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의 개국.
1)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데다 철령 이북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명은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명나라 역시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가 1388년 2월이었다.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왕족들을 한양산성으로 보내고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다. 그들은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려 대군이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위화도 회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데타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단행한 자구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 사불가론 중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사가들도 있고,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주의적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권 장악을 노린 쿠데타였다. 그러나 경쟁 관계에 있던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단행한 것을 볼 때 계획된 행동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고 오히려 상황 판단에 따른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고려왕조의 최후.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
하지만 조민수와 이성계는 차기 왕을 옹립하는 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조민수가 우왕의 아들 창을 내세우는 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한다. 그가 곧 창왕으로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가 1388년 6월이었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당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유는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른바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리로 방출된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창왕이 폐출되었을 때 조정 중신들 중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그런데 마지막 정적이던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내친 후에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왕씨들을 한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방문의 내용은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는데, 기왕에도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들은 산 속에 숨어살면서 대개 자신들의 성씨를 전(온전할 전)씨, 옥씨, 전(밭 전)씨, 용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태조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어,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첫댓글 곰솔선생님 워요 조선의 역사공부 덕분에 잘 합니다.항상 건강 하시길 ......
솥 뚜껑 이별하고 공부하고 감니다 힘 잃지마시고 갈때까지......
곰솔님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