놈들이 꼭 끼어있다니까. 더구나, 그 착한 루이스의 형젠데도 저러니... 내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하늘이 개어가기도 했고, 방 안으로 환한 햇볕이 가득 들어오기도 했다.
빛이 많이 들어오면 환해서 좋았을 뿐더러, 또 춥지 않아서도 좋았다.
'이런 날 내가 침대에 앉아 ‘글 작업’을 하다니...... 이러다가 졸리면 자고, 또 일어나서 밥 챙겨 먹고 일하고......'
무엇보다도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기까지 했다.
이제야 발동이 걸렸던 ‘글 작업’은, 또 새로운 내용이 다소 첨가되는 식으로 이어져 갔다.
그러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날씨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흐렸다 개었다를 반복하며 사흘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신의 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꼼짝 않고 집에만 처박혀 있다 보면, 몸에도 좋지 않을 텐데......'
날이라도 풀리면 저녁에 산책이라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속 날이 궂다 보니... 그럴 의욕조차 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게, 4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