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는 미국의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주이다. ‘Old Dominion” 또는 ‘Mother of Presidents’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죠오지 와싱톤을 비롯해서 8명이 이 주의 출신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크기로는 미국에서 35번째 가는 주로서 동쪽으로는 대서양과 닿아 있고 동,북쪽으로는 와싱톤 DC와 매릴랜드주와 경계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노스 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 서쪽으로는 켄터키 주 그리고 서,북쪽으로는 웨스트 버지니아와 경계를 하고 있다. 인구 800만명의 버지니아 주는 리치몬드에 주 청사가 있고 해군기지와 항구가 있는 대서양 연안의 노포크와 버지니아 비치 지역이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며 와싱톤 DC의 남쪽 서버브인 훼어팍스(Fairfax County)역시 많은 인구들을 수용하고 있다. 버지니아는 1607년 London Company가 신세계에 처음으로 식민지를 개척한 곳으로 인디언들에게서 뺏은 땅에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농장 사업을 벌려 식민지 초기 뉴 잉글랜들르 누르고 정치적 중심지가 된 곳이다. 미국혁명기에는 13개 주의 하나였고 남북전쟁 때에는 남부연맹주(Confederacy)에 속해 리치몬드가 남부연합군의 수도역활을 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때 지리적으로는 한때 북의 뉴 잉글랜드와 남의 버지니아로 남쪽 전지역을 통칭하였었고 정치적으로는 남부에 속하는 보수적인 지역이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막상막하의 각축을 이루는 곳이다. 버지니아를 산업별로 대별하여 보면 농업이 주종인 세난도 배리와 펜타곤과 CIA등 연방정부 기관들이 많이 있는 북부 버지니아, 해군기지들과 군수 기지, 그리고 항구 등으로 주역을 이루는 Hampton지역, 그리고 교육기관들과 연구단지가 들어있는 북부 공업지구를 들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연한 해안지대로 세 개의 반도가 대서양으로 뻗고 있으며 맨 아래 하류에는 만이 형성되어 있어 항구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와싱톤 DC와 경계하고 있는 북부지역은 서버브 주택지대들이 산재한 평원지대이며 서쪽으로는 아파라치안 산맥을 두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접하고 있고 남서쪽으로는 알레가니와 컴버랜드 분지를 넘어 숲이 우거진 국립산림보호지역이 들어서 있다. 역사적으로는 12,000여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한 것은 기원 900년 경으로 보고 있으며 1500년 경에 들어서 외부 사람들이 교역을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1500년 말에는 Powhatan 부족을 중심으로 부족들끼리의 연합을 시도하였고 처음 식민지가 세워지던 1607년 경에는 이 지역에 인디안들이 12,000 내지 13,000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607년 Christopher Newport 가 발견한 해안에 영국의 최초의 식민지를 세우고 영국의 James 왕 1세의 이름을 따서 Jamestown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지난 2007년 설립 400주년을 기념하였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유럽대륙에서의 증가하는 담배 요구에 힘입어 윌리암스버그를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였고 1693년에는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가 설립되었으며 1699년애는 윌리암스버그에 주청사가 세워졌다. 그러나 영국과의 독립전쟁 때 해상으로 들어오는 영국군에게 취약하다고 생각되어 내륙지방인 리치몬드로 수도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1790년에는 수도를 만들기 위하여 매릴랜드주와 함께 땅의 일부를 District of Columbia에 나누어 주었으며 1863년에는 미 합중국(Union)에서 분리하여 남부연맹(Confederate)에 가입하려는 버지니아와 Union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West Virginia가 분리되었다. 한때 담배와 석탄의 수출지였던 이곳이 지금은 컴퓨터칲의 수출지로 전 미국 수풀량의 반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한때 낙농업의 중심지였던 북부 버지니아에는 특히 Dulles Technology Corridor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와 통신기술 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Fairfox 일대의 家系당 수입은 매릴랜드의 베데스다와 함께 1,2 위를 다투고 있다. 농업 역시 버지니아의 중요한 산업으로 25%를 차지하고 있으며 야채, 과일, 땅콩 등과 함께 담배도 역시 한 몴을 하고 있다. 버지니아의 포도산업과 포도주 역시 괄시 못할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의 종교적 동향은 개신교가 76%로 절대 다수이고 카톨릭이 11%이며 개신교도 가운데도 침례교도가 27%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보수적인 기독교 교육기관인 Regent University, Liberty University 그리고 Lynchburg College 등이 이곳에 자리 하고 있다. 버지니아는 신대륙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했을뿐 아니라 초대 대통령을 위시해서 헌법초안자, 여덟 명의 대통령 등을 배출한 주로서 거기에 걸맞게 신화를 만들어 낸 고장이다. 인디안 추장의 딸과의 사랑을 그린 폰카혼다스의 이야기나 초대 대통령이었던 죠오지 와싱톤의 어렸을 적 이야기들, 1980년대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도마스 제퍼슨의 흑인 부인 및 자녀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남북전쟁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은 버지니아가 무대로 되어 있다. 버지니아의 성지들 그렇기 때문에 버지니아 주에는 와싱톤 D.C.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녀들과 함께 찾는 성지들이 제법 많이 산재해 있다. 우선 와싱톤 D.C. 교외에 자리한Mt. Vernon의 저택과 정원이 한 눈에 보이며 당시 의상과 국기를 든 군인들이 서있다. Mt. Vernon의 와싱톤 저택과 정원- 와싱톤 DC의 남쪽, 포토막 강이 내려다 보이는 알렉산드리아의 Mt. Vernon에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이끈 사령관이었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죠오지 와싱턴의 농장과 저택이 있다. 1735년에 와싱톤 가에 의해 지어졌고 죠오지 와싱톤이 1747년터 1799년까지 산 이곳에는 40에이커의 넓은 지역에 죠오지와 부인 마르다 와싱턴의 무덤과 함께 공원도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미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러번 개축되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가구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지난 200여년간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 있도록 잘 관리되고 있다. 3200 George Washington Memorial Pkwy, Mount Vernon, Virginia 제퍼슨 기념관- Monticello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요 3대 대통령이었고 버지니아 대학의 설립자인 도마스 제퍼슨의 5,000 에이커 농장이 와싱톤 교외 Charlottesville의 산 위에 있는데 이곳을 Monticello라고 부르며 지금도 그 가운데 2,500 에이커를 도마스 제퍼슨 파운데이션에 의해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유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국의 유일한 건물이다. 2009년 새로이 완공된 Thomas Jefferson Visitor Center and Smith Education Center외에도 Jefferson Library와 Thomas Jefferson Center for Historic Plants 등이 잘 정돈되어 있으며 Saunders-Monticello Trail 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정원과 식물원이 꾸며져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제임스 매디슨 기념관.- 미국 헌법을 기초한 ‘Father of the Constitution’이요 제4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기념관이 그의 농장이 있던 버지니아 주의 오렌지 카운티에 있다. 이곳에는 미국역사에 끼친 그의 공헌과 함께 특히 매디슨이 농업경제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펜타콘(Pentagon)- 와싱톤 DC의 서쪽 근교, 버지니아의 알링톤에 자리한 거대한 5각형 건물이 1941-43년에 수도권 17곳에 산재해 있는 전쟁담당부서들을 한 곳에 모아 능률을 올려보자는 의도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때에 건축된 것이다. 국방성 청사로 육,해,공군의 본부를 다 수용하고 있다. 특이한 건축양식과 세계에서 가장 큰 면적의 건물이라는 것으로 유명하였지만 9/11 여객기 공격테러로 한층 더 유명해졌다. 와싱톤 D.C. 교외를 떠나 지방으로 가면 윌리암스버그의 식민지 시대 역사유적-1699년부터 1780년까지 윌리암스버그는 신세계에 있는 영국식민지 가운데서 가장 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현재 이곳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이 있다. 300여 에이커에 18세기 풍으로 개조한 주택이나 가게 그리고 태번 등 500여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도시가 만들어졌고 당시의 의상과 모습으로 각종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3월 중순부터 가을까지는 연극과 시범 등으로 당시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고 있다. 이외에도 주지사의 저택이었던 Governor’s Palace와 주 청사 건물 그리고 The Art Museums of Colonial Williamsburg 등이 찾아 볼만한 곳이다. 제임스 타운 (Jamestown)- 필그림들이 매사츄세츠에 상륙하기 13년 전인 1607년 104명의 영국사람들이 버지니아의 제임스 강변에 처음 정착촌을 만든 곳이다. 극심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영국의 첫번째 영구 식민지를 정착시켰다. 2007년 5월에는 정착 400주년 기념식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곳에는 1607년에 타고온 배의 실제 크기 모형이 전시되고 있으며 당시의 정착촌의 모습과 생활, 당시 인디안인 Powhatan의 촌락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입구에 있는 The Museum of 17th-century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는 이곳만의 특이한 박물관이다. 리치몬드(Richmond) 버지니아주의 수도로 인구는 약 20만, 그러나 주위 서버브를 포함한 메트로포리탄의 인구는 120만 정도이다. 제임스 강변에 1737년에 건설된 이 도시에 1780년에 윌리암스버그로부터 버지니아의 수도가 옮겨왔다. 1775년 이곳에 있는 St. John’s Church 에서 Patrick Henry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란 연설을 한 곳으로 유명하며 남북전쟁 때에는 남군인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의 수도였었다. 미국의 핵심’이라 부르는 버지니아 주는 미국역사에서 핵심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지역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 미 합중국 건국에 중추적인 역활을 한 인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지만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남북전쟁의 작고 큰 전투들이 주로 버지나아를 주 무대로 인근에서 일어났다. 남북전쟁기간 동안에 전국적으로 뉴 멕시코에서 테네시에 이르기까지, 벌몬트 주에서 프로리다까지 1만 여 곳이 넘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중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전투지 몇 곳을 연대순으로 소개한다면. 버지니아주 마나사스(Manassas)에서 있었던 첫 번째 불런(Bull Run)전투 1861년 여름, 남북전쟁 발발이래 처음으로 죽이고 죽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버지니아의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남군인 연방군이 수도 와싱톤 DC를 향하여 진격하자 북군인 합중국 군이 Bull Run이라는 작은 강을 건너 반격해 왔다. 북군은 야외에 소풍나오는 기분으로 점심 바구니에 마차를 타고 여유롭게 전투에 임했으나 막상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깜짝 놀라 와싱톤으로 퇴각하였다. 양쪽 모두 기껏해야 60일 내지 90일이면 전쟁이 끝나리라고 생각했지만 4년여를 끌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곳은 와싱톤 DC와 가까워 관광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이점도 겹쳐 아름답게 복원된 남북전쟁 전투지이다. 매릴랜드 샙프스버그근처에 있는 Antietam 전투 (Sharpsburg) Antietam 전승기념비와 널리 알려진 링컨의 사진이 이 전장터에서 찍은 것이다, 1862년 9월, 남군이 북군 지역에서 처음으로 싸움다운 전투를 벌인곳이다. 양쪽 사상자가 2만 3천명에 달해 1일 전투 사상자로는 가장 피해가 많았던 전투이다. 이 전투로 전세는 일단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북군이 이곳을 장악함으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북군의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고 몇일 후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함으로 이 전투는 그 의미를 더하였다. 버지니아의 프레드릭스버그(Fredericksburg) 전투 1862년 12월, 와싱톤과 리치몬드 중간에 자리한 프레드릭스버그에서 벌어진 비참한 전쟁으로 남군이 방어하고 있는 이곳에서 저녁 늦게 시작된 전투는 밤새 총소리가 계속되었고 북군들은 시체들로 뒤덮힌 동네를 전우들의 시체를 넘어 진격해야 했다고 전한다. 아름답고 기묘하게 복원된 이 동네는 당시의 시가전 양상을 보고 느낄수 있도록 관광 투어를 하고 있다. 펜실바니아의 게티스버그(Gettysburg) 북 버지니아의 남군 사령관인 리(Lee)장군은 와싱톤 DC를 우회하여 매릴랜드를 거쳐 펜실바니아주의 수도인 해리스버스(Harrisburg)로 진격하였다. 그는 해리스버그와 필라델피아를 점령하면 전쟁을 끝내고 연방국과 합중국을 정식으로 분리하는데 유리한 협상을 할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합중국의 북군은 남군들을 제지하기 위해 추격하여 1863년 7월 조그마한 도시 케티스버그에서 이들을 만나 1일부터 3일까지 전투를 벌렸는데 이 전투는 남북전쟁에서 가장 치열했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전투로 꼽히고 있다. 이곳은 남북전쟁 전사자들을 위한 묘지로 헌정되었고 링컨의 헌정 연설로 더욱 유명하여졌다. 피터스버그 전쟁 기념공원 (Petersburg National Battlefield) 1864년 여름, 전세는 남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남쪽의 연방군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연방군의 수도 리치몬드에서 가까운 피터스버그까지 퇴각한 남군은 깊은 참호를 파서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북군은 남군의 진지까지 지하도를 파 들어가 폭발시킴으로 승리하는듯 했으나 너무 일찍 터트리는 바람에 남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지하도에 있는 북군들에게 포격을 가함으로 전투는 다시 소강상태에 빠져들고 곧 끝날것 같던 전쟁은 1864년을 넘기고 1865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의 참호들과 지하도를 직접 볼 수 있으며 인근 리치몬드의 연방군 청사와 대통령 관저 그리고 남군 주요 인사들이 묻혀있는 Hollywood Cemetery 등을 볼 수 있다. 버지나아의 Appomattox Court House 1865년 3월, 부군에 패퇴한 남부연방정부와 군이 피터스버그와 리치몬드에서 철군하여 남서쪽으로 퇴각하던 중 서쪽으로부터 몰려오는 또 다른 북군을 만나게 되었다. 남군의 사령관인 리 장군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북군의 그랜트 장군과 그 근처에 있는 Wilmer McLean이란 사람의 집에서 만나 항복하고 전투를 종식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McLean이란 사람이 마나사스의 불런(Bull Run)지역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북간에 처음 전투가 벌어졌던 날 북군이 쏜 폭탄이 그의 부엌에 떨어져서 전쟁을 피해 멀리 남서쪽 버지니아로 집을 옮겼던 것인데 그의 집에서 휴전이 합의된 것이다. 그는 “전쟁이 나의 앞마당에서 시작됐고 나의 응접실에서 끝났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집이 있던 이 조그마한 동네의 10여채 미만의 건물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잘 보존되어 남북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남북화해의 상징으로 방문객들에게 전쟁의 아픔과 더불어 치유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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