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을 중심으로 알타이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극동에 이르는 미개척의 시베리아 벌판에는 인간의 거주에 적합한 지역의 수만큼이나 많은 종족들과 다양한 언어들이 독자적인 세계와 우주관을 구축하며 존재하고, 이 지역의 문화의 다양성과 개별성은 관련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까지도 바이칼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접근을 가로막는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형성하기도 한다.
태고이래 여전히 바이칼은 인간의 손길과 입체적인 이해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신성하고 두려운 존재로 베일에 싸여있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바이칼은 민족의 시원문제와 관련하여 끊임없는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최근 들어 과학과 고고학에서의 성과들에 힘입어 보다 더 객관적이고 전방위적인 접근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유전자학의 발달은 화석상태의 발굴 자료 등에서 DNA를 추출하고, 현재 전 지구상의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면서 인류의 기원과 이동경로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인 탐사와 지리학적인 연구에 최근의 기술력이 접목되어 바이칼 호수의 심저부에서 온천이 대량으로 용출되고 있다는 사실마저 파악함으로써 위도 등 형태적인 요소만으로는 인간의 거주조건으로 설명하기 힘든 혹독한 추위가 지배하던 지역이 오히려 고대인이 거주하기에 합당한 빙하사이에 고립된 오아시스와 같은 열수광산의 거주적합지였을 수도 있다는 추론까지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성과는 한반도에 거주한 고대인들이 남방계열에서 이주한 일단의 부류와 함께 해빙기 이후 바이칼지역의 대규모 홍수 등으로 인해 거주영역을 확장하는 가운데 동남진한 북방인의 계열이 혼재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에도 설득력을 더해준다. 빙하가 북반구의 상당부분을 덮고 있을 때, 고립된 해빙지구인 바이칼은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지구상의 여타지역에서 흔적을 찾기 힘든 독특한 동식물의 존재를 가능케했을뿐만 아니라 열수가 솟구치는 오아시스 지역의 고대 거주민들이 독특한 고유의 문화를 발생시키는 물리적인 환경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환경은 고대 바이칼인1)들의 문화발전의 토대를 형성하게 하였고, 해빙기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종족 이동에 따라 알타이와 중앙아시아 지역과 극동 아시아 지역으로 고대인들이 삶의 영역을 확장시켜가는 과정에서도 서로의 문화를 이어주는 원형들을 유사한 형태로 보존하며 오늘에 이르게까지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의 이동경로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를 띠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일방적으로 북에서 남으로 혹은 동이나 서로 그 방향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동의 주체가 알타이로 향했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극동으로 전진하였을 수도 있고, 다양한 방향의 이동이 반복되면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어, 이동의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신석기인들에 관련된 고고-인류학의 발굴과 연구성과 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각종의 도구 등 물질문명의 발전과 유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들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에서 넓게 분포하는 암각화와 사슴-곰 등의 토템과 같은 정령신앙과 시베리아 샤먼의 존재와 각 지역에서의 변이형태들에서 짐작이 되는 토속종교의 형태들이 보다 더 포괄적인 접근과 적극적인 해석을 요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구체화된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수되어지는 전설과 신화, 그리고 민담들은 바이칼인들의 이동과 문화복합의 형태를 가시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료의 보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의 연구는 대부분 구 소련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소비에트 학자들의 바이칼인들에 대한 연구결과물의 축적된 자료의 양과 시도된 과학적인 방법론에서 절대적으로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데올로기적인 해석태도와 고고학에서의 구석기시대에 대한 편향적인 연구형태 및 민속문학에서의 알타이계 튜르크인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국지성은 바이칼을 정점으로 하는 제 종족들, 즉, 바이칼인들의 삶의 공시-통시적인 측면에 다가가는 한계를 스스로 노정해왔음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바이칼인들의 민속문학은 몇몇 지역을 거점으로 활발하게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그 첫 번째로 알타이를 손꼽을 수 있다. 다수의 민속문학자들은 알타이에서 동과서의 민속문학적인 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알타이 이서 지역의 알타이어계 튜르크인의 민속문학적인 유산과 알타이 이동 지역의 야쿠트, 부랴트, 에벵키, 몽골 등의 민속문학의 특징들이 구체적인 이야기와 신화 그리고 서사시의 형태로 알타이에서 발견되어 채록되면서 이와 같은 주장들은 신빙성을 확보해왔고, 바이칼인들의 문화중심을 바이칼지역에서 오히려 고르노 알타이 등 알타이 산악지역으로 이동시켜 고찰하는 연구태도를 낳게 하였다.
기실 알타이 지역에서 흔한 이야기인 '알타이인의 아버지인 탄자강이야기'에서는 알타이인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몽골계와 튜르크계 종족들의 혼혈적인 형태까지 염두에 두는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베리아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이 되는 무속적, 신화적인 존재로서의 개구리의 모티프를 보여주는 등 시베리아의 샤먼적인 고대종교의 성격과 종족 분쟁의 역사적인 이야기까지 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탄자강이 개구리 혹은 개구리의 왕을 지칭하는 고대 알타이어 단어임을 상기해 보면, 부여의 시조와 관련된 '금와왕 설화'와 알타이 지역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알타이'가 황금이란 의미를 가짐을 염두에 두면, 금와왕은 알타이 개구리의 왕이라는 의미로 설명이 가능하고, 탄자강 역시 알타이 개구리의 왕이란 의미를 갖고 있어 '금와왕=알타이개구리왕=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이란 식으로 연관성을 추정해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만주지역과 알타이 지역의 교류와 문화복합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음성적인 자질의 편차에 따라 별개의 단어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모티프들 역시 알타이인의 신화의 이름으로 재구성되어 등장하는데, 테미르카안 혹은 테미르미제를 하늘 신의 중심으로 삼고, 영계를 다스리는 신 텐게리네 혹은 텐게리, 사람을 잡아먹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 델베르겐,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장사인 코본오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화의 주인공들은 동시베리아의 땅에서도 조금씩 다른 명칭으로 발견되고 있다.
바이칼인들의 주무대였을 동시베리아 지역이 스텝적인 성격으로 민속문학적인 요소가 예술적인 이야기로 발전하면서 계속 축적되지 못하고 전설과 설화적인 성격에 머문 것과는 달리 주봉이 4500미터를 넘는 험한 알타이산맥의 지리적인 요새성과 동과 서를 아우르는 종족들의 국제적인 집단 문화교류의 마당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알타이지역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는 중요한 열쇠를 지닌 민속문학적인 자료가 보다 더 완성된 형태로 풍부하게 전해져왔을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중심의 형성에서 바이칼을 중심으로 하는 동시베리아지역과 알타이지역의 선후관계와 문화복합과 전파의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은 민속문학적인 자산들의 연구와 함께 그 유사성과 특이성이 검토되면서, 일정한 부분 객관적인 서술의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민담의 유형화를 시도하면서 특정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야기체의 모티프가 인근지역에서 변이체로 나타나는 양상들과 유사한 개념의 어휘 및 문화적인 상징들로 확산되어 드러나는 구체적인 모습들은 언제나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가운데 바이칼의 의미 및 어원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 보면, 바이칼인의 문화가 중앙아시아에서 동시베리아에 걸친 드넓은 대륙에서 갖고있는 공유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바이칼은
옛 몽고어로 바이골Bajgol, 뵈갈Bogal,
부랴트어로 뵈골Bogol, 혹은 보골Bogol,
야쿠트인에게는 바야골Bajagol 혹은 뵈골Bogol, 보골Bogol,
발치르인에게는 바이겔Baigel,
네넷인에게는 보이겔Bojgel 혹은 보아이겔Boajgel, 바이겔Bajgel 등으로 불려왔는데,
대체로 '바이'와 '칼'에 해당하는 두 단어가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대의 바이칼은 토속지명이 러시아어의 음성적인 영향을 받아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그 근거로 시베리아 무속Shamanism에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샤먼에 해당하는 단어가
칼묵어에서는 보Bo(남자샤먼),
고전문헌의 몽골어에서는 뷔게Buge,
부랴트어로는 뵈Bo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샤먼을 지칭하는 말로 알타이와 중앙아시아지역의 알타이어계 튜르크어에서 Bo가 아닌 캄Kam 혹은 쿰Kum 등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Bo는 알타이 이동의 바이칼 인근지역에서 극동으로 이어지는 동시베리아에서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의 샤먼을 의미하는 부랴트어 뵈Bo의 음가를 한국에서는 주로 '뵈'로 일본에서는 '부'로 번역하기도 한다.
사모예드와 네넷족의 샤먼이 사설로 늘어놓는 구전 시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보' 혹은 '뵈'에 삼인칭 단수 혹은 단수 소유격을 지칭하는 접사인 'j'와 'aj' 등이 붙어 보이Boj와 보아이Boaj 등으로 변모하는 네넷어의 일상회화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3) 이는 무속언어가 언어형태론의 변이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새로운 문법적인 영역의 형태로 언어변화를 유도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샤먼은 일반인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보Bo에서 Baj 등의 전이체로 변화한 것은 신계와 인계의 경간을 넘나드는 신성한 존재의 담지자인 샤먼이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거나 혹은 주위사람들이 샤먼을 부르면서 Bo + 호격형태 접미사인 'j'와 'aj'등을 붙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바이Baj의 형태를 획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돌간족에서는 사냥의 수호신을 바이-바야나이Baj-Bajanaj로 부르고, 북유라시아의 엥가나산족과 유카길족에서는 수모신을 비디-냐미Bidi-njami로, 돌간족에서는 샤먼을 보카이Bokoj 등으로 부르는 경우 역시 샤먼의 지칭어인 뵈Bo혹은 보Bo의 변이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코리 부랴트Khori-Buryats인은 무당을 지칭하는 말로 뵈Bo 이외에 아르바이Arbaj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유음 r의 발음이 약화되어 아바이Abaj로 불려지기도 하였다(Zhamcharano(1909),386-387).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남자무당을 의미하지만 서부지역의 부랴트인들 사이에는 상당한 속세의 교육을 받고 교사적인 입장에 서게된 적이 있는 박시Baksi였던 다바이Dabaj라는 이름의 소녀사먼에 대한 이야기가 구전되는 것을 미루어보면 극히 한정된 경우이기는 하나 바이Baj가 여성사먼을 지칭할 경우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Zhamcharano(1909),380-381).
이와 같은 음가의 변이는 기원전후의 시기에 이미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동시베리아지역에서는 샤먼을 의미하는 뵈와 바이가 혼용되면서도 대체로 뵈의 형태로 남아있었고, 바이의 경우에는 족장 등의 지배계층이나 노인, 존경받을 만한 인물 등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호칭으로 세속화되어 사용되었다. 예외적인 경우로 제의행사에서 희생제물이 되는 암말 등의 비인격체에도 바이가 사용되는 경우를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알타이 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바이Baj가 세속적인 존칭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때에 따라 비이Bij의 형태로 변이되어 사용되기도 하며 이름의 앞이나 뒤에 덧붙여 사용한다. 사마르칸드와 탈라스 사이의 시르-다리아강 유역에서 부족연맹체성격의 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오구즈(혹은 우구즈)인의 5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부족장인 카안의 계보를 보면 바이라는 존칭이 사용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대체로 바이는 카안 계열의 최상위계층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그 하위의 남성들에게 사용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키르기즈인의 영웅서사시이자 알타이계 튜르크인의 집단 문화 유산인 서사시 '마나스'에 드러나는 영웅 마나스한의 조상의 계보를 살펴보면 바이가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름이 '바이'로만 구성된 형태도 찾을 수 있다.5)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동시베리아의 알타이어계 몽골인이나 퉁구스(혹은 에벵키)인들이 샤먼을 지칭하는 말로 뵈Bo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알타이어계 튜르크인의 경우에는 샤먼을 지칭하는 말로 캄Kam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알타이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바이Baj가 주술적 혹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아아시아에서 샤먼의 북을 bura 등으로 지칭하는 측면에서 알타이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존칭 바이Baj에 종교성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보다 더 세밀한 접근과 어형변화의 증거가 제시되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바이칼인이 호수의 이름에 샤먼을 뜻하는 바이Baj를 붙였다는 것은 바이칼이 무속신앙의 대상이자 주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원시의 바다, 낭만의 바다, 풍요의 바다는 인근 바이칼인의 삶과 죽음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한없는 동경과 함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바이칼 자신이 무속이었고, 샤먼이었다. 어원이 지니는 의미를 보면 바이칼을 무속의 바다 혹은 샤먼의 바다라고 설명해도 하등의 논리적인 비약을 발견할 수 없다.
'칼'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이칼의 동부 부랴트인과 에벵키(퉁구스)인 그리고 몽골인들이 혼재된 서부 몽고지역의 회브스괼Xovsgol 등의 지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넓은 계곡지를 괼, 골, 굘, 곌 등으로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근 키르기즈의 이식쿨 호수의 경우에는 따스하다라는 의미와 넓은 계곡지의 의미가 복합되어있는데, 알타이 이동지역에서 사용되는 괼, 굘, 골 등의 발음이 알타이 이서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쿨(꿀) 혹은 콜(꼴) 등으로 변이되어짐을 관찰할 수 있다.
괼, 골, 갈, 쿨, 콜 등은 계곡과 호수를 모두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스트 우랴딘 부랴트 자치구에서 재현된 울레이 타일라간 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goli tailagan (골짜기의 정령에게),
goli gurbanda (골짜기 혹은 호수의 세 지배자에게) 등의 샤먼의 주술적인 말에서
골gol이 물을 담고 있는 골짜기 혹은 호수의 의미로 사용되는 고대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바이칼'에 '샤먼의 호수'라는 의미가 있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바이칼 자신이 샤먼인 것으로 고대인에게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골인들이나 바이칼 주변의 바이칼인들에게 '바이칼'의 의미를 물어보면 대부분의 대답이 '풍부한 바다', '풍요로운 호수', '부자 호수'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아마도 소비에트기를 거치면서 샤먼적인 요소가 배척의 대상이 되었던 점도 그 원인일 수 있고, 샤머니즘 자체가 쇠퇴하면서 일반인의 기억에서 무속적인 특징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도 반영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7세기 이후 러시아의 실효적인 지배가 시작되면서 상인의 왕래가 활발해지고, 이에 따라 바이칼을 배를 이용해서 건너게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재물을 호수에 제물로 바치는 관행이 자리잡게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값비싼 금은보화가 바이칼 항해와 어로작업의 안녕무사를 빌기 위해 제물로 호수 속으로 던져졌다는 기록은 이르쿠츠크의 박물관과 바이칼의 일반적인 관광안내서의 단골 메뉴가 될 정도로 오늘날의 바이칼인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바이칼에서 제물을 바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금은보화가 바닥에 그득할 것 같은 낭만적인 바이칼의 이미지에서 무속의 바다이며 샤먼 그 자체였던 바이칼의 실상으로 복귀하게 된다.
우상에 대한 숭배 혹은 제사 혹은 제물 공여 의식은 바이칼 주위에 산재한 우상신당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우상신당의 성격상 대규모 제물 봉정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이칼 주변과 알혼섬 일대에서는 희생을 바치는 장소의 규모에 따라 만칸 mankan, 자니그칸 janigkan 등으로 불린 제사터가 널려있으며, 이들 보다 그 규모가 더 크고 조직적인 특성을 보이는 부랴트인의 타일라간 tailagan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타일라간은 서부 부랴트인 Cisbajkal Buryats 뿐만 아니라 바이칼을 지나 몽골고원에 이어지는 부랴트인 Transbajkal Buryats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나타나며, 그 제사의 대상에 따라 농경, 목축, 어로 등의 특징을 갖는 제사형태를 보인다. 부랴트인 타일라간 가운데 발치르족의 타일라간에서는 바이칼에 대한 제사의식의 원형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있다.9)
초여름이 되면 부랴트인들은 알혼섬 혹은 현재의 이르쿠츠크 인근의 바이칼 주변에서 성대하게 타일라간 의식을 집전했고 제물을 바쳤다. 영 tengri 들 가운데 가장 영험이 있고 세력이 강대한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의 여신인 바이겔 하탄 Bajgel Xatan을 경배하기 위해 위대한(jexe) 타일라간이 개최되며 바이겔 하탄에게 희생이 바쳐진다.
초여름의 시기가 바이칼 지역의 농토에서 씨앗을 파종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바이칼 호수상의 특정 지역으로 추정되는 바이칼호수 인근 지역의 땅의 지배자인 다일란 노욘Dajlan nojon에 대한 경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바이겔 하탄 경배 의식 보다 후행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여름이 시작되는 때는 호수를 덮은 두터운 얼음이 모두 녹은 뒤 바이칼의 물결이 다시금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으로서 바이칼인들에게 다가오는 시점이다.
어로와 뱃길의 안녕무사를 위해 바이칼의 여신인 바이겔 하탄과의 조화로운 화해를 모색하려는 발원적인 성격이 다일란 노욘에 대한 경배보다 더 큰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다일란 노욘이 바이칼 인근의 일부 종족들에게는 바이칼인근의 대지를 포함하는 바이칼 호수의 주신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바이칼 인근 특히 알혼섬의 제사의식은 육지에서의 작업보다는 호수에서의 어로와 항해 등과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희생물은 대체로 말과 양 각각 한 마리씩이었으나, 짐승희생제의 이전에 인간희생제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들은 옵 우그리아 지역의 인간희생 관행과 관련하여 '자이말 Ja-j-Mal 신이 인간을 희생물로 받았다'는 주장을 한다. 쿠셀렙스키는 옵지역의 인간희생물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면서 만시족의 제의형태가 소스바강 인근에서 바이칼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11)
바이칼에서의 희생제의에 인간희생이 게재되어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전모를 찾기는 어렵다. 바이칼 연안에서의 타일라간 등과 같은 제의행사에는 마랄12)이나 양을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반해 16-7세기 이후로 접어들면서 상선과 대규모의 어선이 바이칼을 무대로 항해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겨나면서 알혼섬 인근과 바이칼의 중심부의 풍랑이 심한 지역을 지나면서 인간희생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전설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금색 비늘을 가진 물고기와 관련된 전설은 알타이인들과 이웃하는 동슬라브인들의 노브고로드 브일리나(러시아식 영웅서사시)의 '사드코 이야기' 등에서도 발견되고 대체로 전지구상에서 발견되는 테마이다. 바이칼에서는 상인에 의해 바이칼의 인당수에 몸을 던져지게되는 희생처녀가 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로 환생을 하여 신들의 세계인 바이칼에서 살게된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는 인간희생을 반증하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민담의 세계와 불교적인(라마불교) 영향이 접점을 이루는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더 많다.
소비에트 기에 접어든 이후 바이칼을 횡단하는 상선 및 어선들이 호수에 던지는 희생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전설들이 다수 발굴되어지고, 재물희생의 습속이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예부터 이어진 전통이라는 식의 견해가 개진되어지나, 문헌이나 자료 등으로 그 증거가 뒷받침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형태 수준에서의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바이'는 부랴트인과 몽골인들에게 '풍부'를 뜻하는 형용사이나,
의미의 근저에 '위대함'과 '신성함'로서의 '풍부'가 서려있는 것을 보면,
'바이'에는 단순하고 물질적인 자연적인 조건의 풍성함의 의미를 넘어서는 샤먼적인 신비가 포괄되어있음을 그리고 샤먼 - 뵈Bo에서 '베푸는', '위대한', '높은', '큰' 등의 의미인 종교적인 성격의 바이Baj로
그리고 샤먼의 기억이 흐려지면서 '풍부성'의 표상적인 의미가 부각되는 일상적인 단어로 그 성격이 변해왔음을 현재적인 의미에서도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칼이 '부유한 호수', '풍부한 호수'로 의미되건 '무속의 바다' 혹은 '샤먼' 그 자체로 이해되건 간에 바이칼을 둘러싸고 전해져 오는 전설과 민담들은 체계적인 연구의 대상이 된 적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채록조차 되지 않은 채 사장되어져 가는 이야기들이 있음을 생각하면,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서둘러 이야기들의 수집과 분류가 더 시급한 실정이다. 바이칼인들의 이야기와 알타이의 민속소설들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알타이인의 구비문학연구는 물론 고대인의 삶의 양태와 문화의 상호 관련성과 복합성에 대한 성찰도 보다 더 그 시각의 폭을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칼 지역에서 전래되는 구비문학은 현실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 모습으로 신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구비문학작품의 전승주체들 가운데 자연계와 인간세상을 중재하는 매개자적 존재였던 샤먼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야기들의 내용이 현실세계와 초자연적인 현상의 경간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형태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지역은 러시아의 실제적인 지배 하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18세기 초반 이후부터 20세기 초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는 시점까지도 공식적인 문어가 없어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구비적인 성격으로 머물러 있었고, 러시아 혁명이후에는 소비에트의 소수종족 교육정책에 따라 러시아어가 공식언어가 됨으로써 체계화된 자국어 문어는 아예 세상에 나타나지도 못하였다.
몽골과 알타이 지역의 영향을 받은 고문자가 화석언어로서 언어의 기능을 상당부분 상실한 채 그 흔적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13). 소비에트 체제가 강화되면서 미신의 영역으로, 타파의 대상으로 전락한 비밀스러운 종교적인 성격의 샤머니즘과 그와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바이칼의 민속문학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되었던 이야기와 노래들도 상당수 그 원형이 훼손되거나 소실되었다. 바이칼의 구비문학은 그 내용이 현시점에서 수 만년을 뛰어넘는 빙하기에 대한 희미한 기억마저 담고 있고, 바이칼 인근의 알타이어계 다수 종족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기도 해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양민종 논문중에서 발췌
운영자
첫댓글 바이칼문화가 미신적 샤머니즘적이라는 이해와 해석은,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제한된 세계관의 한계로 인해 나타나는 우리만의 입장이라 여겨집니다. 수천년전의 진실을 오늘날의 우리가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보는 형식 수준으로는 올바로 비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의 견해도 거기에 속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그래도 나름대로의 관찰을 한번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역사에 대한 견해 또한 text의 한계에서는 진실규명이 어렵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만 해석하는 것 또한 진실과는 아주 색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오류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을 꼭 무당의 무속과 결부
시킨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무속이 행하는 자태를 가지고 옛날의 단군조선 때 천신을 향해 제사하는 태도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자료의 한계로 인해 생성되는 하나의 오류와도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군조선 때 천신을 향해 제사하는 형태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가 홍수 후 즉시 큰 돌들을 이용해 제단을 쌓고 짐승을 잡아 불을 지펴 연기를 통해 하나님께 제사하던 모습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마니산의 첨성단부터 한국과 인근에 있는 고인돌의 형태도 이와 근거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또한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의 해석에서는 같이 연이어 해석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 할 수 있습
왜냐하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죠....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죠... 혈연, 문화, 환경, 지형 등등...그러나 성경에서는 오히려 이 바이칼에 대해서도 넌지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기원전 2500여년전이라고 하는데 바벨탑 사건은 2340-50년경입니다. 그 때 모든 민족이 흩어질 때 '욕단'이란 사람이(여기의 단 자가 단군의 제단 단 자와 같음) 바이칼 쪽으로 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창세기 11-12장을 참조해 보십시오...거기에 나오는 스발이 지금의 만주 위에 있는 시베리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가 rose of sharon 이라고 나오는데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샤론의 꽃 예수에 대해 들어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바로 이 무궁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무궁화의 학명 또한 rose of syria 라고 나와 있습니다. 시리아가 바로 앗수르 혹은 지금의 이란을 말하며 바벨탑 사건의 장소입니다. 성경에는 이 욕단이 바벨탑 때에 그 지역에서 동쪽으로....즉 동아시아...혹은 한반도 쪽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 우습게도 연대가 너무 일치하는 때입니다. 그 때 바이칼 호수를 지나 왔다고 생각하시면 되고 그 때 거기서 갈라진 사람들이 북극으로 간 에스키모와 아메리카를 지나 지금까지 있는 인디언들....우리와 혈통이 같다고 하지요.... 바로 성경과 우리민족과 이 지역들의 명칭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
싶습니다. 바벨 할 때의 벨은 브와 엘의 합성어인데 엘은 하나님을 말하고 바브는 문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로 향하는 통로라는 것이죠....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상징성 언어인 아리랑또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아리랑 또한 원어로는 알이랑 인데....해석하자면 알 과 함께....즉 이랑이라는 조사가 바로 ~와 함께라는 말입니다. 즉 알과 함께라는 말인데...이 알은 다른 말로 중동에서 말하는 알라, 이스라엘이 말하는 엘....즉 신 이라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신라건국 박혁거세나 김알지 등이 왜 알에서 태어났느냐...이것은 실화가 아니고 상징을 말하는데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왕이 매우 주위의 눈들을 신경쓸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나라가 서는데 여타 다른 곳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이죠...그러나 그러한 왕이 신으로부터 나온 왕이라고 상징화한다면 어느 누구도 반발할 의사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죠....왜냐하면 신이 세운 자에게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신을 대적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알을 상징화했습니다. 근데 그 알 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강한 힘을 지녔느냐...결국 새의 알일 뿐인데...왜 힘이 있느냐....그것은 바로 당시에 한국의 초기부터 전수된 하늘의 신에 대한 발음이 '알'이기에 그 알과 동일한 발음인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강한 뉘앙스를 풍
풍기게 된다는 것이죠....그래서 알이랑이라는 언어가 나온 것입니다. 즉 신과 함께 라는 것이죠...정리해서 말하자면 무궁화를 통해 출발지인 바벨탑 사건의 지역에서부터 즉 시리아에서부터 지금의 한국에 오기까지는 그 험산준령을 그 민족 스스로 나서기 보다는 절대적인 신적 존재에 의지해야만 하였고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발생된 노래말이 아리랑, 즉 알이랑이라는 것입니다. 노래 가사의 의미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신과함께 신과함께 신과함께 말입니다. 신과 함께 고개(알타이 산맥과 기타 산맥)를 넘어간다. 이러한 우리의 민족의 대열을 버리고 이탈하는 자들은(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즉 이말은 저주가
아니라 그런 상황 즉 헤어지지 않고 싶다는 소원이 담긴 염원입니다). 이러한 노래말이 자연스레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갑자기 생긴 나라도 아니면 아무 근거도 없이 생성된 나라가 아닙니다. 주위의 환경도 우리나라와 전혀 관계 없이 생긴 것이 아니듯 말이죠...이 바이칼도 중동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고 역사와 관련없는 것 또한 아니라고 말할수있죠... 죄송합니다. 두서없이 적어봐서... 하지만... 위의 저의 글도 일종의 유추이지만 가장 가능성 있을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서양기독교사관에 매여 배타성을 지녔거나 한다면 저를 무시할 수도 있지만 말이죠....
모든 의견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귀하의 의견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치 논문을 쓰려면 단 몇 단어도 누구에게서 참조 인용했다는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