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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 일가님!
그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최근 일가님께서 연재하신 산당집 번역문을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생각난 것이 있어 그 내용을 올려 봅니다.
한글판 연촌공파족보 발행에 대비하여 1996년판 중랑장보에 실린 선조들의 개인별 기사(행장)를 제가 좀 번역해 보았는데
산당공의 증손인 첨지중추부사 福男 3형제분과 생원공(휘 淑)의 현손인 樂壽 4형제분의 기사를 "견본"으로 여기에 올려봅니다.
제가 족보 개인별 기사 57명을 번역해 보았는데 77 곳의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다른 집안의 선조들의 기록이나 특수한 사정을 모르는 제가 보아도 이처럼 오류가 많은데
地域名이나 人名 日字 등은 잘못 쓰여있더라도 발견할 수가 없고 제가 모르고 그냥 넘어간 것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붉은 글자는 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표시한 것입니다.
번역문 내용을 보시고 잘못 번역하였거나 또 다른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오류들은 직계 후손이 아니면 편집자들은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직계 후손들이 이를 모두 찾아내어 다음번 족보 발행에 반영하도록 수정자료가 올라와야 할텐데
우리 일가님들은 그런 준비들을 하고 계신지 걱정이 됩니다.
우보 최 병 철 올림
彦潾子 福男 복남
字德胤僉知公幼志屹然才慧超越持操介潔玩好性理絶無兒戱妙年中鄕試入京晦齋李先生大加敞重回如某年雖少期之隆顯無所不宜
宣廟甲戌相臣薦除光陵叅奉己亥陞直長以疾不就丁酉島夷之亂興其弟祉男吉男子澈水義糧翰南原兵纇以無飢己亥上聞之甚嘉回急亂邦旺多活人命召拜僉知中樞府事以特恩入士興曺南溟李栗谷爲忘年反南溟日氣味心事峻潔員固栗谷回不爲崖異之行衒餙之態者始見此人竟未得展布所蘊而歿惜哉大司訓未能齋朔寧崔尙重同副承旨坡平尹濟弘同撰行狀吏判延安李肇源撰墓長忌一月二十一日墓靈巖郡新北面龍山里尺洞甑峴坤向有碣床望
配咸陽朴氏叅奉文精女忌九月二十四日墓公墓合兆
*屹然(흘연) : 산이 높게 우뚝 솓은 모양. 介潔(개결) : 성질이 굳고 깨끗함. 隆顯(융현) : 지위가 높고 명성이 드러남. 展布(전포) : 말하다, 진술하다
*오류 : 大加敞重⇒大加敬重(창⇒경), 回如某⇒曰如某(회⇒왈), 興其弟⇒與其弟(흥⇒여), 水義糧⇒收義糧(거둘 수), 翰南原⇒輸南原(한⇒수), 兵纇以無飢⇒兵賴以無飢(실마디 뢰⇒힘 입을 뢰), 甚嘉回⇒甚嘉曰(회⇒왈), 入士⇒入辭(入謝?), 興曺南溟⇒與曺南溟(흥⇒여), 忘年反⇒忘年友(반⇒우), 南溟日⇒南溟曰(일⇒왈), 員固⇒貞固(원⇒정), 栗谷回⇒栗谷曰(회⇒왈), 衒餙⇒衒飾(희⇒식), 大司訓⇒大司諫(훈⇒간), 墓長⇒墓表(장⇒표)
자는 덕윤으로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뜻이 높고 재주가 뛰어나며 지조가 개결하고 성리학을 좋아하며 장난치는 법이 없었다. 젊은 나이에 향시에 합격하여 서울에 올라가니 회재 이언적선생이 매우 공경하여 말하기를 ‘모(公을 일컽는 말로 회재선생은 福男이라고 불렀겠지만 후손들은 차마 선조의 휘를 그대로 적지 못하고 避諱하여 某 즉 아무개 라고 적음)는 나이가 비록 젊어서 융현하였으나 이는 마땅하다’고 하였다. 선조 갑술년 상신의 천거로 광릉참봉에 제수되고 기해년 직장으로 승진하였으나 질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정유년 섬나라 오랑케들의 난에 그 동생 지남 길남 그리고 아들 철과 함께 군량을 모아 남원에 있는 병사에게 수송하여 군사들이 굶주리지 않았다. 기해년에 왕이 듣고 심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위급한 난리에 나라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다며 불러 첨지중추부사에 제배하니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이므로 입궐하여 사양(감사)하였다. 남명 조식 율곡 이이와 더불어 나이 차이를 따지지 않는 벗이 되었는데, 남명은 ‘기질과 마음쓰는 것이 준결하고 정고하다’고 했으며, 율곡은 ‘도도하여 남과 사귀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자랑과 꾸밈이 없는 자를 비로소 이 사람에게서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끝내 품은 바를 펴지 못하고 죽으니 애석하다. 대사간 미능재 삭녕인 최상중과 동부승지 파평인 윤재홍이 함께 행장을 짓고, 이조판서 연안인 이조원이 묘표를 지었다. 기일은 1월 21일이며 묘는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척동 시루고개 곤향으로 비갈 상석 망주가 있다.
배위 함양박씨는 참봉 문정의 따님으로 기일은 9월 24일 묘는 공의 묘와 합조이다.
彦潾子 祉男 지남
字智胤生明宗十二年丁巳公儀形魁梧性氣剛明治巳律身壎篪湛樂事親世盡定省之節居喪也逾哀敬之道丁酉再猘一家五叔姪氣充愾充天擧義募穀運輸軍營兵賴鎰全上聞甚嘉除禮賓寺奉事壽階通政忌一月十二日墓靈巖郡德津西新亭舊志楊洞壬坐有碣咸陽朴俊燮撰碣銘幷書
淑夫人綿城朴氏進士仲凝女生一子忌五月八日墓可的洞宜寧公墓上遷葬于公墓合祔
淑夫人晉州鄭氏通政宋一女生二子四女墓公墓雙兆
*儀形(의형) : 용모. 魁梧(괴오) : 체구가 큰 모양. 梧는‘대(大)’의 뜻. 律身(율신) : 자기 자신을 단속하여 법에 맞게 행동함. 壎篪(훈지) : 피리의 한 가지. 壎篪相和: 형은 壎을 불고 동생은 篪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형제가 화합함을 이르는 말. 湛樂(담락) : 풍류를 즐기다, 유락(遊樂)에 빠짐. 定省(정성) : 昏定晨省. 저녁에 부모님의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 일찍 문안을 드림. 猘(제) : 미친개 제 *정유재란
*오류 : 治巳⇒治己(사⇒기), 德津西⇒德津面(서⇒면)
자는 지윤으로 명종 12년 정사에 태어났다. 공은 용모가 빼어나고 품성과 기개가 굳고 명확하여 몸 다스리기를 법에 맞게 행동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풍류를 즐겼으며 부모를 모심에 혼정신성의 도리를 다하고, 거상은 슬프고 경건한 도리로 치렀다. 정유재란 때에는 한 집안 숙질 5명이 화가 충천하여 의병을 일으켜 양곡을 모아 군영으로 수송하여 병사들이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다. 임금이 듣고 심히 기뻐하여 예빈시봉사에 임명하였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기일은 1월 12일이며 묘는 영암군 덕진면 신정 옛 지양동 임좌로 비갈이 있으며, 함양인 박준섭이 비갈명을 짓고 병서하였다.
배위 숙부인 면성박씨는 진사 중응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기일은 5월 8일이며 묘는 가적동 의령공묘 위였으나 공의 묘소에 이장하여 합부하였다.
배위 숙부인 진주정씨는 통정대부 송일의 따님으로 두 아들과 네 딸을 낳았다. 묘는 공의 묘와 쌍조이다.
彦潾子 吉男 길남
字士胤宣務郞典牲署主簿丁酉國亂陪兄福男祉男興姪澈倡義爲幕穀有司收義糧南原兵賴而無飢以功受職嘉淸辛酉十一月三日生崇禎戊寅十月十六日卒享年七十八墓靈巖郡三湖面龍塘里佳帝島甲向移葬于金井面細柳里前嶝西向癸坐
配晉州鄭氏惟一女察訪倫石玄孫忌五月四日墓公墓雙兆移葬于金井面細柳里前嶝西向公墓雙兆睦祭九月九日
*오류 : 興姪澈⇒與姪澈(흥⇒여), 幕穀⇒募穀(막⇒모), 嘉淸⇒嘉靖(가청⇒가정)
자는 사윤. 선무랑으로 전생서주부를 지냈다. 정유년 국난 때에 형님인 복남 지남을 모시고 조카 철과 함께 창의하여 곡식을 모으는 유사가 되어 양곡을 거두어 남원의 군사들이 이에 힘입어 굶주리지 않아 그 공으로 관직을 받았다. 가정 신유년 11월 3일 태어나 숭정 무인 10월 16일 졸하니 향년 78세이다. 묘는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 가제도 갑향이었으나 금정면 세류리 앞 고개 서향으로 이장하였으며 계좌이다.
배위 진주정씨는 유일의 따님으로 찰방을 지낸 윤석의 현손이다. 기일은 5월 4일이며 묘는 공의 묘와 쌍조인데 금정면 세류리 앞 고개 서향으로 이장하였으며 공의 묘와 쌍조이다. 제삿날은 9월 9일이다.
다음은 또 다른 분들의 내용이니 참고하여 보십시요.
彦淸子 樂壽 낙수
字敬叟生員忌六月十三日
配安東權氏叅判仁洽女文忠公陽村近后忌十二月十五日墓上道洞考墓白虎嶝艮坐合兆舊譜始興矜川金佛菴甲戌年移葬于考墓階下合兆
*오류 : 矜川⇒衿川(불쌍히 여길 긍⇒옷깃 금)
자는 경수. 생원으로 기일은 6월 13일이다.
배위 안동권씨는 참판을 지낸 인흡의 따님으로 문충공 양촌 근의 후손이다. 기일은 12월 15일로 묘는 상도동 아버지의 묘 백호등 간좌로 합조이다. 구보에는 시흥 금천 금불암으로 되어있으나 갑술년에 아버지 묘 계단 아래로 이장하였으며 합조이다.
彦淸子 稀壽 희수
字仁叟嘉靖庚寅生隆慶戊辰生員晩爲安東判官見官長年少耻折腰投紱歸家而終萬歷辛卯三月十三日卒
配光山金氏判官仁瑞女贈領議政光山府院君孟權曾孫辛卯生丁未四月十二日卒墓楊州東面金村鳳頭山養正谷未向雙兆移葬于忠南公州郡灘州面加尺里山五一番地子坐合兆
西紀一九九五年乙亥十月 日十五世孫明鎬謹撰慶州人雲波金俊植謹書碑文
*投紱(투불) : 인끈을 던지다, 벼슬을 그만두다
*오류 : 萬歷⇒萬曆(지낼 력⇒책력 력), 灘州面⇒灘川面(주⇒천)
자는 인수. 가정 경인년에 태어나 융경 무진에 생원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안동판관이 되었는데 부사의 나이가 젊은 것을 보고 허리를 굽혀야 할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인끈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 마침내 만력 신묘년 3월 13일에 졸하였다.
배위 광산김씨는 판관을 지낸 인서의 따님으로 증영의정 광산부원군 맹권의 증손이다. 신묘년에 태어나 정미년 4월 12일에 졸하였으며 묘는 양주 동면 금촌 봉두산 양정골 미향으로 쌍조였는데 충남 공주군 탄천면 가척리 산51번지로 이장하였으며 자좌로 합조이다.
서기 1995년 을해 10월 일에 15세손 명호가 글을 짓고 경주인 운파 김준식이 글씨를 쓴 비석이 있다.
彦淸子 得壽 득수
字德叟號雲菴以孝學行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叅贊官集賢殿直提學公性至孝好性理之學以德行著世以執義不就宣廟國亂奉母至朔寧而母卒賓于山中晝夜號哭賦至負魂箱隱於林間賦荀以爲有奇貨欲宮之及其開見乃魂箱也賦赤感動指生路而去墓在京畿道楊州郡渼金面一牌里養正洞西釜谷
淑夫人靑松沈氏承仕郞沆女墓公墓府
*荀(수득) : 찾아 얻음
*오류 : 賓于山中⇒殯于山中(손 빈⇒염할 빈), 賦至負魂箱隱⇒賊至負魂箱隱(부⇒적), 賦荀⇒賊荀(부⇒적), 欲宮之⇒欲害之(궁⇒해), 賦赤感動⇒賊亦感動(부적⇒적역), 墓公墓府⇒墓公墓祔(곳집 부⇒합사할 부)
자는 덕수 호는 운암. 효성과 학문과 행실로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집현전직제학에 증직되었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성리학을 좋아하여 덕행으로 세상을 드러나고 정도를 지키며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국난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삭녕에 이르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산속에 빈소를 마련하고 밤낮으로 호곡하였다. 적들이 다가오자 혼백상자를 지고 숲속에 숨겼는데 적들이 찾아내어 진귀한 물건인줄로 생각하고 해치려고 하며 그것을 열고 보니 혼백상자였다. 적들도 감동하여 살 길을 가르쳐 주고 가버렸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일패리 양정동 서쪽 부곡에 있다.
숙부인 청송심씨는 승사랑 항의 따님으로 묘는 공의 묘와 합장이다.
彦淸子 眉壽 미수
字甲叟牧使公自幼天性好學經史無不通意犬好騎焉善射世福能父能射乙酉登第歷振威丁亥
除楊州牧使興申砬節楗川葬衣帶于陽州眞官面白牛坐
淑人海州尹氏善霖女文判書重后壬辰卒墓窆祔
*振威(진위) : 진위장군(정4품 무관)
*오류 : 犬好騎焉(견호기언)⇒大好騎馬(대호기마), 世福能父能射⇒世稱能文能射(세복능부능사⇒세칭능문능사), 興申砬⇒與申砬(흥⇒여), 楗川⇒橽川(건천⇒달천), 陽州⇒楊州(볓 양⇒버들 양)
자는 갑수이며 목사를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사에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말타기를 매우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글도 잘하고 활쏘기도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을유년에 급제하여 진위장군을 지내고 정해년에 양주목사에 제수되어 신립과 함께 달천에서 사절하였다. 옷과 관대를 양주 진관면 백우좌에 장사하였다.
배위 숙인 해주윤씨는 선림의 따님으로 문관으로 판서를 지낸 중의 후손인데 임진년에 졸하였고 묘는 공과 합장이다.
첫댓글 내용을 고려하여 자유게시판에서 옮겨 왔습니다.
대단히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만은 저는 족보의 행장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이유는
지금 보시는 것처럼 오류가 너무 많고
또 어떤 곳은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존의 행장에서 대의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행장을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휘 복남의 행장에서 入士는
入仕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은
召拜僉知中樞府事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以特恩入仕 특별한 은전으로 벼슬에 나간 것이다.
가 되는 것 같아서요.
족보에 오류된곳이 그토록 많다니 충격입니다.
지금껏 저는 오류된 곳을 볼 수있는 식견을 갖추지못해 미쳐 생각도 못했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기술적작업을 하신분들의 잘못으로 그리 된것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교정과 감수도 철저하지 못한점이 있겠지요. 저도역시 의령공계 십일세(星煥),십이세(福翰),십삼세(銓龍)간의 출생연대가 맞지않아 고심만했었습니다. 을축(1805)보 이후 1860년대의 족보를 본다면 확인될 수 있을지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올려주신 자료 큰 참고가 되었습니다.
중랑장보에서 제가 표시한 곳을 찾아보세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릴없이 일가님이 말씀하신 17세(星煥), 18세(福翰), 19세(銓雲 銓龍), 20세(吉洪 允洪), 21세(秉文 秉五 秉云) 5대에 걸친 출생년대를 살펴보니 세대간 20~40세 차이로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21세 秉文 후손도 문제가 없고 다만 秉五 秉云 후손에서 년대가 잘 맞지 않는군요. 1864년에 발행한 중랑장보에서는 23세부터 항렬자를 "奎 鉉 河 秉 燮 喜"로 정했고, 지금쓰는 "19세銓 20세洪 21세秉 22세烈 23세圭 24세鎬"자는 그후에 생겼으므로 이를 참고해서 이름자에 새로운 항렬이 들어갔는지를 보고 생졸년을 추정해 보면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랑장보에는 휘 복남의 행장에 분명히 "入士"로 되어있어 저는 처음에 남명(조식) 율곡(이이)과 같은 士類에 들게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도 했으나, 1864년 중랑장보에는 "入辭"로 되어있는데 산당집 번역 연재문 어디에선가는 "入謝"로 쓰여 있지 않았던가요? 아! 이제 찾아보니 "尹濟弘이 지은 崔公福男行狀"이란 글에 "以特恩入謝"라 되어있군요...
그렇군요.
入辭나 入謝나 둘 다 말이 되기는 하지만
崔公福男行狀 뿐만 아니라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崔公行狀에도
始入謝 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入謝로 봄이 옳을 것 같습니다.
우보님께 답합니다. 제가 의심하는 부분은 아렇습니다. 1805년 을축보 9권에 보면 17세 甲煥(甲子), 景煥(丙寅),星煥(庚午)삼형제인데 16세 興運선조 肅廟戊戌, 15세太英선조 肅廟庚申으로 되어있는것으로 보면 庚午(1750)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1964년 甲辰世譜 13권 70쪽에는 星煥선조 출생을 庚子로 표기된것에 큰 의문인것입니다. 이는 16세 흥훈선조를 戊戌(1718)로보면 경자년은 무술년이후 2년후 혹은 62년후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갑진세보에 성환선조의 경자년 출생연대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秉文(丁未 1847),允洪(辛巳 1821), 銓龍(갑진1784)으로 소급해보면星煥(1750)과
銓龍(갑진1784)의 년대사이에 18세福翰선조의 출생년대가 충족되지 않습니다.경오 1750년을기준하면 福翰선조의 출생은 갑자(1804)이되고 19세銓龍선조의 갑진 (1784)을 기준하여 소급하면 福翰선조의 甲子1744년이되어 星煥전조의 1750년과 충돌되는 것입니다. 제가의문하는 내용이 이해되시는지요. 보학에 밝으신 견해로 설명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희 집안에 선조에 관한 명징하지 못한 한 면이어서 죄송합니다.
족보에 출생년대가 맞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두가지 유념해야...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 중랑장공파에서는 1864년 중랑장보를 발행하면서 항렬을 "23세부터 奎 鉉 河 秉 燮 喜"로 정하여 시행했는데, 그후(정확한 시기는 미상)에 문성공종회에서 현행 "洪 秉 烈 圭 鎬..."로 나가는 항렬을 제정하여 통일시켰으므로 이 항렬자가 들어있다면 그 이후 생졸한 것으로 추측해 보는 것, 또 하나는 전에 족보를 轉寫(移記) 編輯 正書 印刷하면서 甲子를 甲午로, 혹은 甲午를 甲子로, 또는 乙丑을 己丑으로, 癸未를 癸亥로... 이렇게 잘못된 것이 많으므로 생졸년 글자를 비슷한 글자로 바꿔보는 것. 다음 기회에 다시 뵙겠습니
예 제의견이바로 그렇습니다.1805년 을축보에 17세 星煥(庚午)이 1964년 갑진세보에 星煥(庚子)로 잘못옮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드러나 이것을 누누를 탓할일도 아니고 다만 족보에 여러 오류가 있다는 것을 우보님 생각이나 의견에 공감한다는 것 뿐입니다. 바로잡을 수 있다면 더욱좋고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근세의 족보보다는 발행년대가 오래된 것에 대한 신뢰가 많습니다. 최근의 족보일수록 세대별로 년대가 맞지 않은 것이 많으니까요. 만숙 일가님의 선조이신 星煥님을 예로 든다면 1805년 乙丑보에서는 庚午생으로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32세 할아버지(1680년생)와는 70세 차이로 좀 멀긴 해도 星煥님이 셋째아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상적인데 1964년 甲辰보에서 星煥님이 갑자기 30년 늦은 庚子(1780)생으로 올려진 이후로 계속 경자생으로 되니 아버지와 62살 차이가 생긴 것같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1805년 을축보가 나온 이후 발행된 족보에서 庚午생이 아닌 庚子생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다음 족보 발행시 수정단자를 제출하여 바로잡아야 했을텐데 관심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무슨 이유로 수정단자 제출이 않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후손들이 족보발행에 참여해야하고, 잘못 올려진 내용을 수정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족보발행에 수단제출도 하지 않고 관심도 전혀 없으니 그런분들 틀림없이 손자대에 가서 자신의 선조를 찾아달라고 애걸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사람들에게 하는 말인데 혹시 만숙일가님이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위에서 제가 지적한 것 모두 저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앞 뒤 글로 보아서 위와같이 고쳐져야 뜻이 통하기 때문에 위와같이 고쳐 본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의견이 있으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특히 영암 집안 일가님들께서는 자세히 보시고 소감이나 의견을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보 일가님 안녕하세요.
까마득하게 상기의 주고받은 내용을 잊고 있다가 covid-19라는 펜데믹 환경이 계속되면서 집안에 있는시간이 많아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하다 족보를 번역해보자 생각했습니다.현재 阿시조로부터 10세 福男선조에 이르렀는데 활자된 내용으로는 번역이 않되어 인터냇을 검색하다 본 란의 내용을 접했습니다. 환자하면서 상당히 많은 오자를 발견되어 "1996년 중랑장공 파세보"와 "1964년 전주최씨세보"를 같이 보면서 정오를 보완하면서 했으나 두보첩이 오자가 있는것은 마찬가지이나 전자의 보첩이 오자가 더욱심했습니다.
특히 산당후손 복남,지남,길남에서 오자가 많이 발견되고 지성 후손 壽자 항열에서 많은 오자가 있군요. 위에 지적하신 점들을 참고하면서 앞으로도 더욱더욱 공경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조상 행장을 번역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