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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께하는세상 대한민국 원문보기 글쓴이: 도들이
1 ○ 영조 즉위년(1724) 8월 30일에 왕세제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옥새 받는 것을 빈전에 고하고 인정문에 나아가 즉위하였다.
2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어의 등이 병 증세에 따라 약을 쓰지 못하였으니, 국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3 비답하기를 "어의의 일과 이공윤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해당 승지를 잡아다가 국문하는 일은 파직만 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4 ○ 9월 11일에 이명언이 말하기를 "청컨대, 독약을 시용한 궁비를 국청에 회부시켜 나라의 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5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에서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우선 임시로 용서해 준 것이 아니고, 내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고 대답한 것도 임금의 원수를 잊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6 임금이 또 말하기를 "선왕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어선을 관장하는 궁인이 그 얼마인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터무니없는 말로써 조사해 낼 수 있겠는가?' 하셨는데,
7 정녕하신 그 하교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임금의 원수는 반드시 토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8 내가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어찌 이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9 선조에서 조사하지 않은 것을 비록 현명한 자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실정을 알아 내겠는가?" 하였다.
10 ○ 이보다 앞서 신치운 등이 김일경, 박필몽의 풍지(風旨)에 생각이 미쳐 복합(伏閤)하여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의 일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11 대왕 대비가 일찍이 숙명 공주의 아들 심정보의 아내인 이씨에게 말하기를
12 "궁중에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주상이 어찌 윤허하지 아니하였겠으며,
13 나도 어찌 분명하게 조사해서 출부하지 아니하였겠는가?
14 그러나 궁중에 진실로 그런 사람이 없는데 외정에서 고집하여 그치지 않고 있으니, 무엇때문인가?" 하였다.
15 이씨는 곧 이진유의 고모이므로, 이진유가 그 말을 듣고는 다시 그 논의를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16 이명언은 곧 이진유의 혈당(血黨)이므로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인데,
17 지금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며 또다시 그 일을 확대시켜
18 공제(公除) 전에 옛 관례를 무시하고 혹은 아뢰며, 혹은 대답하면서 혈전(血戰)의 계책을 삼고 있으니, 식자가 이를 걱정하였다.
19 ○ 9월 22일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바야흐로 나라 일이 위태롭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때를 당했으니,장차 어떤 계책으로 이를 구제해야 하겠는가?
20 임금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다.
21 요즈음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에게는 아침저녁의 밑천이 없는데,
22 의탁할 데가 없어서 떠도는 사람에게 신포(身布)를 징수하여 혹은 인족(隣族)이나 혹은 백골(白骨)에게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23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한 사람이 온 문중(門中)의 역사(役事)를 겸하고 있다 하니, 슬프다,
24 우리 백성들이 살아서는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도 신역(身役)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25 두 왕조(王朝)에서 보살펴온 백성들이 장차 다 죽고야 말겠구나. 생각이 이에 이르니 먹을 것이 어찌 목에 넘어가겠는가?
26 양역청(良役廳)이라고 이름을 정한 것은 우연이 아닐진대, 한두 달 동안에 전연 타당한 대책이 없어
27 백성의 목숨이 끊기게 되었으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는가마는, 관장할 사람을 마땅히 곧 강구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28 ○ 아! 그대들 중외의 신료는 선조에서 백성을 사랑하던 뜻을 본받고 나의 간곡한 말을 생각하여
29 나라의 간우(艱虞)를 폐부(肺腑)의 병으로 여기고 백성의 괴로움을 한몸의 일로 여긴다면,
30 사사로운 뜻은 모두 제거되고 공변된 마음이 다시 밝아질 것이니,
31 송나라 현인의 서명(西銘)이 오늘의 약석(藥石)이 될 것이다.
32 ○ 아! 움막집에 사는 백성이 비록 애통한 마음을 구중궁궐에 한 번 진달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33 위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목민관에 이르기까지 만약 구활(救活)할 대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다하도록 하라.
34 말은 비록 갑과 을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땅히 참작할 것이다.
35 승지는 이를 대신 초안하여 중외에 선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36 ○ 24일에 사대부들이 백성의 집을 함부로 점유하는 것을 거듭 금지하였다.
37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이 혹 싼값에 백성의 집을 강제로 매입하거나 혹은 백성의 집에 임대하여 들였다가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았는데,
38 숙종이 그 폐단을 자세히 알고 엄중하게 금하도록 하고 한성부로 하여금 때때로 백성의 집을 빼앗은 여부에 대해 아뢰게 하였다.
39 이때에 이르러 한성부에서 없다고 아뢰니, 임금이 판하하기를 "진실로 없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깊숙한 구중궁궐 속에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40 낭관으로 하여금 적간(摘奸)하게 하라." 하고, 이어 적간하는 낭관이 여리(閭里,마을)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41 ○ 25일에 이광좌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체로 양역을 변통시키려면 신포(身布) 2필은 과중하니, 이제 만약 그 한필을 감하면 백성에게는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42 그러나 우리 나라는 용도가 해마다 많아지고 달마다 더해가고 있으므로 1년의 세금으로 1년의 용도를 지탱할 수가 없으니, 나라에 일이 생기게 되면 손을 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43 지금 나라의 용도를 미리 헤아리지 않고 앞질러 한 필을 감하면 나중에 명나라 말기처럼 더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44 대저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용도를 조절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45 세종 대왕께서는 황희, 허조와 산릉의 제사 때에 소찬을 쓰기로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려는 뜻이 이와 같았습니다.
46 원컨대, 전하께서는 크게 조절하고 줄여서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를 살리는 방도를 삼으소서." 하니,
47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재물을 착취하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을 베풀면 백성이 모이는 것이다.
48 나라의 저축이 비록 바닥이 난다고 하더라도 백성이 가난한 것보다는 낫다." 하였다.
49 ○ 26일에 임금이 승정원에 머물러 두었던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고
50 말하기를 "내가 어릴 적에 본 것인데, 숙종께서는 비록 깊은 밤이라도 반드시 공사를 수응하여
51 밤이 3경이 될 때까지 시한을 정했었는데, 병환이 있고부터 비로소 인정종(人定鍾)까지로 한정하였다.
52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제부터는 비록 밤이 깊더라도 공사를 들이도록 하고, 변방의 긴급한 보고는 시간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53 ○ 28일에 김홍석, 윤용 등이 또 거듭 궁인 김씨를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54 비답하기를 "삼사에서 만약 나의 말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의심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55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마음속으로 매우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하였다.
56 ○ 29일에 지평 이진수가 아뢰기를 "영덕 현령 홍정보는 개혁에 뜻을 두고
57 엄중하게 단속하는 것을 숭상하여 다스리니, 간사한 서리(胥吏)와 교활한 노복이 감히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58 호장, 이방, 사령, 관노들이 밤에 읍성 밖 요새의 도로를 점거한 다음 시골 백성들이 관가에 바치려고 싣고 가는 것을 쫓아 버렸고,
59 관아의 종이 장계를 가지고 감영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아 금하였고,
60 향소(鄕所)를 달래고 위협하여 그 당에 들어오게 하되 따르지 않으면 그의 아내를 결박하여 강제로 서표(署標)를 받았으며,
61 또 병기를 가지고 관문에 돌입하여 흉언과 위협이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었습니다.
62 그 사잇길로 보낸 장계가 영문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두려워하여 겁을 먹고 찾아와서 근거 없는 말로 사죄했습니다.
63 홍정보가 제일 먼저 주창한 자를 조사하여 형을 시행하려고 하니, 또다시 칼을 뽑아들고 결박을 끊고서 달아났는데,
64 마침내 영문과 이웃 고을의 힘을 입어 6, 7명을 체포하여 모두 자백을 받았으나,
65 감사의 체임(遞任)으로 인하여 아직 처치를 못했습니다. 청컨대, 효시(梟示,목을 베어 메달다)하게 하소서." 하니,
66 비답하기를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니, 오히려 경차관을 차견하여 추핵하게 해야 할 것이다.
67 지금 본 고을에서 자백받은 것을 가지고 곧바로 효시하는 것은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니,
68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핵실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2 ○ 10월 3일에 수찬 김홍석이 상소하기를 "양역(良役)의 폐단은 부역이 고르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2 장차 이를 고르게 하려면 반드시 견감해야 하고, 견감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부족하게 될 것인데,
3 부족해도 충당시킬 대책이 없다면 그것은 일을 담당한 신하가 지혜와 생각을 다하더라도 계책을 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4 무릇 임금이 만민을 기르는 것은 부모가 여러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모두 같은 자식인데, 하나는 노고하여 죽고 하나는 근심없이 편하게 지낸다면,
6 부모로서는 고르게 편안하고 나누어 노고하게 할 생각일 뿐일 것입니다.
7 ○ 오늘날 사족(士族)은 진실로 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 문과이나 무관 두 길의 출신도 아니고 반드시 바탕삼을 만한 문음(門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농토와 집을 소유하고 노비를 부리고 있습니다.
9 한 번 사족이라고 불리워지면 기꺼이 편맹(編氓,평민)으로 자처하려고 하지 않는데 관장들도 이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10 그래서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 말의 곡식과 한 자의 베도 관에 바치는 일이 없이 자식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11 마치 봉작을 세습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12 ○ 한나라 때에는 세 공자가 변방에 수자리를 살았었고, 당나라 때에는 조용할 적에 선비와 농민을 구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3 우리 나라에서도 오위를 혁파하기 전에는 사족들도 모두 역명(役名)이 있어서 편안하게 일 없이 앉아서 먹는 자는 본래 없었습니다.
14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족이란 옛날에 없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우리 나라의 전성기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15 ○ 듣건대, 양역(良役)을 바치는 것은 통상적으로 한 필로 정식(定式)하였다고 하는데,
16 장차 헤아려 줄여서 그 본래의 액수를 감축시킨다면, 신은 부족한 수가 과연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본래의 베에 비교해 보아도 5, 6분의 1, 2에 지나지 않습니다.
17 지금 호적에 드러난 경외의 민호가 여호(女戶)와 단정(單丁)을 제외해도 1백여 만 호에 밑돌지 않을 것인데,
18 사족(士族)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족을 가리지 말고 1백여 만 호의 백성에게 모두 징수한다면, 충당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19 ○ 요즈음 일을 주장하는 자가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은
20 진실로 경장(更張)을 꺼려서이고, 또 오늘날 나라 기강이 그 일을 해 낼 수 없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21 그러나 무릇 크게 변통하기 위한 경우에는 반드시 큰 경장(更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2 그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오직 임금과 정승이 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주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23 혹 자질구레한 것을 주워모아 미봉책으로 꾸려가면서 구차하게 마무리지을 계획을 한다면,
24 이는 명목(名目)이 이미 정당하지 못하고 사체 또한 매우 구간(苟簡)하게 될 것이니,
25 그렇게 되면 시행한 지 1, 2년도 안 되어 온갖 병폐가 생기게 됨에 따라 마침내 도로 정지하게 될 것입니다.
26 한 번 정지한 뒤에는 또 다시 이를 징계하고 두려워하여 폐해를 혁파하자는 말을 꺼릴 것입니다.
27 그러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 마저 마침내 지탱할 수가 없게 되어 나라의 근본이 쓰러질 것이니, 어찌 크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28 ○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진달할 수 없음을 염려하셔서 심지어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진언하게 하셨으나,
29 외신(外臣)의 진소는 체통이 중하므로 반드시 관계가 소원하고 처지가 미천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으니, 또 다시 그 기대에 어긋날까 염려가 됩니다.
30 마땅히 각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열읍에 거듭 유시하여 각각 민폐(民弊)를 갖추어 감영에 보고하게 하고 도신은 이를 채택하여 장문하게 하소서." 하고
31 ○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심이 고금(古今)에 으뜸입니다.
32 그러나 마음을 세움이 흑 순일(純一)하지 못하고 뜻을 지킴이 혹 견고(堅固)하지 못하면
33 속히 물러서게 된다는 경계와 끝맺음이 없다는 비평 또한 마땅히 염려해야 할 것인데,
34 이는 오직 학문을 하여 이치를 밝히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35 진실로 한갓 이름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속히 해버리려는 뜻을 가지고
36 남의 이목에 놀라운 일이 있기를 힘써 구하면서 실제로 몸과 마음에 체득한 것이 없으면,
37 비록 그 처음 부지런히 힘쓸 적에는 조그마하나마 볼 만한 선(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일시적인 지기(志氣)는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38 마음과 뜻이 게을러진 다음에 막연하게 이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되면 마침내 혼란과 같은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39 ○ 비답하기를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자는 것은 명분이 진실로 아름답다.
40 그러나 만약 동쪽 것을 헐어다가 서쪽을 보강하듯이 그 일에 대해 책임만 면하려 한다면,
41 이는 국체(國體)가 구간(苟簡)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뒷날의 폐단도 없지 않을 것이다.
42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반드시 크게 진작(振作)시키는 일이 있은 후에야 양역(良役)을 공평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 고 여긴다.
43 이번에 그대의 상소를 보니 오늘날의 약처방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44 호포(戶布)와 구전(口錢)은 그 의논이 선왕 때부터 비롯되었으나, 시행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처음 실시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45 그러나 인족(隣族)의 침징(侵徵)과 백골(白骨)의 징포(徵布) 또한 고전(古典)에 있었던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처리하게 하겠다.
46 민폐에 관한 일은 도신(道臣)에게 분부해서 이에 의해 거행하게 하겠으며,
47 경계를 진달한 말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48 ○ 5일에 형조에서 아뢰기를 "사인(士人) 이존중, 이보원, 조상항은 남의 집을 빼앗은 죄로 체포되어 갇혔는데, 병이 위중하니, 보수(保授) 하소서." 하니,
49 임금이 말하기를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로 특별히 풀어주되, 병이 낫기를 기다려 추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50 ○ (보수(保授)는 보석(保釋)된 사람이나 도피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근친(近親)이나 친구가 책임지고 맡는 것을 의미한다.)
3 ○ 10월 6일, 당초에 총호사 이광좌가 민폐를 염려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모집하는 역군 수를 작정하여 문서에 기록해서 산릉 도감에게 보냈는데,
2 산릉 도감이 1백 80명의 백성을 더 사역하였으므로, 이광좌가 그 사실을 듣고 조사하여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3 이에 도감 당상 이사상이 크게 노하여 상소해서 이광좌를 헐뜯기를 '이것은 당상을 봉공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4 비답하기를 "체통이 이와 같아서는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5 이튿날 이광좌가 들어가 아뢰기를 "신이 총령(摠領)의 책임을 맡고 있는데 어찌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마는,
6 대저 근일(近日)에 나라의 풍속이 어렵게 되어 허물을 지적하면 비록 추고를 하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 기강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7 ○ 16일에 판윤 심단이 아뢰기를 "사부(士夫)로서 집이 없는 자가 많으므로 세(貰)로 들어가는 것이 근래에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규정입니다.
8 그런데 그 가운데 애당초 세를 주지도 않고, 심지어 허위로 세든 문서를 작성하여 빼앗아 들어간 죄를 면하려고 꾀하는 자도 있으니, 일체 금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9 임금이 말하기를 "사부로서 상민(常民)의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은 빌려거나 세를 들었거나를 막론하고, 빼앗아 들어간 것으로 죄를 정하라." 하였다.
10 ○ 20일에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호속목(虎贖木)에 대한 법을 만든 뜻은 호랑이를 사냥하여 백성의 해를 덜어 주고 그 가죽은 진상하여 쓰고자 한 것입니다.
11 그런데 얻기가 어려운 까닭에, 쌀이나 비단으로 수량을 정하여 거두어 들여서 호랑이 가죽을 살 수 있는 자본을 삼았습니다.
12 무릇 호랑이란 있으면 잡고 없으면 잡을 수 없는 것인데, 잡을 수 없으면 내버려두어도 그만입니다.
13 그런데 지금 각 고을에 얼마 동안의 기한을 정하여 그 값을 바치게 하였으니,
14 넓은 들에 한치의 나무도 없는 고을에서는 어디에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값을 바치게 하고 있습니다.
15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무슨 호랑이가 있다고 호랑이 값을 거두어 들이는가?' 하고 있으니,
16 이것이 어찌 국체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견감해 주고자 한다면 호속목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17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쌀과 베만을 징수하고 있으니, 그 해가 도리어 호랑이보다 더 심하다. 이미 그 해를 알았으면 없애는 것이 옳다." 하였다.
18 ○ 이광좌가 또 아뢰기를 "혜민서는 도성 백성의 의약을 위해 설치한 것이고, 전의감은 조정의 신하들의 의약을 위해 설치한 것이니,
19 설치한 뜻은 매우 융성하지만, 조정의 신하가 전의감의 약을 먹을 수가 없는데, 더구나 도성의 백성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20 인삼이나 중국 당대(唐材)의 값은 선혜청에서 조정하여 오래 구임(久任)시킨 자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는데,
21 이른바 구임은 제조가 사사롭게 친근한 자로 이를 삼아서 혜택을 얻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22 어찌 백성들이 고생하여 모은 물건을 이와 같이 까닭 없이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23 임금이 말하기를 "혜민서, 전의감의 이름이 어찌 좋지 않은가?
24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염소를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하였으니,
25 훗날 만약 그 이름을 보존하게 된 효과로 인하여 혹 옛것을 회복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26 3백 년 동안 전해 온 일을 갑자기 혁파 할 수는 없다.
27 의약을 담당하는 두 부서가 소속될 곳이 없다면 이 또한 구차한 일이다.
28 그리고 구임에 이르러서는 하루 아침에 파직시키는 것도 매우 가련한 일이니, 할 수가 없다.
29 묘당에서 참작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30 ○ 11월 1일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중동(仲冬)의 전후에 다시 우레와 번개의 변이 있어 우르릉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여름과 다름이 없다.
31 내가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성실하지 못한 바가 있는가?
32 어진이가 재야(在野)에 있는데 능히 수용하지 않는 바가 있는가?
33 궁박한 사람이 원망을 품고 있는데 구중궁궐까지 알려지지 못한 것인가?
34 조정의 기상이 화평하지 못하여 천기(天氣)를 감상(感傷)시킨 것인가?
35 공의(公議)가 가리워져 막히고 사의(私意)가 횡행하는 것인가?
36 이 여덟 가지 조목 외에 드러난 것들을 말한다면,
37 백성은 거꾸로 매달려 물과 불 속에 있는 듯하고,
38 당고(黨錮)는 날로 심해져서 서로 간과(干戈)184) 를 찾고 있다.
39 아!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아야 하는데 백성이 장차 다 죽으려 하고 있으니, 내가 누구와 함께 임금 노릇을 할 것인가?
40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니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랴?
41 어떻게 하면 백성이 장차 편히 살겠으며, 어떻게 하면 조정이 저절로 안정될 것인가?
42 그대 신하들은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草)하고 정부에서는 널리 직언을 구함이 마땅하다.
43 그 말이 아주 적절하면 내가 마땅히 가납 할 것이고, 말이 비록 과중하다 하더라도 내가 허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44 어찌 남을 책망하겠는가? 그러나 또한 어찌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45 방백(方伯)의 신하는 스스로 청렴 결백을 지키고 출척(黜陟)을 밝게 하여 한결같이 공심(公心)을 따른다면, 나랏일을 해낼 수 있고 백성도 편안해지리라.
46 아! 그대 여러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념하여 공경히 그대들의 직임을 받들라." 하였다.
47 ○ 6일에 사헌부(장령 서종하)에서 아뢰기를 "유사의 신하가 경비를 걱정하여 빚을 받아들이는 데 급한 나머지 날마다 매질을 일삼으므로
48 도하(都下)의 김씨 성을 가진 부처(夫妻)가 서로 이어 자결했다고 합니다. 듣는 이들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으니,
49 나문하고 빚의 징수는 내년 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독촉을 늦추게 하소서." 하니,
50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놀랍고 처참하다. 해사의 당상관과 낭관은 각박하게 군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51 특별히 그 직책을 파면시켜 백성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52 ○ 유학 이의연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양암(諒闇,경종의 상)중에 계시며
53 효(孝)는 허물이 없을 것을 생각하시고 초기에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우선하시니,
54 하늘의 꾸짖음을 불러 일으키지 않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55 그러나 중동의 달에 천둥과 번개가 예사롭지 않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56 엎드려 생각하건대, 그런데 임어(臨御)하신 지 몇 달 동안 줄곧 미적미적하시며 작은 것은 살피시되 큰 것은 버려두십니다.
57 지금 전하께서 자신을 반성하시고 정사를 닦으시되 근심하시어 소인배들의 죄를 바로잡아 선왕의 뜻이 드러나게 하소서.
58 사문(斯文,유교,유학)의 옳고 그름에 이르러서는 숙묘(肅廟)의 유교가 밝고 밝은데, 흉악한 무리들이 거리낌없이 출향(黜享)하였고,
59 윤지술의 충직함과 억울함은 사림들이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60 은전과 충직을 포상하는 일이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 재앙의 단서가 아니겠습니까?
61 지금 흉악한 무리들이 체결하고 하늘의 재앙이 자주 나타나 국사에 염려가 있는데,
62 큰 화를 겪은 뒤라 선류(善類)들이 떨며 모두 말하는 것을 조심하고 있으니,
63 우리 나라가 3백년 동안 선비를 양성한 뜻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절로 통곡하게 됩니다." 하였다.
64 ○ 정원에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이의연의 상소를 보니 한편의 정신이 오로지 당(黨)을 비호하는 데서 나왔다.
65 이런 상소는 응지로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니. 반드시 즉시 되돌려 주라.
66 아! 붕당이 심해져 시비가 분명하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깊이 탄식하는 바이다.
67 만약 이 일을 가지고 다시 서로 공격한다면 한 번 가고 한 번 옴에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시킴이 없을 수 있겠는가?
68 아! 그대 신하들은 먼저 관평(寬平,너그럽고 고르게하는)한 뜻에 힘쓰고 노력하여 우리 나라를 지키라." 하였다.
4 ○ 11월 7일에 헌부에서 이의연을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 ○ 8일에 이의연을 절도에 귀양보냈다. 우의정 조태억의 청을 따른 것이다.
3 이때 영의정 이광좌와 우의정 유봉휘가 모두 인죄(引罪)하고 사직하였는데,
4 조태억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축년(경종 원년)의 일을 만약 역모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5 나라에서 이미 그 죄를 밝혔으니, 오늘날 신하된 자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비호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6 ○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연이 상소 가운데 정책에 대해 말했는데,
7 내가 비록 현명하지는 못하나 어찌 이것 때문에 털끝만큼이라도 그 무리들을 용서할 리가 있겠는가?
8 이의연은 당(黨)을 위해 죽기로 마음을 먹은 무리로서 원악이 이미 죽은 뒤에도
9 여전히 역적을 비호하는 데로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고 이런 상소를 하였다.
10 내가 역적을 비호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은 상소는 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1 공자가 말하기를 '미워함이 너무 심하면 어지러워진다.'라고 하였다.
12 내 뜻이 이와 같은데, 대간의 상소는 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때문에 개연(慨然)히 답했던 것이다.
13 옥당에서는 한밤중에 청대하고, 영상은 차자를 올렸으며, 오늘은 대신들이 또 청대하였다. 이로 보건대, 온 나라의 공의(公議)를 알 수 있겠다.
14 대계는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어찌 원악과는 다름이 있지 않겠느냐? 이의연을 절도에 정배하라." 하였다.
15 ○ 9일에 지평 윤용이 상소하여 이의연을 국문 할 것을 청하니,
16 답하기를 "이의연은 이미 도배의 법을 베풀었다. 어찌 반드시 죽인 뒤에야 왕법을 바루겠는가?" 하였다.
17 ○ 11월 10일에 호군 김상옥, 전 부사(府使) 유복명, 전 현감 박사성 등이 상소하기를 "김일경의 차고 넘치는 죄는 낱낱이 들기 어려움이 있으나,
18 집안에서 칼날을 들이대었으니, 변란이 한정이 없었고, 참소를 꾸며 시해를 꾀하였으니 흉화를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19 다행하게도 오늘날 전하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시고 조금이나마 삭출(削黜)의 벌을 베푸셨습니다.
20 그러나 신 등은 빨리 역적 김일경의 무상(誣上), 부도(不道)한 죄에 대해 빨리 법을 바루어 여분(輿憤)을 풀고,
21 당(黨)을 비호하는 여러 신하들을 한결같이 아울러 찬출(竄黜)한 뒤에야
22 선조(先朝)께서 받았던 무욕이 신설(伸雪)되고 성궁이 받은 무멸(誣衊) 또한 환하게 씻을 수 있으며,
23 흉얼들이 숨을 죽이고 종사가 안정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니,
24 비답하기를 "김일경의 소행은 참으로 지극히 패리(悖理)하다. 그래서 이미 삭출의 벌을 베풀었고, 당을 비호하는 사람 역시 파직시켰다.
25 어찌 반드시 죽이고 난 뒤에야 왕법(王法)을 바룰 수 있으랴?" 하였다.
26 ○ 11일에 하교하기를 "김일경은 차마 인용할 수 없는 일을 방자하게도 썼으므로 빈전에서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고싶었다.
27 그 엄하게 징토하는 도리에 있어서 삭출에만 그칠 수는 없으니, 절도에 안치하되 당일로 압송하라." 하였다.
28 ○ 26일에 이의연을 국문하였다. 이의연의 나이 33세이었다.
29 ○ 12월 5일에 이의연이 옥중에서 죽었다.
30 이의연은 이해로와 사귀었는데, 이해로는 비분 강개하는 성격에 술을 잘 마셨으며, 술에 취하면 곧 당세의 일을 논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두려워하였다.
31 임금이 즉위하고도 이광좌와 유봉휘가 여전히 집정(執政)하고 있었으므로,
32 이해로가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알고 눈물을 흘리며 그만두기를 권하니, 이해로가 올리지 못하였다.
33 이의연이 일찍이 이해로의 집에 갔다가 그 상소를 보고 그 의(義)에 심복(心服)한 나머지 이해로에게 "어찌하여 올리지 않는가?" 하니,
34 이해로가 "내 어머님께서 몹시 간절히 만류하시니, 내가 차마 올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35 이의연이 "이 상소는 끝내 없을 수 없으니, 내가 이 상소를 올리겠네.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36 이해로가 "나는 능히 올리지 못했지만, 지금 자네가 올리고자 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나?" 하였다.
37 이의연이 이에 이 상소를 올렸던 것인데, 이광좌, 유봉휘, 조태억이 번갈아가며 국문 할 것을 청하였다.
38 임금은 애초에 국문할 뜻이 없었으나,
39 이명언이 말하기를 "지난날 이이명 무리의 마음은 본래 전하께 있지 않았습니다." 하고,
40 또 말하기를 "흉도가 법망을 벗어난 것이 대행조 때는 그래도 관대한 정치를 해치지 않았지만,
41 전하께서는 반드시 토벌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42 전하께서는 삼수(三手)의 음모를 당(黨)이라 생각하십니까, 역(逆)이라 생각하십니까?
43 만약 당이라 생각하신다면 당일 안국(按鞫)했던 신하들은 장차 당(黨)을 심고 남을 함해(陷害)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44 만약 역(逆)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의연이 어찌 역적을 비호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45 만약 흉얼로 하여금 끝내 상형(常刑)을 피하게 한다면 왕강(王綱)은 문란해지고 인륜은 무너질 것입니다.
46 그러니 어떻게 신민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뒷사람의 의논을 두절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자.
47 임금이 부득이 국청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는데,
48 이광좌의 무리가 더욱더 급하게 협지(脅持)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차례의 형신에 옥중에서 죽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사류들이 슬프게 여겼다.
49 ○ 사신은 논한다. 이의연의 상소에 '선왕께서 불행하게도 부지런한 데 권태로운 질환이 있으셨다.' 고 한 것이 어찌 악역(惡逆)에 가깝겠는가?
50 이광좌 등이 이의연을 국문할 것을 청했던 것은 경묘(景廟)께 질환이 있었음을 굽혀 숨긴 뒤에야
51 정책(定策)과 연차(聯箚)를 죄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2 그리고 목호룡이 상변해 무옥을 일으켜 사대신을 죽인 것을 모두 경묘의 예단(睿斷)으로 돌린 뒤에야
53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 등이 천총(天聰)을 가리고 충현(忠賢)을 도륙한 죄를 덮을 수 있었으므로,
54 이의연의 말을 듣기 싫어하여 죽이고자 했던 것이니, 성상께서 이의연의 억울함을 모르셨겠는가?
55 그러나 경묘의 재궁(梓宮)이 빈전에 있고, 이광좌 등이 걸핏하면 '선왕을 위해 죄를 청한다.'고 말하였으므로
56 이에 국청을 설치하라고 명했던 것인데, 이광좌 등이 곧 음형(淫刑)을 베풀어 마침내 죽여 버렸으니, 그 또한 참혹하였다.
57 그러나 천도(天道)는 굽히고 펴짐이 있어서 성상께서 30년 동안 은인자중하시다가
58 영조 31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광좌와 조태억의 관작을 추탈하였으니, 이에 이의연이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59 ○ 전 좌랑 이태징이 상소하여 역적 김일경을 친국하여 실정을 완전히 실토하게 할 것을 청하니,
60 비답하기를 "이처럼 이간하고 의심하는 말은 내가 보고 싶지 않다." 하였다.
5 ○ 12월 8일에 임금이 거동하여 김일경과 목호룡을 친국하였다.
2 김일경이 공초하기를 "신하의 우러러 바라는 바가 이와 같고 군부의 스스로 여김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흉언이겠습니까?" 하고,
3 또 말하기를 "지금 즉시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선대왕의 빈전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4 ○ 임금이 친히 문목룡에게 문목을 부르기를 "임인년의 고변서 안에다 감히 (영조의) 누명을 씻는 등의 일을 제멋대로 썼으며,
5 납초(納招)한 것 가운데 '그 마음을 들춘다.' 는 말은 음흉하고 참혹하였다.
6 그때의 역변이 얼마나 망측한 것이었는데, 제멋대로 그 사이에 거론하였는가?
7 '감히 춘저(春邸,영조)에 있을 때 평생의 심사(心事)를 알고 있다.' 는 등의 말과
8 '즐겨 왕(王)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고 한 것은 더욱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하다.
9 지금 김일경의 일로 보건대, 네가 말한 바와 표리(表裏)가 되어 서로 부합된다.
10 이 따위의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음흉한 사람에게 말하고 교문(敎文) 가운데 드러내었으니,
11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였다.
12 ○ 목호룡은 나이 41세였는데, 공초하기를 "역적 무리들이 전하께 털끝만큼도 서로 가깝지 않은 일이었으나,
13 전하께서 아시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전하께 욕(辱)을 끼치려 하였으므로
14 종사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위해 역적을 토죄하고 억울함을 씻었던 것입니다.
15 고변(告變)하여 역적을 토죄하는 사람의 말이 어찌 과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6 역적들이 전하를 팔아 요악(妖惡)한 말을 하려 하였으므로 분을 느껴 토죄하는 말을 했던 것이니, 추호도 범상(犯上)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17 저는 비단 종사에 공(功)이 있을 뿐 아니라, 비단 전하께 공이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18 ○ 김일경을 국문(鞫問)하시는 것은 천지간의 원통한 일을 침범했기 때문이니, 구문하시는 일은 정정당당합니다.
19 만약 김일경의 말이 전하를 침범했음을 알았다면, 제가 김일경을 베자고 청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찌 김일경의 심사를 알겠습니까?" 하였다.
20 ○ 다시 목호룡을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역적들이 전하를 무욕했기 때문에 역적을 토죄했던 것이니, 감히 공을 바란 계책을 꾸몄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21 만약 공을 바라는 뜻이 있었다면, 어찌 오늘 공을 바랄 수 있음을 미리 알아 상변한 날 전하의 심사를 포백(暴白)하는 말을 했겠습니까?
22 저는 종사와 전하께 공이 있으니, 전하께서 저를 탁용(擢用)하시어 천하 사람들에게 보이실 것을 바랐는데, 국문하시니 너무나도 뜻밖입니다." 하였다.
23 임금이 하교하기를 "단지 삼수(三手)의 역변만 가지고 고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24 그런데 이에 관계도 없는 나를 변서에 집어 넣었으니, '즐겨 왕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는 말은 심상길의 말이 아니라 곧 그의 말이다." 하고,
25 또 말하기를 "영상은 김일경의 신축년 상소를 살펴보았는가? 그 말이 음흉하고 목호룡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26 ○ 한 차례 형신하였으나, 불복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회맹단의 삽혈(歃血,신(神)에게 맹세할 때 마시던 피) 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하니,
27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흉악하고 처참하다." 하였다.
28 ○ 김일경은 공초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 라고 하지 않았다.
29 ○ 무상 부도 죄인(誣上不道罪人) 목호룡과 김일경을 당일 당고개에서 부대시 처참 하였다.
30 ○ 13일에 형조에서 누락된 김일경 첩의 자녀들을 유배시킬 것을 청하자 윤허하였다.
31 ○ 28일에 성균관 사예 백시광이 상소해 역적 김일경을 비호한 정신들을 탄핵하기를 청하니,
32 임금이 상소를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지금 제기할 수 없다.
33 요사이의 일은 이미 정해졌는데, 상소하여 경알(傾軋)하니 지극히 놀랍다." 하고, 이어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6 ○ 영조 1년(1725) 1월 7일에 전 사정 임술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당론을 매우 싫어하시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고칠 계획을 하셨습니다.
2 그러나 오늘날의 당론은 반드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문란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3 전하께서 통촉하지 못하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래저래 하시면서 미봉하는 계책을 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4 만약 그렇다면 전하의 본원(本源)의 바탕이 반드시 편벽되게 가리운 바가 있는 것입니다.
5 주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붕당을 미워하여 제거하려다가 이따금 나라를 망치기에 이르기도 했다.' 라고 하였으니, 경계하소서." 하였다.
6 비답하기를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시비를 우물쭈물해 넘길 뜻이 있겠는가?
7 이쪽에서 지적하여 역적이라 하고, 저쪽에서 지적하여 역적이라고 하는데,
8 고금 천하에 어찌 한쪽이 어질면 한쪽은 역적이 되고, 한쪽이 역적이 되면 한쪽이 어질게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
9 옛사람이 '호인은 없다[無好人]' 고 한 세 글자는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 말하였는데,
10 더구나 세상의 반을 들어 역적이라 하겠는가?
11 그렇다면 한 사람을 죽여 악(惡)을 징계하고 곧은 것을 들어 굽은 것을 바로잡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12 더욱 마음 아픈 것은 피차 공격하면서 위를 무함하였다고 말을 하는데,
13 이는 징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함하는 것이니, 어찌 입에 담을 수 없는 뜻을 생각하지 않는가?
14 사문의 일은 내가 바야흐로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하고 있는데,
15 처음에는 사가(私家)의 문자를 가지고 점차 조정으로 올라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내가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16 ○ 2월 25일, 이 때 왕자가 이미 7세였는데, 재능이 뛰어나고 숙성하여 중외에서 마음을 두었으므로 심정보가 상소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7 이튿날 예조 판서 민진원이 책봉하기를 강력히 청하니,
18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중요한 일은 마땅히 대신이 오기를 기다려서 해야 한다." 하였다.
19 이날 밤 4경에 갑자기 명하기를 "2품 이상 육조의 장관과 양사, 옥당은 입시하라." 하였다.
20 승지 김상옥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경의군을 세자로 삼는다." 하였다.
21 ○ 소원 이씨를 정빈에 추증했는데, 왕세자를 탄생했기 때문이다.
22 ○ 4월 29일에 민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들으니 여염 사이에서 궁인을 선발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23 단지 내노비 중에서만 선발하고, 양가를 침범하지 않는 것은 선조의 구례입니다.
24 지금 들으니 여리(閭里)에서 이 일 때문에 원망과 비방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25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은 참으로 가상하여 기쁘다. 나는 알지 못하는데 이와 같은 일이 있다고 하니, 내관을 잡아 가둔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26 선조에서 양녀를 선발하지 않은 것은 성덕의 일이다. 각기 제 부모가 고생하며 길렀는데
27 하루 아침에 선발하여 깊은 궁중에 유폐시킨다면, 어찌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28 ○ 5월 28일에 경기, 충청 양도의 유생 김수명 등이 상소하여
29 유봉휘, 이광좌, 조태억, 이사상, 이명언, 권익관과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인 육적(六賊)을 처참할 것을 청하니,
30 비답하기를 "비록 칭찬하지마는, 내가 윤허하지 않는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31 ○ 6월 20일에 사헌부(집의 신무일, 지평 한덕후)에서 역적 김일경의 처자를 처형하도록 아뢰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2 ○ 7월 4일에 유봉휘를 귀양보내고 이광좌, 조태억 등은 관직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할 것을 명하였다.
33 이날 우의정 이관명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는데,
34 답하기를 "경 등은 나의 신하들의 의견을 어기지 않는 뜻을 본받아 그 궐정에서 호소하는 것을 그만두고 국사를 강마(講磨)하도록 하라." 하였다.
35 ○ 25일에 충청도 유생 박치룡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유봉휘, 이광좌, 조태억과 역적 김일경 소하(疏下)의 5적을 목베고
36 조태구, 최석항에게 노적(孥籍)의 형벌을 시행하여서 신(神)과 사람의 분노를 풀게 하소서." 하였고,
37 경상도 유생 이도장 등도 또한 상소하여 청하기를 "역적이 괴수와 난적의 무리를 목 베어서
38 온 나라의 사람으로 하여금 환하게 흉당이 이성(二聖)을 무함하고 성궁을 위태롭게 한 죄를 알게 하소서." 하니,
39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기를 "이미 전후의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40 ○ 12월 2일에 사직 홍만조가 졸하였다. 홍만조는 비록 착한 무리와는 배치가 되었으나,
41 8도를 역임하면서 다른 하자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간혹 이 때문에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42 ○ 12일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양산 군수 이두삼은 백성을 해롭게 하면서 자기를 살찌게 하고,
43 창고의 곡식을 덜어내어 사사로이 스스로 판매했으며,
44 읍비를 몰래 간음하여 그의 말만 치우치게 들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45 ○ 영조 2년(1726) 8월 6일에 좌의정 홍치중이 말하기를 "일찍이 김장생과 송시열 양가의 말을 들어보건대,
46 김익량은 김종서의 자손임이 분명했습니다.
47 송시열의 5대 조부가 김종서의 질녀서로 그때 3세의 아이를 숨겨주어 김종서의 뒤가 보존되게 했었는데, 곧 김익량의 선조이었습니다.
48 송시열의 가문에서 당초에 기휘(忌諱)하면서 감히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49 세상에서는 드디어 김종서는 후손이 없다는 말이 있게 되어,
50 접때의 대관의 상소에 곧장 '김종서는 후손이 없는데 김익량이 사칭한 것이라.'고 하게된 것입니다.
51 어찌 세속에 떠다니는 말 때문에 두 선정의 가문에 전해 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52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을 들어보니, 비로소 석연(釋然)해진다." 하였다.
53 ○ 12월 18일에 좌의정 홍치중이 명을 받고 빈청으로 나오니, 임금이 인견하면서 전교하기를
54 "나의 생각에 옳은 것은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겨야 하는데,
55 옳은 것 중에도 또한 그른 것이 있고 그른 것 중에도 또한 옳은 것이 있다고 여긴다.
56 만일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것으로 마음을 먹으면,
57 오래 쌓여 온 폐단이 하루아침에 제거하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세월을 끌어 가노라면 조금이나마 효과가 없지 않을 것이나,
58 나의 부덕한 몸으로 어찌 탕평하게 될 수 있겠는가?
59 요사이에 조정이 만일 당색을 같이 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현명하여도 임용하지 않고,
60 만일 동류로 있게 되면 비록 어질지 않더라도 버리지 않는다.
61 오늘날 토복(討復)하는 의리를 대저 누가 그르다고 하겠는가마는, 그 중에 지엽(枝葉)마저 반드시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과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62 나는 조금도 사의(私意)가 없는 것을 온 조정이 알고 있는 일이고, 또한 나의 뜻에 아부하여 순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63 내가 경을 취한 것은 진실로 경의 공평하고 대범함을 귀중하게 여긴 것인데,
64 경은 정승으로 제배한 뒤부터는 임금으로 있고 신하로 있게 되어, 마음속으로 기뻐했었다.
65 수규(首揆)의 상소는 천만뜻밖에 나온 것이었다. 그는 강직한 성미가 있기 때문에 또한 지나치게 강경한 병통이 없지 않는 것이다.
66 만일에 경이 이 때문에 자획(自劃) 한다면 진실로 바라던 바가 아니니, 나와서 일을 보기를 천만 번 바란다." 하였으나,
67 홍치중이 일단 체직하지 않을 수 없는 뜻을 들어 상세하게 진달하였다.
68 임금이 탑전으로 다가오도록 명하여 한참 동안 손을 잡고 끊임없이 돈면(敦勉)하였다.
69 ○ 20일에 삼사에서 임징하를 멀리 귀양보낸 것을 도로 거두는 일에 있어서는,
70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임징하를 멀리 귀양 보내지 않는다면 뒷날에 무슨 면목으로 대행 대왕을 뵈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71 사간원(정언 한덕후)에서 아뢰기를 "이중환이 적신 목호룡과 함께 일을 한 정상이 목시룡의 공초에 낭자하였을 뿐만이 아니어서,
72 그의 죄상을 논한다면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니, 이중환의 사형을 감동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 ○ 영조 3년(1727) 2월 25일에 검열 민형수, 정익하가 아뢰기를 "저번에 연신(筵臣)이 임금의 얼굴을 쳐다 본 것을 들어 준엄한 분부가 계시게 되었습니다.
2 다만 생각해 보건대, 사관은 맡은 바가 있어 좌사(左史)는 동작을, 우사(右史)는 언어를 기록하게 됩니다.
3 옛 역사를 보건대, 더러는 '상이 얼굴을 움직이며 선(善)하다 했다.' 고 한 데도 있고, 더러는 '상이 안색을 변했다.' 고 한 데도 있었습니다.
4 만일 사관이 천안을 쳐다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처럼 기록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5 이미 준엄한 분부를 받들었지만, 다시 첨망(瞻望)을 해야 동정을 기록하게 되는데,
6 비록 직무를 거행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불경스러운 데 관계되므로 할 수 없이 앙품하는 것입니다." 하고,
7 ○ 또 말하기를 "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보는 것이 이 어찌 업신여기는 것이겠습니까? 대개 친애하는 일인 것입니다.
8 지금 제신들이 평소의 친애하고 사모하는 정에 있어 어찌 첨망(瞻望)하고 싶은 소원이 없겠습니까?" 하니,
9 임금이 이르기를 "저번에 이중협의 일로 인해 분부를 내린 바가 있기는 하나,
10 진나라에서 임금만 높이고 신하는 억압했던 것을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겼었는데,
11 어찌 제신들로 하여금 우러러 볼 수 없게 하겠는가?
12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부의 얼굴을 알고 있지 못한다면 난리를 당하더라도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라고 했으니,
13 지금 좌사와 우사의 말은 옛사람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하고,
14 이어 분부하기를 "이 뒤로 제신들이 우러러 보아야 할 일 있을 적에는 우러러 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15 ○ 5월 17일에 영중추부사 민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사대부들이 오로지 자기 편한 것만으로 일을 삼습니다.
16 가마를 타는 폐단을 선조 때부터 엄금하였는데,
17 지방관은 물론이요, 양반, 중인, 서인, 늙은이, 젊은이가 함부로 타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조정에서 파견하는 대소 관원은 더욱 심합니다.
18 대간 및 대간의 직책을 겸임한 사람은 곧 법을 집행하는 관원임에도 거리낌없이 자신이 법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9 ○ 5월 29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공용(孔鏞)의 일은 우후 보다 낫다.
20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도적을 교화하여 양민을 만드는 것은 진실로 수령에게 달렸는데,
21 지금 토포사가 된 자들은 도둑을 다스릴 때에 한번 옥문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가는 사람이 없다.
22 사람이 어찌 본래부터 착하지 않은 자가 있으리요?
23 단지 신역(身役)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춥고 배고픈 환난을 참지 못하여 서로 모여 도적이 되어 구차하게 살기를 구하는 것이니, 그 정상이 애처롭다.
24 지금 삼남에 기근이 매우 처참하니 수령된 자는 진실로 공용의 마음을 먹는다면,
25 하소연할 데 없는 곤궁한 백성들이 변하여 도적이 되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26 승지 임주국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인심이 교사(巧詐)하여 교화만을 전적으로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27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교사한가?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이 교화를 베푼다면 모두 양민이 될 것이다.
28 지금의 백골 징포와 인족 침징은 참으로 고질적인 폐단이니 수령이 이러한 일에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에 힘을 쓸 것인가?" 하고,
29 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폐단으로 크게 두려워 할 것은 붕당이며, 전화(錢貨)며, 양역(良役)이다." 하였다.
30 시독관 신노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자주 재물을 궁중으로 들이신 일이 있었습니다.
31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부모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으니,
32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이 비록 그 지극한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양지(養志)의 효도가 큰 것입니다.
33 숙종이 승하 할 때 동조(東朝,대비)께서 언문 교서를 내리시어 여러 가지 기구를 없애거나 덜게 하셨으니,
34 전하께서 이 뜻을 우러러 체득하시면 뜻을 받드는 효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35 또 아뢰기를 "지난 숙종 41년 영고(寧考,숙종)께서 이어하실 때에 하교 하시기를
36 '수리하는 데 폐단이 있다. 비록 창문이라도 그 떨어진 곳만 오려내고 구멍을 따라 떼워 바를 것이며 전체를 뜯어내고 바르지 말라.' 고 하셨으니,
37 검약을 숭상하는 덕은 곧 전하의 가법(家法)입니다." 하니,
38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39 ○ 6월 29일에 북관 병사에게 명하여 조총을 다시 익히게 하였으니, 함경도 관찰사 조상경의 청을 따른 것이다.
40 앞서 숙종 을축년(11년)에 북민(北民)이 경계를 침범하여 넘어 들어온 변고가 있었으므로
41 조정에서 변민의 사냥을 엄격히 금지하고 조총은 모두 거두어들여 관청 창고에 보관하여 두었는데,
42 이로 말미암아 민간에 조총이 없어 오랑캐를 방비함이 소홀하였으므로
43 식견 있는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여기더니 이때에 이르러 조상경이 장청한 까닭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44 ○ 7월 25일에 예조 참판 김유경이 상소하기를 "충역(忠逆)을 분변하지 않고 시비를 분간하지 않으면서
45 탕평만을 주장한다면, 그 지키는 것이 굳을수록 그 중도는 더욱 어그러져서 장차 윤상(倫常)이 아주 없어지고 의리가 어두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46 비답하기를 "소의 말이 도리에 어그러진다. 본직(本職)을 갈도록 하라." 하였다.
47 ○ 29일에 사헌부(집의 강필경)에서 목시룡을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법대로 처단하게 하기를 계청하고,
48 또 역적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를 사형을 감면하여 종으로 삼으라는 명을 거두고 빨리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기를 계청하고,
49 또 배창석과 시창, 함우신의 처자를 모두 국청을 설시하여 추문하기를 계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50 ○ 판부사 조도빈이 역적이 충신이 되는 상황으로 상소하고 사직하려 하였다.
51 답하기를 "경이 반드시 거취를 같이하려는 뜻을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하거니와,
52 이번에 상소한 말도 내 뜻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직하지 말고 길을 떠나 오라." 하였다.
53 ○ 8월 1일에 헌부(집의 강필경)에서 아뢰니, 답하기를 "임징하로 세상 사람의 반을 몰아넣는 함정을 만드는가?
54 아! 조종 때에 군, 현을 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고 귀양보내기 위한 것이 아닌데, 이제는 문득 피차가 교체하는 곳이 되었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55 ○ 사신은 말한다. "한 번 흉당이 나라의 일을 담당한 뒤로는 남인과 소북을 끌어들여 등용하여 힘을 합하여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할 생각을 하였으므로,
56 강필경이 시배(時輩)에게 아부하여 반드시 일망 타진하려 하였다."
57 ○ 9월 25일에 호조 판서 이태좌가 호남의 흉년에 대해 진달하고, 이어 각 영문에서 요판(料販)하여 이익을 취하는 데 대한 폐단을 논하고서 엄금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8 좌의정 조태억이 아뢰기를 "영남의 흉년도 호남과 다름이 없으니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흩어져 떠도는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게 하고,
59 이어 내년 봄의 진구(賑救)를 감독하게 하소서. 그리고 다시 측량한 전지(田地)도 상세히 살피게 하소서." 하고,
60 이어 박문수를 어사로 천거하니, 임금이 박문수는 나이가 젊어서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겼다.
61 조태억과 김동필이 모두 박문수가 두루 통달하고 사무에 연달(鍊達)한 것을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박문수를 어사로 삼았다.
62 조태억이 또 아뢰기를 "박문수가 나학천의 소장으로 인하여 매양 종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만,
63 지금 살피러 가는 일을 책임지운다면 그가 감히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각별히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64 ○ 사신은 말한다. "일찍이 영조 즉위년에 나학천이 소장을 올려 경종 원년 이후의 과장(科場,과거)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논했기 때문에
65 박문수가 처음에 이를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66 이때에 이르러 갑자가 출사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조태억의 말이 이러했던 것이다."
67 ○ 10월 13일에 임금이 경종 4년의 일기를 가져다 보고 분부하기를 "일기에 어공(御供)에 쓰는 기명(器皿,그릇)은 모두 은기(銀器,은으로 만든 그릇)를 썼다는 말이 있는데
68 선조께서는 검덕(儉德)이 뛰어나시어 어공에 쓰는 그릇을 은보로 쓴 적이 없었다.
69 이런 말이 국사에 기재되면 선조의 검덕을 후세에 밝힐 수가 없으니,
70 이런 뜻으로 사관에게 분부하여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선왕의 검덕을 밝히게 하라." 하였다.
8 ○ 11월 25일에 여러 도(道)의 감사, 병사가 체임되어 돌아갈 때 창고에 남아 있는 재물을 비국에 보고하도록 명하였으니, 영의정 이광좌의 청에 따른 것이다.
2 ○ 12월 3일에 영의정 이광좌와 우의정 심수현이 좌의정 조태억을 위하여 민간의 가사(家舍,주택)를 빌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3 이때에 조태억이 질병이 있고 집이 성 밖에 있었는데 시임 대신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민간의 집을 빌려 장차 병을 조섭하려 하였다.
4 그러나 민간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금령이 극히 준엄하였으므로 이광좌가 임금에게 청하였고, 심수현이 잇달아 진달하였다.
5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이미 거듭 금령을 내려놓고 대신의 병을 조섭하기 위하여 억지로 허락한다면,
6 이는 성실히 예우(禮遇)하는 뜻이 아니다. 비록 대신이라도 일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법을 지키는 도리에 있어 더욱 소중하지 않겠는가?" 하니,
7 이광좌가 말하기를 "조가에서 법을 지키는데 만약 존귀한 자와 근시(近侍)로부터 시작이 된다면,
8 어찌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에 이익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기쁘고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9 ○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 자신이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법을 어기고 진달한 것도 이미 사체를 잃은 것이며,
10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도리로써 하교하였은즉 마땅히 몸을 움츠려 인책(引責)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한다.
11 그런데도 감히 다스리는 도리에 유익하다는 말로써 말머리를 돌려 극구 아양을 떨었는데,
12 이는 그의 본래의 태도가 그러했으니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되겠는가?
13 그러나 임금이 그를 대함도 너무 박하다고 이를 만하다.
14 ○ 7일에 좌의정 조태억이 민간의 집을 빌림을 허락해 달라는 말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죄를 인책하니,
15 비답하기를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혹 대신을 박절하게 대한다고 말하겠으나, 이것이 진실로 후한 것이니, 경은 지나치게 인책하지 말라." 하였다.
16 ○ 영조 4년(1728) 3월 10일에 교리 정우량, 조현명, 부교리 오광운, 부수찬 홍경보, 이현모, 정자 이종성이 차자를 올렸는데,
17 대략 이르기를 "듣자오니, 지난해 본궁에 거둥하여 지나실 때 잠저에서 모시던 무리들이 모두 알현함을 입었다고 하며,
18 심지어는 구사(丘史,관노비) 같이 천한 자들 역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19 지금 들으니, 구사의 무리들이 행전 옆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20 천한 무리들의 발자취가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청란(淸鑾)이 머무는 곳에 가까이 해서는 안되며,
21 더군다나 동궁 저하께서도 어가를 따르고 계시는지라 더욱 예(禮)가 아닌 것을 보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원하건대 내쫓으소서." 하니,
22 비답하기를 "사전례(私展禮)를 마치고 나니, 내 감회가 새롭다. 너희들이 일에 따라 진계함을 내가 가상히 여긴다.
23 내 비록 학문이 깊지 못하나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느냐?
24 지금 들으니, 그 궁속들이 감히 집안에 있을 수 없어 행랑 밑에 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즉시 내보내라고 명하였거니와, 이후에 따로 이르겠다." 하였다.
25 이때 임금이 사묘에 전례를 행하고 동궁이 어가를 배종하니 성상의 마음이 슬퍼져 눈물이 곤포를 적셨는데,
26 옥당의 차자가 마침 이르러 성비(聖批)가 이러했으니, 역시 허심 탄회하시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다.
27 ○ 3월 12일에 좌포도 대장 이삼이 아뢰기를 "포교가 전주에 가서 마침 행동이 수상한 자를 만나 함께 여사(旅舍)에 앉아 술을 사마시기를 권하였던 바,
28 매우 취한 후 그 사람이 일어서자 작은 종이가 땅에 떨어졌는데 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29 결박하여 영장 이경지에게 고하여 가두고 이름을 물었더니 임피에 사는 이세룡이라 이름하는 놈이었습니다." 하였다.
30 그 편지는 여러 줄이 씌여 있었으나 전혀 문리(文理)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구 가운데 나라에 대한 부도한 말이 많았다.
31 ○ 14일에 봉조하 최규서가 장흠, 안박의 역모와 관련된 급변을 올렸다.
32 ○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33 남산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룻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34 최규서가 창황하게 상변하기에 미쳐서야 비로소 그 변고에 자취가 있음을 대략 알아 비로소 포졸을 풀어 잡도록 명했다.
35 마침내 적정이 드디어 드러나니 뜻을 잃은 불량한 무리들이 박필몽, 심유현과 체결하여 역변을 지은 것이었는데,
36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7 강현은 숭반(崇班,숭고한 지위)의 중신(重臣)으로서 몰래 그 가속(가족)을 호중(湖中,충청도)에 보내고는
38 스스로 소분(掃墳) 한다는 핑계를 대고 하향(下鄕)하였으니, 이에서도 그 세변(世變)을 볼 수 있다.
39 ○ 15일에 적이 청주성을 함락시키니, 절도사 이봉상과 토포사 남연년이 죽었다.
40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41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를 실어다 고을 성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42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43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44 ○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45 영기(營妓,기생) 월례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 양덕부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46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47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48 ○ 군관 홍임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49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50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 하였다.
51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52 ○ 적이 또 진영에 들어와 영장 남연년에게 항복하라 협박하니,
53 남연년이 꾸짖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 하였다.
54 적이 꿇어앉지 않는 데 노하여 칼로 무릎을 쳤으나,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말하기를 "어서 내 머리를 베어라." 하면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55 우후 박종원은 상당 산성에 있었는데 적이 부르니, 박종원이 투항하였다.
56 ○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57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라 사호했다.
58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59 홍임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하였다.
60 ○ 3월 16일에 역적 목호룡의 형 목시룡과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61 대관이 목시룡 및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를 율에 의해 처단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따르지 않았었는데,
62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 송인명이 굳게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63 ○ 19일에 청주 목사 박당이 성을 버린 죄를 사(赦,용서)하였다.
64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에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65 인부(印符)와 처자를 버리고 몸을 빼내어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해 지경 내에 있는 절간에 이르렀다.
66 그의 처자가 하룻밤을 자고 난 후 간신히 뒤좇아 왔는데,
67 혹 발자취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짧은 옷과 평량자 차림으로 운유 거사라고 청탁하면서 승려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68 의병장 박민웅이 적을 평정했다고 보고하고 고을 일을 다스리기를 청했지만
69 깊이 숨고 나오지 않다가 힘껏 청하자 비로소 나왔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분개했다.
70 조정에서는 단지 파직만 하고 엄히 다스리지 않았는데,
71 이는 대개 절로 숨던 날 보장(報狀)으로 아뢰어 대략 적정을 알렸기에 묘당에서 평서(平恕)의 논의를 주장해 중벌을 요행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72 병사가 해를 당한 후 장교 조중백, 김지행이 관속을 거느리고 적괴에게 읍소(泣訴)하여
73 병사의 시체 수습하기를 청하니, 적이 의롭게 여겨 허락하여 그 시체를 여염집으로 옮겨 관을 사서 치상(治喪)하였다.
74 ○ 20일에 밀풍군 탄의 이름이 적의 초사 가운데서 나왔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명하지 않았는데,
75 대신과 삼사에서 일제히 나포해 국문하기를 청하고 극력 다투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따랐다.
9 ○ 영조 4년(1728) 3월 25일에 전교하기를 "얼신(孼臣,서자와 첩의 소생, 천민), 흉예(凶裔)들이 흉억을 함부로 행해 호남과 기전(畿甸,대궐)에서 창궐하게 만들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2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난신 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마는,
3 그 흉한 계책을 배포(排布,마음을 다해 계획)해 세우고 연구하여 경영함이 이와 같은 적은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4 ○ 국가가 저들에게 무엇을 등졌기에 저희 할아비와 아비를 생각하지 않고 차마 적도를 따랐단 말인가?
5 이 적도들이 비록 왕장(王章)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신명(神明)의 주륙을 면할 수 있겠는가?
6 아! 우리 나라는 예의지방으로서 문치를 숭상하여 동경(東京,낙양)의 절의(節義)를 기약할 수 있었다.
7 독서(讀書)한 선비,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풍문만 듣고도 도망해 숨고 머뭇거리며 관망(觀望)하면서
8 흉격(凶檄)을 봉전(封傳)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이냐?
9 ○ 그 연유한 바를 추구하건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조정에서 오직 붕비(朋比,당을 지어 자기편을 두둔함)만을 일삼아
10 오직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色目)만을 추중(推重) 권장하는 데 있다.
11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재능이 없어도 소매를 떨치고 앞장서서
12 당설(黨說,당의 논의)을 장황하게 말하는 자는 급급히 등용하기를 오직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니,
13 비루하고 하찮은 무리와 불령한 무리가 분분하게 섞여 나와 중요하고 현달한 관직을 거치지 않음이 없으나,
14 만약 직책을 지키는 데 조심하고 색목에 들지 않으면 무능하다고 지목하여 천거해 쓰지 않았다.
15 심한 경우 그 사람은 비록 쓸 만하더라도 단지 색목만을 논하고 그 재능을 취하지 않아
16 당로(當路,당의 힘으로 정권을 잡은)한 자는 현사(賢邪)의 구별에 어둡고,
17 물러가 숨은 사람은 스스로 반성할 줄을 모른 채 도리어 무료함이 생겨 위로는 천화(天和)를 해치고 아래로는 인심을 상하게 하였다.
18 심지어는 공격할 즈음에 그 말이 위에 저촉되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음흉하고 불궤한 계책으로
19 그 말을 부연하고 흉언을 첨가해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임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다.
20 그러나 더욱 절통한 것은 적도 가운데 들어가 국옥(鞫獄)에 갇힌 자들이 모두 유명한 사대부요 세가(世家)의 대족(大族)인 것이다.
21 이 어찌 기한(飢寒,배고픔과 추위)에 몰려서이겠는가? 바로 당화(黨禍,당파싸움)가 빚어낸 것이니, 이는 당의(黨議,당의 주장,의논)의 소치(所致)인 것이다.
22 ○ 또 하나는 해마다 연달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구제해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23 오직 당벌(黨伐,당파싸움으로 상대방을 죽이는)만을 일삼는 것으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 되었다.
24 그들이 와해(瓦解)되어 적도에게 투입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니, 이 역시 당의의 소치이다.
25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는 것이다.
26 아! 병이(秉彛)의 마음은 사람마다 같은 것이거늘,
27 우리 동국(東國)의 신하들은 무슨 심장을 가졌길래 이와 같이 지극히 흉악한 일을 한단 말인가?
28 ○ 다만 내가 통분해 하는 것이 있으니, 국가가 그들에게 무엇을 등졌기에 이와 같이 고금(古今)에 없는 흉역을 한단 말인가?
29 아! 내가 재능이 없고 덕이 박한 탓으로 은혜가 우리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덕이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했다.
30 그러나 우리 조종과 우리 선왕의 심후한 인택(仁澤)이 사람들의 피부와 골수에 스몄을 것인데,
31 너희들은 무슨 마음으로 차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32 옛날 동서한(東西漢) 때에도 백성들이 오히려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노래한 바 있는데,
33 아! 우리 나라 백성들이 어찌 한나라 백성에게 미치지 못해 위로는 진신(縉紳), 사류(士類)로부터
34 아래로는 우민(愚民), 필부(匹夫)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적에게 붙어 편안히 여기고 부끄러워할 줄 몰랐으니,
35 3백 년 동안 예의(禮義)를 배양(培養)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36 ○ 그러나 오늘날 백성들의 뜻과 군사들의 마음을 보건대, 적과 맞닥뜨리고자 함이 있고
37 안집(安集)하면 감격함이 있어 매양 노군(勞軍)하고 돌아오거나 선유하고 돌아오면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곤 했다.
38 이로써 보건대, 적에게 붙은 백성들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에 지쳐서 순역(順逆)의 이치를 구분하지 못한 소치이니,
39 이는 너희들이 나라를 등진것이 아니라 실로 내가 너희들을 등진 것이다.
40 아! 꿈틀대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오히려 이러한데,
41 더군다나 세가(世家), 대족(大族)들로 녹을 받으며 조정에선 사람들이 도리어 아래 백성들만도 못하단 말인가?
42 아! 매양 탕평을 말하였으나 너희들은 겉치레로 보아서 지금은 한갓 기미뿐만이 아니라
43 그 해로움이 이와 같게 되었으니, 지금 이후로도 당(黨)을 심고 사(私)를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44 지금부터 앞으로는 그런 옛마음을 끊기를 마치 한 칼로 양단(兩斷)하듯 하여
45 일심으로 봉공(奉公)하고 동인협공(同寅協恭)하여 화를 돌리어 편안함이 되게 하면,
46 이 역시 중흥(中興)하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이다.
47 이렇게 한 후에도 감히 당을 옹호하는 마음으로 임금 앞에 나아오고
48 남을 해칠 뜻으로 조정에 선다면,
49 비단 왕장(王章)이 죄인을 죽여 시체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만 아니라 신명(神明) 역시 함께 죽일 것이다." 하였다.
50 ○ 4월 8일에 도순무사 오명항이 대군을 이끌고 추풍령을 넘었으나 영남의 도적이 이미 평정됨을 듣고
51 거창, 안음, 함양을 거쳐 팔량치를 따라서 가니, 장차 전라도에서 군사를 돌려서 돌아 오려는 것이었다.
52 종사관 박문수를 남겨두고 난리를 겪은 네 고을을 진무케 하고 장계로 아뢰었다.
53 이때 네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은 협박을 받아 도적을 따랐으나 도적이 평정되자,
54 모두 스스로 의구심을 품어 산골짝 사이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전야(田野)와 촌락이 텅 비어 다시 인연(人煙)이 없었다.
55 박문수가 단기(單騎)로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녀서 달아나 피한 자를 불러오고,
56 조가(朝家)에서 협박을 받아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효유하여
57 모두 귀농케 하여 농사지을 양식을 주어 경작을 권면하니, 백성이 안도하여 인심이 차츰 진정되었다.
58 어떤 사람이 박문수에게 군사를 거느려 스스로 호위하여 다니기를 권하니, 박문수가 듣지 않고
59 말하기를 "이는 위태로움과 의심을 진정시켜 편안히 하는 길이 아니다.
60 비록 뜻밖의 근심이 있을지라도 어찌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을 겁내겠는가?" 하였다.
61 ○ (박문수는 소론의 영수 이광좌의 문하로서, 소론계열의 인물이였으나,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할 것을 주장하였다.
62 한국시대에 어사 박문수로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영조 32년에 죽었다.)
63 ○ 4월 22일에 우승지 조명신이 아뢰기를 "적당들 가운데 법망에 누락된 자들이 중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으니, 기포(譏捕,체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처음에 허락했는데,
64 대사간 송인명이 말하기를 "역적들이 용납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흉악한 마음을 굳건히 하여 변란을 쉽사리 촉발시킬 것이니, 좋은 계칙이 아닙니다." 하니,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65 ○ 7월 24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 된 족속으로서 연변에 두어진 자가 몇 사람인가? 내지에 옮겨 두고 상인을 만들면 후환이 없을 듯하다." 하매,
66 시독관 정우량이 말하기를 "국법에 역적의 아들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죽인다는 법이 있었으나, 이제는 폐지되었습니다.
67 이인좌의 아들은 나이가 다섯 살인데 능히 검무(劍舞)하는 모양을 짓고 '내가 어찌 살겠는가?' 합니다.
68 이런 무리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옥에 가두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69 임금이 말하기를 "법이 한 번 흔들리면 뒷 폐단을 막기 어렵다.
70 옥에 가두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말하면 왕법을 헤아려도 너무 심함을 면하지 못하여 국조의 인후(仁厚)한 풍습이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71 ○ 11월 16일 밤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하였다.
10 ○ 영조 5년(1729) 8월 20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정석삼의 말을 듣건대, 술을 금단하는 것 때문에 민원이 적지 않다고 했었다.
2 듣건대, 호남 방백 이광덕은 엄중하게 금하므로 술을 빚는 일이 끊어졌다고 한다.
3 이광덕은 혹독하기 때문에 온 도(道)를 호령할 수 있지만,
4 나는 혹독하지 못하므로 명령이 시행되지 않아 술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5 검토관 유엄이 아뢰기를 "술이 비록 곡식을 허비하지만, 백성들이 살아가는 길이 또한 이를 힘입는 수가 많습니다.
6 또 오부에서 수색하여 고발할 때의 폐단이 매우 심하니, 이제부터는 술주정하는 것만 금단하게 하고,
7 술항아리를 수색해서 고발하는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8 ○ 25일에 하교하기를 "대저 법령은 시행할 만한 것을 시행한 다음에야 백성이 따라서 시행하는 것이니,
9 경사 대부들부터 시행한 다음에야 소민(小民)들이 따르는 것이다.
10 ○ 면임(面任)이 부민(部民)들을 침학(侵虐)하는 일이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11 무릇 그 일에 대한 권한을 잡으면 농간이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12 이 뒤로는 면임들이 수색하여 바치게 하는 한 조항은 거행하지 말도록 하고,
13 만약 빙자(憑藉)하여 여리(閭里)에서 폐단을 끼치는 자가 있으면 법조로 통렬하게 다스리도록 하되,
14 그 가운데 더욱 심한 자는 입계(入啓)하여 무거운 죄로 다스리도록 하라.
15 ○ 그리고 술주정하는 금령을 거듭 밝히되, 범한 자에게 속전(贖錢)을 징수하지 말도록 하라.
16 술을 대량으로 빚는 부류들에 이르러서는 더러 1백 곡(斛)에 가깝도록 빚는다고 하는데,
17 이는 비록 면임(面任)이 없다 하더라도 대중의 눈에 띄게 마련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18 다만 사대부 집에서 술을 빚어 제사에 쓰는 것은 예법에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19 제사를 빙자하여 외람되게 술을 빚어 파는 것은 한갓 조가(朝家)의 법령만 어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20 그 제사에 있어서도 자질구레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는 일이다.
21 각별히 규찰(糾察)하여 바로잡는다면, 소민(小民)들이 외람되게 술을 빚는 짓은 이로부터 금단하지 않더라도 징계하여 그치게 될 것이다." 하였다.
22 ○ (한국시대에 이르러, 영조가 금주령을 내린 것은 알지만, 위의 일이 어찌 술에만 관계 된 것이겠는가?
23 또한, 그 처리함에 있어서 본 받아 따라야 할 것이 있으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4 이는 금주령이라는 단어만 알고 그 처리하는 예(禮)와 절차와 과정을 모르니 한심스럽다.)
25 ○ 영조 6년(1730) 5월 7일에 임금이 숭정문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26 송질, 유건기와 그 아들 유언국 및 유시모를 정혼과 더불어 대질시켰는데,
27 정혼은 불량한 무리로서 공명첩을 도둑질하여 해서 지방에서 발매했다가 그 일이 드러나 잡히게 되자,
28 옥사를 늦추기 위하여 송질 등이 김일경과 박필몽의 일이 원통하다고 말했다 하였으며,
29 또 장차 모역(謀逆,역적을 모의함)한다고 무고하였는데 대질하게 되자 무고했다고 자복함으로써 사형에 처하였고, 송질 등은 석방하였다.
30 ○ 10일에 제조 윤순이 말하기를 "의관 최덕령은 곧 익명의 이성 사촌이요, 김경윤은 곧 김수창의 동성 오촌인데, 이미 죄인의 친족이니 의관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하니,
31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의 친척이란 이유로써 이들을 버린다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 연좌에 관련된 자도 아니니 그대로 두어라." 하였다.
32 또 아뢰기를 "곤양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 난간석에 탈이 있는 곳을 이제 곧 개수하려고 하오나,
33 이러한 농번기에 백성을 부역시키는 것이 염려되오며, 또 봉내에 탈이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니,
34 우선 장마철이 지나기를 기다려 공역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옳다고 하였다.
35 ○ 6월 18일에 판부사 심수현이 역적의 초사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로 도성에 들어와 대죄하니,
36 임금이 인견하고 위로하기를 "경은 비록 허물을 자책하나, 나는 경을 보니 매우 기쁘다." 하였다.
37 ○ 8월 5일, 이때 국청의 여러 죄인 중에는 형장을 받다가 죽은 자도 많고,
38 혹은 실정을 추구하였으나 거짓말을 하고 자복하지 않는 자도 또한 많았다.
39 동의금 조원명은 붓을 잡고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여러 죄인들의 이름 밑에 기록을 달았다.
40 우의정 이집이 말하기를 "국청 죄인 중에도 아직 안문(按問)하지 않은 자도 많은데다가
41 판의금 윤순도 새로 임명되어서 옥정(獄情)을 아직 잘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작처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42 이조 판서 조문명은 말하기를 "끝까지 캐어 보지 않고 이와 같이 작처하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의 말썽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43 임금이 말하기를 "7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소석(疏釋)하지 않고 그대로 겨울을 지내게 하면 반드시 여위어서 죽게 될 걱정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44 권섭은 절도에 정배하고, 최종하와 황익재는 석방하여 보내고, 김중기는 도로 배소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45 권섭은 고 부제학 권변의 손자이고 역적 권첨의 아들이었으며,
46 최종하도 바로 전 승지 최종주의 형이고, 나홍언의 매부인데, 흉언의 내력 때문에 나홍언에게 고발당하였고,
47 황익재는 역당 중에도 가장 흉악한 자로서 역적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왔으나 계제(階梯,단서)가 중간에서 끊어지고, 날짜가 조금 틀렸다는 이유로써 모두 그냥 석방된 것이다.
48 임금이 말하기를 "이 다음부터는 역적의 부자(父子)가 혹시 사건이 각기 다르고
49 혹은 각기 흉모를 내어서 함께 흉역을 한 사람 외에는
50 사정을 알고 동참한 것으로써 그 자식에게 자복을 받아내어 연좌시키는 법은 시행하지 말게 하라." 하고,
51 이것으로써 기록하여 법식(法式)으로 삼게 하였다.
52 ○ 10월 10일에 임금이 명하여 내일부터는 소찬을 올리라 하니, 약방에서 아직은 상선(常膳)을 드시다가 때가 임박해지면 소찬을 드실 것을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3 ○ 12월 8일에 참찬관 박문수가 말하기를 "근래 위로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마음이 아픕니다.
54 나라에서는 비록 인족(隣族)의 폐단을 진념(軫念)하고 탐오(貪汚)의 관리를 엄격하게 단속하려고 하지만 끝내 그 효과가 없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55 조정에서 끝내 국사에는 전념하지 않고 도리어 당론(黨論)만 일삼고 있는 까닭입니다.
56 ○ 예로부터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귀천(貴賤)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57 우리 나라에서는 중세(中世) 이래로 편당(偏黨)이 사(私)가 되어 오로지 세록지인(世祿之人)만 뽑아 쓰고 초야에서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58 간혹 먼 지방 사람을 쓰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임용된 사람은 아부한 무리들에 불과하였기에,
59 절조 있고 정개한 사람은 수치스럽게 여겨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라에서는 현사(賢士)를 얻어 조정에 두지 못하였으니,
60 이는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덕망 있는 이를 좋아하고 재능 있는 이를 추천하는 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61 전하께서 만일 성심으로 칙려(飭勵)하셔서 전일에 구하지 않았던 중에서 인재를 구한다면, 반드시 군자들이 찾아드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62 예전에 우리 세종과 문종의 시대에 있어서는 경학하는 선비를 극선(極選)하여 고문의 자리에 두고
63 자주 인대하여 치도(治道)를 강론하고 물러갈때에는 촛불을 잡고 보내주었으며
64 때로는 깊은 밤에 친히 직소(直所)에 납시어 혹은 옷을 벗어 친히 덮어 주고 혹은 등을 어루만지며 면유(勉諭)하였으므로 은권(恩眷)이 천고에 뛰어나셨으니,
65 이때를 당하여 신하가 되어 어떻게 지성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66 그러기에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한 것은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67 지금은 그렇지 않아 전하께서는 직언(直言)을 들으려 하지 않으시니,
68 군신(群臣)들도 전하의 뜻을 거슬릴까만 두려워하고 있어 상하(上下)가 서로 도리를 잃고 있습니다.
69 이렇게 하여 1년, 2년 지나게 되면 나라 일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70 임금이 말하기를 "권권(眷眷)한 진계는 말마다 모두가 절실하다. 오늘날 박문수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와 같은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11 ○ 영조 7년(1731) 1월 17일에 부호군 이의만이 염백(廉白,청백리) 에 뽑혀 초질(超秩)하기에 이르렀다.
2 이의만이 상소하여 실제가 없는 이름을 무릅쓴 것이라 하여 극력 사양하니,
3 비답하기를 "청렴을 숭상하여 세상을 가다듬게 하는 것이 곧 왕정(王政)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는데,
4 이의만이 들어와 사례하기에 미쳐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장유(奬諭)하고 호피를 하사하였다.
5 ○ 5월 18일에 동지사 송진명이 말하기를 "영조4년의 난리 초에 신이 이덕재를 보고
6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당론(黨論)이 어찌 있어야겠는가? 이번 난리의 근본은 실로 당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발본 색원해야 한다.
7 금일 이전의 일은 모두 혼돈(混沌)에 붙여 한결같이 모두 잊어버린 연후에야 당론이 저절로 사그라진다.
8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이 전이(轉移)한 사이에 있는 일이다.' 라고 하였더니, 이덕재 역시 신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9 신은 시비를 분별하지 않고 하나의 혼돈 세계를 만들어야 바야흐로 피차의 사람을 합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10 임금이 말하기를 "세계(世界)가 비록 변하더라도 인심이 어찌 변하겠는가? 인정으로 참으면서 오래 되면 저절로 잊게 된다.
11 부자(夫子)가 말하기를 '기뻐하기만 하고 참뜻을 찾지 않는다.' 하였는데,
12 이덕재가 경의 말을 듣고 옳게 여겼으나 처음 대각에 제수되자 구습을 드러냈으니, 이른바 불역(不繹)한 자라 할 수 있다." 하였다.
13 수찬 윤동형이 말하기를 "하나의 혼돈 세계가 되면 장차 시비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맙니다." 하자,
14 임금이 말하기를 "시비란 것이 어찌 당론에서 생기지 않는가?
15 처음에는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끝에 가서는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게 되니, 어찌 나라의 절반이 전부 옳고 전부 그를 이치가 있겠는가?" 하니,
16 송진명이 말하기를 "새로운 시비는 비록 분별하더라도 옛 시비는 일체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였다.
17 ○ 영조 6월 6일에 전교하기를 "평시에도 곡식을 저축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는 것은 나라의 중요한 일이다. 하물며 이런 때이겠는가?
18 대저 인심은 쉽게 흔들리기 마련인데 만약 수재나 한재가 있으면 곧 먼저 요동하게 된다.
19 또 조가(朝家)에서 진구(賑救)를 미처 하기 전에는 백성들이 믿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흩어지게 되니 곡식을 저축하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20 경외에서 미리 곡식을 저축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믿게 되어 두려워하지 않는다.
21 경외의 곡식을 관장하는 신하로 하여금 먼저 돈을 흩어 곡식을 저축하는 방도에 힘쓰게 하고,
22 또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미리 재물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 보호하는 방책을 강구하게 하라." 하였다.
23 ○ 6월 20일, 이때에 청나라 예부에서 망우초(莽牛哨) 지방에 수로를 설치하여 추신(秋汛,가을 물)을 방어하는 일로 우리 나라에 문서를 보내었다.
24 망우초는 바로 봉황성(鳳凰城) 근처의 초하(草河)와 애하(靉河)가 합해 감돌아서 들어오는 곳인데,
25 경계가 우리 나라와 서로 접해 있으니, 북자(北咨)의 뜻은 땅을 개척하는 데 있었다.
26 좌의정 조문명이 말하기를 "청나라 세조 때부터 책문 밖 1백여 리의 땅을 버려두고 피차 서로 접하지 못하게 했으니, 그 뜻이 심원(深遠)했던 것입니다.
27 또 우리 나라는 변방 백성들이 근래 매우 간악하여 경계를 넘어 이거(移居)하는 자가 있으니
28 마침내 반드시 대국에 죄를 얻을 염려가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자하여 방색(防塞)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29 임금이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회자(回咨)를 지어 날짜를 정하여 출발해 보내도록 하였다.
30 ○ 7월 8일에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한 공로를 가지고도 단지 덩그런 한 채의 전우(殿宇)가 있을 뿐인데,
31 그것마저도 황폐해져 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후손들이 불초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32 또한 고려 말기의 신하들이 보잘것이 없어서 제대로 보도(輔導)를 하지 못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33 신 등이 불충으로 성상을 섬기고 전하께서 나태하여 떨치지 못하신다면
34 후세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기를 또한 어찌 오늘의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
35 ○ 12월 8일에 영성군 박문수가 장차 분부를 받아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36 박문수가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을 위로하고 진휼함에 있어 검속(檢束)하되,
37 또한 팔량치의 관액과 명지도의 형편을 겸하여 살펴서 소금을 굽는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데,
38 도신(道臣) 조현명은 옛것을 그대로 지키는 데는 남음이 있으나 융통성이 부족하고,
39 신은 융통성은 남음이 있으나 옛것을 지키는 데 부족하니,
40 마땅히 서로 협조해서 함께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위로)하였다.
41 ○ 영조 8년(1732) 윤5월 2일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금 북병사 한범석의 계본을 보았더니,
42 청나라 사람 6명이 두만강 강변에서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43 이전에도 청나라 사람이 간혹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하러 강가를 왕래하였으나,
44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무는 데 이르러서는 이미 갑자년(숙종10년)에 이자(移咨)하여 철거시킨 전례가 있었으니,
45 병사와 지방관이 평상시대로 보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모두 종중 추고하고,
46 그들로 하여금 잘 타일러서 속히 돌아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 ○ 영조 9년(1733) 1월 1일에 하교하기를 "동자가 이른바 '조정의 잘못부터 바로잡고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는 말은 진실로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일정한 법이다.
2 오늘날의 급선무는 '정신을 모으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는 이 여덟 글자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3 새해를 맞이하는 날 여러 신하들을 위해 옛 습관을 버리고 공평한 도리를 넓히며,
4 다만 백성과 나라만을 알고 시상(時象)을 생각하지 말고서 새해와 함께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하였다.
5 ○ 2월 25일에 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 감찰 장위항, 전적 이세후, 훈도 박시태, 직장 정중기, 저작 김극령, 사록 정권, 학정 성헌조, 부정자 이권 등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다.
6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연신(筵臣)들이 영남(경상도)의 일을 진달했다 하는데, 이는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려는 뜻이었습니다.
7 그런데 영성군 박문수는 대처하기 어렵다고 하고, 풍원군 조현명은 천하의 일에 사변은 알기가 어려우니,
8 마땅히 진정시킬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9 우리 영남이 어찌하여 대처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어떤 사변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진정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0 이는 아마도 흉역의 무리인 정희량, 조성좌가 출생하였기 때문에 영남 사람을 다 의심하는 것이 아닌지요?
11 역적 정희량은 안음에 살았고 역적 조성좌는 합천에서 출생하였는데,
12 여기는 곧 낙동강의 오른쪽 궁벽한 고을로서 정인홍이 악취를 남긴 곳입니다.
13 대개 일종의 잘못된 기운이 그 중간에 뭉쳐서 이렇게 흉악한 무리를 출생시켰던 것입니다.
14 그 변란이 처음 발생했을 적에 여러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앞을 다투어
15 의병을 일으켜 종이로 만든 기(旗)와 나무 장대를 가지고 곳곳에서 단속을 하였으니,
16 또한 그 일도(一道)의 충의로운 기개가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17 그렇다면 정희량과 조성좌가 흉역 행위를 한 것은 한줄기의 맥이 이어져 온 곳은 따로 있으나,
18 영남 지역의 인심은 진실로 변함이 없었으니, 무슨 처치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며, 무슨 사변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나라의 진정시키는 대책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19 이번의 선발하여 등용하겠다는 청은 사실상 영남 사람을 돌보아 아낀 것도 아니며 또한 나라에 수용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20 이는 다만 인심이 안정되지 못함을 염려하여 얽매어두는 방법을 베풀기 위한 것뿐이니,
21 다만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22 영남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점은 없으나 그래도 염치와 의리의 귀중한 것을 대략은 알고 있으므로
23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24 그런데 어찌 부질없이 의도적인 미끼를 던져서 도리어 무심한 물고기를 유혹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25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두 신하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과 알기가 어렵다고 한 원인을 자세히 진달하게 하고,
26 인하여 엄중하게 사실을 규명하게 해서 충신과 역적을 명백히 분변해서
27 온 도(道)의 사람으로 하여금 남이 모르는 죄과에 모두 돌아가지 않도록 해 주소서." 하니,
28 비답하기를 "지난번 두 재신이 진달한 것 중에 이른바 대처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그 지역 사람의 성품이 고집스러움을 가리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29 이른바 알기가 어렵다는 것은 세상의 일을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30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므로 평소의 생각에도 늘 잊지 않고 있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31 그런데 그대들의 견해는 어찌 그렇게 지나친가? 그대들의 이번 일은 내가 영남 사람을 대우한 것이 성의가 얕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32 세도(世道)가 시끄러운 때여서 자세히 효유(曉諭)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대들이 지나치게 의심하는 마음을 시원스럽게 열어주는 것이니,
33 굳이 번거롭게 따지다가 도리어 스스로 임금과 사이가 막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34 ○ 영조 9년(1733) 10월 25일에 경주 역리(驛吏) 박상희의 딸 초랑은 나이가 19세인데,
35 초랑이 그 어미와 더불어 산전(山田)에 갔다가 그 어미가 호랑이에게 물리자,
36 초랑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우리 형(兄)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이제 또 우리 어머니를 무니, 차라리 내가 함께 죽고 말겠다.' 하고,
37 왼손으로 그 어미를 안고 오른손에 낫을 잡고 휘둘러 그 어미의 시신(屍身)을 빼앗았다.
38 수신(帥臣)이 이를 장문하니, 임금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39 ○ 이때에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하여 사람과 가축을 상해하였으므로 팔도의 정계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으니,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총계가 1백 40인이었다. (영조 10년 9월 30일)
40 ○ 영조 10년(1734) 1월 1일에 팔도(八道)와 양도(兩都,강화와 개성)에 농사를 권면하는 유시를 내리기를,
41 "농사를 권면하는 방도에는 여섯 가지 요령이 있는데,
42 그것은 농사철에 부역을 시키지 말 것,
43 백성으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할 것,
44 농량(農糧)을 보조하여 줄 것,
45 농기구와 농우(農牛)를 갖추어 지급하여 줄 것,
46 제언(堤堰)과 관개(灌漑) 시설을 갖출 것,
47 나태한 마음을 경칙(警飭)시킬 것 등이다.
48 대저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냐 못하냐 하는 것은 농사의 근만(勤慢)에 달려 있으니,
49 경칙하지 않으면 게을러지고 경칙하면 부지런히 하기 마련인 것이다.
50 만일 경칙 면려시켰는데도 그에 대한 효험이 없다면, 이는 나의 말이 미덥지 못한 것이다." 하고,
51 이어 승지에게 명하기를 "농가집성의 판본이 있는 곳을 물어서 그 책을 널리 반포함으로써
52 우리 성조(聖祖)께서 백성을 위하여 찬집한 성대한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하였다.
13 ○ 1월 10일에 지금부터 모든 익명서는 즉시 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워버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2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은 흉도들 가운데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달은 자도 있고, 반신 반의하는 자도 있으며, 폐기된 데 대해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도 있으니,
3 진실로 조정의 거조(擧措)가 사의(事宜)에 알맞아 용사(用捨)가 고르게 된다면 모두 마음을 고쳐 교화를 따라 원망이 봄눈처럼 녹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4 감록(勘錄)을 이미 반포했는데도 또 감히 괘서(掛書)하여 사람을 무함하였다.
5 작년 호서, 영남의 괘서의 변도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6 위에 있는 자가 그 근본을 잘 다스려 그 말단을 바로잡지 못한 탓인 것이다.
7 그러므로 치화(治化)를 수명(修明)하여 회색(晦塞)된 끝의 이륜(彛倫)을 바로잡는다면 불령배들이 저절로 마음을 고칠 것이다.
8 이런 것을 하지 않고서 이에 군부(君父)로 하여금 날마다 차마 듣고 볼 수 없는 흉서를 보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9 ○ 18일에 수찬 박필균이 상소하기를 "저 흉서를 진실로 불에 태운다고 해서 중지될 성질의 것이라면,
10 정미년(영조3년) 이후에는 불에 태우지 않은 적이 없는데도, 어찌하여 갈수록 더욱 많이 나오고 더욱 흉악하여지면서 중지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11 만일 신국(訊鞫)할 즈음에 언근(言根)을 끝까지 조사해 내어 속히 천주(天誅)를 행하였다면,
12 불에다 태워버리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흉언이 일찍 이미 종식되었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굽혀 용서해줌으로써 역적들의 기세만 돋구어 주었습니다." 하니,
14 대답하기를 "무신년(영조4년) 이후 아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5년 동안 종식되었었는데,
15 지난 봄에 유신(儒臣)들이 유언 비어를 진달한 뒤부터 호서, 영남에서 서로 잇달아 유언 비어가 일어났으며, 끝에 가서는 괘서까지 나왔다.
16 따라서 조정의 동정(動靜)은 진실로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다.
17 만일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법금(法禁)을 설치하지 말고 기다려야만 옳겠는가?" 하였다.
18 ○ 9월 21일에 형조에서 아뢰기를 "현종의 수교(受敎)를 상고하였는데,
19 나인 귀열이 그 형부와 몰래 간음하여 아들을 낳은 데 대하여 결안(結案)하여 아뢰니,
20 판부의 내용에 '이 죄는 산후 백일 만에 행형(行刑)하는 법에 비할 수 없으니 곧 거행함이 마땅하다.' 고 하였습니다.
21 또 지난번에 홍점은 분만한 다음날에 곧바로 행형했으니,
22 윤상(倫常)을 범한 음옥은 산후에 곧 처형하는 것이 이미 정례가 있습니다.
23 이제 간음 죄인 아지는 다시 번거롭게 문의할 필요가 없으니, 곧바로 정법(正法,사형)에 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4 ○ 12월 25일에 고 병사 김수의 사촌 서제인 현감 김협이 김수의 첩 홍도를 간음하였는데, 일이 발각되매 대시(待時)하여 교형(絞刑,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25 ○ '19일 하교(下敎)'는 영조 9년(1733) 1월 19일의 하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26 이는 노론(老論)의 거두 민진원과 소론(少論)의 거두 이광좌를 불러 상호간의 화목을 개도(開導)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27 이 하교가 있은 뒤 다시 이 일에 대해 거론하는 일이 있게 되면, 문득 '19일 하교'로써 일컬었다.
28 그 때에 사신은 논한다. 임금이 지난해에는 합문(閤門)을 폐쇄하였고 이번에는 약을 중지시켰는데,
29 이는 다른 의견을 억지로 합쳐서 탕평(蕩平)을 단단히 이루려는 뜻이었으나,
30 옳고 그른 것이 모두 뒤섞이고 의리(義理)가 마침내 명백해지지 아니하여,
31 다만 임금의 위엄만 날로 위에서 손상되고 성의는 아래로 먹혀들지 않았다.
32 그리고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눈물을 흘리며 은밀하게 말한 것은 대개 두 정승을 개도(開導)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33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함을 깨닫게 한 말은 별로 없고, 심지어는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모두 윤허했으니, 이는 또 애써 불러온 뜻도 없는 것이다.
34 더구나 주서(注書)에게 붓을 멈추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발설하지 못하게 했으니, 무릇 밖에 있는 사람이야 그 누가 다시 이 일을 알겠는가?
35 그런데 그후 상소에 다시 이 일을 주달하는 것 중에 만약에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36 문득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라고 하여
37 의혹을 면하지 못하게 했으니, 온 세상에서 보고 듣는 자와 식견이 있는 이들이 남몰래 탄식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38 ○ 영조 10년 12월 15일에 사간 조한위가 재변으로 인하여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39 오늘날 백성의 곤궁함과
40 언로(言路)의 막힘과
41 기강(紀綱)이 무너진 것과
42 저축의 탕갈된 것은
43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나,
44 사기(士氣)가 날로 쇠퇴(衰頹)해짐은 실로 망국의 조짐이 되고 있는데,
45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그 연유를 알고 계십니까?
46 신은 탕평(蕩平)의 빌미라고 생각합니다.
47 시상(時象)을 따르고 세속(世俗)에 혼동하여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은 진실로 말세(末世)의 공통된 심정(心情)이니,
48 피차(彼此)의 사이에 서로 어울리고 당파의 같고 다른 처지를 관망(觀望)하여
49 오직 규각(圭角,말이나 행동이 모가 나서 남과 융합하지 못함)을 드러내지 않고,
50 시비(是非,옳고 그름)의 분별도 없이,
51 온화한 얼굴로 말하고 웃으며,
52 관록(官祿)만을 보존함으로써,
53 방편(方便,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 편하고 쉽게 이용하는 수단과 방법)의 법문(法門)으로 삼고 있습니다.
54 이런 이유로서 점차 물들고 풍습을 이루어 날로 자라나 그치지 않으니,
55 극단의 폐단을 말한다면 장우(張禹,한나라의 정승)와 풍도(馮道) 가 이것입니다.
56 19일 하교(下敎) 같은 것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한데,
57 전하께서 이미 단서를 제기하고도 오히려 분명히 말하고 드러나게 지적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환하게 알지 못하도록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58 이것이 얼마나 큰 시비(是非)인데 애매한 사이에 둘 수 있겠습니까?
59 ○ 한 번 정사(政事)에 전랑(銓郞) 5인을 의망한 데 있어서는 극단(極端)에 달했으니, 이는 모두 탕평의 연유입니다.
60 당초에 그 인품의 우열은 논하지 않고 반드시 양편의 대등을 유지하고자 하여
61 한 번 의망하고 두 번 의망함으로써 이토록 범람한 수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62 ○ 그런데 듣건대, 훈련 대장 장붕익의 생일 연회에 극도로 사치하여,
63 주육(酒肉)의 풍성함과 풍악의 성대함을 도성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하여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니,
64 장신(將臣)이 근신(謹愼)을 생각하지 않음은 진실로 해괴합니다.
65 인하여 또 조관(朝官)을 두루 초청하여 초헌(軺軒)이 문(門)을 메웠고 밤을 지새워 연회를 베풀었으며
66 기녀들의 가무가 현란했으니, 보고 듣는 자들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67 신의 생각에는 이런 방탕한 습관을 결단코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8 전 교리 신치근은 사천(史薦)의 균등하지 못함을 목격하고 드디어 불평한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처벌할 일이 되겠습니까?
69 그런데 대계(臺啓)가 연달아 일어나 죄를 만들었고 파직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70 아직도 서용(敍用)하지 않았으니, 즉시 조용(調用)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71 비답하기를 "이 시상(時象)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여러 언사(彦士)들을 모아야 되는데,
72 그대는 그 많은 것을 걱정하나 나는 오히려 인재가 적은 것을 염려한다.
73 신치근이 한 일은 잘못된 것인데, 어찌하여 부추기고 억제하는가?
74 대신이 진달한 바는 원래 깊은 뜻이 없으며 나의 하교도 또한 임시 변통한 말은 아니다.
75 그러나 적요(寂寥)한 가운데에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14 ○ 영조 11년(1735) 1월 11일에 임금이 소대를 행하고 정관정요를 강하였는데, 옥사를 다스리는 것을 논한 곳에 이르러
2 임금이 말하기를 "위징이 말하기를 '신문(訊問)하기도 전에 먼저 그에 대한 선입감이 있으면 그를 신문하기에 미쳐 죄에 몰아넣게 된다.' 라고 하였는데,
3 이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자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
4 형옥(刑獄)이란 실로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어 털끝만한 차이에 생사(生死)가 곧 판정되는데,
5 만약 선입감을 가진다면 어찌 다 공평하고 진실하게 판결하여 원옥(冤獄)과 남형(濫刑)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6 ○ 1월 12일에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졸하였다. 김씨는 도정(都正) 김창국의 딸로서 궁궐에 뽑혀 들어와 후궁이 되었는데,
7 숙종의 예대(禮待)가 다른 빈어(嬪御)와는 달랐으므로 임금도 또한 그를 예로써 높이었다.
8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 왕조의 후궁은 다만 이 한사람만 남았었다.
9 일찍이 인현 성모와 더불어 숙종 15년의 환란을 만났었다가, 숙종 20년 성모(인현왕후)께서 복위되었을 때에 그도 또한 복작되었었다.
10 내가 어렸을 때에 항상 어머니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한 소식을 들으니 슬픈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겠다.
11 예장(禮葬)은 안빈의 예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가, 명빈의 예를 쓰도록 하였다.
12 ○ 13일에 강원도 감사 조최수가 아뢰기를 "울릉도의 수색 토벌을 금년에 마땅히 해야 하지만 흉년에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13 김취로 등이 말하기를 "지난 숙종 23년에 왜인들이 이 섬을 달라고 청하자,
14 조정에서 엄하게 배척하고 장한상을 보내어 그 섬의 모양을 그려서 왔으며,
15 3년에 한번씩 가 보기로 정하였으니, 이를 정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6 ○ 1월 21일에 영빈 이씨가 원자(元子,사도세자)를 집복헌에서 탄생하였다.
17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18 ○ 3월 11일에 임금이 최숙빈과 효장 세자의 묘에 거둥하였다.
19 이날 비가 심하게 내리므로 여러 승지들이 이를 정지하도록 청하려고 청대하기를 요구하였는데,
20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날씨가 궂은지 맑은지를 가려가면서 어버이를 뵙는가?" 하고, 이들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21 ○ 13일에 훈련 대장 장붕익이 졸하였다. 장붕익은 거칠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는데,
22 젊은 나이에 무술을 닦아서 자못 교만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23 훈련 대장에 제배되자 그 호령이 엄하고 밝아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었다.
24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장사들이 그를 추모하여 마지 않았다.
25 ○ (한 때에 교만하였으나, 벼슬에 오르고, 뒷 날을 깨우치고, 고친다면 의로움을 얻을 것이다.
26 그러나, 교만하여 벼슬에 오른 뒤에도, 교만하여 벼슬에 올랐다 하여,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27 ○ 5월 1일에 충청도를 공홍도(公洪道)로, 전라도를 전광도(全光道)로, 강원도를 강춘도(江春道)로 하였다.
28 충주, 청주, 나주, 원주의 네 고을이 모두 반역의 변란으로 그 호(號)를 강등했기 때문에 아울러 도의 이름을 고친 것이다.
29 ○ (팔도에서 3개의 도의 이름을 역적이라 하여 강등하였으니, 어찌 온전하게 나라를 지탱 할 수 있겠는가?
30 이러한 잘못이 한국시대에 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통탄 할 일이다.
31 경상도는 영조에게 자신들이 역적의 도시가 아님을 상소하였다. 그래서 온전하였던 것인가?
32 그렇다면 팔도의 절반이 역적이라고 조선이 스스로 정하였다는 것인데, 어찌 이러한 나라가 온전 하겠는가?
33 그렇다면 한국시대는 또 어떠하겠는가?)
34 ○ 영조 12년(1736) 2월 20일에 판의금 윤순이 아뢰기를 "해은군 이당이 민가를 빼앗아 들어간 죄에 맞는 형률을 근거할 데가 없으니,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35 도(徒) 3년에 정배하도록 명하고 널리 알려 법령으로 삼게 하였다.
36 ○ 3월 15일에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37 ○ 영조 13년(1737) 2월 5일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경기 양정 어사 김상로도 함께 입시 하였다.
38 임금이 여아(女兒)를 군액(軍額)에 충당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한참 동안 경탄(驚歎)하고 그 수령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39 ○ 영조 14년(1738) 1월 11일에 전광도를 전라도로, 강춘도를 강원도로 하고,
40 충원, 금성, 원성, 남원, 이천, 장흥, 담양, 예천, 풍기, 용인, 진위 등의 고을을 모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승격해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41 대개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명칭을 낮추었던 것인데, 이제 이미 10년의 시한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15 ○ 영조 17년(1741) 7월 28일에 임금이 숭정문에서 조참을 행하고, 백관과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였는데,
2 대략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지 17년인데, 덕(德)은 아랫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고 은혜는 백성에게 젖어들지 못하여 중외의 백성들이 모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처지에 있다.
3 스스로 부덕(否德)을 부끄러워 하니, 먹으나 자나 어찌 해이해질 수 있는가? 몇년을 고심하며 조제(調劑)에 정성을 쏟아 왔다.
4 문을 닫고 수라를 물리친 것을 지난 역사에서 어찌 찾아볼 수 있는가?
5 몇 차례 칙유(飭諭)하였는데 그래도 붕당의 습관을 달갑게 여기니, 이런 얼굴로는 그대들을 대하기에 오히려 부끄럽다.
6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에서 겉으로는 화합과 협동을 빙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얼음과 숯처럼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 하였다.
7 이때 대사간 정익하가 이광덕을 국문하기를 요청하였는데,
8 임금이 정익하가 대신을 중상(中傷)한 것으로 의심하여,
9 드디어 조참을 행하고서 뭇신하에게 유시를 반포하여 말을 하는 자들을 억눌렀었다.
10 ○ 29일에 태학의 여러 유생들에게 칙유(飭諭)하였다.
11 이때 태학의 여러 유생들이 세 번을 연달아 상소하여 사원을 헐지 말기를 청하였다.
12 임금이 마침내 여러 유생들을 광달문 밖에 불러서 도승지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게 하였는데,
13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저 여러 향원(鄕院)은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폐단이 분운(紛紜)하여 도리어 설월(屑越)하게 되었으므로 유생에게 수치를 끼치고 있다.
14 각자가 사원을 세우려고 서로 앞을 다투니,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고 선비의 습관은 더욱 혼탁하다.
15 지금의 태학은 도리어 눈치를 살피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16 그대 여러 유생들은 근본을 버려 두고 말단에만 힘쓴다고 말하겠다.
17 이번의 이 칙유는 성현(聖賢)에게 질정하여도 또한 잘못되지 않을 것이니,
18 그대들은 빨리 쓸데 없는 상소를 중지하고 공경히 성묘(聖廟)를 지키라." 하였다.
19 ○ 10월 1일에 형조 참판 원경하가 상소하기를 "신(臣)이 고독하게 혼자 있어 외롭게 살아가며 벗도 없었는데,
20 이제 갑자기 별도로 한 당(黨)을 만든 것으로써 유신(儒臣)의 연척(筵斥,손가락질)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21 그리고 또 신이 오광운을 천진(薦進,천거)하였다고 말하였는데,
22 대저 추천하여 진용시키는 것은 승선(承宣)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23 전후(前後)의 연석(筵席)에서 그 성명이 일찍이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24 ○ 당(黨)이 없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고자 하다가 도리어 당을 만든다는 것으로써 비방을 만났습니다.
25 이러한 당명(黨名)을 짊어지고 나니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26 그리고 또 김한철은 신의 평생 친구입니다. 어찌 신을 해치려고 그랬겠습니까?
27 저 자신을 반성하는 바이며 많은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서 사직하니,
28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9 ○ 영조 19년(1743) 2월 11일에 영조 4년 역적에 연좌된 사람 중에서 출계하여 강등한 사람인
30 경성직, 경성구, 경성규 등을 놓아주라고 명하여, 좌의정 송인명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31 ○ 10월 27일에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병술년(숙종32년)에 기로연을 설행한 후 80세의 사족(士族)과 90세의 상한(常漢)에게 가자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하니,
32 임금이 말하기를 "고례(故例)에 다만 주육(酒肉)을 내려 주는 줄로 알았는데,
33 이제 듣건대 가자했다 하니, 이는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고, 은전을 미루어 미치게 하는 성의(盛意)이다.
34 내가 이미 위로 자성의 뜻을 받들어 마지못해 진연을 받았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건대, 어찌 그대로 넘길 수 있겠는가?
35 한결같이 병술년의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6 ○ 영조 20년(1744) 10월 30일에 금고(禁錮)된 전 군수 조봉주는 5년 동안 고신(告身) 을 빼앗고 세 등급을 강등시키라 명하였는데,
37 조봉주는 천안 군수가 되어서 민간의 전지 80여 결을 마음대로 사용하였다가
38 암행 어사에게 발각되었으므로 하리(下吏)를 가두도록 명하였는데,
39 이때에 이르러 형률에 의하여 처벌하였으니, 탐오한 자를 징계하는 법전이 엄하지 않은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16 ○ 존주(尊周)라함은 주나라 왕실을 존숭(尊崇,존중)하는 것으로, 곧 왕실을 높이고 이적(夷狄,오랑캐)을 물리치는 것인데, 이 때에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2 ○ 영조 21년(1745) 8월 5일에 사학 유생 홍계억 등이 상소하기를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존주(尊周)' 두 글자로써 조종(祖宗)을 본받은 선무(先務,먼저해야 할 의무,일)로 삼았는데,
3 간책(簡冊)을 인쇄하는 데 있어서 의리(義理)를 중도에 변경하여 갑자기 '주(周)'자를 '왕(王)'자로 바꾸었으니,
4 신 등은 여기에 '왕' 이라고 한 것은 어느 왕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5 이 천하(天下)를 지배하는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6 그렇다면 오늘날 천하를 지배하는 왕은 누구입니까?
7 이것을 춘추에서 왕정월(王正月)이라고 일컫는 그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8 ○ 대부(大夫)와 사우(士友)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성명의 뜻이 아니고 승지 조명리의 죄이다.
9 자신이 만부(灣府,의주)에 있을 때에 우리 나라의 사정이 저들 나라에 흘러 들어감을 직접 보고,
10 천심(天心,임금의 마음)을 공동(恐動,위험한 말을 하여 두려워하게 함)한다고 하여 마침내 고치고야 말았다.' 고 하였습니다.
11 과연 그의 말대로라면 황단(皇壇,고려 때 부터 하늘과 땅에 제사하던 단) 도 철거하여야 하고
12 춘추도 읽을 수 없을 것이며, 만동묘(萬東廟,임진왜란을 도와준 것으로 명나라 신종, 의종을 위하여 세운 사당) 나 환장암도 헐어야 합니다.
13 저 사람의 말이 한번 입밖에 나와 성명께서 전수(傳授)하신 가법(家法)으로 하여금 파묻히고 어두워서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니,
14 비록 춘추의 난적이라 하고 열성의 죄인이라 해도 가하겠습니다.
15 삼가 원하건대, 어제상훈(御製常訓) 가운데 '존주(尊周)' 두 글자를 그대로 두어 선열들의 뜻을 밝히게 하소서." 하니,
16 비답하기를 "한 글자를 고치는 데도 역시 깊은 헤아림이 있었다. 나이 어린 너희들이 어찌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느냐?" 하였다.
17 ○ (아 통탄 스럽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모두 중국을 우러러 보기를 이처럼 하니,
18 중국의 명령이라면, 감히 임금도 쉽게 갈아 치우고, 조선과 백성을 모두 바칠 수 있는 매국노와 같은 사람들이다.
19 실제로 조선은 명나라에 조선의 처녀 바치기를 실천하였으니, 자국의 백성을 명나라에 팔아,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 목숨을 연명한 것이다.
20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이러하니, 이러한 자들이 지금 한국시대에도 이 땅에도 없다고 할 수 없다.
21 자국민에게는 홀대하면서, 타국을 높이는 자들이 있다면 바로 조선의 이러한 사대부와 같다.
22 이 모든 것이 타민족과 타국을 숭상하는 유학에 대한 믿음 때문이니,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23 ○ 좌승지 조명리가 상소하기를 "죄과를 몰아 붙여 춘추의 난적과 열성의 죄인으로 지목하였으니,
24 바라건대, 파직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시골에 물러가게 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5 ○ 7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유소(儒疏,유생들의 상소)의 말단에 황지(黃紙)를 붙이고 숭정 연호를 썼으니, 이 또한 해괴한 일이다.
26 비록 유중(留中)하게 하였으나, 이 소문이 삽시간에 압록강 북쪽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27 나는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임금이 아니고, 특별히 선인(先人)들의 훌륭한 점을 계술하고
28 후손들을 깨우쳐 주려는 의도로 우연히 상훈의 문자를 만들었다.
29 강도(江都)에 축성하려고 하니 이훈의 상소가 있었고,
30 경성(京城)을 수축하려고 하니 홍중효의 상소가 있었으며,
31 상훈을 기술하려고 하니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다.
32 이 세 가지는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사단(事端)을 야기하였으니,
33 앞으로 닥칠 일을 알 만하다. 나는 앞으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34 이때 해가 저물었는데도 아직까지 수라를 들지 않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힘껏 청하니, 한참 있다가 허락하였다.
35 ○ 묵명(墨名)이라 함은 유생 등이 조관을 탄핵 할 때, 탄핵을 입은 사람의 성명을 유적(儒籍)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36 ○ 유적(儒籍)이라 함은 조선 시대에 각 지방 향교를 중심하여 그 지방 일대에 있는 유학자들의 가계, 학통(學統), 종파(宗派) 따위를 기록한 문부(文簿)이다.
37 ○ 9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조명리가 지난번에 유생들로부터 벌을 당하여, 묵명(墨名) 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38 비록 하교(下敎)로써 묵명은 해제하였으나 벌명(罰名)은 아직까지 학당의 벽에 붙어 있다고 한다.
39 '춘추 난적(春秋亂賊)' 등의 글귀를 어찌 잠시라도 붙여 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 빨리 떼어 버리라고 명하였다.
40 또 하교하기를 "유생들의 소장 가운데 황지에 숭정이라고 쓴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다.
41 소본은 불사르고 소두와 소장을 지은 장의 및 색장은 모두 파면시켜 서인으로 삼도록 하라." 하자,
42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선비도 역시 서인이니 이 구절은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43 임금이 말하기를 "파면시켜 서인으로 만들라고 한 것은 관학에 끼지 못하게 하는 의도이니, 그렇다면 '인(人)'을 '민(民)' 자로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44 송인명이 말하기를 "기왕 죄로 다스리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 줄 바에는 이들도 역시 사자(士子)이니 이와 같이 대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자,
45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은 이미 청토(請討)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고 있다. 이 한 구절이 무슨 애석하게 여길 만한 것이 있어서 꼭 빼어 버리려고 하는가?
46 이 뒤로는 공사(公事)는 승정원에 머물러 두고, 좌상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니, 송인명이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47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라는 하교는 이것이 무슨 하교이십니까?" 하니,
48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은 상훈(常訓)은 실제로 선덕(先德)을 유양(揄揚)하고자 함이었는데, 도리어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49 나는 오늘 밤에 방황하여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50 예조 참판 원경하가 빠른 걸음으로 전(殿)에서 내려가 뜰 아래 부복하고, 관(冠)을 벗은 뒤에 머리를 조아리니, 그 소리가 전상까지 들렸다.
51 임금이 일어나서 올라오라고 명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그 하교를 빨리 중지하지 않으시면 신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52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이와 같은 이가 있으니 훗날 원량(元良,세자)은 믿을 바가 있겠다.
53 원경하는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니, 옛날 사직신이라고 할 만하다.
54 특별히 지중추로 임명하여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겠다." 하고,
55 이어서 공사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한 것과 좌상을 파직하라는 하교를 거두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56 원경하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와서 말하기를 "오늘 지나친 거조는 오로지 유소로 말미암았으니, 소두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57 당시의 사람들은 원경하를 쇄수 판서(碎首判書)라고 지목하였는데, 그것은 머리를 두들겨서 승탁(陞擢)하였기 때문이었다.
17 ○ 30일에 공조 판서 원경하가 상소하기를 "신의 직위는 동지성균인데,
2 상유 한치대와 송영휴 등은 신이 소유(疏儒)를 귀향보내기를 청한 데에, 성내어 부황(付黃)과 묵삭(墨削)을 행하여 학당의 벽에 어지럽게 붙여 놓았습니다.
3 바라건대, 신의 직책을 체개(遞改)해 주소서." 하니,
4 비답하기를 "이는 위에서 듣지 못한 것인데 이미 듣고서야 그냥둘 수는 없는 일이다. 과치(科治)하게 하라." 하였다.
5 ○ 9월 10일에 임금이 몸소 숙장문에 나아가 전 판관 홍우집 등을 나국(拿鞫)하였는데, 홍우집은 소유(疏儒) 홍계억의 아버지였다.
6 당시 임금은 유생들이 원경하를 벌한 일 때문에 진노하였고, 또 연석에서 한 말이 누설된 것을 의심하여
7 먼저 기주관 유한소 등을 죄로 다스렸는데, 전후로 무릇 18명이나 되었다.
8 하교하기를 "이들의 아비는 감히 아무런 일이 없는 듯이 집에 있을 수가 있느냐? 홍우집 등을 마땅히 친문할 터이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 이날 임금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여 홍우집 등 7명을 국문하였고,
10 이덕제, 윤광주는 말이 자세하지 못하다 하여 모두 형신(刑訊)을 당하였으며, 찬배(竄配)된 자가 6명이나 되었다.
11 태학 유생 한치대, 송영휴를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12 ○ 9월 11일에 임금이 군민(軍民)에게 하유(下諭)하는 비망기를 써서 내렸는데,
13 천백 마디 누누이 한 말 중에, '황조(皇朝)에 존복(尊服)하려는 마음이 도리어 유생들을 무날(誣捏)한 결과가 되었으니, 대단히 통한스러워서 진실로 남면(南面)한 즐거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14 정원에서 연달아 작환(繳還)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구대(求對)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15 약방 제조 김약로가 승지와 사관을 인솔하고 궁궐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갔으며,
16 영상과 우상이 뒤따라 들어가서 일제히 소리를 높혀 간절히 아뢰니,
17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존주(尊周)하던 정성이 이 사람들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으니,
18 오늘날 조정의 모양이 흐트러진 머리카락 같아서 진실로 수습할 수가 없다.
19 나는 원량(元良,세자)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경 등이 보좌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하니,
20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총명 신무(聰明神武)하기가 전하 같으신 분도 오히려 이와 같이 근심하시는데, 어찌 오늘의 국사를 어린 원량에게 맡기시겠습니까?" 하자,
21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이 일은 비록 자교(慈敎)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울면서 아뢸 것이고,
22 원량이 간하더라도 듣지 않을 것이며, 군민(軍民)이 옷깃을 잡고 간쟁하더라도 역시 내가 너희들을 잊지 않았다고 하유하겠다." 하였다.
23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끝내 반한(反汗)하지 않으시면 신 등은 마땅히 서로 이끌고 자전(慈殿,인원왕후)께 가서 울면서 청하겠습니다.
24 자전께서도 반드시 신 등을 그르다고는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25 ○ 다음날에 영의정 김재로 등이 복합하니, 선정전에서 수서를 내려 정무를 볼 것을 유시하였다.
26 ○ 9월 26일에 병조 판서 김약로가 말하기를 "한억증의 집에 도포(道袍)를 입은 자가 찾아와서 곧바로 보기를 청하고,
27 마침내 '고변(告變)' 두 글자를 가지고 위협하였다 합니다.
28 그 사람의 성명을 듣건대, 이용발이라는 자로서 자칭 가산의 교생(校生)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9 ○ 10월 8일에 임금이 숙장문에 나아가서 이색 등을 친국하였다.
30 ○ 이색이 고하기를 "신의 매자(妹子,생질) 권두령이 봄에 신을 찾아왔습니다.
31 그는 임서린에 연좌된 처지인데, 적소(謫所)에서 함부로 떠나 왔기 때문에
32 그가 온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지방에 적당들이 모여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려고 한다.' 고 하므로
33 신이 나무라기를 '너는 왜 또 이처럼 친족을 다 죽을 일을 하느냐?' 하였습니다.
34 그가 말하는 적당이란 곧 무신년(영조4년)의 여얼(餘孼)인 이유익의 아들 이천영의 족속입니다.
35 또 망명자 18명은 월강(越江)하였는데, 그 중에 황진기, 정중복은 처음에 칠보사의 중이 되었다가 서로 모여 모역하고 승군을 조직하였으니, 이른바 붕화상이라 함은 승적의 괴수입니다.
36 18명은 장차 호인(胡人)들을 청하여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북변(北邊)을 할거(割據)하려고 하는데, 이유익의 아들이 역시 괴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생략)" 하였다.
37 이용발이 공초하기를 "이색이 신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 책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가서 고변하면 마땅히 공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8 또 이색이 권두령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남북으로 장구(長驅)하여 내려온다면 성공치 못할 것이다. 성중에 잠복하였다가 몰래 급히 일으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39 ○ 다시 이색이 공초하였는데, 형장을 두 차례 가하자 이어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고 조정을 무망(誣罔)하였다는 것으로써 지만(遲晩)하였다.
40 ○ 10일에 죄인 이색이 물고(物故)되었다.
41 ○ 이용발을 친국하여, 권두령의 거처와 이색의 음모를 추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형신하였으나,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았다.
42 ○ 20일에 서북변(西北邊)에서 연좌된 모든 죄인을 호남의 해도(海島)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43 ○ 이후에 무신년의 역적들을 친국하여 형신하게 되었다.
44 ○ 13일에 이다치를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색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잔당은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 마땅하다.
45 강변 7읍에 있는 적객(謫客)들이 바야흐로 동모(同謀)하였는데 북경에 들어가서 청병(請兵)하려 한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46 ○ 정언 김이만이 아뢰기를 "이색의 극도로 흉악한 정절이 여러 역적들의 초사에서 낱낱이 드러났으니 대역으로 논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47 또 조순은 단지 권두령의 흉언만 들었으니, 지정(知情) 불고죄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48 '그렇게 한다면 좋겠다.' 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이미 나왔으니, 대역 부도의 죄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49 ○ 12월 25일에 목광원, 이다치 외 8명이 모두 물고(物故)되었다.
50 ○ 우의정 조현명이 상차하기를 "며칠 전에 대신(臺臣)이, 봉명 중신(奉命重臣)이 역적의 처자에게 음식을 보내어 위문한 일로써 추삭(追削)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51 신도 이 일에 대하여 역시 일찍이 범한 일이 있기에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여 감히 이에 자수합니다.
52 신이 호남의 안찰사로 있을 때에 순문(巡問)하던 차에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53 역모로 죽은 자의 형의 처가 남편을 따라 거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으니, 그는 곧 신의 어미의 이종제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54 영조 22년(1746) 2월 12일에 전 대사헌 윤용이 졸하였다. 용은 윤지인의 아들인데,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
55 ○ 3월 16일에 헌부에서 아뢰기를 "무신년(영조4년) 역괴의 아들로서 사형을 용서받았다가
56 이제 나이가 찬 자들은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죄안(罪案)을 조사하여 아울러 이인좌의 아들을 추후 연좌시킨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7 ○ 9월 1일에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혹시 허물이 있어서 너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이것이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요,
58 오늘의 글뜻을 네가 혹시 알지 못하고서 궁관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이것 역시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니라.
59 예전에 문묘(文廟)께서 동궁으로 계실 적에는 성삼문의 자(字)를 부르며 달 밝은 밤이면 친히 직소로 가서 그와 더불어 강론을 하였으니, 이는 본받아야 할 일이다.
60 사석에서 글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을 경우, 어찌 중관(中官)에게 묻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61 이형만이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었을 적에
62 임금에게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하루 동안에 어진 사대부를 접할 적이 많고
63 환관, 궁첩을 가까이할 때가 적으면 기질이 함양되어 덕성이 훈도(薰陶)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64 임금이 척연히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진달한 말은 옳은 말이다. 일에 따라 진계를 하니, 내가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별히 숙마 한 필을 내렸다.
65 ○ 영조 24년(1748) 4월 15일에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동지사의 장문을 읽게 하였다.
66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당상과 역관을 그들이 어떻게 감히 구류하여 수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니,
67 승지 이형만이 말하기를 "호인(胡人)들은 예의가 없어서 단지 기율에 의해 유지하여 가는데, 기율이 해이해졌으니,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하자,
68 임금이 말하기를 "피국(彼國)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도 기강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였다.
18 ○ 영조 25년(1749) 1월 25일, 임금이 밤에 원경하와 조명리를 불러 정훈(政訓)을 불러 쓰게 하였으니,
2 이것은 동궁의 처음 정사이므로 정치의 요체를 동궁에게 훈계한 것이었다. 그 항목은 여덟 가지가 있으니,
3 대개 중용 구경(九經)의 장의(章義)에서 취하여 장(章)마다 반드시 세번씩 뜻을 되풀이하여 밝혔다.
4 ○ 구경(九經)은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데 아홉 가지 중요한 일로서,
5 중용에 보면 몸을 닦는 것[修身],
6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7 친족을 친히 하는 것[親親],
8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9 신하를 체찰하는 것[體群臣],
10 서민을 자식처럼 돌보는 것[子庶民],
11 모든 공장(工匠)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12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13 제후를 따르게 하는 것[懷諸侯]이라 하였다.
14 ○ 1월 27일에 왕세자의 대리 청정을 팔도에 반포하였다. 이 때 왕세자의 나이 15세였다.
15 ○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동궁의 앞에서 정훈을 읽게 하였다.
16 임금이 말하기를 "정훈 가운데 '아들이 돌아와 아뢴다.[有子歸奏]' 라는 말이 있는데, 네가 이것을 보고도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
17 정훈 가운데 여덟 조목은 어느 책에서 나왔느냐?" 하니, 동궁이 "중용에 있습니다." 하였다.
18 ○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25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56세의 수명을 누렸으니 나에게는 과분하다.
19 네가 만약 나의 뒤를 잘 잇는다면 25년 동안의 허물을 덮을 수 있겠으나,
20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25년 동안 조금 평안했던 일도 너로 말미암아 그르치게 될 것이다.
21 '근습(近習)을 엄격히 한다.[嚴近習]' 는 말에 이르러서는 곧 근습을 온전케 하는 것이니
22 처음에 예방하지 않아 국법에 빠지게 한다면 비록 그들을 온전토록 하고자 하여도 할 수 있겠느냐?
23 그러나 엄격히 한다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위엄과 처벌로써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다.
24 감히 우리의 정령(政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곧 엄격히 하는 것이다.
25 '분화(紛華)' 라는 것은 여색을 가리킨 것이다.
26 너는 모름지기 날마다 손과 발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여 세 《보감(寶鑑)》을 읽어서 이러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27 나는 이 책들이 곁에 있을 때에는 감히 기대거나 눕지 못하였다.
28 이틀밤을 자지 않고 너에게 주기 위해 정훈을 지었으니 네가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느냐?" 하였다.
29 ○ 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조현명이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읽게 하였다.
30 그 차자에 이르기를 "첫째, 저하께서는 큰 뜻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큰 뜻이란 대인(大人)의 뜻입니다.
31 저하께서는 비록 어린 나이에 계시나 국정을 처결하시니 대인의 일을 실제로 행하고 계십니다.
32 진실로 어린 사람의 뜻을 버리고 대인의 뜻을 세우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큰 책임을 맡아 대인의 일을 행하시겠습니까?
33 둘째, 저하께서는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효제란 부모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34 부모의 마음은 자기의 자녀가 착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으며, 또 자기의 자녀가 악한 일을 하지 말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습니다.
35 대조께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저하께서는 반드시 행하시고, 대조께서 행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을 저하께서는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36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오로지 대조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서 비록 궁중의 하찮은 일이라도 한결같이 모두 여쭈어 행하시고
37 주무시는 잠자리와 잡수시는 음식을 보살펴 드리거나 용안을 뵙고 하교를 받들 때에 더욱 삼가고 두려워하며 정성과 예의를 다 하십시오.
38 셋째, 저하께서는 학문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독서 궁리(讀書窮理)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39 독서하지 않고 어떻게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온갖 일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40 신하를 응대함이 번거롭고 잦다고 하여 중간에 끊지 마시고 하루 두 번의 연석(筵席)을 혹시라도 중지하거나 폐하지 마십시오.
41 넷째, 저하께서는 완호(玩好)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42 이른바 완호란 진기한 보물, 성악(聲樂), 화초, 새와 짐승이니 무릇 귀와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43 한번 애호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장차 즐겨 갖고 싶은 욕망은 커지고
44 뜻과 생각은 황폐하게 되어 그 폐해는 단지 공부를 방해하고 정치를 해치는데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45 다섯째, 저하께서는 근습(近習)을 엄격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근습이란 환관, 궁첩(宮妾) 따위가 그것입니다.
46 아침 저녁으로 좌우에 있어 허물없이 대하기 쉬우니,
47 저하께서는 모름지기 장중하게 몸가짐을 가지시어 이들 무리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게 하시고,
48 청소와 심부름 외에는 감히 털끝만큼도 분수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49 그들 가운데 경망되고 말이 많은 자는 반드시 멀리 내치십시오.
50 이 일은 나라의 치평(治平)과 혼란에 관계되며 과거의 실패한 자취를 여러 곳에서 상고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51 ○ (이 글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특히 다섯째의 말은 반대로 생각하여 아래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52 아래사람을 장차 크게 쓰지 않으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으니, 그러한 상관은 조심하는 것이 옳다.)
53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상신의 차자가 곡진하고 조리가 있으니 너는 승지로 하여금 붓을 들어 비답을 부르는 대로 쓰게 하라.
54 내가 마땅히 지켜보겠다. 비답의 내용이 비록 능숙하지 않더라도 중외(中外)에서는 반드시 귀하게 여길 것이다." 하니,
55 동궁이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56 "처녀가 처음 시집갈 때 어찌 부끄러움이 없으리요만, 그래도 배례(拜禮)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57 비답을 불러 쓰게 하는 것이 어찌 처녀가 처음 시집가는 부끄러움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58 동궁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하기를 "차자를 보니 경들의 간절한 뜻이 두루 갖추어 있었다.
59 뜻밖에 대리 청정의 하교가 계시었으나, 나의 성의가 천박하여 끝내 명을 거두어들이게 하지 못하였으니, 천심(天心)과 정리(情理)에 초조하다.
60 이 다섯 조목을 어찌 감히 잠시라도 소홀히 하겠는가? 명심하여 잊지 않을 것이다." 하고,
61 이어서 하령하기를 "사관이 가서 유시(諭示)하도록 하라." 하였다.
62 임금이 "이것이 어찌 한 번 읽고 승정원에 버려 둘 것이겠는가?" 하니,
63 동궁이 "승정원에서 베껴 낸 뒤에 다시 들이라." 하였다.
64 임금이 "'명심하여 잊지 않겠다.[銘心服膺]' 라는 글자는 네 자신이 생각해서 쓴 것이냐, 아니면 다른 데서 보고 쓴 것이냐?" 하니,
65 동궁이 "정유년의 기초(記草)를 보고 썼습니다." 하자,
66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유년에 경묘(景廟)께서 비답을 내리시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는데, 오늘 네가 다시 옮겨 쓰리라는 것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느냐?
67 오늘은 너의 처음 정사인데 어찌 백관을 신칙하고 군민(軍民)을 위안하는 한 마디 말이 없느냐?" 하니,
68 동궁이 불러서 받아쓰게 하기를 "오늘 성상의 훈계를 받들어 정사에 참여하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은 한 마음으로 나라를 도와 소민(小民)에게 털끝만치라도 고통을 주지 말라." 하였다.
69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가 15세된 원량의 '한 마음으로 나라를 도우라.' 는 말을 보고도 오히려 당습(黨習)을 일삼으며,
70 수령이 15세된 원량의 '털끝만치라도 고통을 주지 말라.'는 신칙을 보고도 오히려 혹시라도 백성을 침해한다면,
71 우리 동방은 반드시 오랑캐나 짐승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19 ○ 1월 28일에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2 ○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국가의 경용이 궁핍함으로 평안 감영의 돈 1만 냥을 얻기를 청하였으나,
3 감사가 장부에 기록하기 전에 올려 보내면 혹시 사사로이 바치는 것 같은 혐의를 받으므로
4 장청(狀請)하기를 '별향고(別餉庫)의 이미 장부에 기록된 것을 먼저 보내고 뒤좇아 보충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니 시행을 허락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5 동궁이 처음에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6 병조 판서 김상로가 별향고의 장부에 기록된 것은 가져다 쓸 수 없다고 아뢴 것으로 인하여
7 감영에서 올려 보내는 돈으로 쓰라고 고쳐 하령하였다.
8 ○ 김재로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공천(公賤), 사천(私賤)으로서 양인 아내를 맞은 자의 소생은 아비의 신역(身役)을 따랐으나
9 경술년(영조6년)의 새 정식에는 어미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도록 하였는데도
7 작년에 장례원에서 제도(諸道)에 영을 내려 양인이 된 자를 책으로 만들어 보고하여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되
8 보충대(補充隊)의 속전(贖錢)을 또한 독촉해 받아 올려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보충대란 속량(贖良)한 자의 이름입니다.
9 남자 종과 양인 아내와의 소생은 나라에서 이미 어미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으라고 명령했으니 땅에 떨어질 때부터 자연히 양인이 되었으므로 애당초 보충대의 의리가 없습니다.
10 속전은 제도로 하여금 징수를 면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11 ○ 조현명이 말하기를 "시민(市民)의 피폐함이 참으로 가엾습니다.
12 지난날 비국에서 조사해 보니 장시(場市)에서 부담하는 역의 1년 부담액이 수만 냥에 이르니 시민들이 어떻게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를 키우겠습니까?
13 김상로, 박문수로 하여금 가름하여 곧 바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14 ○ 장령 임집이 상달하기를 "수령으로 백성에게 역을 지워 농사를 방해하는 자는 도신에게 신칙하여 장달(狀達)해서 치죄(治罪)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15 이날 여러 신하들은 모두 움추리고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하여 대조(大朝)에 입시할 때에 비해 더욱 엄숙하고 공손하였으니
16 대개 동궁이 과묵하고 위엄이 있어 얼굴빛과 말솜씨로써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17 ○ 29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정유년(숙종43년)을 회상하니 감회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18 조금 전에 조용히 누워 조는 듯 마는 듯하다가 갑자기 유신을 부르라 명하였다.
19 나에게도 뜻이 있으니 어찌 대리 청정한다고 하여 국사를 소홀히 하겠느냐?" 하였다.
20 ○ (영조의 이 말을 깨닳지 못한 왕세자는 훗 날에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 죽게 된다.)
21 이윽고 앞에 놓인 촛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역시 백성의 노고로 된 것인데도 원량은 촛대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22 백성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23 또 하교하기를 "나이 든 사람을 나이 든 사람답게 대접하는 것은 혈구지도(絜矩之道) 이니
24 사서인(士庶人)으로서 90세 이상 되는 사람을 경외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여
25 우리 원량으로 하여금 경로(敬老)의 의미를 알게 하고 우리의 부로들로 하여금 원량의 첫 정사를 알게 하라." 하였다.
26 ○ 2월 12일에 임금이 길가에 있는 헤어진 옷을 입은 어린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27 하교하기를 "이윤(伊尹)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실로 부끄럽다.
28 지방의 수령이 백성을 구휼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29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우리 백성을 보호하게 하라." 하고,
30 잇달아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의복과 양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31 ○ 17일에 임금이 왕세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13세에 비로소 사부(師傅)를 만나 늦게 배운 까닭에 몸소 행하고 실천하지 못하였고,
32 또 나의 기품이 심하게 용렬하고, 저급하지는 않아 자신을 믿는 병폐가 있기 때문에 너는 나보다 낫다.
33 그러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초목에 물을 주는 것과 같으니 지금 연소할 때에 힘쓰지 않을 수 있느냐?
34 진실로 이 시기를 잃으면 비록 후회한다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 있겠느냐?" 하고,
35 또 말하기를 "방벽 사치(放僻奢侈)는 모두 쾌심(快心)에서 연유한 것으로
36 임금이 착한 일을 하면 백성들이 칭송하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모두 비웃으니,
37 이른바 '종로 거리의 사람이 그 임금을 꾸짖는다.' 는 말이 그것이다.
38 '쾌(快)' 자 한 자가 너에게는 병통이니 경계하고 경계하라." 하였다.
39 또 말하기를 "임금이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하면 신민에게 베푸는 은혜가 시들해지는 것이니,
40 주(紂)의 신민들이 임금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것은 주색에 빠진 데 연유한 것이다.
41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모두 너를 위해서이다." 하였다.
42 ○ 25일에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별시재를 친히 살피며 화병(花餠)을 지져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43 이때 모두 3일만에 마쳤는데, 임금이 향군(鄕軍)의 위사(衛士) 가운데 최하급자들을 불러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물으니,
44 향군들은 각각 기사(騎士)의 군포(軍布)와 양정(良丁)을 황구(黃口)와 백골(白骨)에게 침징하는 폐단을 나아와 아뢰니,
45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묻고나서 또다시 방치하는 것은 곧 문구(文具)이다." 하고, 이에 폐단을 시정하는 정치에 유의하였다.
46 ○ 사신은 말한다. 임금은 비록 별시재를 관람하는 한가한 짬이라도,
47 역시 멀리 떨어진 민간의 어려운 사정에 마음이 불안하여 향군을 대궐 섬돌의 지척에 불러들여 조용히 순문하였다.
48 마침내 이로써 기사(騎士)의 규정을 고쳐 해서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을 없앴고,
49 또 양정의 군포 한 필을 감하여 팔도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도록 했으니,
50 시전에서 이른바 '영원히 잊을 수 없다.[沒世不忘]' 라고 한 것을 여기에서도 역시 볼 수 있다.
51 ○ 27일에 형조에서 상달하기를 "남부 살곶이동 존위 이민철의 보고에 의하면,
52 전춘수(全春守) 이계가 그의 적모(嫡母)를 때려 이마가 깨져 피를 흘리게 하는 강상에 관계되는 변고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53 이민철은 그 상황을 계의 형인 전은군 이돈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 의금부로 이송하여 처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54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55 임금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어미를 때리고 형으로서 아우의 죄를 입증한 것은 모두 강상을 범한 것이니 함께 엄히 다스리라." 하였다.
56 ○ (임금과 왕세자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이렇듯 뜻이 달라지게 되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왕세자가 임금의 뜻과 달리 하는 것은 영조에 연유한 것은 아니였을까.)
57 ○ 5월 23일에 임금이 환경전에 나아가서 동궁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58 유시하기를 "너에게 대리를 명한 것이 너의 일신을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59 나의 노고(勞苦)를 나누고자 함인데, 어찌하여 매사를 반드시 나에게 품의하는가?
60 좌상이 너의 사부인데 근자에 매사를 반드시 품의할 것으로 너에게 권유한다고 하니 이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61 대리를 한 뒤에 대신(大臣)의 도리는 나를 보면 규모를 세워 동궁에게 편안함을 주라고 권유하고,
62 너를 보면 표저(表著)한 정사를 행하여 대조(大朝)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라는 것으로 고한다면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63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너를 보면 반드시 대조께 품의하라고 이르고,
64 나를 보면 어찌해서 큰 일을 동궁에게 맡겨 주어 구속(拘束)하려 드냐고 하니,
65 이와 같이 한다면 너는 앞으로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66 내가 너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대신이 너를 구속하는 것이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20 ○ 5월 29일에 임금이 지금부터 세초 문서를 동궁에 들이라고 명하니, 승지 남태온이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므로,
2 옥당 서지수가 도로 거두기를 권유하자,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노하여 남태온, 서지수를 체직하고, 마침내 조회를 보지 않았다.
3 이 때에 임금이 횟배를 앓아 복약하던 중이었는데, 이것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내가 한나라 고조를 본받고자 한다." 하고,
4 다시 박선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엄한 하교를 내렸는데, 군부(君父)를 협박한다는 등의 하교가 있었다.
5 ○ 8월 15일에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의 누(樓)에 나아가 왕세자를 거느리고 사민(四民)에게 진휼을 시행하였다.
6 파리한 늙은이를 보면 부지(扶持)하여 오가게 하고
7 전대가 없는 것을 보면 빈 섬을 나누어 주게 하였으며,
8 떠돌이로 걸식하는 자를 보고 말하기를 "비록 사민(四民) 밖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나의 백성이다." 하고, 쌀을 주게 하였다.
9 이어 하교하기를 "나의 부덕(否德)으로 열조(列祖)의 부탁을 받고 임어(臨御)한 지 2기(二紀)가 되었는데,
10 한 가지 정사도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여 부탁을 저버리고 백성을 등졌으니, 먹는 것이 어찌 달며 잠을 잔들 어찌 편하겠느냐?
11 아! 창창(蒼蒼)한 하늘이 나에게 부탁한 것도 백성이요
12 척강(陟降)하시는 조종(祖宗)께서 나에게 의탁한 것도 또한 백성이다.
13 지금 초기(抄記)한 바를 보니 그 수효가 아주 많고, 문루에 나아가서 보니 마음에 더욱 긍측(矜惻)하다.
14 다섯 걸음 밖에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백성이 이와 같이 많은데도
15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어 오늘날 처음 보게 되니, 어찌 백성의 부모된 도리라고 하겠느냐?
16 저 창창한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임금이 되게 한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한 것이다.
17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민심(民心)의 향배(向背)는 오로지 이 백성을 구제하고 구제하지 못하는 데에 연유될 것인데,
18 백성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구제하지 아니하면 민심은 원망할 것이요 천명도 떠날 것이니,
19 비록 임금이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곧 독부(獨夫)일 뿐이다.
20 특별히 원량으로 하여금 시좌케 한 뜻은 항상 생각을 여기에 두어 나의 부덕함을 본뜨지 말고
21 중외의 곤궁한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성세(盛世)의 가운데로 모이게 하려는 것이니,
22 대소 신료들도 또한 한때의 의문(儀文)으로 나의 원량을 인도하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의 백성을 구제하라.
23 수령들에게 신칙하여 보민(保民)을 제일 먼저 할 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24 ○ 12월 10일에 우의정 김약로가 말하기를 "무뢰(無賴)한 유수(遊手)의 무리들이 향민(鄕民)으로 재물을 가지고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을 유인하여,
25 비록 채소나 닭이나 시초(柴草) 등의 작은 물건일지라도 모두 거간꾼으로 조종하여
26 스스로 팔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심지어는 중도(中都)의 아후(兒候), 임적(林賊)이라는 칭호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27 자세히 살피어 엄히 금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28 ○ 21일에 임금이 대신과 장신(將臣)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가 말하기를
29 "조령 밑의 7읍에서 세미(稅米)를 싣고 조령을 넘어 충주의 강창(江倉)에 납입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매우 큽니다. 돈으로 대신하여 납입하게 하소서.
30 그리고 노비의 윤삭포도 또한 감제(減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31 ○ 임금의 말이 군문(軍門)의 모재(耗財)에 미치자,
32 훈련 대장 김성응 등의 다투어 사대부의 출회(秫灰)와 약물(藥物)을 구하는 폐단을 말하니,
33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부형(父兄)의 병이 있어서 약이(藥餌)를 구하는 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34 이는 윤이(倫彛)에 관계되는 일이니, 차라리 군문의 재물을 잃더라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35 옛적에 선조께서 하교하시기를 '만약 푸른 큰 대나무를 주지 않으면 사대부가 어디서 죽력(竹瀝)을 얻겠는가?' 하셨다.
36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도 당재(唐材)를 내국(內局)에서 구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느냐?
37 군문(軍門)에는 없어도 되지만 이것은 그만두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38 ○ 사신은 말한다. 일국의 재부(財賦) 절반이 군문으로 들어가서 기계를 갖추고 군병(軍兵)을 기르는 것이다.
39 그런데 이를 관장하는 신하를 선택하지 않아서 소모되는 사단이 많은데도
40 일찍이 스스로 돌이켜 살피지 않고는 이에 출회와 약물 등의 작은 소비만을 가지고 망령되게 천청에 아뢰어
41 자신의 허물은 가리고 당시의 풍속만 박(薄)하게 만들려고 하였는데,
42 '군문에는 없어도 되지만 이것은 그만두게 할 수 없다.' 는 하교는 참으로 대성인의 규모라 하겠다.
43 ○ 임금이 병조 판서 김상로에게 이르기를 "최진해와 최수강에게 어찌하여 관직을 제수하지 않느냐?" 하니,
44 김상로가 사죄하기를 "우미(愚迷)하여 깨닫지 못했다가 지금 하교를 듣고는 비로소 크게 깨달아서 감읍(感泣)합니다." 하고,
45 드디어 무직(武職)을 제수하였다. 최(崔)는 곧 육상궁(영조의 어머니)의 본가(本家)이다.
21 ○ 영조 26년(1750) 1월 16일에 승지 남태온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이 새로 호남에서 왔습니다.
2 호남의 인심이 매우 교활하나 부세(賦稅)를 탕감해 준 뒤로는 백성들이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3 임금이 "백성이 나라의 명령에 잘 따르던가?" 하니,
4 남태온이 말하기를 "백성들도 나라에서 뜻한 바를 알기 때문에 영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고 위압하지 않아도 엄하게 여깁니다.
5 이번의 우금(牛禁)으로 말하더라도 백성들이 금령을 어기지 않아 죽지 않은 소가 거의 4, 5천 두는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6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인구의 증가는 성하던가?" 하니, "근래에 가장 성합니다." 하였다.
7 또 말하기를 "지난번 권학(勸學)을 하유하셨는데 매우 장려하는 효과가 없지 않았으니, 또한 8도에 똑같이 면려하는 방도로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 ○ 이에 사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도 풍속이 교사스러워 한번의 정사나 명령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닌데,
9 남태온이 영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고 위압하지 않아도 엄하게 여긴다고 말하였으니, 무슨 말을 그리도 쉽게 한단 말인가? 면대하여 속임에 가깝다고 하겠다.
10 임금이 인구의 번성에 대하여 물으면 의당 기근과 역질로 살아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아뢰어,
11 임금의 마음을 경성(警省)케 하여야 하건만, 그 반대로 말을 했으니 무슨 마음에서인가?"
12 ○ (조선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의심하고, 경상도는 권력을 위해 말을 하던 때였다.
13 특히 충청도는 끊임없이 공청도라 불리우며 질책을 받아야 했으니, 지역주의가 극심하였다.
14 이러한 풍습은 고려 초기에 시작되었는데, 백제의 견훤이 신라왕을 시해하고, 왕비를 욕보인 것으로
15 유학자들과 경상도에서 전라도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인심이 교활하다는 것이 대표적이였다.
16 고려에 나라를 바친 신라는 고려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세를 마음껏 부렸으나,
17 백제는 고려와 쉼없이 전쟁을 하였기에 고려에서 매우 의심하였다.
18 천년동안 전라도와 충청도는 고려와 조선에서 뜻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19 경상도에서는 역적의 도시라는 이름이 만세에 내려질 것을 두려워 하여 끊임없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여기에 있다.
20 이 풍습을 만든 자들이 신라계의 사람들인데, 신라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 왔을 때에 중국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21 이리하여 중국을 하늘처럼 떠 받들었다. 나아가 고려에 항복하고서도 고려의 외척이 되었으며, 권세를 유지하였고,
22 그 유학자들이 조선의 사대부가 되어, 자국의 백성을 중국 황제에게 바치면서, 중국을 높이고,
23 자국의 백성을 역적이라 하여 억압하고, 도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24 아, 이러한 풍습이 한국시대에 까지 이르렀으니, 통탄 할 일이다.
25 이 모든 책임은 고려왕실과 신라 그리고 조선 왕실과 사대부와 마지막으로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26 이제 그 후손들이 이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 이다.
27 당파싸움은 감히 보건데, 지역주의로 인하여 발생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것이 답답하다. 혹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으리라.
28 언제까지 역사에 갇혀 살 것인가? 역사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역사를 알고, 그속에 감쳐진 권세가들의 망상으로 부터 민생이 벗어나야 한다.
29 그리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속에 감쳐진 민(民)을 알아야 한다.)
30 ○ 4월 6일에 남원의 읍호를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남원이 역적 양찬규의 고을이라 하여 강등하여 일신 현감을 삼았는데,
31 이미 10년이 지났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32 ○ 7월 9일에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시임, 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 및 육조 당상, 양사 제신을 불러 두루 양역의 변통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33 임금이 말하기를 "구전(口錢)은 한 집안에서 거두는 것이니 주인과 노비의 명분이 문란하며,
34 결포(結布)는 이미 정해진 세율이 있으니 결코 더 부과하기가 어렵고,
35 호포(戶布)가 조금 나을 것 같아 1필을 감하고
36 호전(戶錢)을 걷기로 하였으나 마음은 매우 불쾌하다.
37 영상은 비록 경하게 걷는 것이 옳다고 하나 절목(節目)을 보면 이 역시 호구를 수괄(搜括)하는 것이다.
38 백성의 뜻을 알고 싶어서 재차 궐문에 임하였더니,
39 몇 사람의 유생이 '전하께서는 백성을 해친 일이 없는데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을 신은 실로 마음아프게 여깁니다.' 라고 말하고,
40 방민(坊民)들은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불평하고 있다고 말하니,
41 비록 강구(康衢,번화한 거리)에 노닌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42 군포(軍布)는 나라의 반쪽이 원망하고 호포는 일국이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민심은 진정을 시켜야지 선동을 해서는 안된다.
43 지금 내가 어탑에 앉지 않는 것은 마음에 겸연(歉然)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경 등은 알겠는가?
44 호포나 결포나 모두 구애되는 사단은 있기 마련이다.
45 이제는 1필은 감하는 정사로 온전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1필을 감한 대체를 경 등은 잘 강구하라." 하였다.
46 ○ 8월 27일에 왕세자빈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47 ○ 9월 30일, 이보다 앞서 임금이 거둥 때 두 도의 민폐를 생각하여 특별히 쌀 1천 석을 주었는데,
48 유복명이 아뢰기를 "이번의 역사는 모두 전부(田夫)로 하여금 길을 닦게 하였으니, 쌀을 줄 필요가 없으며, 비용을 아끼는 도리에서 환납(還納)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49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전부들이 길을 닦았다고 하지만 교량(橋梁)의 재목은 백성들에게서 나오지 않았느냐?" 하고,
50 7백 석을 본도에 신칙하여 도로와 교량을 닦은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22 ○ 영조 27년(1751) 2월 3일에 환관 김처선에게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김처선은 연산조 때의 사람이다.
2 누차 충간(忠諫)을 진달하였으므로 연산군이 그를 미워하여 호랑이의 굴에 던졌으나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자 이에 결박하여 살해하니, 그 충렬(忠烈)이 늠연(凛然)하였다.
3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충성한 이에 대하여 정문을 세워 주는 것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이니,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4 중관 김처선이 충간을 하다가 운명을 하였다는 것은 일찍이 지난날에 아주 익숙히 들었다.
5 그러므로 내부(內府)로 하여금 2백 년 뒤에 후사(後嗣)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뜻이 대개 깊다 할 것이다.
6 이러한 말세에 마땅히 포양(褒揚)하여 권면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정문을 세워 주게 하라." 하였다.
7 ○ 하교하기를 "연여(輦輿)에 금으로 그리는 것은 삽시간에 지워져버리니, 다만 겉치레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비용이 또한 심하다." 하였다.
8 ○ 10월 8일, 이날 임금이 궁문 밖에 사는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9 하교하기를 "명나라 사람 자손으로 태어난 자들을 효묘조에서 본궁의 동내에 살도록 하였다.
10 지금 그 곳을 지나면서 그 촌을 보고자 하니 포장(布帳)을 낮게 설치하여 바라보기에 편리하도록 하라." 하고,
11 또 하교하기를 "문(門)밖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명나라 조정의 유민이요, 성조께서 애휼(愛恤)하던 자들이니, 비풍(匪風)의 마음과 추모의 감회가 더욱 마음속에 간절하다.
12 선혜청으로 하여금 후(厚)하게 고휼하도록 하여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13 ○ 영조 28년(1752) 1월 16일, 습의할 때는 으레 사복(司僕)의 하전(下典) 가운데 어린아이를 임시 궁인 모습으로 꾸며 곡하면서 뒤따르게 했었는데,
14 임금이 매우 놀라서 드디어 없애라고 명하고 상례 수교에 기재하게 하였다.
15 ○ 2월 9일에 어사 이영복이 복명하여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역사에 관한 폐단은 없었습니다.
16 이번 여러 고을에 대해 하나의 물건이라도 민간에게서 거두어 들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도 민폐가 없었습니다." 하니,
17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가 포장(褒奬)하는 것만 있고 폄하(貶下)하는 것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18 이영복이 말하기를 "실제로 폄하할 만한 수령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19 ○ 3월 4일에 왕세손이 통명전에서 훙서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달 사이에 며느리를 잃고 손자를 잃었으니, 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랴?
20 세손이 지금 3월 초4일 묘시에 훙서하였다. 예조에서는 자세히 알아 두라." 하였다.
21 ○ 하교하기를 "비록 체모는 유지되어야 하나 마땅히 차등을 두어야 하고 또 몇 달 동안에 3도감을 연속 설치하여야 하니,
22 민폐도 돌보아야 하겠다. 모든 일에 내가 절약하여야 하겠지만 도감에서도 생략하기에 힘써 세 살된 나의 손자를 저버림이 없게 하라." 하였다.
23 ○ 26일에 판윤 박문수가 아뢰기를 "얼마 전에 묘소 근처의 보리를 익은 뒤에 베라고 하교하셨습니다.
24 이는 백성을 돌보시는 성스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외재실(外梓室)은 다음 달 초9일에 떠나야 하기 때문에
25 신이 자세히 살펴보고 추산해 보니 대가(代價)는 피곡 20여 석에 지나지 않겠습니다.
26 이 피곡은 호조에서 나누어 주게 하고 그대로 길을 닦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27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한창 자라고 있는 곡식을 짓밟지 말고 잘 베어다가 말을 먹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28 ○ 4월 17일, 이에 앞서 투서한 적(賊)을 오래도록 체포하지 못하자 엄히 신칙하여 기찰하라고 연달아 명하였는데,
29 이날 우포도 대장 장태소의 집 문 밖에 선비 옷을 입은 늙수그한 사람 하나가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두리번거리며 왔다갔다 하므로 행동이 의심스러웠는데
30 장태소의 종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끌어들여 이윽고 바지를 더듬어 보니 봉서(封書) 하나가 땅에 떨어졌는데 뜯어 보니, 그 속의 말 뜻이 전일의 투서와 같았었다.
31 그 사람에게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나는 바로 광평 대군의 후손인데, 가평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름은 이양제이다." 하였다.
32 장태소가 속여서 묻기를 "너는 전에도 우리 집에 투서하더니 또 투서하려 한 것은 무슨 의도이냐?" 하니,
33 이양제가 답하기를 "전에 투서한 곳은 포도 대장의 집이 아니라 정휘량의 집이었다." 하였다.
34 ○ 마침내 장태소가 청대하여 보고하니 바로 친국을 명하게 된 것이다.
35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신이 과연 사혐(私嫌)으로써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으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으나
36 이소의 아들이 땅에 엎드려 호소할 때에, 여선군이 잘못 주달하여 이소의 자손으로 하여금 보존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깊이 통분을 품어 왔으므로
37 투서 내용에 여선군까지 극악한 죄과로 몰려고 약연(躍然) 등의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38 신은 숭선군의 손자 이소와 이종간이 되므로 이소가 적소(謫所,유배지)에 있을 때에
39 신에게 서신을 보내서 자신이 죽은 뒤에 반장(返葬,고향으로 옮겨 장사를 지냄)해 줄 것과 계후(繼後,계통을 이음)를 세워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40 이소가 죽자 그 가족은 길에 떠돌게 되었고 이소의 처도 이미 죽었습니다.
41 이소의 서자는 이름이 이인명으로 나이 15세요, 둘째 이경명은 나이 13세인데, 이소의 양자는 신과는 혐의가 있어 서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42 심성희는 여천군의 가까운 인척이기 때문에 과연 그 자신이 죽어 애석하다고 썼는데 심(沈) 자를 잘못 윤(尹) 자로 썼습니다.
43 이번에 균역법을 실시한 뒤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기에 홍태(洪台)만 제거하면 혹 균역법이 중지될까 하여 쫓아내려고 쓴 것입니다." 하였다.
44 ○ 18일에 이양제의 아우 이경제와 이유제를 신문하였다. 진사 강행정을 신문했는데,
45 ○ 지의금부사 이천보가 말하기를 "강행정은 이름이 알려진 선비입니다.
46 초년에 다소 성취하였으나 북경에서 운명을 물어 보니, '좋게 마치지 못하겠다.' 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20년 동안 글만 읽었습니다.
47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동궁관(東宮官)에 가합한 사람이라고 신에게 말하는 자가 많았는데
48 이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사람을 알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49 임금이 말하기를 "그 취향이 이양제와 같더냐?" 하니,
50 포도 대장 장태소가 말하기를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비록 와서 유숙하기는 하여도 뜻은 통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51 강행정이 공초하기를 "신이 이양제와는 이성(異姓) 6촌간이지마는
52 한 번 그가 국청에 출입한 뒤로는 신의 집에 내왕하는 것을 반가와 하지 않으니 자칭 말을 조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53 금년 정월에 가평에서 올라와서 신의 집에서 유숙하기를 청하기에 허락하였더니 연달아 5, 6일을 머물면서 신의 집에서 유숙하고 밥은 다른 곳에서 먹었습니다.
54 또 신은 늦게 일어나는데 그는 새벽이면 나갔다가 어두워져서야 돌아오기 때문에
55 신이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처자가 굶주리고 있어서 환상곡을 얻거나 혹은 빚을 얻어서 구제하려고 한다.' 라고 답하고는
56 그가 친숙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57 ○ 2월 사이에 이양제가 와서 말하기를 '청계산에 명화적이 도처에서 호응하고,
58 마량(馬梁)의 수적(水賊)은 돛을 높이 달고 바다에까지 나가 소리 높혀 창도(倡導)하고 있으니 불일내에 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기에
59 신이 말하기를 '청계산은 서울과 아주 가까운 곳인데 만일 명화적이 있다면 어찌 모르겠으며,
60 마량에 수적이 있다면 감사나 병사가 틀림없이 장계를 올렸을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61 자네는 가위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23 ○ 초정을 신문하였는데, 초정은 이소의 비첩으로 이인명과 이경명의 어미되는 사람이다.
2 초정이 공초하기를 "신은 본래 숭선군의 방자 나인으로서 이소의 첩이 되었는데, 이양제는 이소의 6촌이기 때문에 신이 알게 되었습니다.
3 기미년(영조15년)에 소가 죽으니, 그의 처 박씨가 20년이나 소박받은 몸으로 와서,
4 신의 모자의 의복과 집물(什物), 전지(田地) 등을 모조리 빼앗고 신의 모자를 쫓아냈습니다.
5 신의 지아비가 살아 있을 때 어린 것들을 이양제에게 부탁하여 이양제가 항상 신의 세 아들을 데리고 가서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6 신이 과연 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평의 이양제 집에 가서 거접하였습니다.
7 신의 자식 하나가 죽은 뒤에 처음으로 이양제 집의 노복 한 사람을 박씨에게 보내서 장례 비용을 청하였더니, 주지도 않고 쫓아보냈습니다.
8 박씨가 들여세운 양자는 몇 촌간이나 되는지는 알지 못하나 과천에 사는 이홍서의 아들입니다.
9 이홍서는 박씨와는 인척이 되는 사이인데 이경제가 사이에 들어 지시하여 양자로 삼았습니다.
10 향옥은 처음에는 나인의 방자이었으나 나인이 죽은 뒤에는 궁에서 나와 궁인에게 술을 팔아 생계를 삼았는데, 그저께에도 소의 집에 왔었습니다.
11 신의 지아비에게는 첩이 또 하나 있었는데 곧 막례(莫禮)로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12 소가 죽은 뒤에 막례와 신은 한꺼번에 쫓겨났는데, 소의 처가 죽은 뒤에는 막례의 소생과 신의 아들이 함께 양자의 집에 있습니다.
13 병인년(영조22년)에 땅에 엎드려 호소했을 때에는 신의 아들에게 부직(付職)을 바라고 신이 과연 지휘하여 한 것이나 여선군이 아뢴 말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14 이양제에게 언찰(諺札)을 보낸 것은 다만 전토(田土)를 추심하는 일로 서찰을 왕래한 바가 있었으나, 공모하였다는 일에 있어서는 천만 애매합니다.
15 나라를 원망하는 말은 입에서 나온 일도 없는데 이양제가 지만(遲晩)하였다고 납공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는 과연 흉악합니다." 하였다.
16 ○ (이 일은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초정의 공초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다. 혹 그중에서 일반인이 깨닳지 못할 것이 있으니,
17 한국시대에 이르러, 땅에 엎드려 호소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억울한 청을 들어 줄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
18 한국시대에는 신(神)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신(神)에게 호소하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다.
19 그러나, 땅에 엎드려 권력자에게 호소하는 이는 없으니, 무슨 이유일까?
20 이에 대해 혹자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있는데 어찌 다른 이에게 엎드리겠는가? 하겠지만, 또 다른 이치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21 들어 주지 않는 신(神)에게 엎드리면서,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어찌하여 소원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사람이 어찌 하여 사람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없는 것인가?)
22 ○ 19일에 임금이 친국하여 이경을 신문하였는데 경은 이소의 양자이다.
23 이경이 공초하기를 "신은 이소와는 25촌이고 외가에서 키워 길렀는데 양모와는 척분이 있는 집입니다.
24 신의 양모가 제사를 받드는 일은 사체가 소중하니 천첩의 소생으로 적통을 이을 수 없다고 여기고 기어코 후사를 세우려 하였는데,
25 이경제가 사이에 들어 주선하여 신의 나이 16세에 출계하여 이소의 뒤를 이었습니다.
26 이양제는 '신의 양부가 살아 있을 때에 천첩 소생을 부탁하였다.' 라고 말하고
27 그들로 뒤를 이으려 하여 신의 양모와 척(隻)지었기 때문에 신과 5촌 숙질이지마는 원수와 같이 대하고 있었습니다.
28 이양제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양제에게 글을 배운 서제들도 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29 ○ 신의 양부가 살아 있을 때에 신의 양모를 소박하여 버리고 이경명의 어미만을 두고 집안 일을 전담시켰습니다.
30 신의 양부가 죽은 뒤에 신의 양모가 서모에게 집을 사 주고 또 보령에 있는 전토(田土)도 주어 한결같이 그의 말대로 하여 세간을 내 주었는데,
31 이양제는 이경명 형제를 가르친다고 칭탁하고 이경명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32 ○ 계해년(영조19년)에 이경명의 어미가 신문고를 치고 신의 파양을 청하니, 예조에 내렸으나 오랜동안 미결되었기 때문에
33 이양제가 식량과 잡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경명의 어미를 사주하여 보령의 전토를 다 팔도록 하고,
34 신의 양모에게 본 문권을 내달라고 청하였으나 신의 양모가 팔아서 써버릴가 걱정하여 내주지 않으니,
35 이양제가 또 날조하여 형조에 정소(呈訴)하였기 때문에 신의 양모가 결국 내주어 버렸습니다.
36 ○ 서모는 이로부터 발길을 끊고 신의 집에는 오지도 않았으며, 이어 집까지 팔고 이양제를 따라서 가평으로 가버렸습니다.
37 지난 섣달에 신의 양모가 죽은 뒤에 이경명의 모자가 올라와 전토와 노비를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38 제사를 받들 위토만이 남았기에 아직까지 나누어 주지 못하고 그대로 신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39 서모는 날마다 해괴한 일만 만들어 내고 불순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발악할 즈음에는
40 아무 해에 땅에 엎드려 호소한 일이 여선군의 저지(沮止)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41 '여선의 교악함이 심하다.'고 하기도 하고, '마음씀이 그와 같기 때문에 저렇게 잔패(殘敗)했다.' 고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42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자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이 마당에까지 들어왔으니, 나의 마음이 서글프다." 하였고,
43 그가 납공을 마치자 초립(草笠)을 내주고 사배(四拜)한 후에 나가라고 명하면서
44 하교하기를 "고한 바가 정직하니 이미 간섭된 일이 없다. 너는 바로 왕자의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특별히 놓아보낸다." 하니, 이경이 감읍하고 나갔다.
45 임금이 다시 불러 들여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요 구하기 쉬운 것은 전토다.'라고 하였다.
46 너의 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의 서제가 비록 불량하다 하더라도 너는 가장(家長)이 되어 어찌 검칙하고 통솔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47 이 뒤로는 함께 살면서 살림살이도 나누어 주어 동기간이 떠도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48 ○ (아, 이러한 일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다.)
49 ○ 이양제를 다시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신은 남을 악역으로 무함(誣陷)하여 이미 죽을 죄를 졌으니 죽임을 달게 받겠으나
50 초정이 무고한 바 나라에 대하여 흉패한 말을 했다는 점만은 천만 거짓입니다." 하였다.
51 ○ 초정과 이양제를 대질하니, 초정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겁간하지 않았느냐?
52 또 땅에 엎드려 호소하였을 때에도 저지(沮止)한 일로서 여선군을 음해하려고 이러이러 해놓고도 그의 계략이라고 핑계대겠다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53 너는 또 여선군 집의 묘소에 흉물을 묻으려 하다가 나의 만류를 받아 드디어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54 너는 또 투서할 때에 나더러 지으라 하면서 경임(景任)더러 쓰라고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55 경임은 이경제의 자(字)가 아니더냐?" 하니,
56 이양제가 처음에는 비록 승복하지 않았으나 마침내는 말이 모두 막혀 문득 '그랬다.' 하였고, 또 '경임과도 과연 상의하였다.' 고 말하였다.
57 ○ 이양제와 이경제를 대질시켰다. 이경제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언제 나와 상의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58 이양제가 말하기를 "이는 내 말이 아니다. 초정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너와 상의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59 나도 너와 상의하겠다고 답하고 바로 불에 태워버리라고 하였으며, 아까 초정과 대질하여 내가 말문이 막혔다." 하였다.
60 임금이 말하기를 "초정은 난초(亂招,죄인의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함) 를 면하지 못하겠다." 하고,
61 다시 초정을 신문하니, 그가 공초하기를 "신이 양자의 일로 감정을 품고 과연 무함하였습니다." 하였다.
24 ○ 막열과 덕이를 신문하였는데, 둘은 다 이소의 늙은 비녀이다. 공초에서 모두 초정의 요악스런 거조와 저주하고 기축(祈祝)한 일을 말하였다.
2 이인명을 형조에 이송하고, 이경명을 다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3 이경명에게 이양제가 전부터 점을 치는 실상을 묻고 점남(占男)의 집에서 그의 행장을 찾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4 우변 포도 대장 장태소가 말하기를 "그 점책과 점돈[占錢]을 가져오려고 점남의 집에 포교를 보냈더니
5 이기상이 석방된 뒤에 말하기를 '네 집이 우리 집 근처에 있지만 않았다면 내게 어찌 이번 일이 있었겠느냐?' 하고 그 집을 헐고 쫓아내버렸기 때문에 찾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6 임금이 소리를 높혀 말하기를 "나라의 은혜도 모르고 남의 살림집을 헐었으니 이는 남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고 문득 이 임금에게 불공(不恭)을 저지른 짓이다. 이인상을 잡아 오라." 하였다.
7 대사간 안집이 말하기를 "이는 국청의 죄인이 아니니 도사(都事)를 내보내는 것은 부당할 듯 합니다." 하니,
8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는 옳지 못하다. 도사에게 서둘러서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9 이인상이 들어오자, 하교하기를 "참작하여 처분을 내릴 때에 그 장임(將任)을 그대로 둔 것은 비록 우둔하다 하더라도 감동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인데,
10 열 대의 형장(刑杖)으로 인하여 분을 품어 어처구니 없고 망칙한 일을 만들었고 위에 대해서 불공을 저질렀으니, 그 죄가 가볍겠느냐?
11 그러나 법에 없는 법을 새로이 만들어 내고 싶지는 않으니, 비록 승복을 받아서 법을 바룰 수는 없다 하더라도
12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도리로 보더라도 예사롭게 처치하여서는 않되겠으므로
13 한 차례 형문를 가한 뒤에 기장현에 종신토록 정배하되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압송하라." 하고,
14 또 하교하기를 "이인상은 자신이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되어서 의당 중죄를 내리기를 청해야 하는데도
15 감히 죄를 감하기를 청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16 대사간 안집을 먼저 체차(遞差)하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17 ○ 또 하교하기를 "지금 대신(臺臣)의 일로 인하여 듣건대 정언 서명천이 물러가서 대명하고 있다 한다.
18 그 소청이 방자하고 무엄하니, 대각에 그대로 둘 수 없겠다. 먼저 그를 체차하고 탈고신의 죄율로 시행하라." 하였다.
19 ○ 22일에 이양제가 물고(物故)되었다.
20 ○ 23일에 이경제는 거제에 정배하며, 이유제는 곡성에 정배하고, 강행정은 영광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21 ○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인심이 교악하여 요사이 또 익명시가 있어 암암리에 비방하고 있건만,
22 서로 전파하고 심지어 지위가 높은 사람도 더러 웃으면서 전하여 말하는 자가 있다 합니다.
23 청컨대 익명서의 예대로 포도청으로 하여금 그 출처를 탐색하게 하소서." 하니,
24 임금이 말하기를 "또 익명시가 있단 말인가? 대신도 그 풍자 속에 들었는가?" 하였다.
25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그 뒤에 들으니
26 오로지 병판의 세 종형제(從兄弟)를 지목한 듯한 글귀의 수가 1백 귀가 넘고 조정 사대부도 많이 들었으며
27 그 말의 귀추는 벼슬을 얻지 못한 원한에서 연유한 듯 하였습니다." 하니,
28 임금이 말하기를 "필시 사대부의 자제가 한 짓일 것이다.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자,
29 승지 이이장이 말하기를 "일에는 경중이 있는데 일시의 경박한 일로서 포도청에서 비밀 수사를 한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30 옛날에도 시안(詩案)이 있었는데 불량한 무리들이야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뒤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31 임금이 말하기를 "진신(搢紳)의 습성이 과연 이렇더란 말이냐? 이는 내가 조정을 바루지 못한 소치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고,
32 이어 칙교(飭敎)를 내리기를 "지금 대신의 아뢴 바를 들은 즉,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시를 진신 사이에서도 혹은 보고 외우고 한다 하니,
33 이 어찌 ‘눈으로는 간사한 빛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본의이겠느냐?
34 이는 오로지 나의 박덕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제 내가 늙고 기운도 없어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오르지 않는데 이 말을 듣고는 마치 더운 술을 마신 것 같다.
35 박덕한 내가 인도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고 각자 마음을 바로 가지고 스스로를 수양하도록 하라." 하였다.
36 이이장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혼후(渾厚)하신데 사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37 그러나 임금의 말씀은 한 번 나오면 팔방에 반포되는 것인만큼 혹 조정의 존엄한 체통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38 야박한 일은 구태여 조정에 끌어올려 시끄럽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지하라 하였다.
39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말씀드린 것이 마침 해가 되었다면 한갓 죄가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40 그런데 또 이 하교를 정지하시니 이 불량한 무리들이 무엇에 꺼려하고 두려워 하겠습니까?" 하자,
41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연교(筵敎)를 써서 내리지는 않았으나 듣는 자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뺨을 맞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42 경박한 습성은 저절로 공론의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니, 이는 금령을 내려 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3 작년에 온천에 갔을 때에도 길가에 언서를 걸어 그 고을 수령을 훼방한 자가 있었으나 내가 가져다 보지도 않았었다." 하였다.
44 ○ 26일에 죄인 초정이 물고되었다. 막렬은 놓아 보내고, 안도행은 멀리 정배하며, 이성과 이보는 형조로 하여금 놓아 보내게 하고,
45 이경명, 이인명을 모두 섬에 정배하게 하며, 김덕해와 미처 체포하지 못한 죄인 김수일은 아울러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46 ○ 대체로 이 옥사는 극히 요사스러웠다. 일이 투서에서 발단하였는데
47 그 공초에 나온 바 저주와 흉물을 묻은 등의 정상과 나라를 원망하고 사람을 무함한 말들이 여러 죄인의 공초 중에서 모두 나왔었으나,
48 임금이 문목(問目) 이외의 발고(發告)는 모두 쓰지 말라 하였으며 옥사가 극비에 부쳐지고 문자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25 ○ 4월 26일에 영돈녕부사 조현명이 졸하였다. 조현명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기절(氣節)이 있어 옛날의 명석에 스스로를 견주고, 녹녹하게 남의 뒤나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2 등과하자 오래지 않아 춘방관이 되어 흉당들이 세제(世弟,영조)를 핍박함을 보고 보호론을 제창하여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았다.
3 무신년(영조4년)에 적(賊)이 일어나자 종군을 자청하여 군병이 중도에 이르렀는데 밤중에 갑자기 군중이 크게 놀라니,
4 조현명이 자객이 들어왔음을 의심하고 입고 있는 옷 자락을 잘라 가동(家憧)에게 주면서 '너는 이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내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말하라.' 하고
5 칼을 집고 원수(元帥)의 장막에 들어가서 적을 수색할 것을 큰 소리로 외쳤는데, 적이 과연 잡히자 군중이 비로소 변동이 없었다.
6 난이 평정되자 공신에 책훈되고 마침내 영상에까지 올랐다.
7 집안에 있을 때에는 청검(淸儉)하여 장원(墻垣)을 꾸미지 않았으며,
8 소주(疏奏)에는 개절(剴切) 질직(質直)하여 남이 하지 못할 말을 하였고,
9 전관(銓官)을 맡은 지 6년 동안에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부탁을 하지 못하였다.
10 다만 뽐내기를 좋아하고 들뜨기가 쉬워 더러는 남의 기만을 당하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홧김에 일을 저지르고서도 그 나쁜 짓을 따랐으니,
11 세상에서는 이 점을 흠으로 여기나 이것으로 그 어짊을 가리지는 못하였다.
12 ○ 9월 22일에 왕손(王孫)이 탄생하였다. (이분이 정조대왕이니, 조선의 3대 왕을 뽑으라면 세종대왕, 영조대왕, 정조대왕이다.)
13 내국(內局)의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축하했는데, '원손(元孫)'이라 일컫는 사람이 있었다.
14 임금이 말하기를 "'원(元)' 자는 곧 '장(長)' 자를 이르는 것이니, 정호(定號)하기 전에 어찌 원손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정호하기를 청하였다.
15 임금이 너무 빠르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기자, 여러 신하들이 다시 힘써 청하니,
16 임금이 하교하기를 "올해 안에 어찌 다시 왕손을 볼 줄 생각했으랴? 슬픔과 기쁨이 마음속에서 엇갈린다.
17 지금부터 이후로 국본(國本)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나, 경오년(영조26년) 과는 차이가 있으니,
18 이름을 지은 뒤에라야 이에 능히 국본을 공고히 하고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 빈궁에게서 탄생한 아들을 원손이라 정호하고, 고묘, 반교하는 등의 일을 7일이 지난 이후에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20 ○ 10월 14일에 왕세자가 홍진을 앓자, 약원에 명하여 숙직하도록 하였다.
21 이때 홍진이 두루 번져 서울이나 지방에 앓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22 ○ 23일에 왕세자빈이 홍진을 앓았고, 27일에 원손이 홍진을 앓았다.
23 ○ 29일에 정언 홍준해가 상서하기를 "이종성은 강퍅하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24 그런데 역얼과 폐족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으므로 음험하고 사특한 모의가 모두 그의 지휘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25 그를 탄핵한 흰 종이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금구 매복(金甌枚卜,새로 재상을 임명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26 그가 당돌하게 뛰어들어 갑자기 영의정으로 올라갔으니, 그전에는 영남의 해안으로 귀양보내려고 하였는데 뒤에는 임의로 태현(台鉉,삼공)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27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한 마디도 말한 사람이 없으니, 대각을 두어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는데,
28 하령하기를 "대조(大朝)께서 하교하신 것은 생각지 않고 협잡하는 마음을 부리려고 하였으니, 매우 무엄하다. 그의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29 ○ 임금이 극수재에 나아갔는데, 승사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영상은 무엇 때문에 나갔는가?" 하니,
30 승지 홍낙성이 "정언 홍준해의 상서 때문에 도성을 나간 것입니다." 하였다.
31 임금이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고, 홍낙성이 말하니, 임금이 "그의 글을 받아들여 올렸는가?" 하니,
32 홍낙성이 "영지(令旨)를 내려 도로 내주었습니다." 하였다.
33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이번에 어떻게 하교를 내렸던가? 참으로 조금이라도 신하의 의리가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34 원량이 어찌 이처럼 너무나 관대하게 처분하였단 말인가?
35 이와 같은 따위를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라가 나라 꼴이 안되고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36 홍준해를 대정현으로 귀양보내되, 즉시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37 ○ 교리 이양천의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그의 임금이 파당을 지은 사람들을 매우 미워하여
38 약도 복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때에 감히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길 가는 사람들도 알 것이다.
39 그는 홍준해와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40 같은 섬으로 귀양을 보내어 그와 같이 국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 모두 정의현으로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41 ○ 동궁에 승지가 입대하였을 때에 왕세자가 말하기를 "내가 대리한 지가 4년이 되었으나
42 성상의 마음을 우러러 본받지 못하여 약을 물리치시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나 역시 무슨 마음으로 약을 복용하겠는가?" 하였다.
43 ○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제조 원경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44 동궁이 스스로 인죄(引罪)하면서 성상께서 탕제를 드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시 환약을 복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게 무슨 모양이란 말입니까?" 하니,
45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홍준해와 이양천의 편을 들면서 임금은 돌아보지 않으며 징계와 토벌을 청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당을 비호하고 역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46 아! 원량은 바로 저군(儲君)으로서 지금 대리하고 있으니 사체가 중대하다.
47 그런데 조용히 조섭(調攝)해야 한다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이처럼 날뛰고 있으니,
48 그의 눈에 저군은 보이지 않고 다만 그의 당인들만 보이는 것이다.
49 지금 내가 비록 혼미하여 누워 있으나 태아(太阿,고대의 명검)가 손에 있다.
50 홍준해는 추자도로, 이양천은 흑산도로 귀양보내되, 모두 엄하게 위리 안치하라." 하였다.
51 ○ 11월 4일에 왕세자와 세자빈, 원손의 홍진이 나았다.
52 ○ 대사간 조재민, 지평 김굉이 청대하니, 임금이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리어 시종안(侍從案)의 그들의 이름에다 쪽지를 붙었다.
53 왕세자가 조재민은 해남에, 김굉은 거제로 귀양보내도록 하였다.
54 ○ 12월 15일에 양위하려는 뜻을 말하니, 16일에 왕세자와 신하들이 양위하려는 뜻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55 ○ 19일에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동궁이 창의궁으로 갈 때에 의장을 갖추지 않고 부어교에서 여(輿)를 물리치고 도보로 갔으니, 변에 대처하는 절차를 극진하게 하였습니다." 하자,
56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돈화문 밖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였으며,
57 경명문 밖에서는 장막을 모두 철거하고 추운 데에 앉아 음식을 들지 않고 연일 눈물을 흘리면서
58 경재들을 만날 때마다 선처할 수 있는 계책을 묻곤 하였습니다." 하니,
59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러하였는가, 동궁이 그랬단 말인가?" 하였다.
60 ○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61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시민과 공인(貢人)들을 불러 물어보아야 하겠다." 하니,
62 우의정 김상로가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뒷날에 불러 물어 보아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하자,
63 임금이 "뒷날까지 기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정부 육조, 한성부의 당상, 낭청과 오부의 관원은 모두 나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64 ○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공인과 시민을 불러 그들의 폐막을 물으니 공인과 시민들이 각각 그들이 종사하는 업종을 들어 대답하였다.
26 ○ 영조 29년(1753) 2월 26일에 호서 어사 채제공이 복명하였다.
2 임금이 하문하기를 "균역(均役)에 대해 과연 백성들의 원망이 없던가?" 하니,
3 채제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편하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하였다.
4 임금이 말하기를 "염세(鹽稅)에 대해서는 또한 어떠하던가?" 하니,
5 대답하기를 "민정(民情)이 또한 칭송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6 ○ 8월 30일에 도감 도제조 김상로 등이 청대하였다.
7 임금이 원역(園役)의 상황을 물으매, 김상로가 "공역(工役)이 거의 끝나 갑니다." 하였다.
8 임금이 "원역이 빨리 이루어진 것은 매우 독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매,
9 김상로가 "신들이 비록 빨리 하지 말게 하기는 하였으나, 공인(工人)들이 다 스스로 마음을 다하므로 공역이 쉽게 성취되었습니다." 하였다.
10 인하여 재실(齋室)의 기둥과 벽에 빗물이 새어 색이 변하고 더러워졌음을 아뢰고 고치기를 청하니,
11 임금이 "또 백성을 괴롭힐까 염려되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고쳐야 하겠는가?" 하였다.
12 ○ 10월 23일에 좌의정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들이 하교를 받고 영상(領相)에게 의논하였더니,
13 결전(結錢)은 법을 세운 처음에 변동할 수 없으니, 신포(身布)와 대동(大同)을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하고,
14 예조 판서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신포는 이미 한 필(匹)을 줄였으므로 이제 죄다 줄이는 것은 마땅치 않고
15 전세(田稅)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쉽사리 의논할 수 없으니 줄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뿐일 듯합니다.
16 또한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균역청을 설치한 처음에 수시로 견감(蠲減)하라는 영(令)이 있었거니와, 이제 이미 수년이 지났고 저축이 조금 넉넉하니,
17 비록 여러 도를 죄다 감면하지는 못하더라도 먼저 경기부터 비롯하면 백성에게 믿음을 보일 수 있고 백성도 또한 실혜(實惠)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18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내 뜻에 매우 맞는다." 하였다.
19 홍봉한이 말하기를 "결전을 견감하면 혜택과 믿음이 함께 서는데 경기의 결전은 2만 5천 민(緡)에 지나지 않으니,
20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어찌 이것을 아끼고 선정(善政)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21 신포는 결단코 죄다 줄일 수 없으나, 대동은 더욱 심한 고을을 가려서 몇 말을 적당히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22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넉넉하지 않겠는가?
23 만년에 백성을 돌보는 것이 차라리 지나친 데에 빠지는 것이 낫다마는, 다만 은혜가 다하면 느슨하여질 것인데, 어떻게 이어 가겠는가?" 하고,
24 경기의 결전을 견감하고 경기의 춘대동(春大同)을 더욱 심한 고을은 두 말을 줄이고 그 다음 고을은 한 말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25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백성이 실혜를 입을 뿐이 아니라,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26 균역 이후로 소민(小民)이 위의 뜻을 알지 못해서 혹 취렴(聚斂)이라고 지목하였으나,
27 이제부터는 거의 백성을 위하는 뜻이라는 것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28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잠저에서 나왔고 임어한 지 세월이 오랬으므로 민간의 이해(利害)를 자못 안다마는,
29 원량과 같은 경우에는 깊은 궁 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어떻게 알겠는가? 경들은 차대할 때에 이 일을 상세히 전달해야 한다." 하였다.
30 ○ 영조 30년(1754) 8월 18일에 이날 임금이 근심하여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능에 배알하고 돌아온 뒤에 한 꿈을 꾸었다.
31 한편 사람이 한편 사람을 거의 다 죽였는데, 소론 집의 한 부인이 울며 호소하기를 '어찌하여 이토록 심합니까?' 하므로,
32 내가 유시하기를 '지금의 당습(黨習)은 거의 태교(胎敎)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노론, 소론의 조선이 아니고 바로 내 조선이니, 내가 양편을 처분하겠다.' 하고, 정신이 몽롱하여 깨니 꿈이었다.
33 내가 평생에 죄없는 세 사람을 죽였는데, 하나는 조관석이고, 하나는 이기상이고, 하나는 왕자를 욕한 사람이다. 이태(李泰)에 이르러서는 죽여도 아까운 자가 아니다." 하였다.
34 ○ 8월 20일에 임금이 춘당대에 친림하여 시사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 등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전일의 꿈을 이야기하였는데,
35 도승지 이익보가 갑자기 말하기를 "사물이 오면 순응[物來順應]……." 하고, 미처 말을 마치지 아니하니,
36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눈물을 머금고 하교하는데, 감동할 줄 모르고 감히 넉 자로 앙대(仰對)하니, 사물이 거슬러 오면 또한 거슬러 응할 것인가?" 하고,
37 곧 귀양보내되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라고 명하였다.
38 총관 민백상을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이 뒤로 당론을 하면 내가 내쳐서 서인을 만들겠다." 하였다.
39 ○ 8월 29일에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40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근일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저하께서 두려워하실 부분입니다.
41 전 필선 박성원이 진계한 지 얼마 안되어 한 번 패초를 어기고서 곧 파면되었으니, 이것은 저하께서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시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42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이어서 권면을 진달하니, 왕세자가 가납(嘉納)하였다.
43 ○ 영조 31년(1755) 2월 8일에 임금이 또 명정전에 나아가 기내 백성으로 성(城)에 들어온 자를 불러다가
44 칠릉(七陵)의 비(碑)를 세우는 역사 및 능에 거둥하는 모든 일들이 민간에 폐단을 끼치지 않을 수 있느냐고 친히 하문하자,
45 모두들 폐단이 없다는 것으로 대답을 하니, 임금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으로 책망하며
46 말하기를 "내가 당장 어사를 보낼 터이니, 만약 폐단을 끼친다는 말이 들어온다면 너희 무리는 엄중하게 다스릴 것이다." 하고,
47 이어 필선 이기덕에게 명하여 경기 지역을 암행하여 염탐하며 살펴 오도록 하였다.
48 ○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에 조정에서는 오로지 잘 보이고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기 때문에,
49 무릇 백성을 불러다가 폐단을 하문하는 즈음에도 밖으로는 경기 감영, 안으로는 한성부에서 틀림없이 임금이 기쁘게 들을 말을 미리 백성들에게 가르쳤으니,
50 백성들이 어떻게 진실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것도 임금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
51 대체로 홍수와 가뭄, 그리고 도적과 기근으로 병들어 괴로워하는 말을 일체 듣기를 싫어 했었기 때문에
52 신민(臣民)이 서로 본받아 상하가 서로 속이니, 이것이 어찌 주민들이 즐겁게 여기며 그렇게 하였겠는가?
53 그리고 어사인 자가 폐단을 몰래 살피기는 하지만 지금 백성들에게 대면하여 타이르며 또 응당 중벌이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돌려가며 서로 전달하고 알릴 터인데,
54 누가 기꺼이 사실대로 어사에게 말을 하겠으며 어사 또한 누구를 따라 그 자취를 감추겠는가? 거듭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55 ○ (사신의 말은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을 속이기 위해서는 모든 조정과 궁궐 밖의 왕실까지 모두 왕을 속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56 그러나, 이 때에 각종 흉서가 여기 저기 나붙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또한 사신의 말이 옳을 가능성도 있다.
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백성들을 직접 만나고, 폐단 등을 묻는 행동은 틀림없이 깨닳아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27 ○ 영조 31년 2월 20일에 임금이 윤지를 친국하며 신문하기를 "너는 역적 윤취상의 아들로
2 오히려 이 세상에서 먹고 숨쉬도록 용납한 것도 이미 관대한 은전인데,
3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흉서를 망화루에 걸어 둔 음흉하고 참담한 정절은 남김없이 탄로가 났으니
4 반드시 주무(綢繆)한 자가 있은 연후에 이를 하였을 터이며,
5 더구나 너의 서롱(書籠)을 임국훈에게 전하여 간직하게 한 것을 임국훈이 현납하였음을 너의 집 종이 또한 벌써 모두 고발하였다." 하였다.
6 윤지가 공초하기를 "이효식이 신이 '간신(奸臣)' 이란 두 글자를 쓰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7 나주의 관리가 많은 포흠(逋欠)을 부담하여 이렇게 사형당하는 가운데서 살아날 계책으로 삼아 신에게 미루고 핑계대니 어찌 흉칙하지 않겠습니까?
8 그리고 신의 집안 종이 고발한 것은 공갈과 협박으로 이루어진 데에 불과하니, 어찌 종으로써 주인을 증거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9 ○ 기언표, 이효식, 임천대, 윤지의 종 개봉, 임국훈, 윤지의 아들 윤광철 등을 신문하니, 모두 윤지에게 불리한 내용이였다.
10 ○ 21일에 임금이 친국하였다. 이하징을 형신하기를 "윤취상 부자의 죄상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네가 무슨 마음으로 함께 감싸며 친밀하게 지냈는가?" 하자,
11 이하징이 공초하기를 "윤취상이 역모를 한 것은 신이 정말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12 그렇지만 그 아비가 비록 역모를 했다 하나 그 자식 또한 어떻게 역모를 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13 ○ 임천대를 형신하니, 임천대가 공초하기를 "신이 윤지와 계(稧)를 함께 하였는데 22일 밤에 윤지가 신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
14 말하기를 '내가 훈련 대장의 아들로 2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있으면서 석방되지 못하고 있으니,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15 그래서 흉서를 걸어 인심을 동요시키려고 하는데, 인심이 동요된 연후라야 바야흐로 뜻한 바를 할 수 있겠다.' 고 하였습니다.
16 ○ 당초에 윤지가 김항 형제와 임국훈 부자, 이제춘, 나귀영, 기언표, 오시대 부자, 이종무, 이효식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의하였으며,
17 작년 6월 계회(稧會) 뒤에 신이 밤에 윤지를 찾아갔더니, 윤지가 말하기를 '이곳의 양반이나 상한(常漢) 할 것 없이 모두 내가 오래도록 귀양살이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일을 함께 하려고 한다.
18 내가 대궐을 침범하려고 한다면 너 또한 기꺼이 마음을 같이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19 신이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진다면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20 ○ 역적 이하징이 복주되었다. 이하징을 형신하니, 이하징이 공초하기를 "신이 갑진년(영조 즉위년) 3년 전에 윤성시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는데, 혼인을 맺은 3년 뒤에 윤성시가 화를 당하였습니다만,
21 신은 김일경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말할 만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22 ○ 25일에 역적 윤지가 물고되었고, 29일에 죄인 임징원이 물고되었다.
23 ○ 하교하기를 "이번의 죄수들이 형신을 받은 것이 수삼차에 불과한데 차례로 물고되었으니 참으로 의심스럽고 괴이한데도
24 한결같이 전례를 따라 검험(檢驗)하였으니, 한성부의 해당 낭청을 잡아다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25 ○ 3월 4일에 정언 송문재가 진달하기를 "역적을 수좌(收坐)하는 삼척법(三尺法)이 매우 엄중하여 결단코 때에 따라 낮추거나 올릴 수 없습니다.
26 그런데 당연히 연좌된 자도 범인과 같은 형벌에 처해야 하는데 사형을 감하라는 명이 있으셨으니,
27 이것이 비록 대조(大朝)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어진 마음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28 흉얼이 제거되지 않으면 화란의 근원이 되기에 적합하며 왕장(王章)이 한번 굽혀지면 실제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29 청컨대 유봉휘, 조태구, 윤취상, 이진유, 이사상, 이명의, 정해, 윤성시, 서종하 등에게 노륙(孥戮)하는 법을 빨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30 ○ 7일에 지평 유사흠, 정언 송문재가 아뢰기를 "여러 역적들을 추토(追討)하고 처자를 연좌시키는 일을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1 ○ 죄인 나침이, 12일에 죄인 이만강이, 13일에 죄인 윤희철과 이수경이 물고되었다.
32 ○ 16일에 김두행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김두행이 거짓으로 어사라고 일컫다가 호남에서 체포되었는데,
33 역적 윤지가 흉서를 내다 건 사건을 대략 고하더니 잡혀와서 국문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언어와 용모가 교활하고 악독했으므로
34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부대시(不待時)로 정법(正法)하도록 명하였다.
35 ○ 21일에 임국훈, 김주천, 박혁초, 이정하 등이 복주되었다.
36 김주천은 바로 윤상백이 끌어들인 바이고,
37 박혁초는 호남의 술사로 역적 윤지와 교결하여 흉언을 수작하였으며,
38 이정하는 윤광철의 가까운 친구로 사람을 모아 계(稧)를 만들어 어지럽게 모의를 함께하였으므로 여러 번 형신을 가하였는데,
39 이때에 이르러 모두 실정을 알고서도 고하지 않은 것으로 지만(遲晩)하여 정형(正刑)하였다.
40 ○ 23일에 박태신을 형신하고, 이어서 효시(梟示)하도록 명하였다.
41 ○ 26일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역적 이염의 아들 이만인을 전라도 순창군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는데, 의금부의 아룀을 따른 것이었다.
42 ○ 4월 5일에 박찬신의 조카 박태정이 붙잡혀 오다가 철원 땅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43 ○ 5월 1일에 판부사 이종성이 왕세자에게 아뢰기를 "대조께서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하교하시기를,
44 '내가 아이 때에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죽였더니, 늙은 궁인이 보고 경계하기를,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까닭 없이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45 내가 이에 감동하여 항상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먹었는데, 하늘이 돌보시어 이런 원량(元良)을 낳았다.'라고 하시어 신은 실로 이 하교를 흠앙하였습니다.
46 방금 새로 큰 옥사를 겪어 뒷수습을 잘하기가 어려우니,
47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으시어 끝없는 아름다움을 도모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가납(嘉納)하였다.
48 ○ 5월 18일에 죄인 김요덕이 물고되었는데, 김요덕은 김일경의 종손이다.
49 김일경의 종자 김유제, 김인제, 김덕제, 김홍제, 김대재, 김우해와 종손 김천주, 김요백, 김요채, 김요옥, 김요덕 등은 심정연의 초사 때문에 모두 국문을 받았는데,
50 김인제는 정형(正刑)되었고, 김요백, 김요채는 역적 윤혜와 함께 효시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장(杖)을 맞다 죽었다.
51 ○ 6월 4일에 대사간 유언민, 집의 서명응이 연명하여 역적 밀풍군 이탄을 노륙(孥戮)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52 ○ 8월 1일에 임금이 명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혹 금문, 성문과 길거리에 익명서가 있거든 처음 보는 자가 즉시 불 속에 넣으라." 하였는데,
53 대개 난역을 겨우 잘라서 인심이 조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상이 염려하여 반측(反測)하는 자들을 진정시킴이 이와 같았다.
54 ○ 5일에 임금이 경기 감사 및 차원(差員)과 수령을 소견하고 백성들의 폐단과 농사 형편을 물었으나 끝내 명백하게 가리켜 진달한 바가 없고
55 대답한 바는 단지 역참(驛站), 부병(府兵)의 잗단 폐단뿐이었다.
56 ○ 12월 26일에 비변사에서 상달하기를 "도성 안의 거지들을 각부에서 진휼청으로 잘 보내지 않아 도문 밖에 주검이 즐비하여 자그마치 1백여 인에 달합니다.
57 경조의 낭청 및 해당 부관을 아울러 나처(拏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58 ○ 28일에 교리 조엄이, 비국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걸인이 굶주려 죽은 일을 아뢰니,
59 임금이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도성 문 밖은 백성들이 사는 곳인데, 굶어 죽은 주검이 이러함은 곧 나의 허물이다.
60 경조의 낭청과 부관은 죄가 없으니 아울러 석방하고,
61 곧 매장할 것이며, 부관으로 하여금 여제(厲祭)를 베풀어 넋을 위로하고 그 족속을 돌보도록 하라." 하고,
62 이어 상진곡을 제주에 보내어 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63 ○ (이 해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자가 5백여명이였고, 훗날에 아들, 왕세자를 죽게 한 것이 영조의 단점이였으나, 백성을 사랑하고, 실천하여, 이 단점을 극복하였다.
64 아. 영조가 사람 살리기를 좋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가? 한국시대에 이렇듯 말과 행동이 다른 지도자들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다.
65 한국시대에 각각의 당파와 정부 조직에서 자신들은 살리기를 좋아하지, 법을 위반하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자가 바로 거짓된 자이니, 마치 영조에게 거짓을 알려 눈과 귀를 가리는 자와 같다.)
28 ○ 영조 32년(1756) 3월 18일에 진휼청에서, 오부의 뽑아 보고한 기민(飢民) 남녀 장정 노약자 5천 4백 50명에게
2 오늘부터 시작하여 닷새에 한 차례씩 건량(乾粮)을 나누어 주겠다는 뜻으로 임금께 아뢰었다.
3 ○ 4월 24일에 영성군 박문수가 졸하였다. 한국시대에 어사 박문수로 유명하였다.
4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 호조 양부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5 그러나 연석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농담)를 하여 거칠고 조잡(粗雜)한 병통이 있었다.
6 또 이광좌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持論)이 시종 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
7 ○ 8월 21일에 임금이 예조 당상을 불러 민사(民事)에 대해 물었다.
8 임금이 연로(沿路)의 농사형편에 대해 물으니, 예조 참판 김한철이 여주, 이천에 전에 없던 풍년이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9 대신 이하도 역시 '여러 도가 흉년을 면했다.' 는 뜻을 우러러 상달하고 '연흉(年凶)' 두 글자는 일체 연석에서 숨기었다.
10 그리하여 홀로 지존(至尊)만 근심하게 하고 묘당의 신하는 성실한 마음으로 나라는 걱정하는 자가 없으며,
11 봉사(奉使)하는 신하는 재이(災異)를 돌아와 아뢰지 아니하고 오로지 아첨하는 말만 했던 것이니, 한때의 풍습을 알 만하였다.
12 ○ 12월 28일에 죄수의 국문이 끝나자 흉장(凶杖) 등 여러 기구들을 불태워 버리라고 명하였으니, 다시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13 ○ 영조 33년(1757) 1월 19일에 정언 박규수가 상서하기를 "신이 지난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14 호좌(湖左)에서 일정한 주거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두 자녀를 데리고 다녔는데
15 남편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우리 식구가 끝내 살아갈 길이 없고 굶주림과 추위만 절박하니, 차라리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만 못하다.' 하고,
16 먼저 그 자녀의 목을 매고 잇달아 그의 처의 목을 매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매어 4구의 시체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17 듣고서 놀랍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여 지나는 길에 도신을 보고 말이 이 문제에 언급되었는데,
18 도신 역시 이미 이 사실을 듣고 조사하여 보았더니, 정말로 그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9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길에는 굶주려 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고, 떠돌며 빌어먹는 사람이 거리에 가득하여
20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를 끌면서 울부짖으며 추위에 얼어서 죽으려는 모습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21 고향에 이르러 보니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을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전부 빈 곳도 여기 저기 있었으니,
22 인가[人烟]가 적막하여 정경이 쓸쓸하고 참혹하였습니다.
23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데, 국가의 근본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으며 어찌 두렵고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24 청컨대 특별히 은지(恩旨)를 내리고 도신에게 별도로 유시하여 각 고을에 신칙하게 함으로써 무마하여 안집(安集)하게 하되,
25 지성으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제1의 의무로 삼도록 하고,
26 방편을 잘 마련하여 빠짐없이 징렴(徵斂)하는 것을 제2의 의무로 삼게 하소서.
27 따라서 지나치게 참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백성이 유리하며 흩어지게 한 자는 일체 대죄(大罪)를 삼도록 하고,
28 옛날의 포흠(逋欠)으로 징수할 데가 없는 것은 즉시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고,
29 이징(里徵)이나 족징(族徵)의 폐단을 엄중히 금지시키게 하고,
30 가난한 백성으로 의지할 데 없어서 바치기 어려운 자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도록 허락하되,
31 추쇄(推刷)하는 정치를 시행하지 말도록 해서
32 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조정의 덕의(德意)가 오로지 회유하고 보호하는데 있고 징렴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하니,
33 왕세자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34 ○ 2월 5일에 시기가 지나도록 혼취(婚娶)하지 못한 자에게 진휼청에서 쌀과 돈을 지급하여 혼인하게 하되,
35 남자는 30세로 한정하고 여자는 23세로 한정하여 혼인하기를 기다린 뒤에 부관(部官)이 진휼청에 보고해서
36 거짓이든 사실이든 서로 혜택을 받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37 ○ 14일에 중궁이 피를 토하고, 다음 날 중궁전 서씨가 승하하였다.
38 ○ 3월 26일에 대왕 대비전 김씨(인원왕후)가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하였다. 이 당은 당초에 이름이 없었는데, 임금이 영모당으로 이름을 붙여 효도하는 마음을 간직했다.
39 ○ 6월 2일에 제주의 백성 40인이 산릉의 역사에 나아가기를 자원(自願)하여 올라왔으므로,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소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40 그 중에 표고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하문하기를 "무엇 때문에 가지고 와서 바치는 것인가?" 하자,
41 대답하기를 "일찍이 권민가(勸民歌)를 보니 미나리를 바친 자가 있었으므로, 신 또한 이런 뜻입니다.
42 신 등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가운데 살면서 자주 흉년을 만났지만, 굶어 죽는데 이르지 않았던 것은
43 진실로 우리 성상께서 곡식을 옮겨 구휼하신 은혜에 말미암았으니, 신 등이 비록 지식은 없으나 어찌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마저 없겠습니까?" 하니,
44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백성들에게 한 가지도 은혜가 미치도록 한 것이 없으므로, 진실로 너희가 바치는 것을 받을 의리가 없다.
45 그러나 너희들의 정성은 실제로 선조의 은덕에 감격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바친 것으로 빈전(殯殿)에 올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46 임금이 제주의 사노(寺奴) 유만길과 김원행은 바로 경자년(경종 즉위년) 인산(因山) 때에 부역한 자인데,
47 또 부역하려 왔음을 듣고 매우 가상하게 여겨 그의 아들과 손자를 모두 영원히 천인(賤人)을 면하도록 허락하였다.
48 ○ 12월 28일에 임금이 원손(元孫,정조)에게 시좌(侍坐)하여 동몽선습을 외우라고 명하였다. 이 때 원손의 나이 5세였다.
49 원손은 거지(擧止)가 단정하고 외는 소리가 크며 우렁차니, 우러러보는 사람이 얼굴빛을 바로잡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9 ○ 영조 34년(1758) 5월 18일에 명하여 어사 이경옥을 황해도에 보내어 요녀(妖女)를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2 이때 황해도 금천, 평산, 신계에 요녀 네 명이 있어, 스스로 생불(生佛)이라고 일컬으면서
3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자, 사람들이 모두 무당을 배척하고 이를 몹시 지나치게 믿어서,
4 무녀의 기용(器用)을 헐값으로 주전소에 팔아 치운 것이 거의 만냥의 재물에 이르렀고,
5 요녀의 한마디 말이 능히 일도(一道)로 하여금 쏠리게 하였으니, 그 선동에 현혹됨을 알 만하였다.
6 ○ 10월 19일에 교리 정광한 등이 상서하기를 "아! 옛날 사람들은 언로(言路)를 혈맥(血脉)에다 비유하였는데,
7 사람에게서 혈맥이 막히면 죽을 것이고, 나라로서는 언로(言路)가 막히면 위험해질 것입니다.
8 근일에 공거(公車,상소)의 글장에서 정사를 언급하지 아니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9 어찌 조정의 정치에 실정(失政,잘못된 정치)이 없어서 그리하겠습니까?
10 특별히 크게는 골경(骨鯁,모든 말을 꺼리지 않고 함)의 기풍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11 작게는 위피(骫骳,문장이 해독하기 어려움)의 수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서로가 따라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구차스레 세월이 지나가기를 바라므로,
13 비록 비상한 재앙이 이르더라도, 말을 하지 않는 뭇 신하들도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14 그러나 만약 저하께서 이들을 수용하려는 도량과 은혜를 널리 베푸는 실상이 족히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그들이 와서 간(諫)한다면,
15 또한 어찌 온 세상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겠습니까?
16 이것도 또한 저하께서 스스로 반성하고 처리하실 바입니다." 하니,
17 왕세자가 답하기를 "어찌 명심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18 ○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서로의 잘못을 탄핵하지 않는 폐단이 있었다.)
19 ○ 12월 25일에 임금이 춘방에 명하여 훈서(訓書)를 모두 모으게 한 것은 대개 원손에게 도움이 있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20 영조 35년(1759) 1월 22일에 대사간 홍종해가 상서하기를 "정성은 비록 어진 이를 좋아하기에 돈독히 한다 하더라도 많은 선비가 모여드는 아름다움이 없고,
21 강(講)은 한갓 서적을 열람하는 데 부지런히 하더라도 날로 새로워지는 도움은 없었으며,
22 언로(言路)가 오래토록 막혀 당론(讜論)이 총청(聰聽)에 상달되지 못하였고
23 관방(官方)이 무겁지 않아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에 많이 채워졌습니다.
24 수령의 어진 치적(治績)은 들을 수 없어 부옥(蔀屋)의 원망이 많이 쌓였고,
25 염퇴(恬退)하는 풍조가 장려되지 않아 진신(搢紳)들의 조경(躁競)이 날로 더해지며,
26 사유(四維,예의염치)가 펴지지 않아 염치(廉恥)가 모두 없어졌고,
27 백관이 태만하여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하니,
28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중이었는데 면계하는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9 ○ 3월 3일에 집의 박성원이 말하기를 "재앙을 늦추는 방도는 성궁(聖躬)을 수성(修省)하고
30 언로(言路)를 널리 여는 것만 같음이 없으니, 이렇게 한 연후에야 그 궐실(闕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31 돌아보건대 지금 당차(堂箚) 이외에 대간의 차자도 들어오지 아니한 지가 오래되었고,
32 진소(陳疏)의 길도 아울러 막혔으니 뭇 신하가 비록 말을 올리고 충성을 바치고자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33 먼저 진소의 길을 열으시고 이어 구언(求言)의 하교를 내리시어 하늘이 소재(消災)하는 방도에 응하게 하소서.
34 신이 이미 언로를 여는 것으로써 앙진(仰陳)하였는데, 언로가 열리는 것은 말하는 자를 넉넉하게 용납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35 이형규가 상신(相臣)을 탄박(彈駁)한 것은 과연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 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36 그러나 대간이 대신을 논핵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절해(絶海)에 투비(投畀)되는 율을 베푸는 것은 이미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에 모자라는 것입니다.
37 더구나 지금은 새로이 대사령을 겪어 전후로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자들이 모두 용서를 입었으니
38 곧바로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으므로 감히 상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39 임금이 둘러대어 말을 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40 ○ 영조 36년(1760) 8월 22일에 임금이 북한산에 성(城)을 쌓는 것이 적당한지 아니한지를 물었고, 북한산 소남문 산길을 닦기를 명하였다.
41 연융대 백성을 불러 보고 폐막을 물으니, 백성이 '세력가의 사나운 노예가 훈조가(燻造價,댓가)를 주지 아니하고 정채(情債)를 강제로 받는다.' 우러러 대답하니,
42 임금이 범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신칙하여 그 가장(家長)은 도년(徒年)의 율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43 전 병조 판서 이창수, 한성 판윤 홍계희, 전 판의금 홍상한, 전 장령 이홍직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44 대저 백성이 고하기를 '거둥할 때 하례(下隷)들이 대가(大駕)를 인도한다고 핑계대면서 함부로 정채를 거두었다.'고 한 때문이다.
45 북한산의 부로(父老) 네 사람에게 미포(米布)를 내려 주기를 명하였는데, 숙종 38년 거둥 때에 공경히 맞이한 자이기 때문이다.
46 ○ 10월 3일에 임금이 영은문에 이르자 한 사람이 길가에서 절하며 곡하는 자가 있어, 사람을 시켜 그 이름을 물으니 김유선이었다.
47 포장 구선복이 말하기를 "본시 광역(狂易)한 사람인데, 초사 가운데 '전하의 명성(明聖)하심으로써 간(諫)함을 용납하지 못하신다.' 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48 임금이 처음에는 깊이 핵실(覈實)할 뜻이 있었는데, 구선복이 '광역은 족히 취하여 믿을 것이 못된다.' 는 말로써 아룀으로 인하여
49 임금의 뜻이 조금 풀어져서 해남현에 연한(年限)을 정하지 말고 정배하기를 명하였다.
50 고훤 도사를 파면하고 서리(書吏)는 해조로 하여금 장 1백을 쳐서 놓아 보내게 하였다.
51 대저 김유선은 호조리의 아들인데 조정 신하가 감히 진언하지 못함을 분통히 여겨 길가에 곡하여 호소함이 있었는데, 실상은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52 ○ 11월 6일에 종가(鍾街,종로)의 거지 아이를 죽을 먹이고 안접(安接)하게 하였다.
53 ○ (거지들에게 죽을 먹이고, 구휼하는 것은 매우 좋았으나, 이들이 스스로 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54 그러나, 비록 일자리가 없거나, 그들 스스로가 원하지 않았거나, 조종과 임금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여, 그대로 굶어 죽도록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니, 참된 군주라 할 수 있다.)
55 ○ 19일에 임금이 특명으로 고원군 열녀인 전덕수의 아내 윤소사를 정려(旌閭)하고 중[僧] 간상을 율에 의하여 처단하였다.
56 애초에 고원군 상발산사(社) 쌍산리의 양녀 윤소사가 시집가서 전덕수의 후처가 되었는데,
57 밭 머리에 막(幕)을 짓고 외를 팔아서 호구(糊口)하였다.
58 이해 9월에 양천사의 중 간상이 마침 전덕수가 출타한 때를 당하여 방에 들어와서 끌어안고 겁간하려고 하자
59 윤소사가 칼을 가지고 혈전하다가 간상이 방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윤 소사가 그 옷자락을 잡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그 지아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60 이에 간상이 낫으로 그 손과 팔과 가슴을 마구 찔러서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는데
61 임금이 말하기를 "윤소사의 정렬(貞烈)은 나도 모르게 늠연(凛然)해진다.
62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입절(立節)한 곳에 비석을 세워 정표(旌表)하게 하고 본군으로 하여금 특별히 제사를 지내어 넋을 위로하게 하라." 하였다.
30 ○ 영조 37년(1761) 1월 3일에 임금이 완악한 백성을 추문하며 다스릴 무렵에
2 그의 부모와 형제 및 정처(正妻)를 잡아다 가두는 것은 인륜에 어긋남이 있다는 것으로 금지하게 하였으며,
3 그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대관이나 종척(宗戚)을 논하지 말고 제서 유위율을 시행하게 하고,
4 그 예속(隷屬)은 추조(秋曹)로 하여금 장류(杖流)하도록 하였다.
5 그리고 이목(耳目)의 관원은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아 다스리되 잘못하는 자는 비국으로 하여금 같은 율을 시행하도록 청하게 하였다.
6 ○ 8월 4일, 이때에 서학동 여경방에 숙빈이 탄생한 옛집이 있었는데,
7 임금이 내승 최조악에게 명하여 형지(形址)를 그려 오게 하고, 이어서 탁지(度支)에 명하여 그 값을 주게 하였으며,
8 증 최 영상, 증 홍 찬성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살면서 전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9 증 최 영상은 곧 숙빈의 아버지이고 증 홍 찬성은 곧 숙빈의 외조(外祖)이다.
10 ○ 5일에 임금이 거동 인현 왕후가 탄강한 옛터에 거둥하여 민광훈과 송준길의 내외 자손을 이곳에 거주하라고 명하였다.
11 ○ 18일에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지금 한성부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어제 밤에 여러 전(廛) 수백 칸이 불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12 도성 백성의 명맥(命脈)이 대부분 시장 생업에 달렸는데 이런 소실의 재해를 당하였으니, 몹시 놀라고 민망하게 여긴다.
13 비국으로 하여금 각별히 소상하게 돌보아 구휼하여 보존의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14 ○ 22일에 임금이 흥화문에 나아가 세 시전(市廛)의 백성을 위로하고
15 해당 순장(巡將)을 도태시켜 버리며, 해당 감군(監軍)은 처치하게 하고, 해당 포장(捕將)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잡아들이게 하였으며, 종사관은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쳐서 도태시키고, 순라 포교도 또한 곤장을 집행하라고 명하였으니,
16 세 시전의 소실된 것을 망연(茫然)히 알림이 없었고 행순 단자를 포도청에서 전례에 따라 서계하였기 때문이었다.
17 ○ 특별히 전 참의 송명흠을 강서원 유선으로 제수하였고, 이어서 승정원에 명하여 하유하고 그날로 길을 떠나 우리 세손(世孫,정조)을 보필하라고 하였다.
18 ○ 9월 21일에 임금이 좌의정 홍봉한에게 이르기를 "어제 서명응의 글을 보았는데 이는 반드시 선왕의 영혼이 나를 인도하신 것이다.
19 도성 10리의 땅을 그가 출입하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찌 천리나 멀리 가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하고,
20 이어서 주서에게 명하여 5월의 일기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고, 친히 스스로 찾아 열람하다가
21 윤재겸의 글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또 이런 일이 있었다. 3도의 도신(道臣)과 구윤옥, 이영휘의 일은 진실로 협잡(挾雜)하는 의논이고,
22 길 옆에 우뚝 솟은 집을 새로 지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하니,
23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이 마땅히 동궁에 나아가 우러러 질문하고 돌아와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24 홍봉한이 동궁에게 입대하고 말하기를 "위에서 비로소 저하께서 서행(西行)하신 것과
25 동교(東郊)에 집을 지은 것을 아시고는 집을 지을 때에 연출(捐出)한 것은 어떤 재물이고
26 역사를 감독한 자는 어떤 사람이며, 서행할 때에 따라간 자는 누구이고 궐내에 머물러 있던 자는 누구임을 하문하셨습니다.
27 지금 저하께서 기특하여 아뢰시고 솔직히 대죄하는 뜻으로 대조께 아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28 하령하기를 "동교의 초가(草家)는 삭지(朔紙)로써 재물을 연출하였고,
29 중관 박문흥을 위하여 영조(營造)한 것인데 대간의 글이 나온 뒤로 곧 훼철(毁撤)하게 하였다.
30 서행(西行)은 4월 초2일에 길을 떠났다가 22일에 돌아왔으며,
31 그리고 대궐에 머물러있던 중관 유인식은 지금 이미 치폐(致斃)되었고
32 따라간 중관은 다만 박문흥, 김우장이다.
33 성교(聖敎)의 아래 어찌 감히 일호(一毫)인들 가려 숨기겠는가?" 하고,
34 이어서 승지로 하여금 1통을 기록해 내어 대조에 우러러 아뢰게 하였다.
35 홍봉한이 돌아와 상세히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죄가 신(臣)의 몸에 있습니다. 먼저 신을 물리쳐 상하에 진사(陳謝)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면(解免)할 것을 명하였다.
36 ○ 25일에 이익원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금방 시민당 앞 뜰에서 대죄하였는데 도제조 홍봉한이 여러 의원을 데리고 구대(求對)하였습니다만,
37 동궁께서 바야흐로 대죄하고 있다는 것으로 단지 도제조만 입대하라고 하령하였습니다." 하였다.
38 ○ 26일에 약방에서 동궁에게 진후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이렇게 초조하고 황급한 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진찰을 허락하겠는가? 물러가라." 하였다.
39 (왕세자가 이 해 초 부터 병이 있어 약방의 진찰을 계속 받고 있었다.)
40 ○ 10월 6일에 임금이 "아직도 대죄하고 있는가?" 하였다.
41 정휘량이 "지금은 일의 체면이 다른 때와는 다릅니다. 성교가 있지 않으면 감히 나가 뵈올 수 없으니 이것이 더욱 마음 조리며 민박한 일입니다." 하였고,
42 홍봉한은 "만약 성교가 없으면 비록 해를 지난다 하더라도 나아가 뵈올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43 ○ 9일에 왕세자가 경희궁에 나아갔다. 흑립과 도포 차림으로 소여를 타고 선인문으로 나가니,
44 약방 이득종이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매, 하령하기를 "송구함이 많은데, 어떻게 진찰할 것을 허락하겠는가?" 하고
45 경희궁 홍마목 밖에 이르러 도보로 들어가서 현모문 밖에서 부복하니, 임금이 내시를 시켜서 진현할 것을 명하였다.
46 왕세자가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영상 홍봉한을 시켜서 힘써 효유하여 들어오도록 하였다.
47 왕세자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환궁하였다.
48 ○ 12월 22일에 세손빈을 김시묵의 딸로 정하여 하교하였다.
31 ○ 영조 38년(1762) 3월 30일에 임금이 세손에게 대학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2 임금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군자(君子)를 보고 가리우는 것은 어떤가?" 하니,
3 대답하기를 "잘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떻게 해야 좋은가?" 하니,
4 대답하기를 "처음부터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매, 임금이 "좋다." 하였다.
5 ○ 임금이 말하기를 "걸(桀)의 대(臺)나 문왕(文王)의 대가 다 같은데, 백성들의 향배(向背)가 어찌 이다지도 상반되는가?" 하니,
6 대답하기를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과 혼자만 즐긴 것이 다릅니다." 하였다.
7 ○ 임금이 "요(堯)임금과 걸(桀)과는 무엇이 다른가?" 하니,
8 대답하기를 "자신을 수양하면 요임금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걸이 됩니다." 하였다.
9 임금이 "요임금과 걸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달랐는가?" 하니,
10 답하기를 "걸은 욕심을 따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11 임금이 "너는 장차 어떻게 해서 요임금처럼 되겠는가?" 하니,
12 대답하기를 "마음을 굳게 정하면 요임금처럼 됩니다." 하였다.
13 임금이 "어떻게 해야 마음을 굳게 정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신(修身)하면 됩니다." 하였다.
14 임금이 "어떻게 해야 수신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15 임금이 "임금이 굶주리는 것이 좋은가, 백성이 굶주리는 것이 좋은가?" 하니,
16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 모두가 굶주리지 않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매,
17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임금은 비록 굶주리더라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 하였다.
18 ○ 5월 22일에 나경언이 복주되었다. 나경언 이란 자는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이니,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19 나경언이 흉서를 내놓으니, 임금이 다 읽지 못하고서 손으로 문미(門楣)를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 하였다.
20 홍봉한이 울면서 보고는 말하기를 "신이 청컨대 먼저 죽고자 합니다." 하였다.
21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22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元良,세자)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23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하였다.
24 ○ 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25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26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27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28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29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30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하기를 청하였다.
31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32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33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34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 위에서 대죄하였다.
35 ○ 판의금 한익모가 아뢰기를 "청컨대 사주한 사람을 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한익모의 파직을 명하였다.
36 ○ 24일에 임금이 흥화문에 나아가 각전(各廛)의 시민을 불러 하유하기를 "어제 내가 본 바가 있어(나경언의 글) 내사(內司)와 사궁(四宮)에서 시인들에게 빚이 많은 것을 알았다.
37 또 너희들이 억울함을 품은 일이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다 진달하라." 하였는데,
38 대개 세자의 본병(本病)이 날로 심해져 주야로 호한(豪悍)한 무리들과 더불어 유희함이 법도를 잃었고,
39 상사(賞賜)가 한정이 없어 내사(內司)가 모조리 비어 시인(市人)의 물건을 거두어 올렸으며,
40 액속들이 위세를 빙자하여 시인의 것을 빼앗아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하였다.
41 임금이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알고는 시인들에게 각기 빚으로 준 것을 말하도록 명해 갚아주라 명하였다.
42 ○ 윤5월 13일, 세자는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43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영조 33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44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45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46 임금이 경희궁으로 이어하자 두 궁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 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을 모두 폐하였으니,
47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48 한번 나경언이 고변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 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49 이에 동궁의 대명(待命)을 풀어주고, 세자가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50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정성 왕후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고,
51 이어서 협련군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 등으로 하여금 시위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52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만 홀로 들어왔다.
53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54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55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 부자(父子)에게 수위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56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57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58 이때 신만, 홍봉한, 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59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 임덕제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60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61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62 이에 전문(殿門)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63 사서(司書) 임성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64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 천선하기를 청하였다.
65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 이씨로서 임금에게 밀고한 자였다.
66 도승지 이이장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였다.
67 ○ 14일에 환자 박필수와 여승 가선 등이 복주되었다. 여승 가선이란 자는 바로 안암동의 여승인데,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였다.
68 ○ 임금이 구(舊) 동궁의 잡물(雜物)을 선인문 밖에서 불태우라 명하였는데,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이 많았으니,
69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70 ○ 15일에 이익원을 중도 부처하라고 명하였는데, 반교(頒敎)할 때 소리를 내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71 ○ 21일에 사도 세자가 훙서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72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를 사도 세자라 한다." 하였다.
73 또 전교하기를 "이제 이미 처분하였은즉 빈궁은 효순과 같으니, 혜빈이란 호를 내려 일체로 옥인을 내리고, 조정은 정후(庭候)하라." 하였다.
74 ○ 28일에 좌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번의 일로 말하면 전하가 아니셨으면 어떻게 처치하였겠습니까?
75 외간에서는 전하께서 결판을 짓지 못하실까 염려하였는데, 필경에는 결판을 지어 혈기가 장성(壯盛)할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신은 흠앙(欽仰)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76 ○ 사신은 말한다. "13일의 일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77 홍봉한은 사부인 몸이고 또 인아(姻婭)의 처지에 있으면서, 마땅히 사과하고 죄를 이끌어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다.
78 그런데 연석에서 면대하는 즈음에 감히 '외간 사람이 결판 짓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전석(前席)에서 할 말인가? 무엄함이 심하다."
79 ○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홍봉한에 의해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모함을 얻는다. 훗날 홍씨가 자서전(한중록)을 작성하여 아버지의 결백을 말한다.)
32 ○ 6월 6일에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가 오는가를 바라보았다.
2 헌납 박치륭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듣건대, 용안 현감 이정이 상소를 안고 와서 올리다가
3 후원(승정원)에서 물리침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정원(승정원) 문 밖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4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궁궐 안에 이처럼 변괴의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보고하지 않았으니,
5 거의 옹폐(壅蔽)하는 데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정원에 있던 승지는 아울러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6 임금이 죄가 삭직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써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승지는 바로 김면행이었다.
7 전교하기를 "세찬 바람이 불어 보아야 굳센 풀을 알 수가 있고,
8 나라가 판탕(板蕩)함을 겪어 보아야 충성스런 신하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정을 두고 한 말이니, 대각이 판별하지 못한 것을 이정이 능히 판별했다.
9 이는 한나라 때의 합관요가 북궐 아래에서 스스로 목을 찌른 일이 있는데, 이정은 비록 살아났지만 고인(古人)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다.
10 이제 만약 가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격려하겠는가? 전 용안 현감 이정에게 첨지중추부사를 특제하라." 하였다.
11 ○ 8월 20일에 임금이 선농단에 거둥하여 추수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12 임금이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에 전배한 뒤에 단에 나아가, 음악을 연주하라 명하였다.
13 예조 판서 신회가 앞에 나와 적전(籍田)의 추수 관람을 고하고 백인환으로 하여금 도량(稻梁) 베는 것을 고하게 하였다.
14 임금이 말하기를 "적전은 농민으로 하여금 베고 거두게 함이 옳다. 기민(耆民)은 20명인가?" 하니,
15 윤동섬이 말하기를 "40명이니, 농민과 합하여 80인입니다." 하였다.
16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성(粢盛)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이 옷을 입었다.
17 내가 기미년(영조15년)에 처음 밭갈고 계유년(영조29년)에 두번째로 해 보았는데,
18 그 때에 전답은 처음이었고 지금은 1백 묘(畝)의 밭이 되었다.
19 당시에는 자성에 쓸 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20 경적사(耕籍使) 김치인이 추수한 기장을 바쳤고, 승지 정광한이 받들어 향안(香案) 앞에 바치니, 임금이 또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으며,
21 경적사가 또 추수한 벼를 바치니, 임금이 또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다.
22 ○ 10월 5일에 임금이 동궁(세손,정조)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는 장차 어떻게 우리 백성들을 구제할 것인가?" 하니,
23 대답하기를 "군상(君上)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24 ○ 11월 11일에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각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소견하여 국수를 먹이고 유의(襦衣)를 하사한 뒤 해당 읍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25 ○ 영조 39년(1763) 1월 3일에 임금이 왕세손에게 말하기를 "중자(仲子)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26 대답하기를 "어머니가 주면 먹지 아니하였으니,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27 임금이 "그 어머니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28 대답하기를 "그 자식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도 억지로 그 고기를 먹게 하여 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또한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29 이때 왕세손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30 ○ 4월 22일에 전조(前朝,고려)의 옛 능과 단군, 기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의 능을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31 ○ 24일에 시독관 이명환이 말하기를 "도(道)가 있는 세상을 당하여 가난하고 천한 것은 진실로 선비의 부끄러움이지만,
32 선비가 만약 재주가 있는 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또한 군주(君主)의 부끄러움입니다. 이는 마땅히 군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3 ○ 5월 26일에 영의정 신만을 파직하고, 좌의정 홍봉한을 면직시켰다.
34 신만은 윤급이 죄를 입은 일 때문에 인입(引入)하였는데, 임금이 누차 사관과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35 홍봉한은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면직을 바랐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36 이때에 이르러 신만과 동시에 인고(引告)하니, 임금이 노하여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37 ○ 6월 18일에 임금이 왕세손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일 굶주리는 사람을 보았다면 옥식(玉食)을 먹기가 편안하겠는가, 편안치 못하겠는가?" 하니,
38 대답하기를 "비록 나의 밥을 덜어서 주더라도 준 뒤에야 먹겠습니다." 하자,
39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백성은 모두 조종(祖宗) 때의 적자(赤字)인 것이다. 뒷날 밥을 덜어주겠다는 마음을 잊지 말고 확충시켜 나가도록 하라." 하고,
40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하유하기를 "경 등은 힘써 보좌하라. 사신은 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라." 하였다.
41 ○ 9월 2일에 임금이 왕세손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구포를 정지하는 것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경용(經用)을 잇대지 못할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42 대답하기를 "백성이 넉넉하게 되면 임금이 어찌 넉넉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43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요순 이후에 다시 요순 같은 임금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44 대답하기를 "사욕(私慾)이 본성(本性)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하자,
45 임금이 잘한다고 칭찬하고서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너는 힘쓸지어다." 하였다.
46 ○ 16일에 임금이 흥화문에 친림하여 경조(京兆)의 사민(四民)들 가운데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차등 있게 쌀을 하사하였다.
47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백성을 보살핌에 있어 어떻게 서울과 지방을 달리할 수 있겠는가? 팔도와 48 양도에 분부하여 경오년(영조26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저치미(儲置米)와 상진미(常賑米)로 서울과 똑같이 사민(四民)을 구휼하게 하라." 하였다.
49 ○ 10월 2일에 간원(정언 이택징)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제도(諸道)의 수재(守宰)들 가운데 역종(逆種,역적)을 돌보아 구휼하는 자와
50 향품(鄕品) 가운데 폐족(廢族)과 혼인(婚姻)하는 자는 나타나는 대로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것으로 신칙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3 ○ 12월 17일에 저자거리에서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죽을 먹이고 옷을 하사하여 보냈다.
33 ○ 무곡(貿穀)이라 함은 상인이 이익을 얻기 위해 곡식을 많이 사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2 ○ 영조 40년(1764) 1월 9일에 장령 이현옥이 상소하여 부유한 상인의 무곡(貿穀)하는 행위를 금하라고 청하였는데,
3 이때에 언로가 막혀 대각의 말이 좀스럽기가 대개 이와 같았다.
6 ○ 6월 27일에 평시서 제조 홍인한이 말하기를 "일찍이 대신의 주달로 인하여 군문(軍門)에서는 시인(市人)을 포박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7 접때 난전(亂廛)의 일로써 한성부와 서로 다투다가 훈국(訓局)에서 시인 한 사람을 묶어 갔습니다.
8 이와 같이 정식을 어긴 데에는 죄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9 임금이 훈련 대장 구선행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제수하였다.
10 ○ 7월 26일에 영빈 이씨가 연서(捐逝)하였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11 영빈이 사도 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12 ○ (침묵을 지킨 것이 화근을 키운 것이 아닌가?)
13 ○ 9월 17일에 임금이 이날 조강을 하려고 하였는데 대각의 인원 수가 갖추어지지 않아 주강을 하라고 다시 명하고, 나오지 않은 대신 서명응과 이지회를 파직하였다.
14 하교하기를 "대신이 전계(前啓)를 베껴 전하는 것을 혐의로 여기고 있다.
15 그러나 새로 올린 계사에도 그전 일이 끼이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오직 패(牌)를 받치는 것을 고상한 풍치로 여기고 있으니 국가에서 대각을 두어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모두 파직시켰다.
16 ○ 사신은 말한다. "'관원을 꼭 갖출 필요가 없이 오직 적임자를 쓴다.'고 한 것은 대체로 반드시 신중히 뽑으려는 것이다.
17 그런데 한번 사관을 뽑는 전조(銓曹)의 낭관을 파직시킨 뒤로 관작이 난잡해지고 선비의 풍습이 비루해졌다.
18 그리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다시금 꺼려하는 것이 없고 연소한 자들은 몸을 검속한 이가 적어 기절(氣節)이 점차로 사그라져서 묵묵히 있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버렸다.
19 이는 비록 대각의 잘못이기는 하나, 이렇게 된 것은 또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20 ○ 9월 21일에 경복궁의 옛터에서 옥으로 만든 토끼와 옥으로 만든 봉(鳳)을 발견하였는데, 위장이 정원에 바쳤다.
21 임금이 이를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이는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22 ○ 영조 41년(1765) 1월 20일에 종신(宗臣) 안천군 이계가 진연(進宴)하기를 청하고, 또 대덕(大德)의 수(壽)로써 응당 행하여야 할 의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니,
23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하교하기를 "이는 나에게 아첨하는 것이니, 그것을 죄주지 않으면 아첨하는 말들을 그치게 할 수가 없다." 하고, 파직시켰다.
24 ○ 3월 5일에 형조 판서 황인검이 아뢰기를 "운봉수 이심이 추노(推奴)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양녀 2인에게 사형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니,
25 임금이 왕부(王府,의금부)에 명하여 조사하게 하고, 사실을 확인한 뒤에 홍원으로 유배시켰다.
26 ○ 문비(問備)는 벼슬아치의 죄상을 관원 명부에 적어 두었다가 인사 행정에 반영시키기에 앞서 심문하는 일이다.
27 ○ 6월 17일에 강원 감사 성천주가 도내(道內)의 수령 중에서 이식(利息,이자,공채)을 늘려 민역(民役)을 면제시킨 자를 포상하여 주도록 아뢰니,
28 임금이 이르기를 "양리(良吏)를 포상하는 것은 도신의 책임이다.
29 이식을 늘려 민역을 면제시키는 것은 흉년에도 오히려 구차스러운 것인데, 하물며 보통인 해이겠는가?
30 이는 바로 취렴(聚斂)하는 신하이니, 포문(褒聞)할 자가 아니다." 하고, 해당 도신을 문비(問備)하였다.
31 ○ 11월 29일에 임금이 감기가 들어 다소 편치 않았고 세손이 또한 병환이 있어 약원에서 연이어 입대하였다.
32 임금이 세손의 거처가 멀어서 가 보기가 힘들다 하여 사현합으로 이거토록 하고,
33 매일 밤에 잠들지 못하고 열 번이나 일어나 임하여 보았다.
34 변뇨(便尿) 등속에도 또한 반드시 가서 보고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세를 돌아보건대 단지 망팔(望八)의 노쇠한 인군(人君)과 충자(沖子)뿐이다." 하였다.
35 ○ 영조 42년(1766) 6월 11일에 사간 임성이 아뢰기를 "윤붕거를 승지로 특별히 제수한 것은 비록 우로(雨露)가 땅을 가리지 아니하는 것 같은 성상의 뜻에서 나왔으나,
36 아무리 북관(北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체와 문벌이 더욱 미천(微賤)하여 장헌(掌憲)을 개정하라는 요청을 전에 이미 윤허를 얻었은즉,
37 승선(承宣)의 직무는 왕명(王命)을 출납하여 책임이 심히 중하니, 사람마다 외람되이 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윤붕거를 제수하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38 답하기를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삼무사(三無私)를 받들어야 한다.
39 우주(宇宙)가 처음 창조되고 사람이 처음 날 때에 어찌 아무 사람은 선비가 되고 아무 사람은 서인(庶人)이 될 것을 미리 분배(分排)하였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0 ○ 영조 43년(1767) 2월 28일에 임금이 남단(南壇)에 행행하여 성경(省耕)하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41 비국 당상에게 시립(侍立)을 명하고 농민을 불러보고 농사 지을 양식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42 세손에게 밭두렁에 가서 살펴보라고 명하고, 이어서 춘방(春坊) 관원의 입시를 명하여 하문하기를 "세손이 농민을 불러서 보았는가?" 하니,
43 문학 이규위가 대답하기를 "왕세손께서 친히 농사짓는 절기와 노고의 정상을 물으셨습니다." 하였다.
44 ○ 좌의정 한익모가 민간의 농우(農牛)가 매우 귀하여 가난한 백성으로 소를 가진 자가 매우 적으니,
45 소를 가진 자로 하여금 빌려 주어 통공(通功,전문적인 일을 나누어 분업함) 하는 것으로 품앗이를 하여, 있고 없고 간에 서로 돕게 하기를 청하고,
46 우의정 김상철이 중외의 백성을 부리는 폐단을 엄금하여 드러나는 대로 논죄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47 ○ 3월 15일에 정언 유지양이 제사에 쓰이는 술에 대해 상소하니, 체직하고,
48 하교하기를 "제향(祭享)에 술을 쓰지 않은 지 이제 이미 10년이 되었다.
49 내가 송다(松茶)를 마시는데, 소민(小民)이 술을 쓰는 것이 어찌 효(孝)라 하겠는가? 세 신하의 일은 3백 년 동안 없던 일이다.
50 상소 가운데 '척신(戚臣)'이란 두 글자는 면목(面目)이 이미 놀랍고,
51 그 전편(全篇)을 논하자면, 임금을 협사(挾私)한 죄과로 돌렸으니, 지극히 무엄하다. 이런 하찮은 자를 어찌 족히 깊이 다스리랴?" 하였다.
52 ○ 윤7월 2일에 경상 감사 김응순이 "산음현에 일곱 살 먹은 여자가 잉태해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고 치계하였는데,
53 임금이 이는 요괴의 인물 중의 큰 것이라고 하면서 크게 우려하였다. 좌의정 한익모와 좌부 승지 윤면헌이 없애버리자고 청하니,
54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시 나의 백성 중의 한 아이이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달려가서 염탐해 보고 오라고 하였다.
55 ○ 10일에 하교하기를 "막중한 사전(祀典)을 가벼이 의논할 수는 없고 또한 감히 자기의 견해를 옳다고도 할 수 없다.
56 그래서 용비어천가 제1장을 읽게 한 것인데, '지금 우리 시조는 경흥에 집이 있다.' 라는 여덟 글자가 내 마음에 더욱 간절히 와닿았다.
57 이는 특히 백두산이 우리 나라 산이 된다는 더욱 명백한 증험인 것이다.
58 아무리 우리 나라의 땅이 아니라 하더라도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우리 나라에 있는데 말할 게 있겠는가?
59 제단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은 도신에게 물어서 상세하게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60 ○ 29일에 산음 어사 구상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종단의 나이가 정말 일곱 살이었는가?" 하니, 구상이 "과연 일곱 살이었습니다." 하였다.
61 임금이 "그 키는 얼마나 되던가?" 하니, 구상이 "몸이 이미 다 자랐습니다." 하였다.
62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은 마땅히 사책에 그대로 써야 할 것이다. 일곱 살 아이가 애를 낳았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63 이미 그 지아비를 알아냈으니, 현혹된 영남의 민심이 거의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64 하교하기를 "내 비록 8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나의 덕이 요괴를 이길 것이다. 어찌 사서(史書)에 없는 일을 들을 수 있겠는가?
65 세상에 어찌 아비없는 자식이 있겠는가? '날과 달로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을 어찌 종단 같은 자에게 비유할 수 있겠는가?
66 무식한 면임(面任)은 비록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독서한 사대부가 어찌 그 말을 베껴 쓸 수 있단 말인가?
67 어찌 백리를 다스리고 십 리를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말 어렵다.
68 산음 현감에게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고, 이 장계를 조보(朝報)에 내도록 하라." 하고,
69 그 여자, 어미, 간통한 남자, 아이를 바다의 섬에다 나누어 귀양보내어 노비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70 ○ 8월 1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종단의 일은 정말 괴이하다. 포사와 견훤의 일(탄생설화)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우 동심(動心)되었었는데
71 다시 생각해 보니, 필시 이러한 여자가 이러한 사람을 낳을 리는 없기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였다.
34 ○ 영조 44년(1768) 2월 15일에 임금이 합격한 생원, 진사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각자의 시험지를 외우도록 하였다.
2 민급에 이르러 원로방지(圓顱方趾) 등의 말이 있자, 임금이 "'원로방지' 네 글자를 어찌 감히 함부로 과거의 글에 쓴단 말인가." 하고,
3 민급의 이름을 버리고 과거의 응시를 정지시키고, 일소와 이소의 시관을 모두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원로방지는 흉측한 역적이 올린 상소에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4 이후옥, 한흥상 외 6명을 모두 방목(榜目)에서 빼 버리라고 명하였는데, 시험지를 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5 ○ 다음 날에 영의정 김치인이 '어제 방목에서 빼 버린 유생들은 듣건대 모두 글을 잘하는데,
6 갑자기 입시하게 되어 놀라 겁이 나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잘못하게 되었다 하니,
7 용서해 주는 방도가 있어야 될 듯하다.' 고 우러러 아뢰자,
8 하교하기를 "아! 노년에 어찌 차마 악착스러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일체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9 ○ 7월 10일에 임금이 친히 석우(石隅)에 나아가 농사를 보았다. 기백(畿伯,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농민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여 각각 농사 형편을 물으니, 모두 풍년이라고 대답하였다.
10 임금이 더위 때문에 편치 못한 증세가 있어 종을 칠 때에 이르러 약방에 입진하도록 명하였는데,
11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내가 지나친 거둥은 하지 않겠다." 하니,
12 도제조 서지수가 말하기를 "뉘우치는 것은 길(吉)한 기미(機微)입니다. 사관이 써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13 ○ 8월 1일에 판중추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졸하였다. 서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소박해서 잇따라 태부(台府,정승)에 올랐으나,
14 충신 염결(忠愼廉潔)함을 스스로 지니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15 전후로 여러 번 바른 말을 올렸고 이미 정승에 들어가자 중외의 서민이 모두 기뻐하였다.
16 정승의 자리에 오래 있지 아니하여 비록 시행한 바가 없었으나, 여정(輿情)의 신망이 끝까지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17 이에 이르러 졸하니 도성 백성이 시장을 파하고 서로 슬퍼하였다.
18 ○ 8월 27일에 부사직 이인배가 상소하여, 삼남(三南)의 교제곡(交濟穀)을 옮겨서 북도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였는데,
19 비답하기를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목을 매고 자식을 묻는다.' 는 말은 매우 참혹하고 슬프게 들린다.
20 북도에 삼창(三倉)을 설치한 것이 어찌 남도 백성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본도(本道)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21 어사에게 명하여 적간(摘奸)하는 뜻이 대개 이것이다. 본도에 삼창이 있으니,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22 하물며 영남도 또한 풍년이 든 것이겠는가? 나도 알고 있다." 하였다.
23 ○ 영조 45년(1769) 4월 16일에 경조(京兆)에 명하여 사부(士夫) 가운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자를 수검(搜檢)해서 아뢰게 하였다.
24 당초에 김기장이 의녀를 그 집에 몰래 숨겨 두었는데, 정형복이 수색해서 찾아내어 가두었었다.
25 당시에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수안(囚案)을 가져다 보고 의녀의 이름이 있으므로 크게 놀라
26 하교하기를 "선상(選上)된 기생들을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즉시 보내게 한 것은 종신(宗臣)과 무신(武臣)들의 혹란(惑亂)을 금한 것이었다.
27 이제 살펴보건대 유생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신(搢紳)이겠는가?
28 김기장에게는 결태(決笞)하여 도배(徒配)의 율을 베풀도록 하라." 하고,
29 이어서 한성부에 명하여 기생을 데리고 사는 자를 수검(搜檢)하게 하고, 또 잇달아 재촉하였으니,
30 이에 부관들이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나가 찾아내어 체포하였다.
31 이날 밤에 붙잡힌 자들이 매우 많아 형배(刑配)가 서로 잇달았다.
32 ○ 다음 날에 이득복 등 6인이 연명하여 상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었는데, 나에게 과실이 있었는가? 무슨 회복할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33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하도록 명하고,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잇달아 내리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잇달아 서로 아뢰어 호소하였다.
34 천위(天威)가 조금 풀리자 웃으며 묻기를 "경들도 또한 데리고 사는 기생이 있는가?" 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있습니다." 하니,
35 마침내 햇수를 한정해서 금령을 설치하고 진신과 조관들은 모두 자현(自現,자수)하도록 명하였다.
36 그리고 무릇 경조와 오부의 관원으로 기생의 일로 인해 죄를 받은 자들을 아울러 분간(分揀)하도록 명하였다.
37 17일에 여섯 유신(儒臣)의 가노(家奴)를 잡아들여 장형(杖刑)을 베풀어 첩을 데리고 사는지를 핵실(覈實)하게 하고,
38 이어서 이득복을 찬배(竄配,섬으로 귀양 보냄)하라는 명을 내렸다.
39 ○ 19일에 임금이 이득복의 소하(疏下)인 네 사람 홍수보, 조재준, 홍경안, 홍찬해를 산배(散配,흩어서 귀양보냄)하도록 명하였다.
40 또 오부의 관원들을 잡아들여 각각 형신을 가하여 산배하도록 명하였는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사람들을 수색해서 바친 것이 적기 때문이었다.
41 또 잇달아 엄지(嚴旨)를 내려 1백 인을 채워 수색해 바치게 하였다.
42 이에 경조의 오부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엿보아 체포하고 듣는 대로 따라서 아뢰니, 그 이름이 조적(朝籍)에 매어 있는 자들은 절도 정배하되, 배도(倍道)하여 압송하게 하였다.
43 판윤 서명신, 좌윤 김종정을 직산현에 투비(投畀)하게 하였는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사람에 대해 사핵(査覈,조사)하는 일을 지체한 때문이었다.
44 ○ 21일에 임금이 옥에 가두었던 여러 시종들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무릇 40여 인이었다.
45 하교하기를 "이는 충신과 역적을 판단하는 날이다. 자수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일어서도록 하라." 하였는데,
46 안성빈이 일어서서 말하기를 "신은 범한 바가 있지만, 아들이 있으므로 경조(京兆)에서 자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47 임금이 말하기를 "안집은 아들이 있다." 하고, 곧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48 권극이 일어서자, 임금이 말하기를 "무상(無狀)하다. 너는 바로 역적이다. 세도(世道)를 위해 한 난적을 제거해야 한다." 하고,
49 또 하교하기를 "너의 정상은 만고에 소인(小人)이다. 비록 효시(梟示)하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다. 너의 말 때문에 남병사 이하 몇 사람이나 죽게 되었는가?" 하였다.
50 ○ 임금이 웃으면서 안상(案床)을 치고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과연 이륜(彛倫)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가?
51 권극을 징계삼아 삼가서 다시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아울러 석방하였다.
52 권극을 흑산도에 찬배하였는데, 며칠이 지나 권극이 길에서 죽었다.
53 대개 권극이 전에 대관이 되었을 때 금주령을 범하였다 하여 남병사 윤구연을 죽일 것을 청하였는데, 윤구연이 죽은 후부터 세상에서 권극이 화심(禍心)을 품었다고 지목하였었다.
54 이때에 이르러 권극이 형벌을 받아 죽으니, 비록 그 죄가 죽이는 데 해당되지는 않았지만,
55 사람들이 모두 이를 흔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좋게 돌아왔다.' 고 하였다.
56 ○ 8월 17일에 이의로, 김이장은 기생에 대한 일로 인하여 이미 찬배되었는데, 영상 홍봉한이 조용히 그들을 위해 말하니,
57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두 사람에 대해 그 할아비들을 생각하여 임용하겠다." 하고, 특별히 방면하여 직첩을 주도록 명하였다.
58 ○ 12월 9일, 당초에 울릉도에 인삼을 캐는 잠상(潛商)을 삼척 영장 홍우보가 염탐하여 붙잡았는데, 추잡한 비방이 많이 있었다.
59 일이 발각되어 홍우보가 죄를 받아 폄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홍명한이 서신을 왕래하여 참섭하였다는 것으로써
60 장령 원계영이 상소하기를 "울릉도에 대한 금령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61 강원 감사 홍명한은 홍우보와 몰래 서신을 왕래하여 사람들을 모아 몰래 들어가서 인삼을 채취한 것이 자그마치 수십 근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35 ○ 영조 46년(1770) 5월 21일에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명나라의 자손을 불러 보고 쌀을 하사하였으며, 군문(軍門)에 임용하라고 명하였다.
2 ○ 9월 25일에 임금이 양정재에 나아갔다. 양정재는 바로 인원 왕후의 외가인데,
3 왕후가 이 집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성모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육상궁을 전배하는 길에 들른 것이다.
4 이어 육상궁에 나아가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5 ○ 다음날에 임금이 환궁하는 길에 서학(西學)으로 가서 거재 유생을 불러 보고 종이와 붓을 내려 주었다.
6 ○ 영조 47년(1771) 2월 1일에 황경룡을 사장(沙場)에서 효시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사죄하도록 하였는데, 황경룡이 환관들과 교결하여 시민(市民)의 재물을 침탈하였기 때문이었다.
7 ○ 2월 3일에 임금이 이르기를 "80이 다 된 임금이 충자(冲子,왕세손)와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8 조정에 있는 제신들이 이와 같이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9 임금이 말하기를 "김우상이 아뢴 바를 들으니, 왕손이 추종을 외람되게 거느리고 다니어 도로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대장의 행차라고 지목하였는데도
10 대신은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고, 홍 봉조하가 나인을 선발하였는데도 대신이 또한 한마디 말이 없었으며,
11 왕손이 방자하다는 말이 있는데도 조정에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그 누구를 믿겠는가?" 하였다.
12 장령 심이지가 은언군 이인과 은신군 이진의 관직 삭탈을 청하니, 임금이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13 ○ 5일에 임금이 창의궁에 있으면서 대궐문을 닫도록 명하고, 호위 대장으로 하여금 나팔을 불게 하여 군사를 모으도록 하고
14 하교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니, 대기하는 군사를 모두 모아 일부는 대궐 밖을 호위하게 하고 일부는 육상궁을 호위하게 하며 일부는 구저를 호위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15 당시 임금이 갑자기 호위하라는 영을 내렸으므로 갑옷 입은 군사들이 도로에서 바쁘게 달려가 온 도성이 술렁이며 어찌할 줄 몰랐다.
16 또 하교하기를 "용동궁의 임장을 잡아오도록 하고, 전 양제(良娣) 집안과 인, 진 집안의 잡류도 또한 잡아오게 하여 궁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17 ○ (양제(良娣)는 사도세자의 후궁 임씨로, 은언군 이인과 은신군 이진의 어머니 이다.)
18 ○ 6일에 전 양제의 집을 봉폐(封閉)하게 하였다.
19 ○ 9일에 대사간 이성원, 사간 원계영, 장령 최민, 임희증 등이 합사하여 아뢰기를
20 "삭출(削黜)된 죄인 홍봉한은 지처(地處)가 어떠하며 의비(倚毗) 함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죄를 범한 것이 매우 중대하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21 전후의 죄상은 이미 대각과 초야에서 올린 글에서 다 말하였으며,
22 비록 이번 이인과 이진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연주(筵奏)에서 스스로 담당하겠다고 한 뒤에 도리어 그 교만하고 방자한 습성을 도와 오늘날의 처분을 이루도록 하였고,
23 성려(聖慮)가 심지어 나라의 근본을 편안하게 해야겠다고 하는 데 이르렀으니,
24 그의 죄상을 논한다면 삭출하는 데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중도 부처하게 하소서." 하니,
25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대각이 있음을 알겠다. 내가 홍봉한을 저버린 것이 아니고 홍봉한이 나를 저버린 것이니, 윤허한다." 하였다.
26 이성원 등이 또 아뢰기를 "정배된 죄인 인과 진은 나이어린 종신으로 능히 근신하지 못하고 사나운 종과 교만한 하인으로 시전(市廛)에서 분탕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27 처분이 이미 엄중해진 뒤에 귀양 길의 행장을 꾸린 것도 또한 분수에 지나친 것이 많았으니,
28 국가의 체모를 엄격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정배하는 데에서 그칠 수는 없습니다. 모두 멀리 떨어진 섬에다 안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9 ○ 영조 48년(1772) 2월 21일에 사헌부가 은언군을 방면하라는 영을 거둘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0 ○ 12월 19일에 경기 어사 윤득의가 복명하여 말하기를 "기전(畿甸)이 크게 나라의 고휼(顧恤)을 힘입어 백성들이 모두 안도(安堵)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였다.
31 ○ 영조 49년(1773) 윤3월 28일에 용강(龍岡) 사람으로 29세 된 총각 박흥조가 신문고를 울리므로
32 전정(殿庭)으로 불러들여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친히 물으니, 소녕원(昭寧園)을 능으로 봉하는 일이었다. 임금이 식량을 주어서 쫓아보내라고 명하였다.
33 ○ 6월 13일에 임금이 서인(庶人)을 불러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라고 하였으나, 모두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자,
34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오늘날의 대신은 비록 말할 것도 없지만 사서인(士庶人)이 어찌 칠실(漆室)에서 걱정하고 탄식하는 자가 없겠느냐? 그런데 왜 말이 없느냐?" 하니,
35 약방 제조 채제공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성세(聖世)에는 백성의 일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으니,
36 가의(賈誼)나 동중서(董仲舒)와 같은 재주가 없고서야 어찌 쉽사리 대답해 올리겠습니까?
37 전하께서는 비록 사람이 없다고 탄식을 하시오나,
38 그 중에는 또한 임금을 보필하고 직사(職事)를 담당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어다가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39 이때에 신전이란 자가 화경 숙빈을 존숭하여 능(陵)으로 봉하고 태묘에 부제(祔祭)하기를 청하니,
40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능으로 봉하자고 청한 자들은 사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공을 탐하고 상을 바라서 그런 것이니, 무슨 취할 것이 있겠느냐?
41 나도 이 일에 대해서는 도와야 마땅한 의리가 있겠지만 비단 선조의 유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42 지난날 숙빈께서 겸공(謙恭)하고 소심(小心)했던 뜻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 정도에 지나친 예(禮)를 행할 수 있겠느냐?
43 사람의 자식은 어버이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아야 하느니만큼 나는 지키는 바가 있다.
44 또 지난날 가상(加上)하였을 때에는 자성께서 함께 기뻐하셨기 때문에 봉행하였던 것이나
45 이제는 내가 어떻게 혼자만 하겠느냐? 이 일 또한 지키는 바가 있다." 하였다.
46 ○ 6월 17일에 대사간 이한일이 아뢰기를 "황승원이 패초(牌招)를 어기면서까지 모피(謀避)하려고 한 것은 해괴하고 통분스러운 일이오나
47 다만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처지에서 아들의 일로써 그 어머니에게 죄를 씌워 먼 곳에 정배하기에 이른 것은 아마도 성세(聖世)의 관전(寬典)이 아닌 듯 합니다.
48 또 듣자니, 그의 어머니는 배소(配所)로 가려고 말에 오를 때에 울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49 '황승원이 어미의 훈계를 듣지 않고 형의 말도 따르지 않아 위로는 나라에 불충을 저지르고 아래로는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다.
50 자식을 이렇게 두었으니, 이번 걸음은 참으로 마땅하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였다고 합니다.
51 이로써 말한다면, 그 어머니는 참으로 어진 분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황승원의 어머니에게는 분간(分揀)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52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품었던 바를 들으니,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전해 듣고 아뢴 사람도 또한 그 체통을 얻었다고 하겠다.
53 이 말을 듣고 어찌 다만 가슴이 매어질 뿐이겠느냐?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를 즉시 방면하게 하라." 하였다.
54 ○ 11월 10일에 도성 백성이 공채(公債)를 많이 지고서 죽은 자가 있었는데, 그 아내가 관비가 되어 빚을 갚기를 원하니, 임금이 가엾게 여겨 특별히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36 ○ 영조 50년(1774) 2월 3일에 조정(朝廷)에서는 뜰에서 문안하고 왕세손은 백관을 거느리고 뜰에서 하례하니,
2 임금이 아직 조섭(調攝,몸조리) 중에 있어서 좌석에 나오지 못하고 당중(堂中)에 누워서 문안과 하례를 받았다.
3 ○ 8일에 해운군 이연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진달하고 유양(揄揚,임금의 공덕을 칭찬)의 의식을 거행하도록 청하자, 해운군을 파직하고 서임(敍任)하지 말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4 ○ 14일에 김응순이 시노비의 고질적인 폐단을 가지고 건의하여 진백(陳白)하였다.
5 임금이 여공(女貢)의 명목을 모두 혁파하고자 하여 시비와 역비의 공물 및 무녀의 베를 모두 없애도록 하고,
6 사비(私婢) 역시 그들로 하여금 공물을 거두지 말게 하려고 묘당에 명하여 의논하여 절목을 만들게 하였는데,
7 묘당의 의논이 다른 물건으로 대신 지급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오래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8 ○ 4월 9일에 임금이 구태후를 잡아들이도록 하여, 엄하게 형벌하고 기장현에 충군(充軍)하였다.
9 처음에 임금이 구종직의 훌륭함을 생각하고 그 자손을 찾도록 명하여, 구태후를 효릉 참봉으로 삼았는데,
10 구태후가 글을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였고 처음으로 능의 서원들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며,
11 더러는 능졸(陵卒)과 더불어 서로 너나들이 하게 되니, 능졸의 무리들이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12 능침 가까운 땅에 있는 큰 소나무 두 그루를 베는 죄를 범하였다.
13 이것 때문에 임금이 통분하게 여겨 이런 명령을 하였다.
14 사간 최민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특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특별한 능관(陵官)을 간택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15 임금이 말하기를 "구태후의 일은 저들의 과실이 아니라, 곧 내가 옛날 사람 구종직을 사모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뒤에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20 ○ 11월 9일, 이때 팔도의 노인 단자가 연달아 올라왔으니, 1백 살 이상된 사람이 20여 명, 아흔 살 이상된 사람이 6백여 명이었다.
21 임금이 놀라며 "괴이하다. 그것이 확실한지를 어찌 알겠느냐?" 하니,
22 좌의정 이사관이 "그 폐단이 없지 않으나 어찌 이렇게 많겠습니까?" 하니,
23 임금이 "비록 더 보탠 것이 있더라도 역시 장한 일이다. 명운(命運)과 기수(氣數)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니,
24 이사관이 "이렇게 장수하게 된 것은 또한 성상의 조화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각각 옷감과 음식물을 내려 주게 하였다.
26 ○ 25일에 임금의 빠진 이가 새로 났다. 입시한 대신들에게 보게 하고 말하기를 "누런 머리에 다시 새 이가 난다는 말은 옛말에서나 들었는데 이것 역시 보통과 다른 일이다." 하였다.
27 영조 51년(1775) 4월 11일에 임금이 한성부의 관원에게 노인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28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이를 속인 것을 현고(現告)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그런일이 없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29 신정기, 김천석을 흑산도에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30 ○ 24일에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만약 억울함을 품은 사람이 있으면, 모두 불러들여 각각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다.
31 ○ 5월 1일에 신문고를 함부로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32 이때 임금이, 근장군이 뇌물을 요구하며 북을 치는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염려하고,
33 병조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고 병리를 곤장으로 때려 다스렸으므로,
34 남잡(濫雜)하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날마다 북을 치니, 그 시끄러운 것을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35 ○ 9월 7일 밤에 임금의 옥체가 편찮았다. 명령을 내려 약원 세 제조와 여러 의관들을 입시하게 하였다.
36 ○ 13일에 임금이 경봉각에 나아가 후원에 올라가서 동교와 서교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내전으로 돌아왔다.
37 여러 대신들이 임금의 건강이 평복(平復,건강이 회복됨)한 데 대한 진하(陳賀)를 행하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38 왕세손이 상소하여 애써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뜻은 굳게 정하여져 있다. 그러나 너의 글이 이와 같으니, 특별히 소청을 윤허한다." 하였다.
39 ○ 10월 10일에 임금이 팔순유곤록을 친히 짓고, 이르기를 "8순의 늙은 나이에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가다듬어 글을 써서 어린 세손에게 보인다.
40 애석하구나! 너의 할아비는 올해 나이 82세가 되도록 평생 동안 고집한 바는 다만 충(忠)과 효(孝)를 아는 것이었다.
41 평생 동안 마음을 지킨 것이, 하나는 자긍(自矜)을 경계함이며,
42 하나는 자대(自大,자만)를 경계함이며,
43 하나는 포의심(布衣心,지위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 이며,
44 하나는 물로 씻어서 깨끗이 하고 싶은 마음이다.
45 만일 나의 마음을 알려면 고령(高嶺) 육오당(六吾堂)을 보아라.
46 그것은 오직 탕평(蕩平)일 뿐이니, 지금에 와서 내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47 균역 한 가지 일은 곧 나의 큰 사업이었는데, 법이 이미 오래되어 마음도 역시 태만해졌으니 다시 어떻게 바라겠는가?
48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 국사(國事)이며 깊이 탄식하는 것이 인심이다. 국사가 이와 같고 인심이 이와 같으니,
49 내가 무슨 마음으로 천승(千乘)의 지위에 있겠으며, 내가 무슨 마음으로 만기(萬機)를 돌보겠는가?" 하였다.
50 ○ 11월 11일에 임금이 대신과 8도에 대한 구관 당상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굶주린 백성으로서 상경(上京)한 자가 있느냐고 물으니, 모두 없다고 아뢰었다.
51 임금이 연화문에 나아가 선전관을 시켜 유민(流民) 2명을 불러들였는데, 사실과 틀린 것을 알고 경기 구관 당상을 중벌(重罰)에 따라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52 ○ 11월 20일에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53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54 다시 입시를 명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55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56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57 작게는 담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58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59 이 다음부터 동궁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나의 사업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60 ○ 12월 7일에 왕세손이 상소하니, 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살펴보았다. 아! 묻노니, 나의 손자는 내 나이를 아는가? 이제 83세가 다 되어 간다.
61 아!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는데, 너는 어찌 이렇게 하여 네 할아비를 생각하지 않는가?
62 혹여 잡기(雜技)같이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배우지 않으면 또한 어찌 능할 수 있겠는가?
63 어린 아이가 문장을 배우는 것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만기(萬機)의 국사에 있어서이겠는가?
64 이번의 이 하교에 대하여 비록 청정(聽政)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백관의 조참(朝參)이 없고,
65 또한 대리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장문(狀聞) 몇 장에 불과한데, 네가 어찌 동요하는가, 네가 어찌 동요하는가?" 하고는,
66 기뻐하며 하교하기를 "네가 과연 받들어 행한 후에야 저녁밥을 먹을 수 있고, 오늘밤에 잠을 잘 수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상소하는가? 나를 생각하라" 하였다.
67 ○ 왕세손이 3번 상소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만약 이 하교를 따르지 않을라치면 대소 공사를 정원에 머물러 두라. 마땅히 전위하는 하교를 내리겠다." 하였다.
68 ○ 영조 52년(1776) 3월 5일 묘시에 임금이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하시었다. 내시가 복의를 받들고 동쪽 낙수받이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고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