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모든 것이 부족하던 60년대 친구에게 선물 받은 외제 연필을 쓰기가 아까워 나중에
글씨를 예쁘게 쓰게 되거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때 쓰려고 무슨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다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서운한 마음에 스스로 자책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한 번 써보기라도 할 것을 괜히 미루었다는 아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좀 더 시간이 흐르자 잃어버린 것이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어차피 연필로 활용도 하지 못할 것을 누군가 주웠다면 예쁘게 깎아 예쁜 글씨로 예쁜 글을 쓸 것만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그것은 연필이 아니고 관상용으로 애장품으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이다. 깍지 않은 연필은 연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자신의 값어치를 못한다면 그것은 벌써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으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 역시 고유의 이름 외에 가치와 호용에 따른 호칭이 있게 마련이다.
꽃이라 명명되는 것들은 꽃을 피워야 꽃이라는 호칭에 대한 가치와 호용을 다하는 것이고, 시인이라면 시를 써야만 시인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가치와 호용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깍지 않은 연필은 이름만 연필이듯이 글 한 줄 쓰지 않는 시인은 무늬와 빛깔만 시인이지 시인이라 할 수 없다.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나 과시용이나,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할 고상한 취미나,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인은 시로 이야기하여야지 말이나, 남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으면서 남의 시와 문학의 환경 탓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남의 시(글)를 탓하고, 주위 환경을 탓하고, 과시욕과 명예욕에 빠지다 보면 자신의 시를 쓸 수가 없다. 문학 환경이 좋지 않으면 자신이 앞장서서 좋은 글로 좋은 환경으로 바꾸면 되고, 남의 글이 좋지 않다면
좋은 자신의 글을 발표하여 깨닫게 하여 주면 된다. 또한, 자신의 글이 좋지 않다면 절차탁마하여 좋은 글쓰기에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노력하지 않고 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옛말에 뛰지도 못하면서 날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한 톨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순리대로 자랄 생각을 않고
한꺼번에 장대한 나무가 되기를 바란다면 필시 씨앗은 땅속에서 썩어 문드러지고 말 것이다. 점진적인 발전과 혹독한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과정은 보지 않고
이루어 놓은 결실만을 보고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거나, 시기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아니면, 겨우 뿌리로 버틸 힘이 생긴 것을 울울한 숲을 이룬 것처럼 그런 결실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과대평가하여 자아도취에 빠져 자만과 과시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시인은 겸양과 겸손의 미덕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글이 좋게 평가되어 회자 될수록
더욱 고개를 숙여야 글과 함께 더욱 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시만 좋게 평가되고 시인으로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면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시인으로 좋은 평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못하다.
남의 것을 기웃거리지 말고, 남의 말에 귀기울지 말고, 남의 탓을 하지 말고, 교만과 오만에 빠지지 말고
시인의 최대 과업이자 덕목인 시를 쓰야 한다. 시인에게 이것보다 더 중하고 큰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시인에게 시는 밥이요 잠으로 한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삶 자체이다.
어떠한 이유와 명분을 가지고 반박한다 하더라도 시인이라고 불리면서 시를 쓰지 않는 것은 이름 값을 못하는 자신에게 부끄러워해야 하고 직무유기한 세상에 미안해하여야 한다.
언제까지 깍지 않은 연필로 자태만을 뽐내고 노력 없는 완성을 위하여 연필을 끼고만 있을 것인가,
세상은 가슴을 적셔주고 깨달음을 주는 시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이여 지금이라도 충만한 감성의 칼로 연필을 깎아 글의 유목민이 되어 천년을 새길 시를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