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사랑
"오빠, 다녀오겠어요."
했으나 인성은 돌아보지 않았다. 알맞게 넓은 등이 강한 거부를
나타낸다. 인실은 그 등을 우두커니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오빠의 허락을 받으러 온 걸까? 그냥 가도 되는 건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양말 신은 자신의 발을 내려본다. 인실은
자기 발이 작다는 생각을 한다. 오빠의 고통스러움이나 오가다의 절실함이
자기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발이 작고
빈약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는 게야."
말하면서 인성은 돌아보았다. 인실이도 눈을 들었다. 오누이의 눈과
눈이 마주친다. 아니 날카롭게 부딪친다. 인성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만다.
그리고 노여움으로 빛나던 눈은 애원의 빛으로 달라졌다.
'오빠, 우리 좀 당당해집시다. 부끄러움, 가책 같은 건 갖지 말기로
합시다. 의지가 거짓으로 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의지가
거짓하고 통할 때, 그것은 승리가 아닐 거예요. 이런다고 나 감정에
빠져서 무모하게 허우적거리진 않을 거예요. 순수한 것과 무모한 건
달라요.'
'넌, 인실이 넌 오가다를 방패 삼아서 결혼을 안 하려는 거다. 너가
결혼을 하지 않고 외
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내탓이고 실은 이 내탓이란 말이다!'
'알아요, 하지만 지금 오빠가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닐 거예요.
인실아 창피스럽다, 인실아 제발 도 이상 망신을 당하지 않게 해다오,
가지 말아다오이겠지요.'
'오냐, 너의 말이 맞아. 난 수치스럽다!'
"그럼 오빠, 갔다오겠어요."
인성은 외면을 했다. 인실은 그 방 앞에서 물러났다. 마루 끝에 놔둔
외투를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푹 싸면서 뜰을 질러나가는데
"작은아씨, 가시는 거예요."
오라범댁 양순이 쫓아나왔다.
"정말 가시는 거예요?"
인실의 팔을 잡는다.
"작은아씨, 그 마음 어째 내가 모르겠어요? 알아요. 너무나 잘 알아요.
하지만 한번 더 생각을해보세요. 오빠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인실은 양순의 팔을 풀었다.
'가나 안 가나, 최대의 관심사였을 거야. 호기심 때문에 잠도 못잤을라?
아무튼 오빠는 신사다.'
"작은아씨, 정말 그러심 안 돼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내가 가야 당신 마음이 흡족할 텐데, 종일
발라놓은 것 같은 여자.'
대문 밖으로 나온다. 대문이 열리고 닫힐 때 나무와 나무가 마찰하며
내는 독특한 음향이 몇 발자국을 걸어나온 뒤에도 인실의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뇌수를 뽑아내는 것만 같은 그 음향, 인실은 비로소 심장의
피가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며 아픔과 괴로움이 달겨드는 것을 느낀다.
'오빠는 신사다.'
올케에 대하여 불만이 있거나 경멸할 때 인실은 곧잘 마음속으로 오빠는
신사다, 하고 뇌곤 한다. 호기심이 강하고 감정을 종잇장처럼 발라대는
여자, 어쩌다 하나를 알면 세상의 느 일을 다 알아버린 듯 난 체하는
여자, 어려운 단어 하나로 유식함을 자처하고, 하긴 단순하여 악랄함은
없다. 그런 모든 단점을 감싸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유인성의 커다란 품,
인실은 오빠의 그런 남자다움을 존경하며서도 올케를 싫어하였다. 양순의
최대의 관심사는 인실이 오늘 나갈 것이냐 안 나갈 것이냐, 그럴 만한
일이긴 했다. 어젯밤을 생각하면은 인실은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선우 형제 집 주연에 간 오빠가 하마 돌아올까 귀를 기
울이며 책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들쑹날쑹이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가는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기를 두 번, 겨울밤은 길었다.
바람은 스산하게 들창을 흔들었다. 경찰간의 사벨 소리를 연상케 하는
한밤의 바람 소리, 기분 나쁜 그 소리, 오렌지 빛 안개 같은 빛을 발하는
발가숭이 전등이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던 유치장 밖에서는 늘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었다. 어찌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유치장의 문은 육중하였고 열쇠 꾸러미의 소리도 육중하였다. 몇밤을
잠자지 못하게 하며 취조하던 일인 형사의 얼굴, 십 리 가다한 오라기 오
리 가다 한 오라기, 며칠을 면도하지 못했을 때 유황같이 누리끼한 안면에
돋아났었던 수염, 그 얼굴은 공포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피를
느낄 수 없는, 벼랑과 같은 절망적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떤 순간, 그것은
꼭 한 번이었었지만 그 얼굴을
불행의 표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인실에게 매우 중요한 심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의 학살을 목도하였던 유인실은
피해자가 갖는, 한치의 여유도 없는 저항 의식을 불태웠다. 그것은 부러질
것만 같은 가파로움이었다.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다. 피해자의
패배로써 그들의 승리와는 관계없이 패배할 뿐이라는 사실, 적이
누구이든, 설령 적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인실은 책에다 마음을 집중하려
했다. 꽁꽁 얼어붙은 길이, 그 길이 걸어와 마음 바닥에 깔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외로움
'그 사람, 나왔을까?'
오가다를 생각했다. 오가다의 얼굴은 결코 불행의 표상은 아니었다.
열두시가 지나고 한시가 다 돼갔을 때 인성이 귀가한 것 같았다. 대문
앞에서 슬렁거리는 기척이 있었다.
"작은아씨, 작은아씨! 나와보세요!"
별안간 숨이 넘어가듯 오라범댁이 방문을 열고 얼굴을 디밀었다. 눈이
번쩍번쩍했다.
"무슨 일이예요?"
"큰일 났어요."
"오빠가 오신 것 아닌가요?"
양순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그러나 목소리는 다급하게
"그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 일본 사람 말이예요."
"그런데요?"
"옥신각신 야단났어요."
"...."
"어서 나가보시라니까요. 작은아씨 보고 가겠다고 때를 쓰고 있어요.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아요."
인실은 일어섰다. 양순은 인실을 바짝 뒤따랐다.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오가다의 모습은 바로 인실의 시야로 들어왔다. 단추도 잠그지 않고 걸친
오버, 안경이 휘번득였다. 그러나 오가다는 인실을 쳐다보았을 뿐, 다음
순간 잡아끄는 선우신의 팔을 뿌리친다.
"나 할말만 하고 갈 거요. 이러지 마시오. 정말 이러지들 말라
그말이오. 나 할말만 하고."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인실씨를 위한다면 이럼 안 돼요."
선우신도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차원이 달라.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인성은 대문 기둥을 등지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상황으로 판단하건데
주연이 끝나자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오는 인성을 오가다가 따라잡은 것
같았고 그런 오가다를 뒤쫓아 선우 형제가 허둥지둥 달려온 것 같다.
"잘 알면서 왜 이래? 때려줄까!"
선우일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양순이 호들갑스럽게 인실을 붙잡았다.
인실은 그를 떠밀어냈다.
"정말 왜들 이러는 거지요? 복잦ㅂ하게 불순하게, 당신들이야말로 왜들
이러는 거요? 분인이 원치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충실한 친구일 뿐이오.
나를 깡패 대하듯, 일본놈의 개 취
급하듯, 나는 당신들의 신뢰했는데."
목이 메는 것 같다.
"나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소. 히토미[仁實]를 불러내지도 않았소.
담장을 뛰어넘지도 않았소. 히토미의 오빠를 따라온 거요. 이래도 내
의도를 오해하는 겁니까?"
선우 형제는 더 이상 할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히토미상, 나 내일 열두시부터 창경원 앞에서 기다리겠소. 나오고 안
나오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요. 우정도 사랑도 결별도 모두 당신의 자유,
당신의 의사요, 당신 자신이 선택하는 거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는 등을 돌리고 헤매듯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어둠에 사라져갔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늦게 선우 형제는
작별 인사도 없이 당황하며 오가다의 뒤를 좇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실은 깡패 대하듯, 일본놈의 개 취급하듯, 나는 당신들을 신뢰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오빠나 선우 형제는 괴로웠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오가다의 말에는 한 오리의 실도 감겨져 있지 않았다. 한 오리의 실도
감겨 있지 않았던 오가다의 말, 오가다는 그것 이상의 이하의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사람, 위대하지도 저속하지도 않는, 꾸미지 않고도
할말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창경원 정문 앞에 오버의 깃을 세우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오가다는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어쩌면 다 가버린 자리에 혼자 남은
가장 초라한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인실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많이 기다렸어요?"
말을 걸었다. 인실은 정확하게 열두시에 도착했지만.
"아니."
했으나 실상 그는 열한시부터 와 있었다.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그는
근처에 있는 주점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왔다. 인실은 매표구로 다가가
표 두장 을 사 들었다.
"들어가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하다가 오가다는 따랐다.
"우리는 겨울에만 이곳에 오는군요."
넓은 뜨락에 들어섰을 때 오가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실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나란히 걸어서 양지바른 전각, 돌층계까지 왔을 때 오가다는
털썩 주저앉았다. 밤새 뜬눈으로 보낸 듯 눈은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뜬눈으로 새기론 인실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도 붉었다. 인실은 오가다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휘어진 잔가지 위에서 그네를 타며 까치는 생각이
난다는 듯 이따금 한두 번씩 우짖었다. 오가다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푸른 연기가 겨울바람에 흩어져서 날린다. 인실이더러 춥지 않느냐, 여기
와서 앉으라 할 여유도 오가다에게는 없는 것같이 보였다.
"어젯밤엔 괴로웠지요?"
오가다가 물었다. 그 말 대답은 하지 않고
"얼굴이 엉망이네요. 수염도 안 깎고."
오가다는 밀 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입에서는 연신
담배연기가 새나오고 있었다.
"겨울 하늘이 어찌나 높고 맑은지 찬바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소."
"어디 따끈한 것 먹으러 가시겠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난처하지 않겠소? 히토미는 언제나 그런
곳에 가기 싫어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오가다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변한다.
"당신이 그러나까 이변엔 내 쪽에서 겁나는군."
"어째서요?"
"나 역시 누굴 만날까 봐서, 팔매질을 히토미 혼자서만 당하고 난
그것을 막아주지 못했으니까."
인실이 웃는다.
"그런 말 말아요. 돌 맞은 상처 같은 것 저한테 없으니까. 앞으로도
그런 건 상처가 되진 않을 거예요."
서로 오랫동안 바라본다. 불꽃같이 뜨거운 것, 그것은 밀착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넘치듯 메운 것이다.
"실감할 수가 없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 내가 지금 이곳에,
서울땅에, 창경원에 앉아 있다는 것이. 히토미, 이리 와서 내 곁에
앉아요."
인실은 그의 곁에 가서 앉는다. 잎을 다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르릉 떤다. 얼마 진까지만 해도 포플러의 높은 꼭대기에 검정 종이를
찢어놓은 듯 잎새들이 더러 남아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잿빛 나무 줄기에
검정 점이 하늘에 찍힌 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새 까치는 어디 갔는지
없어졌다. 스케이트를 맨 중학생들이 연못을 향해 가고 있었다. 땅콩을 입
속으로 털어넣으며 아이들도 스케이트를 메고 지나간다. 멀리 전차에서
땡땡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가 좋은 거야. 무엇을 더 생각할 필요가 있어? 이대로, 이
순간만은 목이 타지 않는다. 부드러운 양털같이 따뜻해. 겨울의 저
빛줄처럼 따뜻하다. 거짓말쟁이, 체면치레하는 놈들아! 너희들은 항상
목이 탈 게다. 너희들의 그 타는 목을 적셔줄 물은 이 세상에 한 방울도
없다. 끝없는 싸움, 끝없는 피비린내, 업화(業火)로서도 태울 수 없는
더러운 오장, 그것은 영원한 저주다! 나는 이 순간을 사랑하리. 이 여인을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떼를 쓰지 않겠다. 함께 도망가자고 하지도 않겠다!
소유하자는 생각도 않겠다! 나를 계집 섞은 것 같은 자식이라 비웃던
놈들! 이놈들아, 너희들 입에 물고 있는 것이 한 알의 열매가 아닌
똥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는냐!"
오가다는 목도리 사이로 비어져나온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창백한 안색이다. 추위에 소름이 돋아난
얼굴이다. 그러나 무심하고 마을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오가다는 벌떡
일어났다. 외투를 벗어 인실의 머리에서부터 푹 싸매어 준다.
"여장부!"
오가다는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인실이 얼굴을 쳐들었다.
"그래보고 싶었어요. 무슨 말이든 외쳐보고 싶었어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안경 속의 눈이 물결같이 흔들린다.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핏줄이 터질 것만 같은 충일감이, 이 여인을
사랑하기보다 이 순간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기쁨이 그를
겸손하게 하였고 양보하게 했을 뿐이다. 소유하자는 생각도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가다는 이미 소유했다는 확신 속에 있었다. 인생의 비밀을
두 손 안에 꽉 쥐고 있었다.
"오가다상?"
"말해요."
"지금 당신 마음 알아맞혀 볼까요?"
껄껄껄 소리 내어 웃어제낀다.
"히토미, 그런데 당신은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지요?"
"피부로, 어린아이들은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어요. 공기로 느끼구,
마음이 맑아지면 느끼는 것도 정확할 것 같아요."
"전혀 정확하지 않는데? 그럼 지금 히토미는 마음이 흐려 있나보지."
"거짓말 말아요."
"하하하핫...... 그럼 당신은 지금 어린애 같은 마음인가?"
"조금은요."
"히토미는 항상 그랬었어 나를 잘 알고 있었던 여성이었어."
오가다는 새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기뻐서 눈물이 난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기쁨이란 슬픔인지 몰라. 많이
슬플 때, 지독하게 슬플 때, 그런 때는 마음 바닥에 좁쌀알만한 내 실체를
잡을 수가 있어서 역설적인 얘긴지 몰라도 평화랄까 그런 비슷한 것이
있을 수도 있더군. 유치하다고 웃지 말아요.
나 어떤 때는 형편없는 인간이거든. 어릴 적에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얘야, 넌 어른이 되고 늙어서 노인이 되어도 도무지 철이 들 것 같지가
않다. 사내자식의 마음이 그렇게 연해서 어떡하느냐, 하시곤 했지요. 난
동경에서 우울했소. 날마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지겨웠소. 지금 그것 사장을 보면 희망이 없어요. 상황이 전쟁으로 치닫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총리가 암살당한 그자체가 중요하기보다 그것이
어두운 앞날을 예시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 관둡시다. 아무튼 우울한
나날이었소. 인간들이 모두 연민스러웠소. 뻘 밭을 밀고 다니는 눈먼
도마뱀 같았고 메뚜기떼 같았고 찬바람에 죽어 가는 메뚜기의 무리가
눈앞을 어지럽게 하는 거요. 어떤 때는 도둑질을 해보고 싶었고 어떤 때는
살인을 해보고 싶었고 어떤 때는 여자에게 폭행을 하고 싶은 충동, 심지어
눈멀고 문둥병에나 걸려라! 하고 외치기도 했었소. 무서운 자학, 당신에
대한 추억과 바늘끝만한 가냘픈 희망이 없었다면 난 아주 망가져 버렸을
거요. 어느 한 곳 몸을 실어볼 곳이 없었소. 아아, 그만둡시다. 이런 말
왜 하는 걸까. 지금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
인실은 오가다의 외투를 벗어 도로 오가다 등으로 해서 걸쳐준다.
"추워요."
"히토미는 춥지 않아?"
"견딜 만해요. 한데 눈이 왜 안 오실까. 올 겨울엔 아직 눈이
안았어요."
"눈 얘기는 왜?"
"눈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도둑질 살인 얘기할 때, 얼굴을 푹
싸버리는 털모자와 우장같이 큰 털옷 생각도 하구요."
"그래요? 탄띠 두르고 총대 메고 북만줄 누비는 생각 말이오?"
'알면서 괜히 저런다.'
인실은 집을 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다. 역시 작은
발이었다. 꼭 맞는 검정 구두를 신은 발은 집에서처럼 초라하지는 않았다.
"우리 걸어요."
인실이 일어섰다.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걷는다.
"실은 나 아까 이곳에 들어오지 않으려 했소."
오가다가 말했다.
"왜 그랬어요?"
"히토미를 데리고 갈 곳이 있어서."
"어딘데요?"
"그걸 미리 말할 수는 없어요. 말하면 안 갈 거구, 가보면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그런 곳이거든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곳이오."
"짐작이 안 가네요."
"히토미는 날 믿지요?"
"믿어요."
"그럼 날 따라와요."
오가다의 어투에는 다소 격렬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다짐두지 않아도 따라갈 건데, 나 당신 무서워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창경원에서 나왔다.
"걸어갈까,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갈까."
"먼 곳이에요?"
"상당히."
결국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시내를 벗어났는데 인실은 어디 가느냐
묻지 않았다. 택시가 간 곳은 조용한 산장이었다. 인실은 그곳이 조용하의
산장인 것을 알지는 못했으나 산장이라는 그 자체에 긴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인실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산장지기 노인이 나왔다.
아가다에게 인사를 했으나 인실에게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찬하가 나타났다. 그는 인실에게 스스로 인사를 했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하듯. 인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그에게 답례를 한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세 사람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ㅇ간 뒤 비로소 오가다는
"조찬하 씨. 이분은 조찬하 씨요. 나하고 함께 나왔어요."
"앉으세요. 이름 같은 거 모르면 어때요."
세 사람은 마주앉는다. 인실은 어디서 보았던 것 같은 생각에서
조찬하를 쳐다본다.
예의 그 맑고 가차없는 눈빛으로 남자와 함께, 그것도 일본 남자와 함께
외딴 곳을 왔는데, 추호도 어색해하는 것 없이 쳐다본다.
'대단한 여자로구나."
"나는 죄인입니다."
순간 찬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인실씨께서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지요."
"무슨 소리 하는 게요."
오가다가 나무라듯 말했다.
"이 친구 아버지가 일본서 작위를 받았다 하며 저러는 거요. 소심한
것도 일종의 병이지."
인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제 그의 형을 만났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언제였던가 강선혜로부터 들은 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명희선생님의,"
이번에는 찬하의 낯빛이 변했다.
"어떻게 아십니까?"
"전 명희선생님의 제자예요."
"그, 그렇습니까?"
흐트러진 찬하 모습을 오가다는 유심히 쳐다본다. 이 사내의 상처,
그것은 오랫동안 오가다에게는 의문이었다. 상처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은 없지만 오가다는 항상 찬하로부터 그것을 느꼈다. 찬하는 인실의
눈빛에서 모든 것을 A깨닫는다. 이 여자는 내 사장을 다 알고 있다.
"명희선생님, 지금 고생하고 계세요."
인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찬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렇게 흩어진 찬하를 오가다는 한번도 본
일이 없다. 이렇게 흩어지리라 상상해본 일도 없다.
"꼭 아시고 싶다면 말씀드리겠어요."
인실은 형 조용하라고는 전혀 다른 찬하에게 믿음을 가지며 말하였다.
명희의 의사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고 싶습니다. 꼭 알고 싶습니다."
"시골에서 교편을 잡고 계세요. 보통학교에서, 그것도 촉탁으로요."
인실은 자기 자신이 야학의 선생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항상 그 자신이 여자 대학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야학교의
선생이라는 사실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째서 명희에 대해서는 아픔을 느껴가며 말을 했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하는 오가다의 존재, 말을 전해주는
인실의 존재까지 까맣게 잊은 듯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형수님은 결백합니다!"
별안간 그이 입에서 밀려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잘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손님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창가에 가서
등을 돌리고 선 채 밖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오가다와 인실은 석상같이 굳어져 탁자의 한 곳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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