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32 ~ BC 202
이름은 적(籍), 우(羽)는 자이다.
임회군 하상현(臨淮郡 下相縣, 현재는 江蘇省) 출생.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항우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항우의
할아버지는 항연(項燕)이라는 사람으로 초나라 대장군을 지내 인물이며,
진나라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였다.
항우가 태어난 시기는 전국시대였으며
그가 장성하였을 때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였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항량(項梁)에게 맡겨져 가난하게 자랐다.
젊은 시절 키가
8척에 이르렀고
큰 솥을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 하여 공부를 하지않았는데
오로지 병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항우는 이미 검술과 전투에 능했으며
각종 병장기를 잘 다루었다고 전한다.
삼촌 항량이 살인을 저질러
가족 모두가 회계(會稽, 현재의 쑤저우 蘇州)로 달아나 그곳에 정착하였다.
마침
회계군으로 행차하는 진나라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보고
"내가 저 녀석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를 대신해 줄 테다"
라고 호언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진나라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중 BC
209년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항우도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 태수를 참살하고
인수(印綬)를 빼앗은 것을 비롯하여
진나라 병사를 휘하에 모아 세력을 형성하였다.
항량과 항우가 거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호걸들이
모여들었다.
진승과 오광이 내부 반란자에게 피살되자
더욱 세력이 확장되었고
책사
범증(范增)의 건의로
초나라 왕족 웅심(熊心:초나라 회왕의
손자)을 추대하여
봉기의 명분과 민심을 얻게되었다.
항량이 진나라와 전투에서 사망하고
진나라 장수 장한의 공격으로
진승, 오광 등이 차례로 죽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초나라 송의가
최고 사령관을 맡아 지휘하였지만
진군하지 않자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나라
장한의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 정예병을 패퇴시켰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가장 강력하고 유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항우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동쪽 성문인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관중(關中, 현재 산시성 위수)으로 쳐들어갔다.
항우는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을 파괴하며
황궁을 약탈하였고 이것으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항우에 앞서 관중에 들어와 있던 유방(劉邦) 군사의 저항을 받았지만
함곡관에서 이를 물리치고
관중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홍문(鴻門)에서 유방을 만나 그의 사죄를 받고
오히려 그의 계략에 속아
놓아주고 말았다.
항우는 유방을 가소롭게 여기고
진나라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도성
함양(咸陽)을 불사른 뒤에
팽성(彭城:徐州)에 도읍하여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진나라 멸망을 위해 함께 싸운
장수들의 공로에 따라 분봉하여
18명의 제후를 임명하였다.
이때 유방에게 한중땅을 주고 한왕(漢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항우를 따라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도 봉토를 받지 못한
장수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항우의 실패 원인은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유방을 가소롭게 생각하였고
휘하의 제후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주면서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항우 진영에서 이탈하는 부하들이 생겨나고
이들을 통솔하지 못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유방과 중국 천하를 두고 경쟁하였는데
팽성전투에서
고작 5만
명의 군사로 56만 명의 유방 군사를 무찔렀다.
하지만 수하의 장수들이 항우의 노여움을
두려한 나머지
한왕 유방에게 투항하는 일이 생겼고
유방은 주변 세력을 연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때문에 항우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적과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垓下, 해하의 결전)에서
한왕(漢王) 유방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이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虞姬)와 헤어지는 모습을 두고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항우를 두고 후대의 사람들은
항우는 병법에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