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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견훤의 사위 영규가 내응하다
견훤의 사위 영규가 내응하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英規)註 458458 영규(박영규)는 후백제의 장군으로 견훤의 사위로 승주(현재 전라남도 순천시)출신이다. 견훤이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자, 아내와 상의하여 고려에 사자를 보내고 왕건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 할 때 공을 세워 좌승(左丞)을 제수받고 전 1000경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두 딸은 왕건의 부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정종의 부인은 문공왕후(文恭王后)이다. ≪고려사≫ 권92 열전 5에 박영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닫기가 비밀리에 그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서 애쓰신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로 가셨오. 대체로 정조 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본단 말이오. 더구나 고려의 왕공(王公)은 어질고 후덕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의 계시한 것인가 하오. 필경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해서 왕공에게 은근히 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註 459459 신호철은 박영규의 귀순은 그의 독자적인 판단이라기보다 견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 평가하였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닫기 그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 2월에 사람을 보내서 태조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왕께서 의기(義旗)를 드시면 저는 내응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기뻐하여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해져서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된다면, 곧 먼저 장군을 뵙고 다음에 당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천지와 귀신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註 458
영규(박영규)는 후백제의 장군으로 견훤의 사위로 승주(현재 전라남도 순천시)출신이다. 견훤이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자, 아내와 상의하여 고려에 사자를 보내고 왕건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 할 때 공을 세워 좌승(左丞)을 제수받고 전 1000경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두 딸은 왕건의 부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정종의 부인은 문공왕후(文恭王后)이다. ≪고려사≫ 권92 열전 5에 박영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註 459
신호철은 박영규의 귀순은 그의 독자적인 판단이라기보다 견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 평가하였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주제분류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
색인어
이름 : 견훤,영규,왕공,왕공,태조,태조,영규지명 : 삼한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후백제는 멸망하고 견훤이 죽다(936년 6월 (음))
후백제는 멸망하고 견훤이 죽다 ( 936년 06월(음) )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老臣)이 전하께 항복해 온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적자(賊子)와 난신(亂臣)을 죽이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註 460460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일대로, 930년 고창군 전투 직후 설치한 고려의 군사기지이다(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견훤」,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02).닫기로 나가게 하고, 가을 9월(936년)에 태조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註 461461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이다.닫기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註 462462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북동쪽에 있는 하천으로 낙동강의 상류이다.닫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을 향해갔다. 이에 북을 치고 나아가니 후백제의 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기를, “원수(元帥)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註 463463 공훤은 고려 초기의 장군으로 927년에 신라가 후배제의 침입으로 위급하여 고려에 구원을 청하자 공훤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930년 고창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쳤고, 938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할 때 일리천에서 신검을 격파했다.닫기 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註 464464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읍 일대이다.닫기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能奐)에게 묻기를,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로서 의당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하니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그를 목베어 죽이게 하였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므로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다. 견훤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당註 465465 견훤이 사망한 장소에 대해서 안정복은 ≪東史綱目≫에서 연산현의 동쪽 5리에 있는 절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김정호는 ≪大東地志≫에서 개태사를 들어 견훤이 죽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김갑동은 황산불사를 개태사로 보고 있다(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견훤」,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02). 그러나 박순발은 개태사일수도 있으나, 936년에는 개태사라는 이름의 절이 없으므로 황산불사는 개태사와 동일한 곳에 있던 개태사의 전신이거나, 개태사와는 무관한 황산 지역에 있었던 사찰일 수도 있다며 평가를 보류하였다(박순발, 「견훤왕릉고」,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2).닫기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936년)註 466466 이 부분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갑오일이 9월 8일이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수자는 착오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닫기이고 나이는 70이었다.
태조의 군령은 엄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아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英規)에게 말하기를,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내외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서 성의를 보였고 겸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나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좌승(左承)이란 벼슬과註 467467 좌승은 3품의 상급에 해당하는 관계(官階)로 17개의 관계 중 6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조 때 각 지역에서 귀순해 온 성주·장군 및 그 아들에게는 보통 제10위의 원윤(元尹)을 주었으며, 태조 15년 공직이 귀순해 왔을 때도 제7위인 대상(大相)을 준 바 있다. 그리고 전 1천경을 하사했는데 이 또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고려의 개국 1등공신인 신숭겸이나 복지겸에게도 전이 수여되었으나 3백경에 불과했다(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견훤」,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02).닫기 밭 1천 경(頃)을 내리고, 역마(驛馬) 35필을 빌려 주어 가족들을 맞게 했으며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註 468468 당 소종(昭宗)의 연호 중 하나로 892년~89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892년)에 나라를 세워 진(晉)나라 천복(天福)註 469469 후진(後晋) 고조(高祖)의 연호로 936년~94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936년)에 이르니, 45년 만인 병신(丙申)년에 망했다.
註 460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일대로, 930년 고창군 전투 직후 설치한 고려의 군사기지이다(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견훤」,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02).
註 461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이다.
註 462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북동쪽에 있는 하천으로 낙동강의 상류이다.
註 463
공훤은 고려 초기의 장군으로 927년에 신라가 후배제의 침입으로 위급하여 고려에 구원을 청하자 공훤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930년 고창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쳤고, 938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할 때 일리천에서 신검을 격파했다.
註 464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읍 일대이다.
註 465
견훤이 사망한 장소에 대해서 안정복은 ≪東史綱目≫에서 연산현의 동쪽 5리에 있는 절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김정호는 ≪大東地志≫에서 개태사를 들어 견훤이 죽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김갑동은 황산불사를 개태사로 보고 있다(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견훤」,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02). 그러나 박순발은 개태사일수도 있으나, 936년에는 개태사라는 이름의 절이 없으므로 황산불사는 개태사와 동일한 곳에 있던 개태사의 전신이거나, 개태사와는 무관한 황산 지역에 있었던 사찰일 수도 있다며 평가를 보류하였다(박순발, 「견훤왕릉고」,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2).
註 466
이 부분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갑오일이 9월 8일이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수자는 착오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註 467
좌승은 3품의 상급에 해당하는 관계(官階)로 17개의 관계 중 6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조 때 각 지역에서 귀순해 온 성주·장군 및 그 아들에게는 보통 제10위의 원윤(元尹)을 주었으며, 태조 15년 공직이 귀순해 왔을 때도 제7위인 대상(大相)을 준 바 있다. 그리고 전 1천경을 하사했는데 이 또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고려의 개국 1등공신인 신숭겸이나 복지겸에게도 전이 수여되었으나 3백경에 불과했다(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견훤」, ≪한국사학보≫, 고려사학회, 2002).
註 468
당 소종(昭宗)의 연호 중 하나로 892년~893년에 사용하였다.
註 469
후진(後晋) 고조(高祖)의 연호로 936년~943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
이름 : 견훤,태조,태조,술희,태조,신검,태조,견훤,효봉,덕술,애술,명길,태조,효봉,신검,태조,공훤,신검,부달,능환,태조,태조,능환,양검,능환,신검,견훤,태조,태조,영규,견훤
국명 : 당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사론은 말한다
사론은 말한다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註 470470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論曰’이라고 하였는데, 두 내용은 똑같다.닫기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게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註 471471 ≪삼국사기≫ 권50 열전 궁예조를 보면 궁예는 스스로 왕이 된 후 영주의 부석사로 가서 그곳에 있는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었다.닫기 그 어질지 못한 것이 너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일어나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註 472472 항우는(기원전 232~202)는 진말한초의 사람으로 초(楚)의 건국자이다.닫기·이밀(李密)註 473473 이밀은 수말(隋末) 당초(唐初)의 장수(582~618)로 자는 현수(玄邃)이며 경조(京兆, 현재의 섬서성 서안) 출신이다. 613년 楊玄感과 함께 수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으나 대업 616년 와강(瓦崗)을 근거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군공을 세웠으며 적양(翟讓)에게 신임을 받아 위공(魏公)에 책봉되었다. 그 뒤 618년 왕세충(王世充)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당에 항복했으나 곧 모반죄로 참살되었다.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에 열전이 실려 있다.닫기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漢)과 당(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註 470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論曰’이라고 하였는데, 두 내용은 똑같다.
註 471
≪삼국사기≫ 권50 열전 궁예조를 보면 궁예는 스스로 왕이 된 후 영주의 부석사로 가서 그곳에 있는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었다.
註 472
항우는(기원전 232~202)는 진말한초의 사람으로 초(楚)의 건국자이다.
註 473
이밀은 수말(隋末) 당초(唐初)의 장수(582~618)로 자는 현수(玄邃)이며 경조(京兆, 현재의 섬서성 서안) 출신이다. 613년 楊玄感과 함께 수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으나 대업 616년 와강(瓦崗)을 근거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군공을 세웠으며 적양(翟讓)에게 신임을 받아 위공(魏公)에 책봉되었다. 그 뒤 618년 왕세충(王世充)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당에 항복했으나 곧 모반죄로 참살되었다.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에 열전이 실려 있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이름 : 궁예,견훤,궁예,견훤,궁예,견훤,항우,이밀,궁예,견훤,태조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42년 3월 (음))
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 ( 42년 03월(음) )
가락국기(駕洛國記)註 474474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조 태강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인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駕洛國)의 사기이다. 가락국은 가야의 제 국가 중 의 한 나라로 가락국기중에서 말함과 같이 대가야 또는 가야국이라 하여 육가야 중의 일국이라 하고 또 ≪삼국유사≫ 오가야조에서는 금관과야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금관국이라고 하고 중국사료(≪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 등)에서는 '狗(拘)邪韓國'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사료(≪일본서기(日本書記)≫와 ≪고사기(古事記)≫ 등)에서는 가야국(加羅國), 임나국(任那國),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초기 주국으로 지금의 김해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이다(정중환, 「駕洛國記의 文獻史的 考察」, ≪가야문화≫ 3, 가야문화연구원, 1990, 12쪽).닫기문종대(文宗代)註 475475 고려 제11대 왕으로 생몰년은 1019~1083년이고, 재위 기간은 1046~1083년이다.닫기 대강(大康)註 476476 요(遼) 도종(道宗)의 연호로 1075년~1085에 사용하였다.닫기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註 477477 김해 지방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금관소경(金官小京), 김해소경(金海小京)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태조 23년(940)에 김해부로 바뀌었고, 이후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임해군이 되었다 광종 22년(971)에 금주도호부(金州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목종 3년(1000)에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현종 3년(1012)에 금주(金州)로 개칭되었고 문종대에는 금주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96쪽).닫기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註 478478 구간(九干)에 대하여 일찍이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에 인용되어 있는 김유신비문(金庾信碑文)에 김유신의 출자를 설명하는 가운에 ‘수로왕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구촌(駕洛九村)을 바라보았다’라고 보임으로써 수로왕의 출현 이전의 가락구촌이 있었다는 전승이 비교적 오래전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84년에 건립된 가락국태조능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에 구부(九部), 구간(九干), 구경(九卿) 등으로 표기된 것도 이러한 전승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사료에서 구간이 추장(酋長)이라고 표기되었듯이 가락구촌에 지도자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이영식, 「九干社會와 駕洛國의 成立」,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33쪽). 구간사회를 국가형성론 상에서 볼 때 추장사회(Chiefdom)의 단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쪽|이륭조, 「한국고인돌사회와 그 양식」, ≪동방학지≫ 23·24, 1980, 306쪽), ‘읍락사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金延鶴, 「伽倻의 國家形成」, ≪가야문화≫ 1, 16~17쪽). 그리고 김태식은 구간은 김해 지역에 산재하던 소단위 세력집단들인 구촌의 추장들로서, 그들은 수로의 강림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재지 세력으로 보았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5~36쪽).닫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註 479479 여기에 대해서는 두 세가지의 견해로 나뉘고 있다. 이종욱과 三品彰英은 一百戶의 ‘百’자는 ‘萬’자의 착오로 보고있고(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中, 塙書房, 1979, 315쪽), 이영식의 경우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는 기사를 근거로 4천~5천 家로 보고 있다(이영식, 「구간사회와 가락국의 성립」,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닫기,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註 480480 후한을 세운 황제로 재위 기간은 25년~57년이다.닫기 건무(建武)註 481481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25년~5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18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註 482482 계욕(禊浴)이란 계욕(禊浴) 계음연(禊飮宴)이라고 한다. 계는 불계(祓禊)란 말이다. 불계는 제계목욕하여 심신을 맑게 하고 천지신명에게 양재구복(禳災求福)의 치성을 드리는 제의를 말한다. 한나라 대의 예제에는 3월 상사(上巳)에 특히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심신의 숙구(宿垢)를 제거하였으나 위(魏) 이후로는 상사일을 다만 3일로 정하여 춘계를 행하게 되었다. 춘계라 함은 계춘 즉 3월 3일에 행하는 계욕을 말함이니 이에 대하여 7월14일에 행하는 계욕을 추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계욕도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행한다고 한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2쪽).닫기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註 48348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도호부산천조(金海都護府山川條)에 구지봉(龜旨峰)이 보이고, ≪삼국유사≫ 권2 기이 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도 관련기사가 보인다. 원시신앙에서 구(龜)를 영적존재로 여겼을 것이며, 구지봉을 ‘굿’하는 봉우리로 한자로 음차한 견해도 있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5쪽)..닫기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어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註 484484 협진(浹辰)은 십이지의 자(子)로부터 해(亥)에 이르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열이틀’로 볼 수도 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닫기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곧 은(殷)나라 천을(天乙)註 485485 은(殷)의 탕왕(湯王)을 가르킨다.닫기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곧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았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곧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곧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註 486486 수로는 가락의 시조이나, 김태식은 구간(九干)과 같은 재지 세력의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당시에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이주민이거나 또는 이주민으로서의 명분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으로 추정하였고(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6쪽), 이병도는 수로를 가락 최초의 군장이 아니라가락이 소위 육가야의 맹주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을 때의 군장이라고 보았으며, 가락의 구간과 부원들이 대회하여 일인의 군장을 선출 추대한 사화에 있어 육란=육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순이라 파악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5~316쪽).닫기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한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註 487487 육가야니 오가야니 하는 것은 결국 연맹단체를 말한 것으로 맹주국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제국을 말할 때에는 오가야라 하고, 맹주국까지 합하여 말할 때에는 육가야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의 금관과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였고, ≪본조사략(本朝史略)≫에서는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1~313쪽).닫기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답자(畓字)는 속자(俗字)이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註 488488 석가의 16제자. 영세에 살면서 불법을 보호한다고 한다.닫기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註 489489 오행설에서 숫자1을 상징하는 물(水)로부터 3을 상징하는 나무(木)가 나오고, 그 나무에서 숫자 7을 상징하는 불(火)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이는 후대의 윤색일 뿐 수로왕 당대의 인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역주 사야사사료집성≫ 제1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4, 99쪽).닫기 7성(聖)이 살 곳은 여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註 474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조 태강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인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駕洛國)의 사기이다. 가락국은 가야의 제 국가 중 의 한 나라로 가락국기중에서 말함과 같이 대가야 또는 가야국이라 하여 육가야 중의 일국이라 하고 또 ≪삼국유사≫ 오가야조에서는 금관과야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금관국이라고 하고 중국사료(≪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 등)에서는 '狗(拘)邪韓國'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사료(≪일본서기(日本書記)≫와 ≪고사기(古事記)≫ 등)에서는 가야국(加羅國), 임나국(任那國),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초기 주국으로 지금의 김해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이다(정중환, 「駕洛國記의 文獻史的 考察」, ≪가야문화≫ 3, 가야문화연구원, 1990, 12쪽).
註 475
고려 제11대 왕으로 생몰년은 1019~1083년이고, 재위 기간은 1046~1083년이다.
註 476
요(遼) 도종(道宗)의 연호로 1075년~1085에 사용하였다.
註 477
김해 지방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금관소경(金官小京), 김해소경(金海小京)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태조 23년(940)에 김해부로 바뀌었고, 이후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임해군이 되었다 광종 22년(971)에 금주도호부(金州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목종 3년(1000)에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현종 3년(1012)에 금주(金州)로 개칭되었고 문종대에는 금주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96쪽).
註 478
구간(九干)에 대하여 일찍이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에 인용되어 있는 김유신비문(金庾信碑文)에 김유신의 출자를 설명하는 가운에 ‘수로왕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구촌(駕洛九村)을 바라보았다’라고 보임으로써 수로왕의 출현 이전의 가락구촌이 있었다는 전승이 비교적 오래전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84년에 건립된 가락국태조능숭선전비(駕洛國太祖陵崇善殿碑)에 구부(九部), 구간(九干), 구경(九卿) 등으로 표기된 것도 이러한 전승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사료에서 구간이 추장(酋長)이라고 표기되었듯이 가락구촌에 지도자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이영식, 「九干社會와 駕洛國의 成立」,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33쪽). 구간사회를 국가형성론 상에서 볼 때 추장사회(Chiefdom)의 단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쪽|이륭조, 「한국고인돌사회와 그 양식」, ≪동방학지≫ 23·24, 1980, 306쪽), ‘읍락사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金延鶴, 「伽倻의 國家形成」, ≪가야문화≫ 1, 16~17쪽). 그리고 김태식은 구간은 김해 지역에 산재하던 소단위 세력집단들인 구촌의 추장들로서, 그들은 수로의 강림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재지 세력으로 보았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5~36쪽).
註 479
여기에 대해서는 두 세가지의 견해로 나뉘고 있다. 이종욱과 三品彰英은 一百戶의 ‘百’자는 ‘萬’자의 착오로 보고있고(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中, 塙書房, 1979, 315쪽), 이영식의 경우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는 기사를 근거로 4천~5천 家로 보고 있다(이영식, 「구간사회와 가락국의 성립」, ≪가야문화≫ 7, 가야문화연구원, 1994).
註 480
후한을 세운 황제로 재위 기간은 25년~57년이다.
註 481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25년~55년에 사용하였다.
註 482
계욕(禊浴)이란 계욕(禊浴) 계음연(禊飮宴)이라고 한다. 계는 불계(祓禊)란 말이다. 불계는 제계목욕하여 심신을 맑게 하고 천지신명에게 양재구복(禳災求福)의 치성을 드리는 제의를 말한다. 한나라 대의 예제에는 3월 상사(上巳)에 특히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심신의 숙구(宿垢)를 제거하였으나 위(魏) 이후로는 상사일을 다만 3일로 정하여 춘계를 행하게 되었다. 춘계라 함은 계춘 즉 3월 3일에 행하는 계욕을 말함이니 이에 대하여 7월14일에 행하는 계욕을 추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계욕도 동으로 흐르는 물에서 행한다고 한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2쪽).
註 48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도호부산천조(金海都護府山川條)에 구지봉(龜旨峰)이 보이고, ≪삼국유사≫ 권2 기이 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도 관련기사가 보인다. 원시신앙에서 구(龜)를 영적존재로 여겼을 것이며, 구지봉을 ‘굿’하는 봉우리로 한자로 음차한 견해도 있다(정중환, 「가락국기의 건국신화」, ≪가야문화≫4, 가야문화연구원, 1991, 115쪽)..
협진(浹辰)은 십이지의 자(子)로부터 해(亥)에 이르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열이틀’로 볼 수도 있다(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역주 가야사사료집성≫ 제1권, 2004).
註 485
은(殷)의 탕왕(湯王)을 가르킨다.
註 486
수로는 가락의 시조이나, 김태식은 구간(九干)과 같은 재지 세력의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당시에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이주민이거나 또는 이주민으로서의 명분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으로 추정하였고(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36쪽), 이병도는 수로를 가락 최초의 군장이 아니라가락이 소위 육가야의 맹주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을 때의 군장이라고 보았으며, 가락의 구간과 부원들이 대회하여 일인의 군장을 선출 추대한 사화에 있어 육란=육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순이라 파악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5~316쪽).
註 487
육가야니 오가야니 하는 것은 결국 연맹단체를 말한 것으로 맹주국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제국을 말할 때에는 오가야라 하고, 맹주국까지 합하여 말할 때에는 육가야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의 금관과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였고, ≪본조사략(本朝史略)≫에서는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를 오가야라고 하고 있다(이병도,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1~313쪽).
註 488
석가의 16제자. 영세에 살면서 불법을 보호한다고 한다.
註 489
오행설에서 숫자1을 상징하는 물(水)로부터 3을 상징하는 나무(木)가 나오고, 그 나무에서 숫자 7을 상징하는 불(火)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이는 후대의 윤색일 뿐 수로왕 당대의 인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역주 사야사사료집성≫ 제1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4, 99쪽).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신상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정치>신이>기타>소리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정치>왕실>궁궐>殿·門·閣·堂·樓·臺·亭·房
이름 :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광무제(,아도간,천을,고조,고조,순,수로,수릉지명 : 구지,구지,황산강,지리산,가야산,신답평서명 : 가락국기국명 : 후한,은,한,당,우,가야국,가야,가야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이 탈해를 술법으로 굴복시키다
수로왕이 탈해를 술법으로 굴복시키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註 490490 ≪삼국유사≫ 권1 기이편 탈해왕조와 같은 책 왕력편에서는 완하국(琓夏國)을 용성국(龍城國), 정명국(正明國), 화하국(花廈國)이라 하고,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5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1쪽).닫기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註 491491 신라의 제4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57년~80년이다.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에 의하면 서기전 19년,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4년경에 바다를 통하여 금관국을 거쳐 신라에 도착하여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유리왕을 이어 즉위하였다.닫기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註 492492 나룻배로 건너다니는 곳이다.닫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註 493493 배를 타고 싸우는 군대이다.닫기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註 490
≪삼국유사≫ 권1 기이편 탈해왕조와 같은 책 왕력편에서는 완하국(琓夏國)을 용성국(龍城國), 정명국(正明國), 화하국(花廈國)이라 하고,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5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1쪽).
註 491
신라의 제4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57년~80년이다.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에 의하면 서기전 19년, ≪삼국유사≫ 권2 기이편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4년경에 바다를 통하여 금관국을 거쳐 신라에 도착하여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유리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註 492
나룻배로 건너다니는 곳이다.
註 493
배를 타고 싸우는 군대이다.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정치>신이>기타>기타
이름 : 함달왕,탈해,탈해,탈해,탈해,탈해,탈해,탈해,탈해국명 : 완하국,신라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다(48년 7월 27일(음))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다 ( 48년 07월27일(음) )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註 494494 가락국기의 주석에서는 전산도(前山島)가 “京南島嶼也”라고 하였는데, 조선초기(1530년)의 지리 상황을 보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김해부가 바로 남쪽에 바다가 있고 그 부근에 많은 섬들이 있으며, 남쪽 15리 안에 덕도, 전산도, 곤지도가 있고 30리 밖으로 취도, ,명지도, 덕형도가 있다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김해도호부 산천조). 이와 관련해 김태식은 경남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에 있던 조그마한 돌섬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근래에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전승으로서 믿을 바가 못되며 조선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 등이 비정한 바와 같이 현재의 경남 김해시 풍유동, 명법동, 이동에 걸쳐 여러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칠산’ 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하였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한국사연구회, 1998, 9~10쪽).닫기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註 495495 승점(乘岾)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의견을 내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京都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 즉 畿內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고(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 59쪽), ‘궁궐가까이에 위치한 나라’를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최진원, 「한국신화고석-수로신화」, ≪대동문화연구≫ 24, 76~79쪽). 김태식은 궁궐에 가까운 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봉황대로 보아야 하므로 봉황대로 추정하였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닫기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그를 맞아서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註 496496 아유타국은 인도 갠지스 강의 상류인 사라유 강의 左岸에 있던 고대 도시국가인 아요디아(Ayodha)왕국이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아유타국의 실체에 대해 몇몇 견해가 있는데, 김석형은 아유타국을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分國으로 보았고(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 경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이라고 한 이종기의 견해도 있다(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 99~100쪽). 한편 김병모는 타이 메남강 가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는 부정하고 아요디아를 근원지로 보았다(김병모,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아유타국고(Ⅰ)」, ≪삼불김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1, 일지사, 1987「고대한국서역관계-아유타국고2)」, ≪한국사논총≫ 14, 1988|「가락국 수로왕비 탄생지」, ≪한국상고사학보≫ 9, 1992).닫기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註 494
가락국기의 주석에서는 전산도(前山島)가 “京南島嶼也”라고 하였는데, 조선초기(1530년)의 지리 상황을 보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김해부가 바로 남쪽에 바다가 있고 그 부근에 많은 섬들이 있으며, 남쪽 15리 안에 덕도, 전산도, 곤지도가 있고 30리 밖으로 취도, ,명지도, 덕형도가 있다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김해도호부 산천조). 이와 관련해 김태식은 경남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에 있던 조그마한 돌섬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근래에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전승으로서 믿을 바가 못되며 조선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 등이 비정한 바와 같이 현재의 경남 김해시 풍유동, 명법동, 이동에 걸쳐 여러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칠산’ 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하였다(김태식, 「가락국기 소재 허왕후 설화의 성격」, ≪한국사연구≫ 102, 한국사연구회, 1998, 9~10쪽).
註 495
승점(乘岾)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의견을 내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京都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 즉 畿內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고(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 59쪽), ‘궁궐가까이에 위치한 나라’를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최진원, 「한국신화고석-수로신화」, ≪대동문화연구≫ 24, 76~79쪽). 김태식은 궁궐에 가까운 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봉황대로 보아야 하므로 봉황대로 추정하였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註 496
아유타국은 인도 갠지스 강의 상류인 사라유 강의 左岸에 있던 고대 도시국가인 아요디아(Ayodha)왕국이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아유타국의 실체에 대해 몇몇 견해가 있는데, 김석형은 아유타국을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分國으로 보았고(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 경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이라고 한 이종기의 견해도 있다(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 99~100쪽). 한편 김병모는 타이 메남강 가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는 부정하고 아요디아를 근원지로 보았다(김병모,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아유타국고(Ⅰ)」, ≪삼불김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1, 일지사, 1987「고대한국서역관계-아유타국고2)」, ≪한국사논총≫ 14, 1988|「가락국 수로왕비 탄생지」, ≪한국상고사학보≫ 9, 1992).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이름 : 유천간,신귀간,유천간,신귀간,왕후,유천간,왕후,왕후,신보,조광,모정,왕후,왕후,왕후,황옥,수로,공주,공주,공주,왕후,왕후,왕후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관제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다
관제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농부들의 칭호이고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방(五方)을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註 497497 서울대규장각본에는 神天이 없다.닫기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고,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을 고쳐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註 498498 신라 17관등제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湌)이라고도 하였다.닫기·아질간(阿叱干)註 499499 신라 17관등제의 제6관등으로 아간(阿干)이라고도 하였다.닫기·급간(級干)註 500500 신라 17관등제의 제9관등으로 급찬(級湌)이라고도 하였다.닫기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이른바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한 방법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고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의 몽조(夢兆)를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註 497
서울대규장각본에는 神天이 없다.
註 498
신라 17관등제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湌)이라고도 하였다.
註 499
신라 17관등제의 제6관등으로 아간(阿干)이라고도 하였다.
註 500
신라 17관등제의 제9관등으로 급찬(級湌)이라고도 하였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정치>행정>관직>중앙관직
정치>행정>관인>인사·제도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정치>왕실>왕족>태자·태자비
색인어
이름 : 아도,아궁,여도,여해,피도,피장,오방,오상,유수,유천,유공,유덕,신도,오천,오능,신귀,신귀,도산,당원,거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