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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람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사
意味構造와 배행으로 본 時調의 現場/ 유 준 호
현대시조는 그 작품 자체가 문학성을 가져야 하고, 시조의 형식 요건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신선감이 있는 시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정의해 볼 때 이를 위해 표현되는 그 양태(樣態)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고 시조 시형에 맞으면서 구(句)와 장(章)이 호응하고 음보율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시조의 어떤 작품을 어떤 틀에 넣고 일률적으로 찍어내는 제품처럼 여겨 재단(裁斷)해 살펴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뭇 예술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품의 형태는 존재한다. 특히 현대시조는 다른 어느 문학 장르에 못지않게 그 표현 양식이 존재하기에 외형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재적 흐름의 줄기에도 이는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무릇 시조(시)작품은 그 표현 기교에 있어 응축(凝縮)과 확장(擴張)의 적절한 배합으로 생성(生成)되는 살아 있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북송 때 소동파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음미하면서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했는지 모르겠다. 요즘 와서 현대시조의 시행 배열에서 전보다 상당히 다양화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시행의 다양화가 비시조(非時調)로 비쳐질 여지(餘地)를 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시조곡(時調曲)에서 시조시(時調詩)로의 역할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방증(傍證)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나타난 시조의 형태가 시각적인 면이 고려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시행을 나열(羅列) 배치(配置)함으로써 외형만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行)을 바꿀 때에는 그만한 이미지의 전환이나 점층이 있어야 된다고 현대시학에서는 말하고 있다. 시조에도 이는 원용(援用)되어야 할 부분이다.
‘시조는 그 내적 구성상 최소한의 의미단위가 이루어지는 구수율(句數律)을 지니고 있으며 전체 12음보의 음보율을 형성하고 있다. 시조는 3장의 짧은 시형에 현대시 한 편의 의미구조를 담아낼 수 있는 내적 틀을 갖추고 있다. 시조는 장과 장, 구와 구 사이에 내적 의미망(意味網)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즉 한 편의 시조 속에는 기승전결의 시적 논리가 완벽하게 구사되고 있다. 이를 도식화하면 초장(도입, 전개)의 A, 중장(전개)의 B, 종장(전환, 마무리)의 C로 크게 3등분 되는데, A와 B가 연속적일 때보다 A와 B가 변증법적일 때 C의 기능은 증폭된다. 이는 연시조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현대시조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작품은 그 의미구조상으로 볼 때 몇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즉 동의적 진행형 : A-B→C, A-B-C, A-B=C, A=B-C, A*B*C, 반의적 진행형 : A=B#C, A-B#C, A#B#C, 종합적 진행형 : A#B-C가 그것이다. (박제천, 한국 현대시조의 전통성 탐색-시적 의미구조를 중심으로, 2002년 시조시학 봄 호 참조) 이 중 시조 전개의 전형(典型)은 대체로 A-B-C와 A=B-C로 나타나고 있다.
위의 말들을 상고(詳考)하여 실제 이에 걸맞은 시조 몇 편을 가람문학 34집에서 찾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시형(詩型)이 앞의 형에 알맞고 시적(詩的) 내용과 시적 의미망(意味網)이 갖춰져 있으면서 현대 감각을 살려 썼다고 보이는 작품을 골라 감상 평설(評說)해 보자.
다섯 분의 신작특집이 있는데 그 중 두 분의 작품 한 편씩을 골라 살펴본다.
살며시 들어온
신록이듯 작은 만남
맨 먼저 향을 푼다.
가던 길 뒤돌아보아
저리 향이 진할까
<김길순, 산수유>
이 작품은 그 구조로 볼 때 A(초장)―B(중장)=C(종장)의 형태를 띤 구별배행시조로 A, B가 C와 병립(竝立)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초장에서 상(想)을 던져놓고, 중장에서 초장의 전제를 펼치고 종장에서 시적(詩的) 상념(想念)으로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수유는 잎이 나오기 전인 3~4월에 가지 끝에 산형(傘形)꽃차례로 노란색의 꽃이 20~30송이씩 무리 이뤄 피어 가을에 빨간 열매를 단풍 든 붉은 잎 속에 맺는다. 다른 나무들은 잎을 파릇파릇 내미는데 이 산수유는 잎 대신 먼저 꽃을 피워 바람결에 향을 날리기에 초장에서 신록과의 작은 만남이라고 하고, 중장에서 맨 먼저 향을 푼다고 한 것 같다. 봄에는 이렇게 꽃 먼저 피우고 잎을 나중에 피우는 것들이 많은데 이 산수유도 그 축에 드는 놈이다. 이 산수유는 산에 있어야 제격이지만 집 근처에도 심는다.
종장 ‘가던 길 뒤돌아보아/ 저리 향이 진할까’한 것은 산수유가 다른 꽃보다 먼저 향기를 뿜어내기에 가다가 뒤돌아보며 그 향(香)을 뒤에 두고 가기 아쉬워 다시금 그 향기를 진하게 맡고자 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이 작품엔 그 행간에 봄부터 여름 거쳐 가을까지의 시간이 숨어 숨 쉬고 있다. 어찌보면 시공의 이미지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인생길엔 좋고 싫은 향기들이 교직되어 있다. 그 중에 좋은 향기를 맞는다는 것은 인생의 행복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살 때는 몰랐는데 지내고 보니 행복였음을 산수유를 통하여 표현해본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의 핵심구인 종장은 아마도 그런 심경을 표현한 것이리라.
노을빛 종착역에
과속딱지 붙었다.
백발에
검버섯이 핀
그 얼굴은 누구더라.
<이흥우, 초침으로 가는 나이>
의인화(擬人化)의 기법(技法)으로 인생을 천착한 시조이다. 시조는 언어의 결합에 의하여 탄력을 가져야 하는데 이 탄력(彈力)은 응축(凝縮)의 기법에서 얻어진다. 시조에서의 단수는 더욱 그렇다. 이 작품은 구별배행이 이루어진 시조로 의미구조(意味構造)로 볼 때 (A=B)=C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초장과 중장이 병렬되고 다시 맺음 하는 종장에 병렬되어 나타난다. 참으로 탄력 있는 감각적(感覺的)인 시조 작품이다. 감각성(感覺性)은 시의 재치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나이가 들어가는 인생을 기차나 버스에 비유하고 있으며, 늙음 아니 겉늙음을 ‘과속딱지’로 은유(隱喩)하고 있다. 세월은 생생하던 핏기를 거두어가고 신체의 오감 기능도 이에 발맞춰 퇴화하여 어느새 흰 머리칼이 늘고 피부에 무늬를 놓는 검버섯이 피어났으니 젊은 날의 아름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지금 보는 자신의 모습이 마냥 낯설기만 하다. 그래 인생은 낯설게 왔다가 낯설게 가는 것인가 보다. 이흥우 시인은 순수(純粹)와 자연의 미감(美感)을 동시에 버무려내는 시인인 성싶다. 어쩌면 이 작품은 감각 속에 사유(思惟)가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시는 비유덩어리 모임이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위에서 ‘노을빛 종착역’은 하루해가 저물 듯 더 갈 데 없는 막바지 인생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돋보기 안경 끼고’는 늙음을 비유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거울’은 반성(反省)의 매개체(媒介體)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해 주는 회고(回顧)의 장치이다. 또한 ‘과속딱지’란 생각보다 일찍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함의(含意)한 시어라 보이고, 그 과속된 인생 때문에 백발(白髮)에 검버섯이 피어난 것이리라. 아마도 작자는 상상 밖의 모습에 몹시 놀라서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누구더라’하고 읊고 있다. 그렇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나이 먹음’ 즉 닥치는 세월은 초침으로 이어져 가는 시간의 부산물(副産物)인데 한참 지나다 보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엉뚱한 모습이 되어 있다. 이에 놀람의 감정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놀람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처연(悽然)하고 구슬픈 감정의 놀람은 바로 이런 늙음이리라.
다음은 회원신작에서 몇 편을 골라 보았다.
어디서 보냈을까
발신인도 없는 편지
뜻밖에 환한 웃음
겨우내
잊고 산 세월
꽃물 터진 봄소식
<박봉주, 화신(花信)>
이 작품은 A(초장), B(중장)가 C(종장)로 마무리 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초장에서 상(想)을 던져놓고, 중장에서 초장의 전제를 구체화하고 종장에서 감회로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A-B→C의 형태의 구별배행시조이다. 의인화로 봄의 ‘꽃소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첫 수에서 ‘어디서 보냈을까/ 발신인도 없는 편지’했지만 자연의 섭리로 볼 때 분명 보내는 곳도 있고, 보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마 보낸 곳은 섭리가 들끓는 ‘자연’이요, 발신인은 신적(神的) 기운을 가진 ‘봄기운’임에 틀림없다. 봄기운이 땅 속에 잠든 꽃의 인자(因子)를 깨워 세상에 불러내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애매성(曖昧性)을 보여줌으로써 ‘봄소식’의 신비감을 자극하려고 한 듯하다. 이렇게 초장에서 꽃의 시원(始原)을 제시하고, 중장에서는 ‘설레어 뜯어보니’‘뜻밖의 환한 웃음’이라 하여 마음 설레는 꽃의 개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종장에서 시인은 ‘겨우내’ 움츠려 아름다운 새 생명의 아리따운 세계를 잊고 있었는데 꽃이 피어 생동의 봄을 알려주어 그 뿌듯한 기쁨에 설렘을 표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개화를 통한 봄의 환희(歡喜)를 시화(詩化)한 단시조 작품이다.
바람에 실려오는 연꽃향에 맴돌았던
떨어져나간
연지에
홀로 서서…
<신형덕(복순), 겨울 연밥, 전편>
연꽃의 열매인 ‘연밥(蓮子)’은 누가 애써 돌봐주지 않아도 홀로 익어간다. 연밥은 한의학에서 비장(脾臟)을 지켜주는 과일로 알려져 중국 청나라에서는 황제의 식재료로 썼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장별 배행 및 음보별 배행을 시킨 A-B#C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시조이다. 즉, A가 B로 생성되었고 이 A, B가 C와는 대립 관계를 유지하는 시형이다. A, B가 ‘알참’이라면 C는 ‘허전함’이다. 위 시조에서 ‘그 시간 여위어가’는 세월, 계절의 흐름이요, ‘갈색 묵향’은 여문 씨의 모습이다.
그 ‘갈색 묵향’을 품은 연밥은 제때 거두어 주어야 제격인데, 제 때인 가을이 다 지나 설한풍 몰아치는 겨울철에 홀로 ‘연지(蓮枝)에’ 매달려 견디고 있다. 차라리 땅에 떨어져 숨었더라면 생명의 온기를 누렸을 텐데 어쩌다 가을 아닌 ‘겨울 연밥’이 되었을까 하는 동정(同情) 어린 심경이 있다. 초, 중장이 ‘연밥’이 생성되는 과정이었다면 종장은 고난과 역경의 실존적 아픔을 견디는 ‘연밥’의 모습을 생략의 묘로 표현하고 있다.
앞의 신 시인의 작품 ‘진우가 아프단다’가 인간과 동물을 등장시켜 삶과 죽음을 대비(對比)했다면 이 작품은 많은 사연을 시공(時空)에 묻는 생략의 기법을 사용하여 상상의 폭을 넓힌 작품이다.
성경을 읽으며
금시 벗어놓은
도수 높은 저 안경
얼마큼
닦아냈을까
얼마를
또 닦을까.
<이도현, 안경알을 닦으며>
A-B-C의 의미구조 형태를 보여주는 구별 및 음보별 배행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즉, 초장에서 상(想)의 전제를 던져놓고, 중장에서 그 전제를 구체화하고 종장에서 감회를 표현하는 전형적 구조이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다분히 사실적인 것 같지만 의미를 천착해 보면 일상어 속에 상징되는 인생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시력(視力)이 퇴화할수록 안경 도수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시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이의 안경알은 동그라미가 겹겹으로 맴돌아 있어 현미경에 가까워 옆에서 보는 이마저 어지러울 정도로 도수가 높다. 안경 도수가 높다는 것은 자연 상태에서는 늙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사람들은 그 안경알을 통하여 세상을 보려고 매일 안경알을 닦아야 한다. 하루에 몇 번을 닦아야 할 때도 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세상을 보니 어쩌랴. 시인은 ‘성경’을 보느라 안경알을 닦는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가치와 이치, 삶의 진리가 숨어 있는 명서(名書)이다. 이를 통하여 인생을 배우는 것이다. 인생은 완성이 없다고 한다. 그래 평생을 배우며 살다가는 것이 인생이라 한다. 그러니 한평생 안경알을 닦으며 살 수밖에 없다. 이 작품 속에서 ‘안경’은 인생의 참된 진리의 보고(寶庫), ‘안경알’은 인생의 참된 진리와 삶의 지혜를 길어 올리는 두레박과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도수 높은’은 늙음을 ‘닦음’은 치열한 인생 역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조운의 시조 ‘구룡폭포’를 보면 그 첫머리에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金剛)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란 구절이 나오는데, 위 작품은 이런 시상이 끄트머리에 배치되어 있다. 세월을 뛰어넘는 기원의 시간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요즘 와서 이 시인(李詩人)은 감정을 접고 무념(無念)을 기르는 시작(詩作)을 주로 하고 있다. 그의 시집이었던 ‘장자(莊子)의 바람’에 물든 것일까. 이 작품의 종장엔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이 대(對)를 이루어 표현되어 있다.
하얀 아침을 맞아
외치는 소리
그립다.
사랑하는 일
순백으로 피어나는 날
청복(淸福)을
그릇에 나눈
그 시절에
소복하다.
<이방남, 복조리>
이 작품은 주로 음보별 배행을 시켜 초장과 중장은 병립, 종장은 그것이 수렴되는 모습인 A=B-C의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눈이 하얗게 내린 섣달 그믐밤을 배경으로 쓴 시조이다.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자정 이후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 놓는 조리로 한 해의 복을 조리와 같이 긁어모아 건진다는 뜻과 조리의 무수한 눈이 신체의 눈과 같이 광명(光明)을 상징하는 데서 이를 문 위나 벽에 걸어 놓아 벽사진경(辟邪進慶)하는 풍속이 담긴 사물이다. ‘하얀 아침’으로 표현된 티 없이 깨끗한, 한 점 탈(頉)도 날 수 없는 순결, 순백의 사랑이 샘솟는 ‘아침’이 시(視)·청(聽)·촉각(觸覺)으로 초, 중장에 나타나 있고, 종장에서는 맑고 깨끗한 아취(雅趣)가 있는 삶이 나타났다. 이웃끼리 욕심 없이 나누며 살던 ‘그 시절’이 마음 속에 그득 고여 있음을 회고적(回顧的)으로 표현하고 있다. 초장 ‘외치는 소리’에서 <복조리 사려!> 하는 새벽을 깨우는 긴 여운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인데 ‘그 시절에’의 ‘-에’자는 빼면 어떨까. 어쩠든 전통적 동양미가 차분하고 잔잔하게 깔려 있는 간결하고 깔끔한 시조 작품이다.
아래 작품은 그 구조로 볼 때 A(초장)-B(중장)→C(종장)의 형태가 반복된 작품이다. 초장에서 상(想)을 던져놓고, 중장에서 초장의 전제를 구체화하고 종장에서 감회(感懷)로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른 논에 물이 들어
낭창낭창 춤을 추는
아카시아 하얀 향기 물고 오던 뻐꾸기소리
유년의 그 봄하늘에 구름처럼 떠돈다.
큰 고모
연애할 때
담 밑에서 울었다지.
첫여름 꽃물 흐를 때
울기만 해도 질척였지.
더 휘지 못한 봄밤을
울어주던 그 뻐꾸기
아카시아 향기 질 때
거짓말처럼 따라 갔다.
당골재
날 등을 넘어
어디 갔나.
그 뻐꾸기.
<조경순, 늙은 뻐꾸기>
뻐꾸기는 설화에 한(恨)과 설움의 상징으로 표징(表徵)되어 있는 새이다. 그 설화로는 첫째 며느리가 떡국을 퍼놓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개가 먹고 달아났는데 며느리 소행으로 알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때려 죽였는데 그 영혼이 새가 됐다는 ‘떡국새 설화’가 있고, 둘째로는 계모 학대에 시달린 딸이 호청 들일 풀을 퍼먹다 죽어 새가 됐다는 ‘풀국새 설화’가 있다. 공통점은 인간이 한을 품고 죽어 새로 환생했다는 것이며, 떡국, 풀국의 음차로 뻐꾸기란 이름을 얻게 된 새이다. 이 작품은 이런 정서를 깔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노라면 김소월의 ‘접동새’가 자꾸만 생각난다. 다만 시 ‘접동새’가 이와 유사한 설화를 바탕으로 육친애의 정한을 읊은 시로 선과 악의 이중구조를 띠고 있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 ‘늙은 뻐꾸기’는 아카시아 향기 너울진 두메산골을 배경으로 유년의 추억을 ‘낭창낭창’ ‘뻐꾹 뻐꾹 뻐버꾹’하는 의성어로 장단을 맞춰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둘 다 민요적 냄새가 짙게 깔린 향토적 정한이 배인 작품이란 점이다. 고적한 봄밤 울어 예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귀에 쨍쨍 들려오는 듯하다.
이 작품은 시형의 배열을 음보별, 구별, 장별 배열을 적당히 섞어 쓴 작품으로, 구와 구의 호응이 서로 상응하고 있으며, 낭만적 분위기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 행간마다 감각적 지각이 봄밤의 정서를 토해내고 있다. 첫수에서 옴을, 둘째 수에서 퍼짐을, 셋째 수에서 떠남의 이미지를 시간 공간적으로 배치하여 조화롭게 확장, 확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상의 배치를 대립수식, 호응서술, 시상의 단정(추측) 등의 서술기법을 사용하여 애상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시조는 초장에서 일으키고, 중장에서 펼치고, 종장에서 높이고 굽히고 맺음 하는 형태가 불문율(不文律)처럼 시조의 핏속에 DNA로 흐르고 있다. 이 작품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위 작품에서 핵중핵(核中核)의 구(句)는 마지막 수 종장 ‘당골재/ 날 등을 넘어/ 어디 갔나. 그 뻐꾸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날등을 넘어’와 같은 표현은 범상한 시어의 굴착이 아니라고 본다. ‘날등’은 ‘맨 그대로 있는 등성이’란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 ‘날등’은 고향의 정서와 잃어버린 정서의 교착점이 아닐까 한다. 뻐꾸기는 애상적인 정서의 상징물인데 지금은 어디 가서 삭막한 고향 정서만 남겨놓고 있을까 하는 아쉬움을 이 작품은 표현하고 있다.
아직은 여린 봄 아침
피는 돌아 사무치고
솟구쳐 터져나온 영혼
아픈 눈물 향기인가.
<허인무, 매향(梅香)>
이 작품은 A#B-C의 반의적 진행형으로 구별 배행이 이루어졌다. 초장의 맵고 강한 내적 이미지와 중, 종장의 가녀린 외적 이미지를 대립시켜 표현하고 있다. 매화는 ‘고결’, ‘결백’이란 꽃말을 가진 꽃으로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옛날부터 삼동을 인고(忍苦)로 이겨낸 다음 봄에 앞서 피워낸 꽃이라 하여 선비의 벗으로 대접 받는 꽃이다. 그래서 일찍이 김진섭도 “매화찬”이란 글에서 매화는 ‘초지상적(超地上的)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주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超高)하고 견개(狷介)한 꽃’으로 ‘선구자(先驅者)의 영혼(靈魂)’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청초(淸楚)하고 가향(佳香)이 넘칠 뿐 아니라, 기품(氣品)과 아취(雅趣)가 비할 곳 없다’고 하였다. 이런 모습이 위 작품에 선연히 나타나 있다.
초장 ‘인고(忍苦)로 다진 동천(冬天)/ 다독이는 매운 마음’이 매화의 초고(超高)하고 견개(狷介)한 모습이라면, 중장과 종장의 ‘아직은 여린’ ‘터져나온 영혼/ 아픈 눈물 향기인가’는 청초(淸楚)하고 가향(佳香)이 넘치는 아취(雅趣)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해야 하겠다. ‘아픈 눈물 향기’는 어쩌면 섧도록 은은하고 아린 꽃샘 추위 속의 향기를 그리 표현한 듯하다. 종장에서 표피(表皮)를 뚫고 피어난 꽃을 ‘솟구쳐 터져나온 영혼’이라고 신선(新鮮)한 역동적(力動的) 표현(表現)기법(技法)을 씀으로써 한결 시조를 생동감(生動感) 있게 하고 있다.
다음은 한밭시조문학 25집 “내 영혼 맑은 물소리”에 수록된 작품 두 편으로 한 편은 A-B#C의 의미구조로 A(초장)은 B(중장)에 예속되고 C(종장)는 변환의 이미지로 맺음 하는 구별배행시조이고, 또 한 편의 작품은 A*B*C의 의미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A와 B가 인과가 되고 다시 C가 B와 인과를 이루는 형태의 구별배행시조이다.
줄줄이 불 켜들고
속속들이 깨물어
피어난 어린 입술
몸뚱이 어둠을 찢고
아롱지는 눈물의 황홀
<박헌오, 석류3>
이 작품 <석류3>는 젖니 같은 씨를 빨간 물기가 품고 있는 석류의 특성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쓴 시조이다. 석류 속에는 천연(天然) 호르몬 에스트로겐이란 것이 들어 있는데 이는 당뇨병 개선, 자궁 발육, 내막 증식, 유선 발육에 효능을 발휘한다고 하여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생명의 과일’ ‘지혜의 과일’로 귀히 여겼다고 한다.
박헌오 시인이 ‘석류’를 ‘자궁’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이와 무관(無關)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은 한 편의 탄생(誕生) 설화(說話)를 품고 있는 듯하다. 익어 빠개진 석류 알엔 환한 불이 켜 있고, 어린 입술이 어둠에서 탈출하여 탄생하는 황홀경(怳惚境)이 펼쳐지고 있다. ‘눈물의 황홀’ 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황홀한 아픔’과 같은 표현법으로 일종의 역설적 표현[paradox-모순형용]이다. 이 작품 속에는 생명 탄생의 비밀이 있다. 마치 한 생명이 어머니 뱃속을 떠나 세상에 고고성(呱呱聲)을 지르듯 석류 알알은 생명의 비밀을 품은 ‘어둠’에 갖혀 있다가 빛(탄생)을 위해 스스로를 터뜨려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래 ‘(기쁜)눈물의 황홀’이 되었다. 뭇 생명은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있어야 태어난다. 이 시조의 종장 ‘몸뚱이 어둠을 찢고’는 태어나는 생명체의 자발적 노력을 보인 시구이다. 그렇게 해서 ‘석류’는 이 세상에 황홀한 존재로 태어나고 있다.
가람문학과 한밭시조문학지의 작품 9편을 대상으로 살펴보니 의미구조가 각양각색으로 같은 모습은 없으나 대체로 「동의적 진행」으로 된 것이 일곱 편, 「반의적 진행」 두 편, 「종합적 진행」이 한 편이었다. 동의적 진행 구조는 전통적 맥락으로 내려오는 형태인데 이를 대부분의 시조는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행의 배열도 일곱 편이 「구별 배행」이고, 「음보별 배행」, 「장별·음보별」, 「장별·구별·음보별 배행」이 각각 한 편씩이었다. 이는 의미구조와 행 배열이 다양화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시나 시조는 비과학적 사고로 비논리적 언어구사를 하는 문학장르로 알고 있는 이가 적지 않은데 이는 무한 상상의 영역을 두고 하는 말이지 작품 내의 유기적(有機的) 논리성(論理性)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의 작품에는 동맥과 정맥으로 흐르는 피와 같은 흐름이 있어야 한다. 중간 중간 잘린 핏줄에 여기저기서 피가 흘러들고 있으면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 시조도 하나의 문학으로의 생명체이다. 시나 시조 모두 표현은 쉽게, 표현 내용은 심오하게 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문학 특히 시조(시)의 최종 목표는 독자들이 그 작품을 읽고 유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때 유기성이 없이 난해한 작품이나, 비논리적인 작품에서는 그 유열감을 느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보통의 경우 시조의 핵심구는 종장에 배치한다는 것은 불문율이기 때문에 점층, 전환이 확실히 이루어지는 종장처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만큼 시조는 많은 고심(苦心)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시조시인은 시를 쓸 수 있지만 자유시인은 시조를 함부로 쓸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 점을 시조 쓰는 이들은 유념해 볼 일이다. [2014. 가람문학 제35집]