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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선언이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서명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하였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 |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 ” |
—포츠담 선언, 제8항 |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해서, 이에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도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참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8월 폭풍 작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여 10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였으나 지도부의 분열로 항복 결정을 번복하였다가 다시 항복 번복 결정을 번복하여 항복하였다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14일, 1945년 8월 10일 발표된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대하여 일본에 항복의사에 대한 수락을 통보하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쿠바 혁명 발발
1953. 7. 26
![]() 카스트로(1964) |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가 혁명세력을 조직해 산티아고데쿠바 시에 주둔해 있던 몬카다 군병영을 공격하면서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7·26운동 조직을 지휘하다가 1956년 12월 2일 다시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했다. 그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동생 라울, 그리고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등과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8년 12월 31일 마침내 바티스타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1961년 쿠바 공산당의 서기장에 오른 카스트로는 이후 쿠바에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이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의 피그스 만 침공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은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미국중앙정보국(CIA)의 활동은 한동안 이어졌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한겨레21>(1999. 9. 16)이 제공하는 특집 '21세기 쿠바의 운명'을 통해 쿠바 혁명 당시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전을 벌인 한인 임은조에 관한 '헤르니모 임을 아십니까', 과도기에 처한 쿠바 사회를 담은 '21세기 쿠바는 어디로', 카스트로 정권의 장기 유지 원인을 따진 '영원한 영웅, 피델 카스트로'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다. <뉴스위크 한국판>(1999. 1. 20)은 40년간 절대권력을 유지한 카스트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카스트로의 끈질긴 생존본능'을 제공한다.
[영어 사이트]
Seeing Red는 바티스타가 쿠바를 떠나고 카스트로가 승리를 거둔 직후 행한 연설,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40주년 기념 연설을 소개한다. World History Archive는 Marxism and the Future of Cuban Revolution을 비롯해 'Human beings are the most important, say Cuban youth', 'Che Guevera's Memory' 등이 담긴 History of Cuba를 제공한다. Latin America Network Information Center는 쿠바 관련 링크 자료와 카스트로 연설문 검색기를 제공한다.
프랑스 7월혁명 발발
1830. 7. 26
![]() 샤를 10세, Francois Gerard가 그린 초상화(부분), 프랑스에 있는 Chateau de Versailles 소장 | 1830년 7월 26일 프랑스의 샤를 10세가 '1814년 헌장'의 정신에 역행해 기본권을 제한하는 3가지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7월혁명이 일어났다. 이 칙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파업과 항의시위에 이어 27일부터 3일간 파리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지지하고 귀족주의자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상황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은 1792년 프랑스 혁명을 위해 싸운 경험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7월혁명으로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한 개인 홈페이지에서 르네상스부터 파리 코뮌까지 유럽 근대사회 형성기에 관한 자료를 간략하게 제공한다.
[영어 사이트]
Internet Modern History Sourcebook은 루이 필리프 정권에서 각료를 지낸 프랑수아 기조의 'Condition of the July Monarchy, 1830~48'와 7월혁명 이후 개정된 프랑스 헌법을 제공한다. Discovery Channel School은 7월혁명의 배경과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Connecticut Review>(1996. 봄)는 7월혁명 기간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던 미국인 제임스 쿠퍼의 시각에 비친 7월혁명을 다룬 Wayne Hanley의 'One Man’s View of the July Revolution of 1830'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