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대제
313년 6월,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324년 경쟁자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의 단독 황제로 올라선다. 바로 그 해 그는 놀랍게도 이 무명의 도시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 수도로 결정하고 제국 전역의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벌인 6년 간의 공사 끝에 330년 5월 11일, 자신의 이름을 붙인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준공식을 열고 정식 수도로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고향은 지금의 크로아티아인 나이수스란 소도시였고, 일반 장교에 불과했지만 몸을 일으켜 4황제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출세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반인 브리타니아, 갈리아, 스페인에서 힘을 키워 라이벌들을 하나씩 제압해 가며 단독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가 휘하 군대들에게 황제로 추대를 받은 장소는 제국의 최변방이었던 브리타니아의 요크였다. 그럼에도 그는 천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훨씬 동쪽인 이곳으로 옮겼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정작 그 이유를 글로 남기지 않았고, 동시대인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런 엄청난 사업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많은 신화와 전설이 생겨났지만 물론 모두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이곳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 막바지에 와서는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로마 제국을 완벽히 통일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내전이 한창이던 324년에 비잔티움을 공격했지만, 리키니우스군이 잘 막아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해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이틀 간의 전투 끝에 배 130척과 병사 5천을 수장시키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제해권의 장악으로 보급이 원활해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장악할 수 있었고 결국 리키니우스를 제압하고 로마의 단독황제에 올랐다. 황제는 이 전투를 치르면서 비잔티움이 아주 가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합리적인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는 있다.
첫째는 난세인 당시를 감안하면 이곳이 천연의 요새이기 때문이었다.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으로 둘러싸인 삼각형 반도에 위치한 비잔티움은 육지 쪽만 잘 막으면 되었고,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금각만 쪽은 쇠사슬로 입구를 막으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봉쇄를 한다고 해도 소아시아와 워낙 가까워 야음을 틈타 작은 배로도 왕복이 가능했다. 또한 트라키아의 곡창지대와 부근의 풍부한 어장도 겸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평시에는 유럽과 아시아,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요충지라는 사실이다. 이 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면 각지의 물산이 집결하는 최고의 상업도시가 될 수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교 공인에 그치지 않고 제국 전체의 그리스도교화를 밀어 부치기 시작한 황제에게 있어 그리스도교화가 훨씬 더 진행된 그리스어 권인 이 곳이 새로운 수도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곳은 그리스도교라는 말이 처음 나온 장소이자 성 바오로의 선교기지이기도 했던 안티오키아처럼 완전히 동방으로 쏠려 있지는 않았다. 당시 《신약성서》 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었다. 사실 로마의 뿌리 깊은 공화정과 이교 전통은 그가 구상하는 전제적이고 그리스도교화 된 제국과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이렇다 할 전통이 있는 것도 로마화가 철저하게 진행된 곳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중요한 기존 종교의 중요한 신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가 보기에 이탈리아는 이제 변방에 불과했던 것이다.
네 번째로는 수도 로마 자체의 쇠퇴였다. 당시 로마와 이탈리아는 말라리아의 창궐로 인구가 격감했고, 이미 그의 전대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부터 정제와 부제 4명 중 아무도 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정도였다. 무속적 차원이긴 하지만 로마는 천년의 운을 다하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있기도 했다. 제국의 무게 중심은 누가보아도 뚜렷하게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새롭게 등장한 동방의 강적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에는 이곳이 더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은 서기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 1세에게 참패를 당하고 포로가 되어 왕이 말에 오를 때 인간 디딤돌이 될 정도로 큰 수모를 당한 바 있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본인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37년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다가 중간에 병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