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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설교 모음
목 차
① 가족
② 가정
③ 가정과 예수님
④ 가정사역
⑤ 가정문제와 상담
⑥ 가정상담
⑥ 멋쟁이부부 십계명
⑦ 남편들에 대한 십계명
⑧ 아름다운 가정
⑨ 아내를 감동시키는 남편
⑩ 당당한 아버지상
⑪ 아버지의 영적권세
⑫ 아름다운 부부
⑬ 부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⑭ 부부조화 10가지 비결
⑮ 예화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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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미쉬파하【 ·가족, 씨족】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300회 나오는데, 우가릿어와 퓨닉어에서도 볼수 있으며 그 의미는 동일하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창세기 8장19절이다.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가족', '종족', '족속' 등으로도 번역된다. 같은 종(種)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생활양식, 특성을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각 종류간의 이질성과 개체성을 강조하는 단어로는 '민'이 있다. 이 단어는 동사 어근인 "쉬프하〔 〕"와 관련이 있으나 그것의 동사형은 구약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다른 명사형은 "프하〔 ·여종〕"로 창세기 16장2절에 나온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원컨데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미쉬파하"는 오경과 역사서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민수기에서만도 154회 사용된다), 시가서 및 예언서에서는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혈연으로 맺어진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씨족"이나"광의의 가족"에 속하였다. 사울은 자신이 가장 미약한 가족에 속해 있기 때문에 왕이 돌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삼상 9 : 21). 이러한 의미로 여리고에서 목숨을 건진 라합의 가족의 범위가 결정되었다. '…또 그 가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수 6 : 23). 이 단어가 70인역에서는 "데모스"〔 :백성, 대중, 무리〕,"퓔레"( :지파, 민족, 백성) 및 "파즈리아"( : 가족, 씨족)들으로 번역되었고, 흠정역에서는 "가족, 친족, 종족" 등으로, 그리고 기타 대부분의 역본에서는 "친족"이나 "종족"대신에 "가족"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가정 - 家庭
나타난 최초의 사회적 집단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 속에 국가와 교회의 원형(原形)이 나타나 있었다. 이러한 가정은 그 자체가 선한 것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선을 창조하는 곳이다. 가정이 존재하는 목적은, 육신적으로는 자녀를 낳는 것이며, 도덕적으로는 보다 더 고등한 사회 집단 속에서 적응하기 위해 인격을 수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은 일차적으로 학교나 국가의 관심 사항이 아니고 가정의 관심 사항이다."(E. Brunner, The Divine Imperative, p.512) 히브리어 미슈파하(가족, 개인들의 가족적인 인연)는 또한 친족, 지파, 민족을 의 미하기도 한다(민 3:15;삿 13:2; 암 3:1,2). 사사기 6:15에 있어서, '가족'이란 엘레프, 즉 1천 명으로 구성된 가족을 의미했다(삼상 10:19; 미 5:2에서도 그러함). 보통 이에 해당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에는 파트라아-파테르(아버지)에서 나왔음-인데, 이 단어는 경우에 따라서는 족보로(눅 2:4, AV,RSV), 혹은 혈족(행 3:25, AV)으로 번역되었다. 사도행전 7:13에서(RSV) 가족이란 게노스이다.(AV는 혈족, ERV는 가계)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정은 중요한 사회적(행정적) 단위였다. \율법과 예배는 그 조상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오래 전부터 장로들, 즉 가족의 두령들에 의해서 집행 되었다. 부인('여자.여인' 해당 항목 참조)은 남편의 절대적인 소유물이었다. 따라서 신랑은 그 장인에게 모하르, 즉 신부 값을 지불했었다(출 22:17). 부인은 아들을 낳을 때에 귀중히 여김을 받았다. 만일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 남편은 더 많은 아내를 얻거나 이혼하는 관습이 있었다. 결혼에 대한 보다 더 고상한 개념이 창조기사에 나와 있다. 여기에서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었다"(창 2:8). 일부일처제 (一夫一妻制)는 창 2:24에도 나와 있으며 선지서(예컨대, 호세아)-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아내로서, 하나님은 다른 민족들은 알지도 않으셨음-에도 나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0:36,37과 누가복음 14:26에서 가정을 이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키셨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가정은 보다 더 많은 동정심을 갖게 하고, 보다 더 의무들을 잘 이행하게 하는 훈련장(E. Scott)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정을 그의 새로운 질서(세계)의 모형으로 간주하여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셨다. 이러한 모든 참된 가정생활은 근본적인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엡 3:15).히브리 가정의 가장은 특별히 자녀들의 교사로서 영적 복지의 수호자로서 그 사명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정의 온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히브인들은 가정중심으로 모든 생활을 하도록 규정 지워졌다.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한계 속에서 특별한 역사 즉 계시사(The history of revelation)를 주도하며, 그 속에서 자신을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알 만한 것을 인간에게 주셨다. "인류의 모든 족족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게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행17:26-28) 모든 시대를 통하여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으나,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고, 모든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인정하지 아니하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인간에게 여러 시대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후 아브라함 때까지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사역하셨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가정은 아담과 하와의 가정(창2:25)이다. 이 가정은 창조 질서에 의해 조성된 최초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성자도 하나님이며, 중매자도 하나님이며, 집례자도 하나님이며, 결혼의 원리(창2:24)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창세기 4장에 최초의 가정 문제가 아담의 집안에서 가인,아벨로 인하여 발생되었다. 그 갈등은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인간들 간에 투쟁의 시작이 되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로 인한 다툼에 대해서, 부모로서 '아담'과 '하와'는 징계나 권고를 했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가인'도 자기의 행위를 부모에게 이야기하거나, 상담하였다는 기록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 또한 아담의 자녀인 '가인'의 결혼에 있어서도 아담이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인의 자녀 '라멕'도 살인죄를 범하고도 한마디 반성의 빛도 없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23절).아담과 하와는 가인에 대해, 가인은 자녀 라멕에 대해 방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성경의 증언처럼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상호간의 관계가 파괴(창3:12)되고, 가정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스림의 행복(창3:23-24)을 영위하는 창조적 질서를 바르게 수행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아가 경건하여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가정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창12:3)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얻도록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방법들을 통하여 인류 구속의 완성 때까지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족속으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도록 사역하신다. 그 사역의 방법은 계시이며(창12:1) 교육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살던 족장 시대는 2-3세기 후의 함무라비법전(A.D. 17-16)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족장 시대에도 도덕 , 경제 문화가 발달한 시대이며, 가정형태도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인간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녀와 가정을 선택하여 책임을 부여하였다고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여호와의 도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족장 시대의 교육은 형식적이며 정규적인 요소 대신에 자연적이며 비형식적인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제단을 쌓고 번제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그들의 자녀들이 보고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책임과 번제의 대상자 하나님을 배웠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체득하였으리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학대를 당할 때(출애굽기 1:l8-14)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출애굽기 3:2)모세는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이루는 데 역할을 한 선지자이다. 모세가 성장한 가정은 그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레위인인 어머니에 의해 모세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들을 배웠으며 민족 의식의 발현으로 애굽인을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히브리서 11:24,25)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첫 부인을 이방의 땅에서 만난다. 모세의 부인인 사모는 이방여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둘째 사모도 이방여인을 취하였는데 이를 두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비방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은 첫째 모세 같은 위대한 지도자도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과 둘째 특별히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 한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선교 목적이라는 특별한 계시의 이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이로 보건데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함을 기뻐하는 (히11:26)언약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유대 민족의 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그들의 가정을 중심으로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애굽에서의 탈출은 곧 아브라함 부부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후손들을 구원하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가정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줄 때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였다. 이는 결국 하나님은 경건한 지도자의 가정을 들어 쓰시고 또한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펼쳐 나감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이 말씀은 단순히 말씀을 가르칠 것에 대해서만 언급된 것이 아니다. 가정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 단위로서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초 공동체로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신자의 가정의 건강은 곧 공동체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두 중요한 중추인 부부의 화합과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바라시는 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구약의 시대를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가정 안에서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위탁받은 유일한 사람으로서 가정의 유일한 교사였다. 히브리 민족의 가정교육의 주체는 부모이며, 부모는 자녀 교육을 위탁받은 최초의 교사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있어서 종교와 교육이 거의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교육의 방법은 절기를 통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행하여 졌다. 부부는 가정 안에서 자신이 주체자인 동시에 율법을 준행하는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인하여 지도 받는 피 주체자로서 살아가는 중요한 영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Edith Deen. Family Living in the Bible, 도한호역, (서울: 요단 출판사, 1980), p. 108). a. 현대사회 속에서의 가정 - 우리의 신앙생활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현대산업 사회의 허다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압력을 이기기 위한 사회기본 단위이며 인간회복과 구원의 장(場)인 가정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의 뜻이 가정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일일 것이다.6) 요즈음 미국에는 4천만 이상의 어머니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중 600만은 자녀가 없다. 3살 이하의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약 3분지1이 온종일 일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직장이 없는 많은 어머니들은 TV에 몰두하거나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자녀교육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7)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산업 문명권에 속한 사회는 많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는 도시화의 문제로서 인류가 농경문화에서 산업문명으로 발전됨에 따라 전원적 농경문화가 도시문화로 변천하게 되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3%만이 농촌에서 살고 97%가 도시에 몰려 살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에는 주택란, 교통란, 교육란을 비롯하여 매춘, 도박, 절도, 강력범, 마약범, 등 각종 범죄와 그리고 퇴폐풍조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가 수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산업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노사문제와 이윤분배, 노동자들의 인권, 환경오염, 자원고갈, 직업병, 다국적 기업의 횡포, 생산제일주의, 공해, 복지시설 부족, 빈부의 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기계가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하게 됨으로서 작업의 량과 질에 있어서 사람이 기계보다 낮은 대우를 받게 되었고 사람이 기계를 수종들 뿐만 아니라 기계의 일부처럼 비인간화되어가는 문제이다. 그러면 이러한 산업사회의 문제들 속에서 가정에는 어떻한 문제들이 샐길것인가? 이러한 사회변 4) 이문우, op. cit, P215) 이문우, lbid, "현대산업사회와 가정예배의 중요성" 새가정(6월호,1985),p.39 7) 죤,F, 맥아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가정" (서울:나침판사,1985),p31-32 동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도시현상으로 가족들이 농촌과 도시에서 헤어져서 살게 되거나, 근무시간등으로 가족들의 얼굴보기가 힘들정도로 자리를 같이하기 힘들게 되었다. 방치되거나 과잉보호를 받게되는 자녀와 청소년들의 문제와 부부의 탈선문제 등이 발생하고 가정불화와 이혼문제, 배교(背敎). 불신앙의 문제 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도산(倒産) 또는 실직으로 가정경제의 파탄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8) 이러한 가정문제 등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가정문제는 가정에서 해결되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 가정의 문제는 가정을 구성하는 가정의 문제에서 그리고 그 가족의 문제는 종교문제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b. 사회변동에 따른 문제 - 오늘의 사회는 그야말로 급변해 간다. 따라서 이 세대는 삶의 모든 면에서 변동이 일어나고 개혁이 단행되고 혁명이 폭발한다. 그 결과 사람의 삶에 근본적으로 위협을 주는 것이다. 역사관의 변동, 가치관의 변동. 전통에 대한 도전 등은 종교인의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부인할 뿐 아니라 자연인과 신앙인의 삶의 형태까지 부인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 결과 자연인이 가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중요성은 무시하고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는 동시에, 종교인이 가지는 수직적인 변동을 간접적으로 부인함으로서 신앙인의 삶의 형태도 부인하고 나아가서는 삶의 근본구조를 붕괴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되었다.9) 그러므로 변화되어 지는 가족변동의 문제는 현대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관계가 있다. 특히 산업화, 도시화, 전문화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 가족변동의 요인들인 가족형태의 변화, 가족기능의 변화, 가족윤리의 변화는 각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10) 핵가족화, 가족기능의 변화, 역할분담의 혼동 등은 현대가족에게 사회문제를 나타나게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족의 불안정 문제와 노인문제, 청소년문제 등은 중요한 문제이다. 가족의 불안정의 문제라 함은, 현대가족은 부부중심 가족이며 부부가족은 자유연애 결혼을 전제로 한다. 그 결과 부부의 사랑이 식으면 쉽게 해체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부부 가족의 결함은 위약하고 불안정 할 수 있다. 부부가족의 불안정성은 그것 자체도 문제가 있으려니와 그로 인한 자녀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E,R, Mowerer는 "가족해체란 가족들의 야망이나 이상이 각각 달라지고 가족의 목표가 일치하지 않으며 그들의 가족을 하나의 조화있는 조직체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마저도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11) 고 하였다. W.J. Goode는 가족해체란 가족성원이 자기의 역할 의무를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한데서 오는 역할구조의 해체 또는 붕괴라하고 그 주요 내용은 불안정한 가족으로서의 부적당한 출발, 결혼의 파기, 별거, 이혼, 유기, 가족이 동거하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형식적인 가족, 불가항력에 의한 남편이나 아내의 결손 등이다. E,W, Burgess는 가족해체의 요인을 감정적 대립 문화형의 대립, 사회적역할의 대립, 경제적 긴장, 정서적 성적갈등12) 이라고 하였다. 그와같은 요인에 의하여 가족성원간에 역할기대와 역할수행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역할관계가 해체되는 상태를 가족해체라고 본다. 즉 남편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부인이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여 의견충돌이되고 감정적 대립 나아가 역할수행을 포기하고 결국 가족의 붕괴 즉 이혼으로 발전하는 것에 이른다. 또한 노인문제는 산업화, 도시화, 가족의 세대적 분열에 의한 핵가족화가 가부장적 가족에서 부부중심 가족으로 바뀌어지고, 효(孝)의 권위가 흔들리고 노인의 지위와 역할의 변동으로 노인의 권위가 저하되고 노인의 지식과 경험이 별로 소용없는 것이 되었으며, 노인이 가정경제에 있어 오직 부담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13) 8) 신광준 op. cit., p.41. 9) 이종성,"급변하는 세대와 기독교 가정", 새가정(1967.8.9월호), p 29. 10)이성곤, "교회안에서 가정 목회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 (장신대석사논문1988) p29. 11)E,R, Mowrer, "sociology of Marriage", p,16. 12)Lbid. 13)현두일, "노인 문제에 관한 연구" 건국대학교 학술지 (15권 1973년) p 319. 결국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사회변동의 여러요인들 즉 가정형태의 변화,가정기능의 변화, 가정윤리의 변화, 등에 의하여 부부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자녀 양육문제, 청소년문제, 노인문제 등 삶의 모든 세대에 걸쳐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어 지고 있다. <참고: 가정과 예수님>
가정과 예수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가족제도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국가나 교회, 노동이나 신앙의 제도보다도 먼저 가족제도를 만드신 이유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존권을 이야기 할 때에 어떤 이들은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극단에 서서 의식주등의 육체적 물질적인 욕구충족을 거론하며, 성욕과 애정과 친밀등의 정서·정신적인 욕구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반면에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는 이들은 구조악의 정화와 민주적인 삶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주장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하나님은 위의 모든 인간의 욕구를 아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욕구와 필요들을 주신 분이시며, 동시에 그 욕구들과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와 필요만 보시지 않고 그것들이 충족될 수 있는 제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고 바로 가정은 인간의 생존권을 충족시키는 첫 번째 장임을 아시고 이 제도를 제일 먼저 창조하시고 이 제도에 복을 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정을 통해 도구지원(생존에 필요한 필수품의 지원)과 애정지원(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지원)뿐 아니라 정체성의 지원(삶의 의미와 목적등)을 받아야 한다. 가정이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권 획득의 가장 중요한 장이 무너진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가정제도의 사활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부부및 가정에 관하여 신구약 성경은 부분적으로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가족관계의 기초를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서 부부관계의 근본원리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원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언약(covenant)관계라고 할 수 있다(Myron, Chartier,1978).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아버지와 자녀 관계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사랑하며, 돌보고, 응답하고, 훈련하고, 주며, 존중하고, 알고 용서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관계를 연구한 레이 앤더슨(Ray Anderson, 1982)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가족관계의 중요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스튜아트 맥린(Stuart MacLin, 1984)은 "언약의 언어와 가족신학"이라는 논문에서, 언약관계에 나타난 7가지 관계적 특성을 기술하면서 이것을 효과적인 가족관계의 모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맥린이 관찰한 언약관계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사람들은 관계적으로 창조되었고, 공동체 속에서만 참인간이 된다. ②가장 기본적인 가족과 언약의 단위는 쌍방관계이다. ③공동체 속에 사는 인간은 화합과 일치 뿐 아니라 갈등도 경험한다. ④언약관계에 사는 자는 반드시 서로를 용서하며 용서받으며 살아야 한다. ⑤언약관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결속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⑥언약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관계의 형태와 질서를 유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⑦언약관계 속에 사는 자들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살며, 현재의 삶을 살아가며, 미래를 기대하는 시간적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언약관계의 요소들은 가족관계에서 4중의 연속적인 단계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언약, 은혜, 능력부여, 그리고 친밀의 과정으로 이것은 직선적인 단계라기 보다는 서로 중복되며, 하나 안에 다른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성숙한 언약 관계로 발전한다. 이제 이 4가지 과정을 차례로 살펴보자. ⑴ 언약(Covenant) -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모델을 통하여 계시한다. 하나님은 요나와 언약을 맺으시고(창6:18, 22,9:9-10),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창15:18, 17:1-7),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다(출34장, 신5장등). 신약성경의 탕자와 사랑의 아버지 비유(눅15:11-32), 요한일서 4:10-19등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언약관계의 특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모든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에서 무조건적이요, 일방적으로 시작된다. ② 하나님의 언약은 상대자(아브라함, 이스라엘등)에게 적극적인 응답을 요구하지만 그 상대자가 응답이 없을 때에라도 자기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지키시는 영속적인 언약이다. ③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언약의 복(언약의 결과)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상대자가 그 언약을 지키는 쌍방적인 언약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언약 관계는 성숙해진다. ④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의 당사자 뿐 아니라 그 가족과 후손까지 포함시킨다(창12장, 15장, 17장등) 이러한 언약 관계는 모든 가족 관계의 기본모델을 제시한다. 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자녀는 부모와 무조건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자녀와 부모는 인간적인 타협이나 조건에 의하여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산을 통하여 자녀는 무조건적으로 자기 부모와 관계를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시는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자의 선택은 조건에 의하여 좌우될 수 있지만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의 선언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하는 절대적인 부부관계의 성립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모든 가족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에서 시작한다. ② 부모와 자녀의 가족관계나 부부간의 관계는 죽음이 그 관계를 갈라놓을 때까지 영속되는 관계이다. ③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부부관계가 진실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흐르는 관계가 되려고 한다면 쌍방간에 언약(충실성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 ④ 가족관계의 복은 후대에 까지 이른다. 이처럼 언약은 가족관계의 출발이요, 그 언약을 쌍방이 성실하게 지키는 성숙한 언약관계의 달성은 행복한 부부와 가정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⑵ 은혜(Grace) - 언약관계의 유지와 성숙을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은혜 관계가 필수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약을 배반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유지에 필수적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저주하셨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약 성경의 탕자와 사랑의 아버지 비유(눅15:12-32)는 은혜관계의 핵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탕자는 언약을 배반한 아들이다. 그가 다시한번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용서는 결정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행위를 용서의 은혜라고 믿는다. 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영접하고 용서한 것은 부모와 자녀라는 기본적인 언약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② 아버지는 배반한 아들을 용납하고 용서하여 자기의 아들로 다시 받아들인다. ③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씻어내고 새로운 옷, 신, 신발, 관계(반지)등을 부여한다. 즉 아버지의 용서가 아들과 아버지의 언약관계를 회복시킨다. ④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하고(반지의 의미) 새로운 규범에 따라 살도록 한다. 이러한 탕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보여주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의 십자가등은 은혜의 중심으로, 언약을 버리고 떠나간 인간을 용서하고 받아 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새로운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살게 하시는 결정적인 행위이다. 바로 이것은 가족관계의 실천 모델로서 가정은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납하고 회복시키고 새 삶을 살게 하는 은혜관계라고 할 것이다. ⑶ 능력부여(Empowering) - 능력부여라는 말은 관계 가운데서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능력부여는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힘이 없는 자에게 부여하여, 힘이 없는 자가 새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는 상대방을 지배하고 상대방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촉진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능력부여의 구체적인 모델이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요10:10)하려고 오신 분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요7:28)된다. 예수님은 죄인, 병자, 불구자, 귀신들린자, 주린자, 약한자등이 새 힘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 분은 섬기는 분이요, 생명을 버리는 분이다. 그러한 행위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 행위이다. 곧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더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넘치는 삶을 살게 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을 완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능력부여를 받는 자들이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성숙한 삶을 포함한다. 바로 예수님의 능력부여는 자녀교육과 부부관계에 중요한 모델이 된다. 부모는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은 자녀들의 가능성과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녀의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훈련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완성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능력부여의 과정에서 성숙되어간다. 예수님의 능력부여 모델을 구체적으로 따른 가정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삶의 열매가 열린다. ⑷ 친밀(Intimacy) - 하나님은 돌보시는(Caring for)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완전한 존재로 회복시키고자 원하신다. 우리가 성결하시를 원하며, 행복과 건강과 충만을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들으시며, 공감하며, 우리 가운데 내려오셔서 우리를 돌보신다(출3;1-11). 【성육신과 가정】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기를 노출시키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교제를 나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시고 사랑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우리의 옆에 서시며,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곧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들으시며, 우리를 공감하시며,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는 친말관계의 절정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친밀한 가정의 모델을 제시하며, 어떻게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는가를 보이신다. 이상에서 언급한 언약, 은혜, 능력부여, 그리고 친밀은 ①기독교 가정의 삶의 모델을 제시하며, ② 기독교인의 삶의 근본윤리가 어떠함을 제시하며, ③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독교 가정에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가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시며 가르쳐 주신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능력을 주시며, 기독교인의 가정을 복된 가정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언약의 삶, 은혜의 실천, 능력부여의 봉사, 그리고 친밀한 교제등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삶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힘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의 가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너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며, 모든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로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경의 모델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따라 가정회복과 평화의 교역을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가정사역 - Family Ministry.
가정 사역은 무엇인가? 이 말은 물론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가정사역이라는 말은 흔하지 않은 말로서, 이는 교회가 가정목회에 초점을 모아 병들어 가는 가정을 치유하고 또 예방하고 이미 깨어진 가정의 상처 받고 버림받아 고독한 자들이 된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가정치유사역 (Fam:ly Heaeing Min:stry)이라고 한다. 이말을 제일먼저 사용한 사람이 챨스 M. 쉘이다. Charles M. Sell박사는 미국 목회자들의 경우를 예를 들어 교회가 가정 사역을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문제에 빠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즉 자신들의 병든 가정을 거론해야 하는 고통 때문에... 문제에 개입하기를 싫어한다."고 했다. 이 말은 의외로 많은 목회자들이 가정 내에서의 생할에 자신감이 없고 또한 문제점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미국내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가정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성구(마6:33, 마22:30, 눅14:26, 막3:33,-35, 고전7:31,32)들이 있어서 오해의 소지도 있으나 결혼과 가정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성구(요2:12, 마25:2, 엡5:,딤전 4:1-5)들이 있음을 주시해야한다. 현대 교회가 가정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사역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가정 사역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며, (Family Ministry is Spiritual and moral Ministry)가정 사역 자체가 전도(Evavgelism)요 제자 훈련(Discipling)이요. 영적진리(Spiritual truth)란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을 적용(Biblical Application)하기 때문이다. 가정 사역은 곧 교회 성장 사역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 분담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인으로 살고 있고 가정들이 출생부터 사망까지 우리를 만들어 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최선의 시대와 최악의 시대를 이루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어떤 단체도 가정만큼 우리를 서로에게 연결시켜주지 못하며 어떤 것도 그만한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가정 사역에 절대적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왜 이러한 가정의 파괴가 쉽게 일어나고 자주 일어나는 가? 그것은 현대사회가 고도로 산업화 전문화 되면서 핵가족 중심과 개인주의, 그리고 물질주의로 인간 비 인간화 등을 들 수있다. 또한 가족에 대한 새로운 사회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앞으로는 더욱 높은 비율로 이혼이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되고 이는 목회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베리쏘온의 글에 따르면 상담자중 81%가 종교인이며 그중 41%가 기독교인이다. 이 상담 내용중 51%는 부부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또한 부부사이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의 60%가 결혼에 불만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최고의 이유가 대화의 결핍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경속에서 기독교 가정 특히 목회자 가정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예방적 차원에서 해결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가정의 기독교 역사적 근거】
(1)초대교회의 가정 - 에디스 쉐퍼(Edith Shaeffer)는 그의 저서 "What is Family?"에서 "가정은 생명체요 올바른 행위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예술로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들의 모임이다"고 말했다. 겐 게츠는 그의 저서 '가정생활 세미나'에서 '신약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가정은 거의 교회와 흡사 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개개인의 가정은 가정이 생성되는 그날부터 지상교회의 지체였다."고 했다. 초대 교회와 그 당시 크리스챤 가정들의 형태는 교회가 가정 같았고 가정이 교회 같은 모습이었음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전 16 :15, 롬16 :3-5; 고전16 :19 골4 : 15)그래서 겐 게츠는 "교회는 가정을 감싸고 있는 우산과 같은 개념이 있고 가정은 교회의 축소형이다.고 힘있게 강조했다.
(2)중세와 근세 - S Hiltner는 그의 'Preface to Pastoral Theology'에서 개신교에 신학이 정립된 것은 19세기 때부터이다. 고 했다. 최초의 목회신학의 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Bu-Cer로서 그들 종교개혁자들은 목회신학의 관심을 영혼치료와 인격회복에 두었다. 가정사역의 문제에대한 관심은 이보다 훨쒼 뒤인 것을 알 수있다. 기독교초기(A.D.180년)에는 환란과 핍박이 극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단위는 교회중심이었다기 보다 가정중심이었음을 알 수있다. 빌립보성의 자주장사 루디아처럼 먼저 여자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그다음 온 가정이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되는 경우가 흔하였다. 사도시대에서 믿음의 가정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시련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가족들이 물건을 하나님께 바치고 땅을 팔아 바치는 은혜 충만한 생활이 있었으나, 그 반면에 박해가 겹쳐와서 가정에 대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가족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의 발전 역사에 잃어버린 영혼 구원이 항상 있었던 것과 같이 가정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다. 믿음의 가정에게 박해가 심해졌을 때 믿음이 부족한 가족들은 교회를 떠나게 됨으로 가정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AD 50-200). A.D.200-306년에는 Dioclection황제의 박해속에 견디다 못해 이탈한 사람들을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연결 화해시키는(Reconciling)기능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가정의 문제들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기독교문화시대가 도래한다. Constantinusghkdwp의 기독교 공인 후 비잔틴 문화의 개화기(동방기독교시대)에는 기독교문화예술이 번성함과 동시에 기독교 가정의례들이 새롭게 제정되는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예식이 카톨릭의 7성례 가운데 하나가 되는등의 비정상적인 교리들이 제정되기도 하는 문제도 있었다. 중세기(AD 500-1500)에는 로마 카톨릭의 세력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기독교 가정이 빛을 보지도 못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은둔 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톨릭은 항상 교황과 분쟁을 일으키고 교권싸움에 몰두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려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으며 오직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카톨릭은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크게 벗어난 생활을 했으며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말살시키려 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독교 가정은 영적인 생활에 큰 수난 시대를 맞았다. 종교 개혁 시대부터 근대(AD 1500-1900)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의 자유를 되찾아서 활기찬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대형전도 집회가 열렸고 성결운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기도 했으며 개심자들이 많아 저서 기독교 발전에 절정기를 이루었다. 또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가정의 믿지 않는 많은 가족들이 구원을 얻었다. 근세에 와서는 성경공부와 개인전도 훈련 프로그램들이 교회에서 개발되었고 전도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많아졌다. 교회에서 총동원 주일을 계획하고 가족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전도함으로 짝 믿음 가정의 가족들이 믿음의 가족이 되어 합심 가정이 많아졌다. 그러나 짝믿음 가정의 가족을 구원시키려는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은 아직도 부족하다.
(3)현대의 가정이해 - 가정 사역의 구체적인 목적은 자녀와 부모와의 연구가 처음으로 시도 된 것은 1910년대 정신분석학에 의해 체계화되기 시작했고 사이몬드(D. Symodds. 1930)에 의해 기초 이론이 형성되었고 우리 나라는 1960년대부터 가족 관계, 부모와 자녀 문제를 다루는 연구가 시작된 것으로 전해 온다. 그 동안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의 연구를 분석해 보면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갈등을 가정 환경과 생활 양상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사회 복지가들은 사회 복지적 측면에서, 심리학에서는 가정 구성의 인격, 욕구의 부조화를, 문화인류학에서는 전통적 가정과의 마찰에서 오는 갈등을 연구해 왔으나 오늘의 가정 문제는 더욱 심각해 가고 있다. Charles M. Sell은 그의 책에서 가정문제에 경종을 울려준 사람으로 1937년 레지나 와이맨(Regina Wieman)을 꼽는다. 그는 이 책에서 "가정은 지금 길고도 위험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것이 언제 시작 되었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며, 그 결과가 어떠할 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Charles M. Sell은 이 말들을 종합하지 않아도 가족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해준다고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 문제의 확대라고 생각한다. 또 가정의 모든 문제는 교회가 마땅히 품고 치유해야 할 곧 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정 사역은 가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창(Mission Home)이 되도록 예방 관리 치유의 사역이다. 그 사역의 중심은 교회의 본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가정이 복음으로 회복 될 때만 가정이 가정다울 수 있고 이런 가정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의 갱신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정들을 둘러보면 모든 문화와 양상들은 무섭게 가정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부식시켜 안정을 잃고 위기 상황 속에 고통의 정서를 느끼며 무기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적 기관으로서 교회의 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치유되고 회복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가정에 대한 이해이다.
2)가정의 성서적 근거 -
(1) 구약에서의 가정 - Charles M. Sell은 많은 교인들이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의 가정 생활을 희생시키는 것을 마음 아파했고 또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이 교인들의 가정을 풍성하게 사역해 주지 못하는 것을 지적했다. 찰스 셀은 말한다. "가정 사역은 교회가 가정을 뒷받침해 줘야 한다는 입장에서 가정사역에 관한 책을 쓰게 됐다"고, 하나님께서는 가정사역을 활용하셔서 교회를 돕고, 나아가서는 가정들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 대로의 삶을 누리도록 하나님께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가정 사역" 책을 쓴 찰스 M. 셀은 가정사역의 기초를 하나님이 창조원리 가운데 하나로 주신 결혼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결혼의 성격과 근거에서 말했다. 그럼으로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해는 성경 그리고 구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찰스 M. 셀은 결혼의 성격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볼 때, 결혼은 하나님의 의도 그리고 그 성격은 철저히 일부 일처제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는 친밀한 관계로서 개인적인 헌신과 사회적 헌신과 하나님께서 승인한 헌신이 무엇보다 기초되어야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가족의 의미는 넓은 범위의 공동체를 포함한다. 결혼을 해서 결속된 친 가족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그들 집에 함께 거하는 노예, 첩, 고용인, 외국인까지 가족 개념속에 포함시켰다. 은준관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실현하는 도구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생활화되고 종교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또한 히브리 민족 공동체의 가정들은 가정을 통해 민족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도우신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훈련을 시키는 현장으로 삼았다. 즉 "예배적 기구"로서의 가정이 교육이나 친교보다 우선했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구약에서의 결혼의 목적과 십계명의 제5계명은 사회질서와 윤리 개념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가정은 넓은 가정인 사회와 문화를 책임지는 사명적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근삼은 "구약의 하나님은 최고의 생활자 또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도덕, 진리, 과학, 예술등 모든 생활권에 있어서 자존하시는 지배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전생활 영역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예배적기능, 교육적기능, 안위적기능, 보존적기능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정"이라는 용어에는 자연적, 심리적, 사회적인 용어의 뜻을 초월해서 그 가정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참 능력은 인간들의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힘이었다. 이스라엘의 가장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사랑하신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들 또한 그 사랑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지속적인 교육 훈련이 대대손손 지켜지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들을 재인식시키며 교육시켰던 것이다. 성경 전체의 흐름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신명기서의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의 사랑, 능력 약속을 자손들에게 이해시키는 반복적 명령이다. 히브리 가정의 가장은 특별히 자녀들의 교사로서 영적 복지의 수호자로서 그 사명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2) 예수의 가정관 - 찰스 M. 셀은 가정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눅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찾는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가정에 대한 이해는 이 비유에서 볼 때 아주 깊은 친밀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가정은 사랑안에서 친밀감을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가정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으나 이혼에 대해서는 깊이 말씀하셨고, 성적 윤리에 대해서는 구약에서의 계명보다 더 깊이 말씀하셨다. 예수는 모세 율법에 의한 이혼 방법과 이혼 증서의 허용을 반대하는 입장을 신명기24장 1-4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셨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성경 인용과 위선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 심도 있게 책망을 하시고 무리들에게 당신의 깊은 진리를 전파했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 중에는 남편의 판단과 그가 원하는 대로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어버렸다. 어떤 랍비는 종교적인 이유( 스10 :3,44 )나 아이가 없다는 이유( 말2 : 15 )로 이혼을 허용하였다. 또 어떤 랍비는 아내가 요리는 못한다는 이유로만도 이혼을 당할 정도로 율법은 타락한 인간들의 수단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이혼을 제기 하기도 하고 이혼 이유를 설명도 않고 일방적 이혼이 자행되자 이스라엘 랍비들중에서 이혼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혼의 질문을 받으셨을 때( 막10 :2-12, 마19 : 3-9 ) "결혼은 일부일처제가 돼야하고 일생을 나눔이 없는 결합( Cleaving )속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예수는 여기서도 모세 율법을 인용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지적하시고 창조주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 이뤄지고 제정된 결혼은 인간이 나눌 수 없다고 반박하시고 유대교적 실천의 모순성, 즉 모세율법을 악용하는 타락의 근성에 대해 무섭게 반박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 거룩한 결혼과 가정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해서 비판하셨다. 또 예수 당시 남성들은 간음죄에 대해서 별로 자책이 없었고 유별나게 여성들이 간음죄를 지은 것에는 민감했던 것이다. 이것을 예수께서 지적, 남녀 구별 없이 똑같은 죄를 지적하셨다.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최초에 창조하신 가정창조에 연결시켜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가정, 성경적 결혼의 기초이고 기독교적 결혼의 기초라고 할수 있다. Georgia Harkness는 그의 저서 [Christian Ethics] 에서 "가정은 거룩한 관계이고 결혼은 신성한 인격적 결합이어서 가볍게 파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혼 생활에는 기쁨이 있는 동시에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했다. 다만 예수께서는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성행위로인한 더 큰 죄악이 있을 때에는 이를 제하기 위하여 이혼이 불가피 하게 허락될 수 있으나 유대인들처럼 정욕과 허영을 채우기 위해 타락의 행위로 이혼을 악용할 수 없음을 밝히시면서 창세기 1:27, 2:24을 근거로 하여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예수는 가정이 일종의 생활 방편이나 사회적 관계나 개인적인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님을 특별히 강조하신 것이다. 결혼이 너무 쉽게 그리고 이기적으로 행해지고 너무 속히 깨어지는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 예수의 가정관은 영원히 인간 모두에게 깊이 뿌리 박혀야 할 진리이기도 하다.
(3) 바울의 가정관 - 찰스 M. 셀은 바울서신서에 나타나는 다양한 비유와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근거로 들면서 가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특히 바울이 가정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 가정의 질서와 질서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많은 서신서들 가운데 가정 윤리에 대하여 많이 언급했다. 즉 가정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거룩한 공동체로서 가정을 가정되게 지키려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정의 질서 즉 결혼의 신성, 부모와 자녀 관계의 질서, 공동체 보존에 대해서 깊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없는 가정은 온전한 가정이 아니며, 비참한 가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 결혼의 순결을 강조했다. 하나님 없는 가정속에는 언제나 사탄이 틈탈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부도덕한 애정 관계는 가정을 파괴하고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 특히 고린도교회의 성적 타락에 대해서 강력히 지적했다.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뜻은 가정의 순결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 과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쫓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가정의 신성을 일깨워 주는 서신을 보냈다. 바울은 한 가정을 형성하는 부부 관계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밀접한 관계를 말했다. 이것은 사랑의 질서와 복종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즉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셔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희생적 사랑을 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다. 이것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만이 그리스도에게도 복종할 수 있음을 말했다. 아내의 순종은 남편의 우월이나 아내의 열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같이 남편이 가정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전8 : 11) 따라서 아내는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배움으로써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남편의 권위가 가정의 폭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 고 했다. 칼빈은 바울에 이 사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남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소유했다면 마땅히 그 의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바울은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메세지에서 주안에서 부모공경을 강조했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처럼 주종관계 즉 노사관계의 질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관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John Howell은 성경에 입각하여 "가정은 남자와 여자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됨에 그 기원이 있음을 말했고 Maston은 "기독교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했고, 아담스 (Jay E. Adams)는 "가정은 사회보다 먼저 제정되었고 국가보다 먼저 존재하였기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최초의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고 타락한 후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회복된 가정을 통하여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생명의 장이고 사명의 현장이다.
가정문제와 상담
【가정문제 상담을 위한 교회의 역할】결손가정의 원인은 잘못된 결혼관, 가정관, 자녀관 때문에 번번히 이루어지는 이혼, 재혼 등에 원인을 두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젊은이에 대한 결혼관, 가정관 등을 올바르게 가르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이혼이 증가일로에 있는 실정으로 교회에 속한 가정도 이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부부간의 위기란 결혼후 몇번정도 찾아온다. 실패, 질병, 실업, 간음, 등에서 계기가 될 수 있고, 자녀문제, 고부간의 갈등, 물질 문제가 계기가 되어 이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진실한 부부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제각기 생각과 행동이 다르게 공동체가 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부부의 공동체를 형성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만이 올바른 해결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부정이외의 이유로 이혼을 허락치 않고 있다. 부정이란 성의 공동체를 파괴해 버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상대가 부정을 범한 경우에도 그것을 용서하고 해결하는 것이 성경적이라 생각한다. 목회자는 결혼의 신성과 이혼이 금지된 성경적 교훈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야 하는 목회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부부갈 등을 해소하고, 가정붕괴의 가장 큰 문제인 이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가정목회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여 봉사해야 한다. 재혼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재혼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강하게 작용했으며, 근래에 와서도 이상주의적 경향을 갖는 사람들은 재혼을 부정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절대로 재혼을 금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재혼할 경우 중요한 문제는 당사자 보다도 자녀의 문제가 더 개인적,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가족계획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목회적 배려가 있어야한다. 교회가 적어도 신자 부부에게 그들이 가족계획을 하도록. 권고하면서 가정목회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런 일을 교회에서 가르쳐 사전에 가족게획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며 이것을 위해 도덕적 신념과 생의 의미에 대한 이해, 부모의 능력과 자녀의 책임적 행동, 결혼관계, 혼전 성교육, 피임, 육아 등을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상담과 더불어 교회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가족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부모 교육에 있어서도 "하비거스트는 청장년기의 문제를 부부공동생활 습득문제, 자녀들이 부모 되는 문제, 자녀 양육 문제, 가족 관리 문제, 직업, 시민의 책임, 사교집단을 찾는 문제 등을 지적하고 있다." 학습하는 부모들에게 그들의 실제적 관심사를 프로그램에 잘 반영하여 교회와 지역사회는 단기간의 문제중심의 과정반을 수시로 개설하고 관심 있는 부모들을 동원하여 교육훈련을 유도해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참고할 교육방법은 부모자신들이 사전계획과 프로그램 작성에 참여하여 학습동기를 유발시키며 전달교육이 아닌 학습자 자신의 참여와 학습성과를 얻도록 하여야 한다. 부부 프로그램의 작성은 교회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그들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작성하여 실행토록 가정 목회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가정은 부모를 중심으로 자녀와의 사랑으로 결속하여 신앙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부모의 역할은 크다.
방법적 제안
a.성경적 훈련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에서 알 수 있듯이 부모는 하나님으로 자녀를 낳도록 위임을 받았으며 일정기간동안 교육을 시키고 양육할 책임을 맡았으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길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 가정이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교육의 내용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교육의 방법이 함께 숙고되어져야 한다. 교육의 내용은 좋은 교육방법을 통해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자녀를 성경적으로 교육한다 할지라도 그 방법에 있어서 미비하거나 옳지 못할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특히 결손가정의 자녀들은 가정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에 시달릴 우려가 있으므로 성경적 훈련을 통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미 결손가정은 자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 사실을 직관하고 그 사실을 무리 없이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인지했을 때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 내에서의 성경적 훈련은 대화를 통한 서로간의 이해가 먼저 우선해야 할 것이다. 부쉬넬은 부모와 자녀사이에 이루어지는 좋은 대화는 설교보다 좋은 방법임을 시사했다. 가정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공동체 내에서의 대화는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며 상호통행적이어야 하고 드디어 하나님과의 대화로 승화시켜 여기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잇도록 한다. Ginotte는 대화의 새로운 방법에 대하여 그 기본적 요소는 공경과 기술이며 첫째는 부모자신의 자존심과 자녀의 자존심을 함께 존중해야 할것과, 둘째는 이해라고 하였다. 성경은 행복의 가정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주님을 알고 사람이 지배하는 가정이다. 하나님의 가정에 축복하신 것을 인간들은 스스로 성경을 떠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가정의 자녀들을 내몰고 있고 무엇보다 올바른 가정교육과 성경에 기초한 훈련이 필요하다.
b. 동기부여 - 가정에서 기독교교육이란 어렵고도 힘드는 일이다. 더욱더 결손 가정 내에서의 기독교교육이란 주어진 장애물들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은 개인들이나 그룹들을 기독교적 삶의 스타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신앙 공동체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다. 이러한 계속되는 노력속에서 결손가정의 자녀들은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점점더 나은 삶을 위해 적응하며 훈련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전환, 즉 동기부여(動機賦與)를 해야 한다. 결손가정 자녀는 자신의 가정에서 주어진 위치의 중요성을 깨달아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인식해야만 한다.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한마디의 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녀와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자녀가 양친에게 바치는 순종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를 통하여 개선하고 증가된다. 사도요한은 "어찌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권면을 통하여 부모형제와의 관계가 하나님 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의미를 밝히시고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을 가정에게 부여하신 큰 축복이라 볼 수 있다. 자녀는 이러한 가정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여 부모와의 갈등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역동적 체계로 자신을 전환해야 한다. 따라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대한 순종의 기반 위에 올바른 가정을 이룩하기 위한 끊임없는 신앙훈련과 자기성찰, 계속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c.자녀의 본보기 - 부모는 자녀가 그리스도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훈련하고 훈계함으로서 자녀들이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의식 또는 무의식의 과정을 통해서 타인을 모방하려는 것은 개인의 태도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과정중의 하나이다. 부모의 모범은 자녀의 삶에 중요한 힘이 된다. 부모의 삶은 그 자체가 곧 자녀들의 환경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손가정의 자녀들은 이미 결손 된 환경이라는 장애물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계속적인 훈련속에서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가정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있도록 삶의 확고한 모델로서 자녀의 빈축을 받지 않는 책임질줄 아는 부모, 자녀에 대한 태도가 일관성 있는 부모로서의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모범이 된다는 것은 완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완전한 본보기가 되려는 노력으로 비현실적인 자기 모습을 만들어 냄으로서 인간적인 갈등이나 생활에서 오는 충돌을 감출지도 모른다. 그런 노력은 비현실적이고 위선적인 본보기를 연출시켜 자녀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심지어 배척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성숙한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완벽한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백과 겸손의 실제적이고 생동적인 모범이 됨에 따라 자녀들은 불완전한 가정 내에서도 서로 존경하고 하나님과 용서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 기독교교육에 대한 책임은 부모들에게로 귀착된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결손 가정 역시 하나님이 주신 가정이라는 막중한 하나님의 명령수행을 하는 장소로 기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d. 가정예배 - 가정예배는 가족의 신앙적인 교류와 성장을 위하여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가정이 진정한 행복과 안식의 장소요,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때 이러한 것은 가정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가정예배를 통해서 가정은 서로 협동하게 되고 확고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특히 가정예배는 가족의 건강과 영혼을 관리하는데 필요하다. 즉 이러한 경건 생활을 통해서 부모는 그들 자신이 먼저 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정에서 말씀의 순종 훈련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자란 자녀는 비록 결손가정의 자녀라 할지라도 일반가정 못지 않게 가정내의 화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에서 가장 유력한 권위는 영적인 권위뿐이다. 그것은 외적 강제력을 가장 적게 필요로 한다. 물론 부모의 권위의 배후에는 항상 외적 강제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은 부모가 힘이나, 경제력에 근거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적 태도를 본받아 부모가 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을 자기도 섬기겠다는 생각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통한 자녀교육은 특히 중요하다. 결손 가정 자녀가 결손상태에서 자라는 것은 구조적 결손이라 할지라도 가정에서의 경건생활은 영적인 결손상태를 막아준다.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메마를 수 있는 결손가정의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적 정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가정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서 자칫 메마르기 쉬운 결손 가정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가정내에 신성한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e. 동역자의 자세 - 부모의 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 있는 자리이다. 부모의 위치는 먼저 가정에배를 주관하고 주님의 말씀을 익히 알아 주님의 선하신 뜻에 복종하도록 정서를 가르쳐서 자녀들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순응해 나가도록 해야하고, 특히 결손 자녀들은 그들을 거룩한 신앙인이 되도록 훈련시키며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인격형성을 도와주는 조력자, 동역자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자녀들의 어려운 문제에 이해와 용납과 승인, 존경 그리고 사랑으로 그들의 내면적 고통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또 부모의 권위를 가지고 훈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도록 지도해야한다.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자녀들을 사랑으로 훈련시키고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결손가정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가족 모두가 서로를 위해 사역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부모, 자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해야만 할 것이다.
【참고문헌】김득렬, "결혼과 가족관계" 서울: 교문사 1980. 권이종, "사회교육과 청소년지도" 서울: 배영사, 1984. 김재은, "발달심리" 서울: 창지사,1984. 김영진, "신앙생활백과" 서울: 성서교재사간행사.1986. 김용섭. 여명의 광장, 서울: 복음과 지성사, 1983. "동아원색세게 대백과사전" 서울:동아출판사, 1982. 박덕규 "청소년의 성격형성과 공격성" 서울: 배영사 1983. 신광준, "현대산업사회와 가정예배의 중요성" 새가정 1985. 신현준, "자녀교육 이렇게하세요" 복있는 사람 1989. 유영주, "가족 관계학" 서울: 교문사 1983. 오인탁외 "기독교교육론" 서울: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86.
가정상담 - 家庭相談
가정문제의 형태와 원인, 이희승씨의 국어대사전에 보면 위기의 정의를 "위험한 순간, 위급한 시기" 라고 정의하고 있다. 오성춘은 위기를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개인의 내적 반응, 위험에 대한 대응 능력의 일시적 상실,즉 정서장애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은연 중의 확신의 상실을 포함 한다고 말하였다. 또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개인의 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위기라는 영어단어"crisis"는 헬라어"krisis",또는 "krine in"에서 온 것인데, 본래 이 단어는 인간경험 가운데서 전환점(turning point)이나,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하는 "분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이센은 하나의 위기란 위험스러운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 정서적 성숙의 기회도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위기에 대처하는 데에는 고조된 정서적, 지적 과정들이 연관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헤데만과 카플란은 위기를 질병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으로 보았다. 따라서 하워드. 스톤(Howard W.Stone)은 위기는 사람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그의 인격이 성숙해 지든지 아니면 비참하게 반응하여 심지어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캐프란은 위기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단계적 위기와 우발적 위기이다. 단계적 위기는 인간의 성장과정 속에서 연속적으로 위기를 맞는데,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는 출생, 용변 연습, 취학 청년기, 직업선택, 객지에서의 생활, 졸업, 약혼, 결혼, 임신, 부모가 되는 일, 중년기의 위기, 부모 喪 , 갱년기, 은퇴, 배우자의 죽음, 친구들의 죽음,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죽음이다. 우발적 위기는 그 사람의 독특한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필수적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또는 뜻밖에 상실 당했을 때 생기게 된다. 실업, 지지자의 상실, 또는 지위의 상실, 감당 못할 사건의 발생, 질병 또는 수술, 자녀의 죽음, 부부간의 부정과 이혼, 정신질환이나 알콜중독, 신체의 결함, 혼외 임신, 안전한 곳으로부터의 이동, 천재지변이나 또는 전쟁, 불경기와 같은 사회의 참화 등이다. 이런 사건은 정서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조성하며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 그 결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위기는 단순한 사태의 돌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기란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한 개인의 내적인 반응이며 위기를 촉발시키는 사건과는 다르다. 돌발 사태의 발생으로부터 위기상황에 이르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사태의 돌발 - 사태에 직면한 당사자의 사태에 대한 판단 - 사태에 대한 대비책과 대처방법의 강구 - 사태극복의 실패 - 위기발생. 첫째 단계는 자극 또는 촉발 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죽음이나 실직 같은 외적인 상황을 말하며 전문이론가들은 이것을 정서적인 위험 사건이라고 말한다. 둘째 단계는 그 상황에 대한 개인의 독특한 평가이다. 이것은 촉발적 사건에 대한 생각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사건을 중대한 위협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평가는 평가하는 개인의 인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중요하게 평가되었나에 따라 위기로 발전될지 여부가 상당한 정도로 결정된다. 세째 단계는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하여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대응책들이 경주된다(예를 들면 대응책들에는 친구들, 친척들, 목사 그리고 의사와 같은 눈에 보이는 방책과 새로운 상황과 여러 가지 문제들과 감정에 직면하는 내면적인 방책이 있다. 이 대응책의 적절성에 따라 한 사건이 위기로 경험되는 정도가 달라진다. 대응책은 상황에 대한(주관적)평가와 함께 위기 발생 과정의 두 가지 가변 요소이다. 마지막 네째 단계에는 개인은 외적 위협에 내면적으로 대응하면서 위기자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위기발생에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이 평가과정(인식작용)에서 촉발적 사건을 심각한 위협으로 평가하는데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이 그 위협적인 상황을 쉽게 해결해 두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예리한 위기가 대부분의 이론가들과 일선 상담자들이 동의하고있는 것처럼,대개 4 - 6주 동안 계속된다. 어떤 위기의 후유증은, 특히 슬픔의 경우 수 년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힐트너(Seward Hiltner)는 "교역자의 관심에서 위기를 보면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의 중대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구스타프슨은(James M.Gustafson)은 니버(H.Richard Niebuhr) 의 " The Responsible Self"의 서문을 쓰면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 임재하여 그의 신앙의 불을 일으키며 그의 삶을 새롭게 하며, 비극을 뛰어 넘어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개인이나 목회자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위기 가운데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적인 지혜를 따라서 위기상황의 역동성을 옳게 이해 할 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은 곧 계시의 순간임을 믿는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으로 위기를 당한 사람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 위기에 처한 당사자와 그를 돕는 공동체가 어떠한 대처를 했는가에 따라 새로운 삶의 도약이 이루어 질 수도 있고 파괴적인 삶으로 빠질 수도 있는 결단의 시기요, 긴급을 요하는 시기요, 궁극적인 관심을 제기하는 시기가 곧 위기 상황인 것이다. 위기는 인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목회자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은 위기에 처할 때 당사자가 어떠한 영적인 차원을 갖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순간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새로운 영적인 성장이 가능하게 되는 시기라고 하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를 통하여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은 단순히 인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인간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보게 되는 계시의 순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한 남자와 여자는 "인류의 생존 사 만큼이나 긴 수명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의 기초로서 존속하여 원초적 제도(Primary Institution)" 즉,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가정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단위이다.(biological unit) 가정은 보다 넓은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그 적응능력을 훈련시켜야 하는 사회화 단위( unit for sociologization)이며,또 때로는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고 상호 작용하는 집단 인격의 단위(unit of collective personality)를 이루고 있다. 가정의 의미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궁극적으로 그들 사이의 사랑도 생산의 목적도 아니라, 가정을 통하여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안에 동참하는데서 그 의미를 찾는다. 부르너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가정의 존재 구조를 찾으며,그 존재구조를 신앙으로 인식하는 한, 가족인들은 그 속에서 맺어지는 신비적 연합의 의미와 경험을 가진다고 말했다.
【가정문제 상담 원리】
상담자와 내담자는 각자 나름대로의 상담에 대한 기대와 목표를 가지고 가족위기 상담에 임하여야 한다. 목표의 선정은 상담의 성공과 실패에 관련되어 지기 때문이다. 가족위기 상담에서의 목표는 종국적으로 성서적 가족관에 연결되는 목표이어야 한다. 위기 상담자인 스톤(Howard W.Stone)에 의하면 위기란 외부적인 위험성에 대한 한 개인의 내적 반응이므로 그 상담의 목표는 "개인으로 하여금 우발적인 위기에 잘 대처하도록 돕는 것이다" 라 하였다. 이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기는 위기를 당하는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둘째, 따라서 상담의 목표 및 과정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를 고려할 수 있다. 셋째, 상담자는 위기를 당하는 개인의 결정적인 순간을 알 수 없으므로 위기 상담 자는 예방 적인 상담이 효과적일 것이다. 넷째, 정서적인 능력과 적응 적인 행동은 개인 성장에서 보다 집단 상담에서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오성춘씨는 위기상담에서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들을 표현하다. 만약 교역자가 그들을 도와서 그 지배적인 감정들을 확인해 주고 또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목회자가 위기를 겪고 있는 어떤 개인이나 가정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 개입할 때 두 가지 목표를 지니게 되는데, 첫째는 위기는 발달이 된 사건의 충격을 가하는 한 감소시키는 것이며, 둘째는 그 사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 스스로 힘을 돋우게 하고, 미래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A.결혼 위기 상담(하워드 크라인벨) - 개인과 사회의 위기가 점점 더해 가는 오늘날 소용돌이치는 혼란의 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을 보살피고 상담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기회를 목회자는 가지고 있다. 전승 적으로 내려온 목회자의 위치와 역활 덕택으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위기 상담자가 된 것이다. 글래써는 주장하기를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인데 이러한 욕망이 좌절될 때 사람들은 위기와 상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주 영적인 배고픔, 생의 공허감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인간관계의 빈곤에 직면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 스스로 관계 개선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데 목회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또한 위기 상담에서 의미를 일깨워 주고 소망을 주는 역활을 하며, 그 중 중요한 기능은 영성적인 성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이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변치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거기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위로를 통하여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고후1:4) 위기는 사람들을 삶의 공허감이나 관계의 빈약함에 직면시키고 대결시키는데 목사는 위기에 처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들과의 관계안에서 영위되는 생의 본질적인 의미로 재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정서의 파괴를 초래하고 미래의 실패와 인격적 질환을 증가시키는 위기에 대한 비 건설적인 반응은 1.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 2. 문제로 부터의 회피(예 : 알콜의 힘을 빌어서). 3. 도움을 구하거나 받는 것에 대한 거부. 4.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무능력. 5. 위기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대한 실패. 6. 다른 해결수단 모색에의 실패. 7. 위기의 원인이나 해결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킴. 8. 친구 또는 가족과의 관계 두절. 상담자는 피 상담자가 이러한 좋지 못한 반응들을 나타내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해서 그로 하여금 부정적 반응을 버리고 다음과 같은 건전한 대처수단을 강구하도록 돕는다. 1.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2. 문제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3. 분노, 불안, 죄의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서도 표현 하고, 일할 수 있게 한다. 4.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도록 한다. 5. 여러 가지 해결 수단을 모색하도록 한다. 6. 그 상황에서 변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리하게 할 수 있게 한다. 7. 변화 불가능한 것은 사실 그대로 용납하게 한다. 8. 자신의 이미지에 있어서 허세가 있고 부담스러운 면은 포기하도록 한다. 9. 친척, 친구 또는 전문가와의 접촉을 통해 문을 열게한다. 10. 문제를 건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더디더라도 단계를 밟아야한다. 성장상담은 상담, 치료, 교육, 삶의 고양을 통해 성장을 촉진시키는 개방적이고 발전적인 접근 방법이다. 성장 중심적인 방향을 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미래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클라인벨은 지구상의 여러 해방 운동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모든 인간이 그들의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영적 잠재력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최선의 가능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요10:10) 그리스도교적 삶의 목적은 인간을 해방시켜 삶을 풍부하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상담의 일반적인 목표는 사람의 관계, 행위, 기능 등에 있어서 어떤 정도의 건설적 변화에 있다. 상담의 목표는 즉 보다 나은 상호간의 만족한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요10:10)하기 위한 것이라고 요한 복음에 가정 서정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영에 중심을 둔 생명력이라는 내적인 권위를 발견하고 개발 할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난다. 예수의 놀라운 생명력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것은 또 치유의 능력이 있는 성장촉진 에너지로 경험할 수 있다. 예수는 특별히 성장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예수는 예민한 감각과 깊은 사랑으로 만났기 때문에 어떤 유형의 사람들 -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들, 창기들까지도 포함해서 - 과 맺은 관계도 그들과 그의 계속적인 성장을 촉진시키는 나와 너의 만남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하고, 성장 지향적인 방식으로 응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해 주었기 때문에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예수의 희망과 기대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풍부한 잠재력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장상담은 희망지향 적인 상담이다. 성장상담방법은 실제에 근거한 희망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다루도록 사람들을 돕는다. 성장결혼상담은 사람들의 문제와 갈등을 전적으로 극복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결혼부부상담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지만 부부들의 지난날의 성공-그러나 억압되어 있는-들, 그들의 현존하는 힘, 그리고 자신들의 유산을 보다 많이 사용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희망적이고 생산적인 인식을 갖도록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성장상담은 상담, 치료, 교육 삶의 고양을 통해 성장을 촉진시키는 개방적이고 발전적인 접근방법이다. 성장중심 적인 방향을 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미래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우리가 개방적이고 자신을 열고 남을 돌보고 모험을 감행하고 성장하는 그 만큼 남의 성장도 촉진시킬 수 있다. 성경상에 나타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인간을 의지하면 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전제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으신다. 오직 진리의 사랑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와 같이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목회상담 자는 온전한 인간인 예수를 바라봄으로 생명을 풍성케 하는 상담을 할 수 있다. 성장상담의 실제적인 원리로는 인간의 잠재력 개발이 있는데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성장의 능력, 감추어진 성장의 근원을 찾아내어 동기유발을 시키는 것이다. 성장상담은 각 단계에서 발생하는 위기들을 성장의 기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즉, 성장상담은 뜻밖의 위기 - 즉 질병, 사별 그리고 이혼 - 당한 사람들과의 자연스런 접촉을 할 수 있는 상담자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고무해준다. a. 계획적인 결혼 생활 방법(International Marriage Method) - 계획적인 결혼생활방법(International Marriage Method)을 줄여서 IMM이라 한다. 이것은 간단하며 부부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혼생활을 성장시킬 수 있는 4 단계 도구로 되어있다. 개인의 성장은 우리가 동일한 관계 속에서 두가지의 것 - 우리가 얻을 수 없는 확고한 사랑,그리고 정직한 개방성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성장공식은 아래와 같다. '돌봄 + 대면 = 성장!' 신약성서가 성장 공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안에서 진실을 말할 수"(엡 4:15) 있을 때 서로의 관계는 성장을 돕는다. 개개의 가족들은 만일 그들의 보다 더 넓은 인류 가족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한다면 건강하고 창조적이며 풍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IMM의 4 단계 - 1. 당신의 건강한 관계를 확인하고 굳건히 하기. 서로의 기본적인 욕구를 더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극적인 장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두명 중의 한명이 먼저 '나는 당신의 ... 을 좋아합니다.' 라는 문장을 완성하는데 가능한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나면 다른 한명이 역시 '나는 당신의 ... 을 좋아합니다.'라는 문장을 완성합니다. 이제는 이와 같이 한 일에 대하여 서로가 어떻게 느꼈는지 토론을 합니다. 토론중에 파트너가 말한 당신의 좋은 점을 기억할 수 있는대로 많이 카드에 적는다. 이 단계는 결혼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점과 자산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 2. 성장범위를 통일 시키기 - 만나지 못한 욕구들,서로에게 원하는 것들 - 여기에서는 '나는 당신으로 부터 ... 을 필요로 합니다.' 라는 문장을 완성하고,다른 이도 꼭같은 방법으로 완성한다. 이것은 자신의 욕구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토론을 합니다. 두 목록중에 상충되는 것은 C라고 적고, 서로의 욕구가 반대되지는 않으나 단순히 다른 것은 B라고 적습니다. 같은 것은 A입니다. 3. 변화를 위한 재 접촉 - 당신의 욕구를 더 많이 파악하기 위한 결정 - 이제는 부부가 목록에 적혀있는 것중 모두에게 중요하고 성취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성공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하다. 결혼 생활의 성장을 위한 목표를 A욕구에서 선택한 다음, 이것을 이룰수 있도록 언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세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분명하고 변화 가능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간략하게 그 요구 사항들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함께 참여하여 적는다. 그리고 계획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각자의 행동을 바꾸려고 했던 것들을 적어둡니다. 이렇게 하면 검토하고 행한 것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4. 행동하기 - 계획, 검토, 발전시키기, 그리고 진행과정을 추적하기 IMM의 마지막 단계는 계획을 발전시킴으로써 공동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서로를 격려해 주기도 하고, 계획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거나 강조할 것들을 말합니다. 결혼생활을 더욱 성숙하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을 계속 기록해야 합니다. IMM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후, 성숙한 욕구에 만족하였다면 다른 욕구들을 나누고 계획을 수립합니다. 적극적인 감정과 장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을 좋아합니다.'라는 단계를 규칙적으로 되풀이한다. IMM을 사용해 시작된 발전 단계는 '만일 당신이 나의 욕구들을 충적시켜주면 나도 당신의 욕구들을 채워줄 것이다.'라는 단순한 주고 받는식으로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랑과 신뢰가 커짐에 따라 사람의 욕구 속에서 상대방의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렇게 되면 자아실현과 결혼실현(풍요한 결혼 생활)사이에 있는 어떠한 갈등이라도 자아-타자 실현이 결국에는 진정한 자아실현이 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하워드 크라인벨,[부부성장상담]이종헌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p.23) B. 의미 요법을 통한 상담 (Victor E. Frankl) - 의미요법의 창시자인 Victor E. Frankl은 1905년 비엔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다. 성장하면서 신경학과 정신요법에 관심을 가지게된 프랭클은 20세 때에 프로이드와 교분을 갖게되었다. 2차 세계대전시 유태인이란 죄명으로 죽음의 수용소인 Auschwise와 Dachau등지에 수용되었고 수용소에서 그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은 학살되고 그 혼자 살아남았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프랭클은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통하여 얻은 체험을 근거로 하여 Logo Therapy(의미요법)이라른 학설을 창설하였다. 로고테라피의 초점은 셋이다. 그것은 인간실존의 세가지 근원 사실에 초점을 모으고 있는데 1.의미의 의지가 그 하나이며, 2.고통 중에서 의미가 그 하나이며, 3.의지의 자유이다. 여기서의 자유는 자기 자신의 세운 방식뿐 아니라 죽음의 양식까지도 결정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로고테라피는 1.의지의 자유 2.의미에의 자유 3.생명의 의미이다. 의지의 자유는 결정론 대 범 결정론의 문제를 포함한다. 권력에의 의지나 괘락에의 의지는 균형유지 성 원리라는 보다 넓은 개념이다. 이 로고테라피는 환자에게 절망을 승리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에, 낙관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에서 불가피한 고통과 같은 삶의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까지도, 인간이 자기의 곤경을 받아들이는 태도여하에 따라 인간적인 업적으로 바꿔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인간에게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심리요법이 묘사하고 있는 인간상의 완성에 공헌하고자 한다. 즉, 인간을 전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간을 순순한 인간적인 것, 즉 영적 차원을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공헌한다. 이것은 신경증이 있는 사람이 인생의 과업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데 그에게 이 과업을 의식하게 하고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도록 깨우쳐주면 그의 신경증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며, 로고테라피는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의 선택의 자유를 그에게 맡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스스로가 수행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도와주며 따라서 환자를 의미와 대결하게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의미와 가치의 범위를 깨닫고 알수 있도록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대하는데 있으며,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환자의 삶의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치료자의 임무가 아니라 실존에의 주체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환자 자신의 일이요, 치료자는 다만 환자의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을 도와 줄 뿐이다. 환자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함은 의미는 발견될 수 있을 뿐이지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다. 이것은 실존에의 의미추구, 즉 그 의미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가치의 가능성을 실현시켜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동기화 된다고 생각한다. 짧게 말해서 사람은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정의하면 첫째 충동적인 에너지의 역동체로 보아왔던 종래의 심층 심리학에서 인간을 하나의 메카니즘의 한 부분으로 격하시켰던 것을 인격적, 영적 존재로 다시 회고시켜 놓았다. 둘째, 인간이해와 인간의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의미에 대하여 인간은 정신 혹은 영적 존재이며, 자유와 책임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인간존재는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 사랑의 의미, 노동의 의미, 고통의 의미등 인간의 모든 면에 의미가 있으며, 의미는 가치를 통해 충족되었는데 그것은 창조시기, 경험가치, 태도가치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은 없다고 했다. 셋째, 치료기술에 있어서 영적 차원에 대한 호소를 하였다. C.교류분석을 통한 부부의사 소통.(Eric Berne) - TA는 Transacational Analysis의 약자로서 에릭번(Eric Berne 1910 - 1970)에 의해 개발된 정신 분석학적 경험과 기술에서 착상하였으며 거기서 정신분석학의 여러 가지 요소와 개인 및 사회심리학, 학습이론 등의 개념을 첨가하여 발전시켰다. 또 접근은 치료과정의 목표와 방향을 뚜렷이 제기하는 내담자가 전개한 계약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각 사람들의 초기 결정에 초점을 두며 새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개인 능력을 강조한다.(이기춘,[TA요법과 목회신학],신학사상,(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9), P. 160. Howard Clinebell, op. cit., PP. 27-31).인간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TA는 인격의 구성요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TA요법의 철학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교류분석의 특징은 이론적인 평이성에 있다. 번은 모든 사람들이 정신병의사 또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기를 바랬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신의학의 언어가 비신화화 또는 평이 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번의 교류분석은 오직 한가지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치료자가 알 고 있는 바를 그대로 환자가 알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한가지 언어는 간단하고 생생한 Stroke, Child, Adult, Parent, Game, Racket등의 일상용어로 표현된다. 둘째로, 교류분석의 철학은 인간의 긍정성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가치체계 위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기본입장을 나타내는 네 번째의 명제인 '나도 옳고, 너도 옳다.'(I'm OK- you're OK)는 단순한 전이 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대한 실존적인 서술이다. 세 째로 교류분석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결단적 치료'(decisional therapy)라는 것이다. 곧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활, 감정, 행동 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네 째로 교류분석의 철학은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세 차원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다. 교류분석의 이 네 가지 기본철학은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세 차원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다. Eric Berne은 이 접근법이 구조적이고, 의사교류 적인 분석과 관련된 성격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TA는 사람과 자아 신뢰를 배울 수 있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으며 자기 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TA의 기본 목표는 내담자의 현재행동과 그 생의 방향에 대한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자율성의 달성이며 자아 통제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과,지신의 행동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과, 자신이 행동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과, 여기 - 지금 사는 데에 있어 관계없는 부적당한 패턴을 버리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사람들이 솔직하게, 건전하게, 친밀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그들과의 의사교류 성질을 이해하도록 도우는 것이다.
【상담의 실제적인 방법.】- 부부는 항상 서로에게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친밀해지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부부간에 서로 대화할 화제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부부관계의 조화와 연합된 일치감은 만족한 의사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클라인벨은 의사소통이란 우리 몸에 산소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관계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기능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는 상호관계 속에서 긍정적인 STROKE를 주고받으며,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줄 안다. 허나 역기능적 부부의사 소통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요인은 첫째 자아가 건강하지 못한 부부에게서 발견된다. 이것은 성인자아나, 부모자아가 어느 한쪽에 치우쳤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때에는 부부각자가 어떤 자아상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자아로 의사소통을 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역기능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들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서로 다른 인생각본에 따른 삶을 살며, 그 각본으로 인해 결혼관계에서 친밀감을 방해받는다. 이러한 자들의 삶의 태도는 인생각본이 형성되는 시기에 부정적 STROKE로 인해 자기 수용과 타인 수용을 하지 못하는 비극적 각본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세 째 역기능적인 의사 소통을 하는 부부들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삶의 태도를 반복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동기 유발이 이루어진 게임을 한다. 결혼관계에서 게임의 발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뢰와 애정이 뒷받침된 진실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부정적 STROKE를 교환할 때 발생된다. 네 째 역기능적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들은 대화의 유형에 있어서 충족교류에 발생되는 메너리즘에 빠진 의사 교류나 적의 적, 교차적 교류를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들을 들 수 있다. 역기능적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는 1.자아가 약하거나 오염, 배타적이고 2.부부의 삶의 각본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며 3.적의, 교차교류를 하며 4.결혼관계에서 파괴적인 게임을 하는 부부라 볼 수 있다. 이런 부부들에게 TA를 통해 부부의사 소통을 하면 첫째, 성인자아가 부모와 아동자의의 재형성을 통해 통합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 둘째, 각본분석에 있어서 자율적이고 친밀한 각본을 형성하고 있는 부부에게서 볼 수 있다. 부부는 모든 부분을 수용할 줄 알며, 적절히 부부간에 긍정적 STROKE를 주고받아 긍정적 감정을 유지한다. 셋째, 교차, 적의 적 교류가 아닌 충족교류를 통해 의사소통의 방법이 재정립된 경우 기능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넷째, 게임을 의식적으로 탈피하고 그 대신 시간구성을 재미있고 친근한 놀이로 채우게 될 때 기능적 부부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또한 부부간의 의사소통이 쉽고 자기 노출이 되며 서로의 욕구에 대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더욱 행복하고 친밀한 부부관계가 가능해진다.
멋쟁이부부 십계명
▶ 여가에 투자하라 = 같이 할 수 있는 취미를 갖게되면 대화도 늘고 서로간의 이해도 깊어진다.
▶ 계획을 세워라 = 로맨스는 우연히 오는게 아니고 창조하는 것.1주일에 한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같이 슈퍼에 가거나 식사 또는 다른 가사일을 돕는 것도 좋은 방법.
▶ 서로 격려하라 =『당신 생각이 옳아요』『당신 차림이 어울려요』라는 등 상대방을 북돋우는 말을 자주하자.
▶ 매일 한끼는 함께 식사하라 = 부부가 마주앉아 정답게 식사를 하면 가족 전체의 평화도 가꿔진다.
▶ 매주 한통 이상의 편지를 쓰라 = 상대방에 대한 칭찬과 고마움을 글로 나타낸다는건 말과는 또다른 흥분과 기쁨을 선사한다.
▶ 매월 한번 이상 외출하라 = 연애시절이나 신혼때 자주 들렀던 식당이나 거리에 가보는 것도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계절마다 함께 여행을 하라 = 철따라 운치있는 곳을 찾아나서는「작은 사치」는 서로의 애정을 깊게하는 지름길이다.
▶ 서로 유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 = 어려운 일을 당할때 자유분방하게 대처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 생활을 즐겨라 = 욕심을 줄이고 여유있는 태도를 가지면 주어진 상황이 달라보인다.
▶ 기념일을 장식하라 = 생일,결혼기념일은 물론 처음 만난 날과 약혼기념일 까지 챙긴다면 금상첨화.
남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남편에게 부여된 권한은 남편에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한을 권리로 느끼지 말고 의무로 느껴야 합니다. 그는 그에게 부과된 책임을 기억하지 않고서는 그에게 주어진 권한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지배를 짐으로 인식해야 하며, 그 지배의 책임을 짐으로 져야 합니다. 그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든간에 그의 뜻에 따라 실행되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의 책임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 책임을 귀하게 여기게 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감추지 말게 하십시오. 그는 이 무거운 책임이 가정을 번영과 행복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의 구심점이라 믿고 이를 보람있게 행사해야 합니다. 그는 책임을 다하는 곳에 권위가 세워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권한을 격하하거나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확과한 신념과 결단력을가지고 가장으로서의 입장을 온유하고 슬기롭게 견지해나가야 합니다. 그러 할 때 비로소 그는 가정을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리더십을 포기하기 마세요. 그건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지 마세요 그것은 당신이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우리를 당황케 하고 위를 경악케 하고, 우리를 위축케 할 따름이에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먼저 사랑하게 했던 선명한 비젼을 어둡게 할거예요. 당신이 가정에서 제1인자 의 위치를 포기한다는 것은 진실로 무서운 모순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권한을 놓고 당신과 끝까지 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마음은 당신의 승리를 원하고 있답니다. 당신은 이겨야만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리더쉽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리더쉽은 하나의 겉치레입니다.
남편이 비록 가정의 모든 일에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는 아내에게 속해 있는 의무와 능력의 영역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역에서 아내의 손에 직접적인 책임과 권한을 남겨주는 것이 남편의 할 일입니다. 그가 아내 에게 의견이나 결정을 구하기 위해 어떤 문제를 맡긴다고 해서 그의 권위가 감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어느 단체의 회장이 결정을 하기 위해 각 부의 부장들에게 어떤 안건을 위임하는 것과 같이 아내가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능력과 권한의 영역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영역 내에 있지 않은 것을 빼어나게 잘하는 경향이 있으며, 어떠한 책임도 그에게 부여되지 않은 곳에서 자기의 지혜를 보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높은 의무 가운데 있는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여자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남자도 집안 관리의 모든 사소한 일로 머리가 복잡할 때,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자기 아내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러한 오류에 바지기 쉽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행동과 권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 아내의 겸손한 활동을 무시하지 말게 하십시요. 아내가 해야할 일은 사소 한 것에 불과하다는 남편의 생각은 아주 부당합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그가 자기 아내를 마땅히 부양할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녀의 감정을 부드럽게 다룰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십시요. 만일 남편이 아내의 일과 책임을 과소평가한다면 그는 아내의 마음에 쉽사리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입혀주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가정주부가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에게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특별한 "비타민"이 있는데 기독교 가정에서도 때때로 이러한 비타민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의 월급봉투를 보고 그가 모시고 있는 사장이 그를 칭찬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주부는 그와 같은 기준이 없습니다. 가정주부에게도 역시 평가와 자극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이러한 필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저들은 "그래,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오?"또는 "당신은 버스를 잡아 탄 뒤에 계속 뛰는일은 없잖소." 하고 가법게 넘겨버리고 맙니다.
잠언 31장10절에는 현숙한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남편들이여, 여러분의 아내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보화 로 생각하십시오.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존중하십시오. 아내의
재능을 인정하십시오. 아내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십시오. 아내의 기분을 잘 이해하십시오. 아내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부드럽게 성실하게 표시하십시오. 그것을 날마다 계속하십시오. 이와 같은 매일의 "비타민"은 여러분의 아내에게 부부생활의 참된 보람을 안겨줄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3:19). 이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남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그릇된 행위 곧 "가혹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혹한 행위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생활일지라도 손상시킵니다. 남편은 자기 마음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성실성을 그냥깊이 묻어두려고만 합니다. 그는 사소한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내에게는 중요할 수 있는 사소한 객관성을 무시해버리고 맙니다. 그는 가장 온유하고 다정한 사랑과 존경을 보여야 할 때 이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낯모르는 사람들을 모두 정중하게 대합니다. 저들을 위해 그는 훌륭한 외출복을 입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는 위선인지 위악인지 모를 정도로 놀랍게 변합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여러분의 배필이며 여러분의 반신입니다. 인생의 여행길을 단 둘이 걸어가는 동행자입니다. 아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아내에게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매일 여성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여성을 계속 부드럽게 정중하게 대해 주고 여성에게 깊은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남편의 의무입니다. 만일 남편이 여자에게 어떤 불만의 이유를 갖고 있다면, 단 둘이 있을 때 솔직하게 이야기하도록 하십시오. 자녀들 앞에서 비난하고 외부인들 앞에서 불평하는 경우, 그것이 그의 아내에게는 가혹한 고통이 됩니다. 더욱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결과가 됩니다.
결혼은 상호존경 위에 세워집니다. 예절은 이러한 존경의 지주입니다. 물론 이것은 깊은 내적 근원에서 발생해야 합니다. 그것은 허례허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에게는 외양도 중요합니다. 옷차림은 항상 정숙 하고 검소해야 합니다. 저들의 언행도 정중하고 정숙해야 합니다. 저들의 모든 행동과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저들의 생활에서는 무관심, 권태, 번거로움, 무례,불결, 부주의 등과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습 니다. 저들의 생활은 샘물처럼 신선하며 꽃처럼 아름답고 새들의 노래처럼 즐겁습니다. 부부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형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청결"입니다. 청결은 곧 성결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청결과 영혼의 청결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양을 소홀히 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품위의 손상과 경멸을 받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항상 정결한 몸으로 성결한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크리스챤이 될때 우리 마음속에는 화평과 희락이 가득넘치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내를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마십시오. 아내의 슬픔은 곧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여러분은 아내가 비통해 할 때 하나님도 역시 비통해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남편된 자들아, 너희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벧전3:7). 성서가 이렇게 요구할 때, 남편에게 "이는 너희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리라"(벧전 3:7하)하고 경고를 덧붙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학대한 일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혀준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가 상달되지 않고 다시 되돌아와 입술에 묻혀 시들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뭔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에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기도가 축복의 보좌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안겨다 준 아내의 슬픔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신의 마음 문을 그에게 열어주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가혹했습 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도 역시 그에게 가혹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아마 아내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해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정하게 그로 하여금 깊은 슬픔의 맛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내에게 한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유함과 자기 희생으로 상처받은 아내와 화목할 때까지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파라독스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예가님은 "만일 누구든지 제일 앞서고자 하려거든 모든 사람들 중에서 마지막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발을 씻어주실 때 이러한 원칙을 몸소 싫증 하셨습니다. "저녁 먹는 중에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게로 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3-5). 예수님은 영적인 권위를 충분히 의식하시고 제자의 발을 씻기십니다.이것이 올바르게 행하여진 영적 권위의 표준입니다. 자부심이나 권세나 자기 민족은 영적 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영적 권위의 근원입니다. 아내와 자녀에 대한 남편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적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권위의 작용 원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아어주실 때,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예증하신 바와 동일한 파라독스에 뿌리박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를 행사하려는 사람은 먼저 종이 되어야 하며.. 그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죽을 때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남편들이여, 여러분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부심과 여러분의 자아 와 여러분의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십자가를 지신 여러분의 주 예수를 따르십 시오. 그리하면 갈보리에서 핀 사랑의 꽃이 여러분의 가정에 만발할 것입니다!
[래리 크리스텐손 ]
아름다운 가정..."남편"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업 5:25-33)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자로 알아 귀히 여귀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라."(벧전 3:7)
(Likewise you husbands, live considerately(이해심을 가지고) with your wives, bestowing honour(칭찬하고 높여 주라) on the woman as the weaker sex, since you are joint heirs of the grace of life, tn order that your prayers may not be hindered.
남편들에게 대한 권면을 요약하면 아내를 사랑해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헬라어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 세 가지 있는 줄을 아시지요. 하나는 감정적인 사랑이요, 하나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향한 사랑이요, 마지막 하나는 희생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단어를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는 마지막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답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부 관계에서 희생이라고 하면 아내가 남편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편에게 있어 부족되기 쉬운 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읽은 말씀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그 분이 교회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아내를 위해 생명을 버리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평상시 일상 생활을 하면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일 만한 기회는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남편의 사랑은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요약해서 말하면 아내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과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남편보다 아내가 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남편도 깨어지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더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의 감정에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가정과 남편을 위해 수고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위로나 격려를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아내의 삶에 있어서 활력소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듭시다. 일반적으로 직장에 다니던 여자들도 아이를 낳게 되면 직장을 그만 두고 가정에서 아이를 기르는 일과 함께 가사를 전담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세 때 식사 준비하고 청소하고 아이 치닥거리 하는 일입니다. 식사를 준비하려면 시장도 다녀 와야 합니다. 저희 동네는 아직 5일 장을 서는데 지난 번 장에 갔을 때 일입니다. 어떤 아이 엄마가 좁은 장터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느라 이리저리 걸리적 거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이 좀 어디다 맡기고 오지 좁은 장터에까지 끌고 다니느냐고 뭐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 엄마가 하는 말이 "아이를 맡길데가 있어야지요. 누구는 데리고 다니고 싶어서 데리고 나왔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시장을 보면 물건을 사게 되는데 아이까지 끌고 다니면 더 힘이 듭니다. 저도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유모차에 두 아이를 태워가지고 시장에 다닌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정말 대단해서 그런 정도 가지고는 울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종일 수고했는데도 저녁 때 퇴근한 남편이 "하루 종일 집도 안 치워 놓고 뭘 했어?" 하면서 꾸중하듯이 말할 때는 정말 울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아침에 청소를 했건만 아이들은 돌아서기만 하면 어지르는 것을 남편이 몰라주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하지 않으면 표가 나고 하면 표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아내의 수고를 남편이 몰라준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직장에 나가서 돈이라도 벌면 수고했다고 말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통념입니다. 사실 하루 종일 표도 안나는 일을 하고 있으면 더 한심하고 화가 나는 것은 아내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수고를 몰라 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 아내의 수고를 알아주고 해도해도 끝없는 일을 하고 있는 한심한 마음을 알아주어 간단한 말 한마디라도 수고에 대한 감사를 표현해주고 위로해준다면 아내들은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수고를 잊습니다. 남편의 위로와 격려는 아내는 자기가 하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쁜 마음 으로 보람을 느끼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된 이들은 아내가 집에서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내가 집에서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도 남편이 직장에서 하는 일들과 똑같이 가치있는 일이라 고 인정해주는 남편을 통해 아내들은 격려를 받습니다. 자신이 하루 종일 매여 있는 일이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생활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낙심된 마음 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때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고 느낍 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며 자녀를 양육하는 아내의 수고를 인정 하며 그 수고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격려해 주는 남편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아내 의 머리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입니다.
남편된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 역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보다 잘났기 때문도 아니고 더 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머리로서 책임 을 져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로서의 책임은 아내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완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며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말씀이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불리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주신 권위와 책임은 아내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하나님과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말씀을 책임감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내의 머리라는 말씀은 아내 위에 군림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봉사함으로써 아내의 머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맺는 말
결혼은 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비그리스도인들에게나 결혼은 현실이지만, 그러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현실입니다. 결혼을 앞둔 분들이 가정을 위해 준비할 것은 그리스도가 주인되시는 가정에 대한 꿈을 나누는 것과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섬기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섬김의 실천자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무엇보다도 섬김의 훈련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섬김의 대상으로서 먼저 손꼽아야 할 사람은 각 사람의 배우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는 베필로서 두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부부는 이웃과 다른 가정을 섬기는 삶의 반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사랑의 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하나님께서 자기 가정에 주신 축복을 누릴 뿐아니라 이웃과 다른 가정을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할 줄 아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만 머물러 있을 때 우리의 영성은 sine 곡선을 그릴 뿐 좀처럼 성장하지 않지만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과 우리의 삶을 나눌 때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정말 멋진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그런 꿈들을 잊고 자기 가정만의 행복을 생각하며 살아 갑니다. 심지어 그 사랑하던 배우자의 행복조차도 잊은 채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기회를 통해서 여러 분들이 잠시 잊었던 꿈들을 되찾으며 사랑받기만 바라지 말고 사랑하고 나눌 줄 아는 아내와 남편,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부부, 자녀의 삶에 좋은 본을 보이는 부모가 되어 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 가운데 빛된 가정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진경 : 서울대 사대 수학과를 졸업, 위튼대 기독교 교육 MA,신학 MA, 현 영남신학교 출강, 기독학술교육연구소에서 성경적 자녀교육을 강의, 양승훈 교수의 아내로 슬하에 범모, 창모, 예은 세 자녀를 두고 있음.]
아내를 감동시키는 남편
부부 사랑의 집은 진실을 주초로 삼아야 한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녀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마7:26-27).
그래서 사람을 심으면 행복의 꽃이 피오 온 가정에 멋진 향기로 가득하게 하지만, 미움을 심으면 영낙없이 불행의 냄새가 나서 부루를 가정에, 자녀를 가정에 묶어 놓지 못하고 집밖에서 서성거리게 한다.
서로가 오늘 이렇게 부부가 되어 살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진실된 사랑의 모습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잠든 시간, 조용한 음악과 함께 촛불의 조명 속에서 대화의 문을 열어 보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최초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때를 회상해 보자. 부부사랑의 진실된 주는 무엇이었고, 그 주초가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랑의 진실의 조초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가?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그리고 처음 사라의 진실된 주초가 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과 말을 통해서 그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진실이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되어 사랑의 옹달샘 구실을 하고 있는지를....
행복한 가정은 행복의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찾는 것이 아니다. 계속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가 샘솟는 행복의 옹달샘을 파는 일이다. 고여있는 웅덩이같은 물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는 웅덩이를, 어떤 사람은 여자, 권력, 혹은 여러가지 취미 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 있으나 곧 마르고 앙상한 바닥을 들어낼 때 기쁨 보다는 실망과 좌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는 헌신적인 노력과 자기 희생이 뒤 따른다. 자녀를 위해서 수고하는 땀방울이 있고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고생하는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아픔 뒤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쁨이라는 생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아2:2) 우리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육신의 견재를 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다.
미움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입으로 먼저 행 해 표현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여인이 당신만 하리요","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제일 멋진 여인을 주셨다고 생각하오"," 나를 위해서 당신은 과분한 여인이요","당신을 볼 때 마다 난 기쁨이 넘치오","당신이 최고인 것을 난 이제야 알았오"
모를리가 없다. 다 아는 일이다. 밥하고,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반찬 만들고, 애들 돌보고.. 수고하는 아내를 마음으로만 알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멋있게, 더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땀흘린 만큼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처음 사랑할 때는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당신이 아픈 것을 볼 수 없어요" 라는 빈 말 같은 말에도 아내에게는 사랑의 밀어처럼 들 리는 법이다. 아내들은 평소에도 빈말같은 이런 말에도 취하는 법이다. 몸살이 난 아내를 두고 당신이 출근해야 한다면 이렇게 시작해 보라.
약국에서 사온 약과 먹을 수 있는 보온병에 든 물을 준비해서 멀리 맡에 놔 둔다거나, 그녀가 무료할 때 읽을 수 있는 신문과 잡지를 손으로 쉽게 집을 수 있는 신문과 잡지를 손으로 쉽게 집을 수 있는 위치에 놓고, 작은 전등을 곁에 켜 둔다거나, 쉽게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전화선을 길게 연결해 준다거나 빨리 회복하기를 기원한다는 사랑의 글이 담긴 카드 한 장을 머리맡에 남겨 두는 일이다.
그 순간 아내는 정신적으로 병이 나은 감격을 느낄 것이다. 아내를 감동시키는 것은 새 집을 사서 이사 가는 것보다 새로운 자동차를 사주는 것 보다도 바로 이런 하찮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 아내는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 한다.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혹은 평소에 하루 종일 집안에서 지친 일을 하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해보라. "여보 당신 이번에 회복되면, 우리 극장에 한번 갈까?", " 여보, 오늘 시간 있어? 빨리 일 끝내고 00로 나와, 데이트 하자구, 옷은 이런 것으로 하고...." 당신의 전화를 받는 순간, 당신을 만나는 순간까지 아내는 얼마나 감격하는지 아는가?
건강은 기쁜 마음에서 출발되는 것이다. 병만 주었던 당신이지만 때로는 약을 줄 수 있는 당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속적으로 아내를 감동시키는 남편의 10계명을 지켜보라.
1. 처음 사랑의 관심과 사랑이 변하지 않게 하라.
2. 아내에게 있었던 기념일(세례, 약혼, 결혼, 생일) 을 기억하라.
3. 아내의 외모와 옷차림에 관심을 보여라.
4. 아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말라.
5. 매사를 아내와 상의하고 대화를 통해서 결정하도록 하라.
6.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말라.
7. 문제 앞에서는 남편이 먼저 양보하라.
8. 가정 경제는 아내에게 일임하고 믿음을 줘라.
9. 아내의 여가 활동에 관심을 가져라.
10. 아내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려는 마음이 표현되게 하라.
당당한 아버지 像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어떻게 비쳐져야 할까. 지난해 전국을 강타한 아버지 신드롬은 나약한 아버지,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일관돼 안타깝다는 소리가 많았다.
가정과 사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건강한 아버지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존경받고 신뢰받는 아버지 상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모임 전국연합(회장 李在澤)은 새해가 밝자마자「아버지 헌장」을 발표했다.
이와관련, 李씨는 『각 단체별로 마련한 아버지들이 지켜야 할 실천사항을 한데 모아 6개월 작업끝에 만들었다』며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는 아버지의 모습이 올바르게 정립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헌장>
①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와 행복을 위해 힘쓰며 가족은 이를 인정하고 협조해야 한다. 아울러 자녀와 배우자를 보호하며 정신적 지주로서 참된 가장이 된다.
② 아버지는 자녀들이 건전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인간으로 발달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과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을 지키며 자녀 양육과 교육의 공동책임자로서 그 본분을 다한다.
아버지는 가족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어린이들에게도 애정을 가진다. 지역 사회 발전에도 힘쓰며 효 평등 협동등을 토대로 한 공동체문화를 이끌어 간다.
④ 아버지는 개인임과 동시에 직장과 사회 국가의 일원으로서 그 발전에 이바지 하며 책임있는 생각과 행동을 유지한다. 아울러 아버지들의 이러한 노력은 존중되고 높게 평가 되어야 한다.
⑤ 아버지는 한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능력이 아닌 한 인격체의 인품으로서 순수하고 참되게 평가되어야 한다.
⑥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는 가운데 자신의 올바른 역할과 권리를 찾는다.
⑦ 아버지는 가족뿐 아니라 사회 국가로부터 아버지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협조받아야 한다. 또한 건강을 잃었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도움을 줄수 있는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아버지의 영적권세
(1) 축복권
하루에 한번씩 자녀들의 머리에 안수하고 또는 껴안고 축복기도하십시오. 자녀는 야단치는 것으로 변화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비젼을 심어줌으로써 놀라운 자녀로 만들어 집니다.
창12:2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에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2) 말씀권
일주일에 2-3회 아버지가 친히 자녀들을 모아놓고 성경말씀을 가르치십시오. 아버지의 영적권위로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가정에서 테레비젼이 이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들은 하루에도 테레비젼에게 몇시간 동안 세상가치관과 풍습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에 이미 물든 다음 에는 자녀를 돌이키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어려서 부터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십시오.
신6:6 "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
(3) 훈육권
아이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며 징계를 하십시오. 징계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 주는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공의로 대하는것이 사랑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엡6:4 " 또 아비들아 너희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4) 신앙전수권
부모의 신앙을 유산으로 삶속에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많은 가정이 신앙전수가 실패하고 있습니다.
시 78:5-7
5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6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7 저희로 그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아름다운 부부/행18:1-4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냉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미모의 여인으로부터 계속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칸트의 마음이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여인이 하루는 칸트에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칸트가 간단하게 말했습니다."생각해 보겠습니다."그리고는 그 후로 칸트는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대한 책들을 모두 뒤졌습니다. 결혼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고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칸트가 말했습니다."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한 결과 당신의 따님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랬더니 돌아 온 대답은 "너무 늦었네.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네"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가슴으로 느껴야할 것을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모릅니다. 사랑은 논리보다 감성이 앞선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혼이라는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 동기가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이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애인이 좋아져서 가로채기 결혼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밥 먹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결혼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는 모습에 반한 사람, 걸음걸이에 반한 사람, 목소리에, 뒷모습에.....모두 다 결혼의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한결 같은 대답입니다. 무엇일까요? "내가 눈이 삐었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좋았습니다. 팔자 걸음도, 비뚤어진 입도 심지어는 코 푸는 모습까지도.... 이게 뭡니까? 바로 감정입니다. 그 당시의 감정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논리가 아닙니다. 밥 먹는데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걸음걸이에 오묘한 논리가 숨어 있나요? 아니거든요. 또한 사랑은 이론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50대50이니, 30대70이니 하는 비율의 이론들은 사랑에는 성립되지 않는 말들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내 감정의 전부를 주는 것이 사랑이요 여기에서 곧 행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입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왜 결혼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이 답은 맞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동기를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만 생각하면 상대방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단은 길들여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들은"다홍치마 때 잡아야 된다"."신혼 초에 잘 길들여야 된다"는 요상한 논리 때문에 결혼하면서부터 많은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결혼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불편을 잠깐 참고 희생하면 배우자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더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사랑이요, 결혼이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죽으면 살고, 나누면 부해지고, 섬기면 지도자가 되고, 버리면 얻는다." 이 진리는 교회생활에서 뿐이 아니고 가정생활과 부부생활 모든 곳에 다 적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사역학회장>인 <주수일>씨가"행복해지기 위해선 먼저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현대인의 이혼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이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포기란 있을 수 없다"는 이기심에서 생겨 난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은 <누구를 만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만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배우자가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꾸준히 뜻을 맞추고, 목표를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자기희생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불만을 감사로 바꾸고 사는 사람들이 부부입니다.
여러분, 결혼 반지는 왜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2천년도 더 된 서양의 전통에서 나온 얘깁니다. 넷째 손가락을 약지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넷째 손가락에 심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신경이 있다고 믿었기에 이 손가락에 의미를 둡니다. 그리고 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의식은 독립의 포기와 순종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원래 넷째 손가락은 구조상 모든 손가락 중에 가장 독립성이 적은 손가락입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실험을 해보십시오. 다른 손가락은 잘 펴지지만 넷째 손가락만은 홀로 서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펴진다 해도 완벽하게 펴지지 않습니다. 넷째 손가락의 이 비 독립성을 서로에게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의식이 바로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왼손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왼손이 오른손에 비해 보다 연약하고 오른 손이 하는 일에 보조적이고 순종적이어서 서로에게 종속적인 역할에 적합하다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잘 이루어 질 때를 우리는 감히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이것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매 맞는 아내, 매맞는 남편"이라는 말들이 사회 문제의 중심을 이룬지 오래입니다. 현대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가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시대"라고 동서양이 이구 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은커녕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현대라는 시대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불확실성"이라는 것입니다. 믿지를 못하겠어요.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부부가 내일의 남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세상이 현대입니다. 그야말로 "불확실한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대의 가정은 가정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살고 있으면 건강한 가정이라는 생각은 이제는 옛날 얘기인 듯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의 <가정>에는 <아내>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이다."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가 있을 때 비로소 <가정>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만 있는 가정은 가정이 아닌 <동거>일 뿐입니다. 가정에 <아내>와 <남편>이 없으니 <아빠>와 <엄마>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무너져 내린 가정에서의 아이들은 <동거 남>과 <동거녀> 사이에서 <출생과 존재의 혼돈>을 겪으며 자라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이 되는 셈입니다. 시험관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혹은 소나 양을 복제하듯 복제되어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이미 현대의 아이들은 참된 의미의 <부모>를 잃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가정을 회복해야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찾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참 행복한 부부입니다. 누굽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참 이상적 결혼생활을 이루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되는 데 언제나 부부의 이름이 함께 소개됩니다. 바울이 세 번 소개하고, 누가가 세 번 소개하는 참 건강한 부부입니다.(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행 18:2, 18, 26) 이들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태인 추방령에 의하여 강제 이주를 당해 고린도까지 쫓겨오게 됩니다. 이들은 천막제조기술을 가진 집시 상인이었습니다. 이역 만리 낯선 도시인 로마에 가서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보따리를 싸고 만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업 터를 잃고 떠돌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낯선 외지인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이릅니다. 사실 그들이 하던 천막 제조업으로 굉장히 거칠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둘이서 함께 힘써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같이 앉아서 늦은 밤까지 바느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나섭니다. 사업과 돈버는 목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인생의 비전이 거시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가면 자기들도 거기 가서 장사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합니다. 어디든지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바울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함께 이룹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과 그 사역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늘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부부가 가장 행복한 부부입니다. 오늘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롬 16:3,4절을 보면 그들은 목숨 바쳐 헌신하는 교회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개척초기였기 때문에 아예 자기 집에서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소개하는지 보십시오. "나의 동역자"라고 자랑스럽게 부릅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헌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참 간단한 공식으로 전개됩니다. 그것은 곧 헌신하는 만큼 성숙하고, 성화됩니다.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께 고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아무리 좋은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헌신하지 않는 한 결국 무용지물이 됩니다. 건강, 재물, 재산, 재능, 실력, 사회적 신분, 수준 높은 학력과 지식, 기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는 가정적 종교입니다. 창1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주례하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가정 되게 하시는 창조 역사의 클라이맥스(Climax)가 나옵니다. 모든 창조 역사가 마지막에 가정을 이루는 데 핵심을 두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맨 처음 이적을 나타내시고 찾아가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혼인잔치 집에 찾아가셔서 축복하신 것이 예수님 행하신 이적의 첫 번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현대의 슬픔은 사람마다 가정을 떠나서 행복을 찾기도 하고, 부부의 관계를 벗어나서 기쁨과 향락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신주의에서 자유를 찾고, 방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 사랑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오히려 섬기는 일에서, 봉사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란 신앙 위에 맺어져야합니다. 부부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것으로 끝입니다. 설교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이것 때문에 만나고 저것 때문에 만나고, 취미가 어떻고, 지식이 어떻고, 수준이 어떻고...별소리를 다 해봐야 죽을 때까지 맞추어도 못 맞춥니다. 맞는 사람이 없어요. 바른 조화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맞출 수 있는 것 단 한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신앙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신앙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이 가정되게 하는 데는 신앙적 기초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그 위에 세워져야만 진정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섭리적 의미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고로 다른 아무 조건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셨다" 그 한가지로 살아가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태넌>박사가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마 지금 서점에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남녀싸움의 90%는 언어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남녀의 어긋나는 대화에서 싸움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태넌 박사에 의하면 여자는 대화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얻고자 하지만 남자는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충고를 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부부가 티격태격 할 수 밖에요. 사소한 말다툼에서부터 모든 남녀의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이럴 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둘이 마주 보고 서로 자기의 욕구를 상대방을 통해서 충족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부란, 둘이 한 방향을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신앙적 가치, 신앙적 목적이 아니고는 부부는 부부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쪼록 이 신앙적 가치관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들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부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성경본문] 엡 5:22-33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벧전3:7
(엡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 5:31) ㄱ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제 목 / 부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본 문 / 엡 5:22-33
가정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으로 가정은 시작되고 그 시작으로 인해 자녀들이 태어나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곳이 곧 가정입니다.
[부부란 단순히 육체가 하나가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인격과 삶이 하나가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생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아내도 남편의 생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즉, 남편의 전 삶이 아내의 삶이 되어야 하고, 아내의 전 삶이 남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의 100%와 아내의 100%가 완전히 결합되어 서로에게 자기를 완전히 줄
수 있어야 진정한 부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0% 부부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부부 생활을 보다 잘해 가기 위해서는 믿음과 희망,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수년 전 모 여대 동문들이 만난 자리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되어 눈길을 끈 일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당신의 남편을 사랑합니까' 라는 설문에 대해서는 90%이상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남편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란 설문에 대해선 70%이상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유독 '당신의 남편을 믿습니까' 라는 설문에 대해서만은 45%의 저조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같이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것은 셋 중에서 선택된 하나가 사랑이라는 뜻이 아니라 제일 높은 단계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의 바탕 위에 희망이, 희망의 바탕 위에 참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고, 아내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남편에게 맡길 수 있을 때 두 사람은 결코 남남이 아닌 완전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한 몸이 된 부부라는 것을 항상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가정의 부부들은 믿음의 바탕 위에 존경과 사랑을 쌓아 감으로 서로의 생을 아름다운 예술로 완성해 가야 하겠습니다.](기독교문장대백과)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효도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효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부모님들의 그런 효를 바라보는 자녀들은 다시 그 부모님께 효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남편과 아내가 한 가정을 이루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이미 앞에서 서론으로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부부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1.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되 순종으로 사랑하라(22)
이 순종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순종이어야 합니다. 즉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듯 아내의 머리가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은 말합니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몸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머리와 몸통은 하나입니다. 이 둘이 합해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남편을 머리로 알고 순종하라는 말씀은 주종의 관계를 이루라는 말씀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되 바르게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몸통은 있는데 머리가 없다면 그는 죽은 몸입니다. 또 머리는 있는데 몸통이 없다면 그도 역시 죽은 몸입니다. 그래서 몸통과 머리는 하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내가 남편을 머리로 순종하라는 말은 가장 아름다운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랑은 서로를 존경하는 사랑입니다.
야, 너, 오빠, 영희야, 형아... 등으로 상대를 부르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런 호칭에서 서로에 대한 존경이 나올까요?
존경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존경이 없는 부부는 육신의 쾌락과 향락의 관계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랑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부부는 몇 촌인가요? == 무 촌입니다. 이것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돌아서면 남입니다. 존경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존경하는 사랑으로 한 몸이 되시길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2.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25)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되 주께 순종하고 복종하듯,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자기의 목숨과 바꾸는 그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되 그 자신의 목숨과 바꾸시면서 사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 할렐루야!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말씀은 곧 목숨을 걸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살신성인입니다.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고통은 그 어떤 고난과 고통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고통이고 가장 큰 고난이며 수치입니다. 그런 죽음으로 주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합니까? = 죽도록 사랑합니까? 얼마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처럼 목숨을 걸고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남편들이여 내 몸을 내어주는데 까지 아내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2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내 스스로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성경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예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할렐루야!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학대하십니까? 아니면 가장 존귀한 존재로 여기십니까?
요즘 마약이 사회의 큰 죄악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마약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장 학대하는 것입니다. 마약은 몸도 학대하는 것이고 그 영혼도 학대하는 것입니다. 마약은 자신의 몸도 마음도 더 나가 영혼까지도 파괴됩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지내신 한 분의 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다시 마약을 하다가 붙들렸습니다. ... 안타깝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연예인. 마약 해외여행...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남편 여러분!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사랑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8절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에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편이 되었든 아내가 되었든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가까이 에서 각각 아내와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즉 내 몸을 내가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떠나서 두 몸이 하나를 이루는 것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안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주님이 한 몸이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서로 존경하는 순종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에만 강요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아내를 향한 말씀은 남편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고, 남편을 향한 말씀은 아내에게 해답이 되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사랑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부부가 제일입니다.
사랑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곧 성경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할렐루야!
부부조화 10가지 비결
최효섭목사의 『부부조화를 위한 10가지 비결』.
① 떨어지지 말고 되도록 함께 다녀라
② 교대로 화내고 동시에 소리지르지 말라
③ 약점을 타인에게 떠들고 다니지 말라
④ 확실한 증거없이 실수나 허물을 지적하지 말라
⑤ 냉전은 일몰 전에 끝내라
⑥ 아직 부부로 남아있는 이상 의심하지 말라
⑦ 아내=들릴만큼 한숨쉬지 말라,남편=소리지르기전 두 번 심호흡하라
⑧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고 용서하라
⑨ 행복해야 할 아이들과 조화를 원하시는 창조자가 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⑩ 어떤 말,어떤 행동으로 사랑했는지 반성하라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10계명
1) 상대의 싫어하는 화제를 수시로 끌어낸다.
월급이 언제나 오르죠? 밖에서도 무기력하나요?
2)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
누구 남편은 승진했다던데, 옆집 부인은 언제나 멋지던데
3) 상대의 용모의 단점을 지적한다.
당신은 유방이 어디있어, 당신 삼겹살 구어먹자
4) 내가 잘났다고 주장하라
우리집은 대대로 양반이야, 당신 무슨 학교 출신이야
5) 잘 잊어버리고 오리발 내밀어라
장인생신이야 ? 몰랐어
6) 상대의 식구들 흉을 보라
당신 식구들은 늘 그렇게 뿐이 못돼?
7)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라
당신이 불쌍해서 데리고 사는거야
8) 듣기싫은 별명을 붙이라
9) 상대를 무시하라
10) 미안해요, 사랑해요, 든든해요와 같은 긍정적 언어를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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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부싸움
어느 젊은 집사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인 데 부인이 화가 나서 밥도 안짓고 건너 방으로 가서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저녁도 못 얻어 먹고 따분한 남편과 아이들이 문 앞에 가서
문 좀 열어 달라고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 때 남편은 문득 자기 아내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하던 것에 착안하여
문 앞에 대고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잠시 후 그 성경 말씀에 대한 답신 성경 말씀이 방 안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결국 이 부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나와서
밥을 짓고 정상 일과를 살게 되었답니다.
p.s 아내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남편들... 아내에게 잘 해 주세요
온유한 사람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먹었다.
이러한 실험에서 보듯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는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팔 복중에 하나이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 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첫댓글 좋은글감사합니다.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